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엘리오는 그렇게 말하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이 웃음도 맥길리스는 지난주에 보았다. 지난주.
예전에는 이 쪽의 '사정'으로 그 긴 방학 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보거나 애써 잡은 약속이 이 쪽의 '사정'으로 번번이 취소되곤 했다. 안되겠다고 말하면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안돼?'라고 되묻던 얼굴이 맥길리스에겐 생생했다. 울 것처럼 콧잔등을 찡그리고 양 다리를 불만스럽게 흔들던 모습.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흔들리는 다리의 폭이 점점 커졌고, 화가 나면 이윽고 늘씬한 다리로 한 번 무언가를 쾅 걷어차곤 했다. 이런 버릇 없는 행동은 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엘리오는 고집스러운 측면이 있어서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 왜? 왜 안되는데?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싫어서 그래?
평소에는 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꼭 이럴 때만 싫냐, 고 콕 찝어서 물어보는 가엘리오를 맥길리스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이 먹은 지금엔 어쩌면 그게 도련님의 영악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맥길리스는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거기까진 알 수 없었고 그것이 꽤나 난처했다. 정말 싫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맥길리스가 솔직하게 그러면 가엘리오는 놀란 눈을 껌벅이다가 큰 눈망울 하나 가득 눈물을 채울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는 싫었어도, 그가 주는 '정당한 핑계'들이 좋았다. 방학 때는 공식적으로 외출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던 것이 매일 일과가 되었다. 가엘리오가 놀러 오거나, 보드윈이나 이슈 가에 초대 받으면 혹시 모를 남의 눈 때문에 저녁의 일과는 며칠 동안 멈추었다.
내심 이를 악 물고 버텨도 그게 얼마나 맥길리스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그러니 약속을 파투내면 울고 싶은 것은 사실 맥길리스 쪽이었는데도 가엘리오는 이렇게 집요하게 이유를 물어봤다.
- 아파서.
사실과 거짓이 반반으로 섞인 말에 가엘리오는 그 날 한달음에 맥길리스에게 뛰어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적잖이 놀란 것은 이즈나리오와 맥길리스 둘 다였다. 그리고 가엘리오는 고집을 부려 맥길리스의 방에서 사흘을 머물다 갔다.
그 뒤로 가엘리오와의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의미 없는 고집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언제나 안된다고 말하던 맥길리스가 처음으로 방학 중 약속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가엘리오는 기쁨에 차 함뿍 웃었다.
나이를 먹을 수록 맥길리스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 팔다리가 길어졌고, 목소리가 변했고, 얼굴이 변했다. 게다가 사관학교는 기숙사제였다! 긴 방학에도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가끔은 거울로 보는 제 얼굴보다 가엘리오의 얼굴을 더 자주 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고통이 멀어지면 다시 찾아 온 순간 훨씬 견디기 힘든 법이었다.
사관학교의 첫 방학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하루가 일 년 같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맥길리스는 처음으로 몸소 깨달았다.
첫 방학 석 달 동안 가엘리오를 아주 못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깐 어머니와 아브라우 어딘가의 고산지대를 다녀왔고, 맥길리스에게 기념품도 주었고, 새로 알아낸 디저트 가게에서 차가운 초콜릿 음료도 마셨다. 방학 동안의 계획을 점검하고, 다음에는 둘이서 여행을 가자는 약속도 했다. 그러나 그 얼굴이, 미소가, 집에 돌아오면 한 달 전에 본 것처럼 아득했고 갑작스럽게 맥길리스는 패닉에 휩싸이곤 했다.
이 집에 언제까지고 혼자 남을 것이라는 공상, 나이를 먹은 가엘리오는 예전처럼 떼를 쓰지 않는다. 아프다고 말하면 짐짓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약간 고민하다가 몸조리 잘하라는 얘기를 끝으로 통화를 종료할 것이다. 근거 없는 확신에 가까운 망상이 견고한 이성 밑에서 깜박, 맥길리스를 차가운 벽의 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사방이 꽉 막힌 궁지였다. 차갑고 음습하고 거친 표면이 연약한 피부를 긁어내는.
그 때마다 맥길리스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가엘리오가 가져다 준 차. 무심코 그에게 전화하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씹었다. 앨범을 뒤적거렸고, 시간은 무탈하게 흐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기숙사에서 짐을 풀며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자기 최면과 같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되뇌어야 했다.
동시에, 맥길리스는 갑작스러운 이별의 방법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앙은 이유도, 형태도 없고 이별은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는 것처럼 우연하고도 쉽게 찾아온다. 초조함으로 가득 찬 여름은 다행히 무탈한 개학으로 끝이 났다. 잘 지냈어? 하고 웃는 가엘리오의 얼굴을 한 대 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뒤로 맥길리스는 수많은 가정을 세웠고, 연습했다.
"저녁 먹기 전에 산책 갈까."
기숙사는 새로 정리할 것도 없었다. 간단히 옷가지 몇 개만 정리해두고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와 밖으로 나섰다.
해는 이제 많이 짧아졌다. 명도와 고도가 낮아진 태양을 보며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뒤를 천천히 걸었다. 호수의 잔물결에 부드럽게 부딪힌 햇볕이 다시 가엘리오의 실루엣 끝에서 눈부셨다
"가엘리오."
그러다 문득 이름을 부르면 가엘리오는 돌아서서 묻는다. 왜, 맥길리스? 그새 서늘해진 바람이 눈동자를 시리게 스치는 데도 가엘리오의 눈은 여전히 커다랗고, 이 쪽을 향해 있었다.
"웃어 봐."
맥길리스의 뜬금없는 요청에 뭐야? 그렇게 말하면서 가엘리오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는다.
지난주였다. 이 웃음을 본 것이.
일주일. 맥길리스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악몽의 주기는 그것보다 훨씬 짧았다. 해를 거듭할 수록 공포는 무뎌졌지만 아직도 가끔은 두려웠다. 그 집에서 숨을 쉬는 것. 홀로 남는 것. 햇볕이 부서지는 이 평온한 공간과는 영영 다른 곳에 갇히는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 홀로 남는 일은 없다는 것, 아무 일 없이 나는 밖으로 나가고 우리는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그래서 맥길리스는 신호를 정했다. 가엘리오가 웃어주면 그건 현실이다. 나는 여기에 제대로 존재한다. 밖의 세계,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만약 가엘리오가 웃지 않는다면, 그건 이별이다. 나는 악몽에서 깨지 못했고, 여전히 그 집, 그 방, 그 곳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너는 불만스럽게 다리를 흔들고 코를 찡그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화면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뭐해, 맥길리스."
맥길리스가 잠깐 발걸음을 멈춘 사이 가엘리오는 코 앞에 와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엘리오가 맥길리스보다 작았는데 어느 새 눈높이는 비슷해져 있었다.
"갑자기 웃으라고 해놓고, 사람 민망하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냐."
맥길리스는 부루퉁한 얼굴의 가엘리오 옆에서 웃음을 참으며 나란히 걸었다. 그는 고집스럽고, 요즘은 양 다리를 크게 흔들진 않지만 대신 발 끝으로 땅을 퍽퍽 차며 걷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맥길리스와 만날 때마다 가엘리오는 웃는다. 언제라도 기쁜 얼굴로 웃었다. 재회의 신호는 그것으로, 그러면 맥길리스는 악몽에서 빠져나왔다. 그것 뿐이었다. 웃지 않는 가엘리오는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