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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다섯 번째
본편 전개는 동인질에 하등 도움이 안되니까 마음이 급하군요.
리퀘박스 다섯 번째, '어느날 눈떠보니 좀 멍청해진 맥길리스가 가엘리오 좋아하는게 보고시퍼요,,,'
그래서 맥길리스가 좀 멍청합니다.
가엘리오는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날았다. 뭔가 이상하지만 여긴 그런 표현도 된다. 우주니까. 뛰는 것보단 나는 게 빠르지만 속도를 내려면 그만큼의 작용이 필요하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복도를 내달려 가엘리오는 전함 가장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영관급 장교들의 1인용 숙소 가장 끝은 의외로 구석지고 의외로 인적이 드물다.
"맥길리스가 의식을 차렸다면 바로 구속해서 끌고 가면 될 텐데 왜……."
"성격이 급해졌군."
"……."
러스탈의 가벼운 훈계에 가엘리오는 문을 열자마자 떠들어대던 입을 딱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머리에 잔뜩 열이 올라 지나치게 조바심 내고 있었다. 아직도 못 고친 걸까? 가엘리오는 마른 입술의 거스러미를 이로 질근댔다. 예전에는 쉽게 흥분해 가끔 앞뒤를 잊어버리고 골몰하곤 했다. 가엘리오가 낯선 전함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가장 먼저 주의하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엘리오의 기억 가장 마지막에 있는 저 평야에서의 전투는 전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조야했다. 냉정했더라면 비등하게는 싸울 수 있었겠지. 전투 중의 고양감이야말로 전투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는 훈련교관의 말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만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조했다. 그래서, 애쓰고 있었는데 방금은 전에 없이 무언가 초조해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그 간단한 문장이 가엘리오의 의식을 순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인양된 기체, 파일럿 의식 불명. 그렇게 만든 것은 가엘리오 본인이었고 그를 콕핏 안에서 끌어내는 것도 멀찍이나마 눈으로 확인했다. 눈에 띄는 직접적인 상처는 없었다. 제네바 조약에 의거해 그는 구금되기 이전에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기 위해 의료실도 이동되었고……. 자신은 그가 온전하기를 바랐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가엘리오가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려 애쓰며 뱉은 말에 러스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러스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침상이 보인다. 약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뺀다면 평범하게 잠들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면 분명하게 숨도 쉬고 있다. 사지도 멀쩡해 보이고, 붕대나 거즈 같은 게 붙은 부분도 없다. 안도감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엘리오는 다시 러스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맥길리스 파리드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워 질 것 같다."
"…뭐?"
혹시 이대로 빈사 상태라는 건가? 가엘리오는 다시금 치미는 초조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결과인가. 권력, 위력, 폭력, 그가 믿던 가치에 그대로 패배한 남자의 말로인가. 아득해지는 의식에 가엘리오는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 때까지 주먹을 꽉 쥐어 본다.
"아니,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맞겠군."
"본론은 빠를 수록 좋아, 에리온 공."
팔짱을 낀 가엘리오의 가시 돋친 말에 러스탈은 한 번 웃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처음엔 경미한 뇌진탕이라고 진단했지. 틀리지도 않았어. 뇌기능에도 별 이상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Amnesia. 아무래도 그는 지난 과거를 통째로 잊어버린 것 같아.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면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지. 그의 인생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
러스탈은 침상에서 잠든 맥길리스와 서 있는 가엘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설탕이 가라앉은 라벤더 시럽 같은 눈에 희미한 동요가 떠올랐다. 이전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언제나 가벼웠고 미래를, 올바른 가치를 짊어지기엔 지금의 무게가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스탈은 그 시럽 같은 달콤함,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그의 청렴결백함도 꽤 좋아했다. 현실이 아무리 혼란하고 척박하다 해도 한 명쯤은 그 순박하고 어리석기까지한 결벽한 의지를 관철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비록 친구를 죽이고, 저까지 죽일 뻔하고, 여동생을 농락한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우애하고 동정하며 연민하는 가엘리오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를 정식 재판에 회부하는 건 무리지. 일반 병실에 그냥 둘 수도 없어. 명백하게 그는 이 체제의 붕괴를 모사했다. 많은 장교들이 목숨을 잃었어. 혹시 모르지. 그에게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은 사람이 사적으로 그를 처단할 수도 있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어디까지지?"
"확실하지 않아. 여러가지 확인해 봤지. 이름은 무엇인지, 인적사항은 어떻게 되는지,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은 있는지. 인적사항과 교우관계에 대해선 훌륭하게 대답했다. 신병 인수자로 자네를 지목했지.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은 모호해. 어느 시점까지 기억이 없다면 어제의 날짜라도 대답해야 되는데 그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은 아주 없고 생도시절과 임관 이후, 그 즈음에서 혼란하고 있어.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뇌의 문제는 아니고 심적인 이유라는 것 같더군. 앞으로의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게 결론이야."
"1급 경호체제로 돌리고 지구로 이송해."
"아리안로드 함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지구 본부는 그 쪽대로 지휘체계 및 반역에 참가한 장교들의 처우 관련 문제로 정신이 없네. 당분간은 여기에서 그를 책임져야 해."
"그…래서?"
가엘리오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는 팔목을 슬쩍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예감이 아니라 정황 근거로 도출된 가정이라는 쪽이 더 맞는 말이며 가엘리오 보드윈의 인지 추론 능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자네가 그를 좀 지켜봐야겠어."
러스탈 에리온은 활짝 웃으며 가엘리오에게 새로운 직무를 부여했다.
…
*
가엘리오는 잠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자신은 남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전투 스킬을 가졌다. 공간 감각은 좋았다. 논리력은 살짝 떨어졌지만 그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절대적인 수치에선 모자람 없다. 파일럿은 기계와 시스템을 이해해야 하기에 그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은 있다. 예술은 문외한이지만 기계적으로 외운 탓에 아직도 파블로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켰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정확한 바이올린 보잉을 위해선 어깨를 움직이는 게 중요하단 것도 안다. 가구엔 인체공학이 필요하고 심적으로 편안한 공간배치를 위한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기억을 잃은 전 친우이자 현 원수를 다루… 아니, 돌보는 법은 모른다.
"왜 그래 가엘리오 어디 안 좋아? 기분 나빠? 왜?."
"그을쎄에."
너 때문인데. 전부 너 때문이지.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꾹 억누르며 가엘리오는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을 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기억상실이란 말만 했지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한 것 같은데. 가엘리오는 다시금 골머리를 싸맸다.
맥길리스가 깨어나자마자 보인 이상행동에 당장 러스탈에게 연락했지만 「그건 새로운 증상이군. 의료팀에 전달해 두지.」 하고 러스탈은 단박에 통신을 끊어버렸다. 가엘리오는 당장 쫓아 올라가 그에게 따지고 싶었으나 가엘리오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날라치면 맥길리스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다.
"가지 마, 가엘리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을 애처롭게 내리 깔고 조금만 있으면 눈물을 드리울 것 같은 우수에 찬 얼굴은 어느 화보에나 나올 듯 아름답다. 사관학교? 임관 직후? 다 헛소리다. 맥길리스는 막 태어났을 때도 우는 대신 근엄하게 '응애' 소리만 냈을 게 분명했다. 완전 사람이 바뀌었다고!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보낼 수 없다면 자신이 대신 가고 싶었다. 자신은 아발론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이 쪽이 아니었던가.
몇 안되는 사유물을 들고 방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가엘리오는 이런 걸 걱정하지 않았다.
생도 시절과 임관 직후, 그 즈음의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는 막 우정을 쌓고 있었다. 그토록 오래 붙어있었으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 대해 아는 건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몰랐던 사실을 조금씩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이상, 꿈꾸는 미래, 그는 단 맛을 좋아한다. 그를 위해서 가엘리오는 몇 종류의 가향차를 새로 샀다. 캐러멜이나 초콜릿이 첨가된 것들을 맥길리스는 좋아했다. 풍부한 크림이 들어간 시트 케이크, 생초콜릿을 녹여 만든 음료, 디저트를 잔뜩 알아봤다. 맥길리스는 의외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그래서 종종 대련을 부탁했다. 펜싱이나 맨손 격투, 어느 쪽도 맥길리스는 능숙해서 가엘리오는 매번 패배의 쓴 맛을 보았지만 그것도 재밌었다. 예전처럼 억울하거나 위축되는 것보단 어쩔 수 없지, 하는 체념과 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더 컸다. 맥길리스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할 때 낯부끄럽지만 꽃다발도 준비했다. 화려한 생도 예장도 맥길리스에겐 모자랐다. 세상 모든 영예가 그의 머리에 관처럼 얹어져 있는 것 같았다. 대리석으로 깎은 듯 완벽하고 빈틈없는 맥길리스가 그에게만은 살짝 속내를 보여주는 것에, 그러한 자신의 위치가 그토록 만족스러웠다. 어리석을 정도의 친애였다. 한치의 의심도 없던 과거를 잘 연기할 수 있을까. 그가 내비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철저하게 가엘리오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될지,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속내를 까발리면 혹여나 그 생생한 증오를 보여줄까. 그렇다면 그 혐오를, 같은 공간 안에서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지.
가엘리오가 걱정하던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턱을 괴고 앉아 누워있는 맥길리스를 보고 있을 때, 결국은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 지경이 된 지금까지 맥길리스는 여전히 가엘리오에게 어떤 감정들을 주고 있었다. 분노나 증오나 혐오가 아니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과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들어올려졌다. 흰자위엔 핏줄이 터진 자국도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 쪽으로 돌아왔다. 시력도 멀쩡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초록이 가엘리오를 응시한다. '안녕, 가엘리오.' 그는 의례적으로 그런 말을 하겠지.
"안녕, 가엘리오."
대사는 예상대로였으나 예상을 벗어난 건 그의 표정이었다. 봉오리 진 꽃이 눈 앞에서 만개하듯 맥길리스는 활짝 웃었다. 웃어? 그야 맥길리스는 언제나 미소 짓고 있었다. 적당히 예의 갖춘, 얇은 입술로 길게 호선을 그리면서 다정하게. 그러나 이건, 좀, 달랐다.
"눈을 떴더니 전혀 모르는 곳이라 놀랐어. 아깐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여긴 어디지? 머리는 왜 그래? 껌이라도 붙었었나? 그러게 조심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니거든."
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 없어 코웃음 치는 사이 침상에서 일어난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머리에 손을 뻗는다. 방금 전과는 달리 한껏 침울해진 얼굴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애수 어린 시선으로, 가볍게 가엘리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맥길리스의 손길이 낯설었다.
"아깝게. 네 머리카락, 좋아했는데. 그래도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네. 아닌가, 어른이 된 건가?"
내 기억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단 얘기를 들었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가 있을 거라고. 맥길리스는 전에 없이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몇 살이지, 가엘리오? 간지러운 한숨이 코끝에 닿는다. 가엘리오가 몸을 뒤로 뺀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가엘리오의 머리에 닿던 손은 그대로 멈춰 허공에 떠 있었다.
기억을 잃으면 다 이렇게 되나?
가엘리오는 약간 신선한 느낌으로 맥길리스를 보고 있었다.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맥길리스는 전과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생애 한번도 없었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맥길리스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맥길리스는 꽉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뭐?"
"왜 피해?"
"왜, 냐니, 그거야……." 그거야. 가엘리오는 말을 골랐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지극히 사실적인 말이었다. 맥길리스는 한 번도 가엘리오에게 먼저 손 뻗은 적 없었다. 가엘리오도 말로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한 번도 맥길리스가 먼저 가엘리오를 향해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친구 사이에서 빈번한 스킨십이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가끔 어깨를 짚거나 가볍게 두드리는 것도. 모든 것은 가엘리오의 착각이고 헛된 꿈이었다. "너는 나를 싫어하니까." 이 말은 가엘리오가 미처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별안간 억울함이 치민 까닭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맥길리스는 크게 뜬 눈으로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뻔뻔하긴. 그의 심신안정을 위해 말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후회했지만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속이려 하다니. 이왕 내뱉은 말 차라리 솔직하게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밀어붙였다.
"싫은 게 아니면, 그래―, 싫은 건 아니었겠지. 너는 나나 카르타를 장기말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잘해주었지. 감정은 논리와 이성을 이겨. 한 사람에 대한 존경, 애정, 우정, 신뢰. 너는 그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것들을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존재는 인정하고, 이용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눈꼬리가 처졌다.
"솔직해져, 맥길리스. 아무 탓도 하지 않을게.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나는 여전히 너에게 화는 나지 않아. 그냥 조금 슬플 뿐이야. 진심을 얘기해 준다면―."
진심을 얘기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엘리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냥 그랬구나. 처음부터. 가엘리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었다. 맥길리스가 건네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점이,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아직도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자고 일어나면 익숙한 자기 방이고 제복을 입고 출근하면 어느 복도에서 맥길리스를 만나 인사하지 않을까 그런 헛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은 독이고 덫이고 족쇄였다.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다리를 붙들고 옥죄고 육체와 정신을 좀먹고 헐어버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나 맥길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맥길리스의 과장된 동작은 전에는 몰랐는데, 꽤 기이한 버릇이었다. 그는 잔뜩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 누구나 몰입할 정도로 호소력 있는 표정이었다. 얘는 연기를 했어야 했는데 -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야, 가엘리오. 나는 너를 사랑해."
극적인 무대에 극적인 연출. 가엘리오는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거짓말. 가엘리오가 그렇게 읊조리면 맥길리스는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내 말을 믿지 않아? 그거야 네가 그럴 짓을 했으니까.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슬펐다. 자신은 더 이상 맥길리스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맥길리스에게도 꽤 충격이었는지 내내 이 상태다. 가엘리오가 어디 가려고 하면 옷을 붙잡고, 어디 가냐고 묻고, 불안정한 환경과 의식이 맥길리스의 심층심리에 대체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가엘리오로서는 당최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어미를 좇는 새끼오리처럼 가엘리오를 쫓아다녔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엘리오에게 의존했고 끊임없이 가엘리오에게 되뇌였다.
"사랑해. 이 말에 거짓은 없어."
(중략)
특별히 허가를 받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함정 안에만,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 있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 - 사실 가엘리오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 MS도 없이 우주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슈츠를 챙겨입는 맥길리스는 예전과 같았다. 첫 항해에서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꼬드겨 몰래 이렇게 전함 밖으로 나왔었다. 무중력과 고요의 세계에서 단 둘만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로맨티스트가 아닌 가엘리오조차도 설레게 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아마 그것을 동경해서 대지를 벗어나 하늘로, 이 아득한 우주로 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맥길리스에게 손을 뻗는다. 그는 좀 놀란듯 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가엘리오의 손을 잡았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손을 내내 거부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조차 잊어버린, 지금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맥길리스'에게 지금까지 너무 가혹했던 걸까. 가엘리오는 과거의 맥길리스와는 별개로 그를 연민했다. 어쩌면 이건 맥길리스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가 냉정한 이성과 이상에 대한 의지로 져버리고 있었던 솔직한 진심.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믿기 힘들었지만.
제일 처음, 의료용 캡슐에서 눈을 떴을 때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깨달았던 건 제가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그 열정, 맹목, 전부 사랑이었다. 그에게 가는 애정이 우정과 친애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란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까.
지난 2년 동안 그런 수많은 가정들이 가엘리오의 머리를 스쳐가곤 했다. 맥길리스를 좀 더 자세히 알았다면, 그를 경계했더라면, 아니 그를 완전히 사랑했더라면,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아니 이 가정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실현될 수 없지. 그러나 모든 가정, 후회는 실재가 되지 못한 것들이며 실재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이고 이것은 그 어떤 우주에서도 반대가 되지 않는 절대적 진리다.
가엘리오는 충동적으로 헬멧을 벗었다. 맥길리스가 놀란듯 허둥댄다. 이전의 맥길리스라면 전혀 그러지 않았겠지. 아마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러나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야, 가엘리오.'
알아.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나중에 기억을 되찾은 맥길리스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억한다 해도 가엘리오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지금은 지금이다. 간신히 지금의 그와 예전의 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맥길리스는 여기 실재하고 있다. 저를 사랑하는 맥길리스가. 예전과는 별개로, 제게 사랑을 말하는 이를 그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존귀한 사랑에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대기가 없는 우주에선 그 어떤 소리도 소리가 되지 못한다.
너, 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산소가 부족한 탓일까. 가엘리오는 흐려지는 시야로 생각했다.
사,
맥길리스가 헬멧을 벗었다.
랑했,
우주에서는 탄 고기 냄새가 난다고 한다. 달에서는 독특한 화약 냄새가, 혹자는 달큰한 라즈베리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그 어느 것도 맡지 못했다. 지금 코끝으로 맡을 수 있는 건, 달작지근한 초콜릿 냄새, 이건 아까 맥길리스가 마신 캐러멜 가향차 냄새일까. 모르겠다. 숨이 벅차서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할 수 있는 키스였기에 가엘리오는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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