아침과 저녁이라는 가시적인 시간 개념이 없는 우주공간에서는 반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준수하는 게 중요하다. 우주 표준시 AM 09 : 00. 맥길리스 파리드는 언제나처럼 조식을 먹고 방에 앉아 몇 가지 자료를 보고 있었다. 이례적인 콜이 울리기 전까지는.
「파리드 특무소령, 소위 아인 달튼입니다.」
아인 달튼은 화성에서 만난 인물로 죽은 상관의 복수를 하겠다며 동행 시켜 달라고 요청한 갓 임관한 소위였다. 개인의 목적을 위한 사사로운 소속 이전은 있을 수 없지만 맥길리스는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알겠다 답하곤 가엘리오에게 떠넘겼다. 처음에는 상의도 없이 이러기냐, 감사관의 호위 자격인 제게 부관이 붙는 건 이상하지 않냐 불만을 내비치더니 이내 그가 썩 맘에 들었는지 가엘리오가 가는 곳마다 아인이 붙어있었다. 물론 아인도, 처음엔 미묘한 표정이더니 요즘은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이 퍽 묘해졌다.
그것이 맥길리스는 거슬렸고, 아마 아인도 느꼈을 것이다. 화성 지부라는 소속과 혼혈이라는 출신, 그리고 자신도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맘이 없어 보이는 아인 달튼은 사적인 용무로는 결코 타인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으며 맥길리스와는 공적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콜?
무심코 가엘리오라고 생각했던 맥길리스는 통신장치에 손을 뻗어 화면을 열었다. 홀로그램 너머로 보이는 아인은 빳빳하게 굳어서 몹시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이런 연유로 연락 드리는 게 외람됨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어진 말에 달력을 확인한 맥길리스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인을 제자리로 보내고 - "내일까지 휴가를 주겠네, 소위. 자네 상관은 내일까지 병가니까." - 맥길리스는 의례적인 노크를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락이 걸리지 않은 도어에 한숨을 쉬다가도 문 열고 나오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는 가엘리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녀의 부주의함을 탓할 수도 없다. 탓해야 되는 건 부주의가 아니라 미련함인가? 아니면 그녀의 체질?
"가엘리오."
답이 없을 걸 알면서 맥길리스는 괜스레 이름을 불러본다.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청자색의 머리카락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흐드러진 등나무 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반듯한 그 등이 태아처럼 바짝 웅크려 굽어있는 것을 본다. 찡그리며 감은 눈꺼풀 위에 땀에 젖어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가엘리오는 원발성 월경곤란증상, 요컨대 생리통, 을 심하게 겪었다. 남들보다 성장이 조금 더뎠던 가엘리오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인상을 쓰다가, 점점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내더니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맥길리스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유 없이 가팔라진 숨에 어떻게든 진정해보려 하다가도, 그녀를 부축하려고 등에 닿은 손 언저리에 묻은 축축한 것이 붉은 얼룩임을 알았을 땐 맥길리스도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카르타가 아니었다면 가엘리오는 생리통으로, 맥길리스는 쇼크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초경을 그대로 맞이한 후 한동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피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게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를 한층 더 가깝게 만들었다. 보드윈의 자긍심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이미 못 볼 꼴 다 본 맥길리스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그 이상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가엘리오를 챙겨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맥길리스 뿐이다. 아인 달튼 소위는 어떻게든 고군분투하며 그녀를 침대 위로 끌어다 놓고, 진통제를 먹이는 데까진 성공한 모양이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맥길리스는 매번 일상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제복을 갖춰 입는 가엘리오의 성실함에 혀를 찼다.
"벗긴다, 가엘리오."
퍽 건전하게 들리지만은 않는 문장이지만 가엘리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추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풀어내면 이미 식은땀에 젖은 흰 셔츠가 도드라진 어깨와 가슴, 움푹 들어간 허리까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제발 이런 걸 아무에게나 보이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자신에게도.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제복의 재킷과 셔츠를 벗긴다. 부드러운 가슴을 제외하면 군살이라곤 하나 없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신체다. 어중이떠중이 남자 다섯은 눈 감고도 때려눕힐 수 있는 육신이 어쩔 수 없이 무력해질 때마다 맥길리스는 그녀가 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맥…길리, 스……."
신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찬숨과 산뜻한 라벤더 향과 섞여 닿는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목덜미와 얼굴을 닦아내면 가엘리오가 가늘게 눈을 뜨고 맥길리스를 바라본다.
"아인이 있,었는데,"
"그에겐 내일까지 휴가를 줬어.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해."
"상관으로서 못 볼 꼴을 보였어."
"어쩔 수 없지."
오늘 내일은 푹 쉬도록 해, 가엘리오.
남몰래 긴 머리카락 끝에 입 맞추며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눕히고 이불을 정돈해주었다. 고통 때문에 여전히 태아처럼 웅크린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본다. 눈을 감고서도 가엘리오는 무방비하게 그 온기에 만족하며 미소 짓는다. 지근거리에서 저를 꿰뚫는 녹색 눈이 어떤 형태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