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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리퀘박스 여섯 번째 : 관심받고싶어서 가엘리오한테 너만 알아둬, 곧 퇴직할 생각이야(혹은 사관학교시절로 자퇴선언) 폭탄선언하는 맥길리스 써주세요🙏
그 다음에 뭐 어떻게 하란 말이 없어서 장르는 제 맘대로.
시작은 아주 작은 생채기였다. 피가 난 줄도 몰라서 카르타가 작은 비명을 지르고서야 알았다. 네잎클로버를 찾던 가엘리오의 시선도 이 쪽을 향했다. 하늘에 흐린 구름이 가득 끼는 것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별 거 아닙…ㄴ네."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혀를 깨물 뻔해 엉뚱하게 흐트러진 어미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정원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팔뚝에 조금씩 방울져 배어나오는 피 같은 건 혀로 몇 번 핥으면 그만인 것을 다들 한번도 다쳐보지 않은 것처럼 난리였다. 나는 습관처럼 혀를 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런 '불결'한 짓은 여기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멀뚱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다그쳤다. "너! 있잖아!" 주어가 없는 문장을 가엘리오는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주머니를 뒤져 잘 다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엷은 푸른색에 자색실로 꼼꼼하게 테두리가 마감된 손수건 끝엔 필기 자수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G. Bauduin. 물건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건 소유가 약속된 자들의 오만이다. 작은 손가락이 내 팔뚝에 서툴게 매듭을 묶고 말했다.
"이따가 우리 집 가면 약 발라줄게. 많이 아파?"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 가엘리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사실 말을 꺼내기 전엔 아예 몰랐고, 지금도 느낌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약간."
거짓말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욱신거리고, 팔뚝에 매인 손수건의 감촉은 부드럽고, 어설프게 매듭진 손수건의 끝을 가엘리오가 눈치채지 못하게 잡아 당겼다. 너무 꽉 매여 눌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좋았다.
*
"대체 왜 그러지?"
"글쎄."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붕대를 잘 매게 되었다. 필수 이수 과목인 보건이 도움이 되었을까.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고 시트를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이조차 못했다. 보드윈의 하녀들이 만류하는데도 기어이 본인이 하겠다며 커다란 응급상자를 받아 들고 삐뚤빼뚤하게 가위질을 했다. 깔끔하게 펴지도, 붙이지도 못해 몇 번이나 떼었다 붙였다 하는 바람에 접착력을 잃은 시트가 손등 위에 너덜너덜하게 얹혀진 것을 가엘리오는 미안함과 뿌듯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나를 보곤 했다.
그렇게 보는 가엘리오는 보상을 바라는 개인 동시에 그 지루하고 쓸데없던 시간을 인내했던 나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도 보였다. "고마워." 하고 한 마디 하면 가엘리오는 세상 제일 좋은 어려운 일을 해낸 꼬마처럼 웃었다. 내 손가락 하나에 누군가가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관계의 우위,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권력이었다. 그 땐 미처 몰랐지만 그 기분은 정의하고 나면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희열이었다.
가엘리오는 변덕스럽게 다채로운 카레이도스코프처럼 눈을 가져다 대고 약간만 각도를 바꿔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곳을 향해 있던 무표정한 얼굴이 말을 걸면 웃고, 비꼬면 화를 내고, 칭찬하면 웃고, 내가 상처 입으면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표정을 짓는다. 이상한 일이다. 정작 본인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으면서 나의 고통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황홀하게 아름다웠으나 비극이 희극보다 감명 깊듯, 슬프게도, 가엘리오의 분노와 슬픔은 그의 기쁨보다 내게 훨씬 감명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에게 주기는 쉽지 않다.
이 때를 빌어 말하건대, 가엘리오 보드윈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다. 물리적인 상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고귀한 자긍심과 오만한 선의나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완전무결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는 신의 아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눈동자, 우월한 혈통, 건장한 신체. 키가 작고 부드럽고, 때로 유약해 보이던 얼굴은 성장하며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선을 갖고 있었지만 시선은 나날이 깊어졌고 억세지는 턱선 같은 게 눈에 띄었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엷은 보랏빛, 밝은 빛에선 투명하게 엷은 푸른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어린 시절처럼 언밸런스한 단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약간 처진 눈꼬리는 얼핏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을 꽤나 붙임성 있고 부드럽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여려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 그는 과연 태어나서 이미 저승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신의 아들인 것인가.
그렇다면 상처 입는 건 나여야만 했다. 물론 상처 입는 것은 쉽다. 그에게는 나의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 약간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실로 가시적인, 육체적인 고통이면 되었다. 고의라는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긁어낸다. 도구는 어느 것이라도 좋다. 종이책의 단면, 낡은 건물의 거친 벽돌벽, 부서진 유리의 끝. 가엘리오는 그러면 놀란 얼굴로 내게 와서 화를 내고, 내게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통들을 마치 제 살이 파이기라도 한 양 아파한다. 그는 나의 잦은, 자잘한 부상들에 놀라고, "너는 왜 이런 일에만 부주의한 거야?", 의아해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일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앞에서 기꺼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다.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을 굳건한 신체가 내 앞에서는 스스럼없이 낮아지고 나는 그러면 어떤 포만감을 느끼면서 너의 숙인 뒤통수를 바라본다.
"사관학교를 그만둘까 해."
"뭐?"
화들짝 놀라 갑자기 고개를 드는 작은 머리에 턱이 부딪혔다.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우왓, 괜찮아?" 다급하게 얼굴에 손이 닿는다. 마디진 손가락, 예전보다 훨씬 억세고 커진 강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턱, 아랫입술 끝을 문지른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가엘리오." 내가 황급히 그의 손을 쳐내면 가엘리오는 '아.'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미안." 짧게 사과하고는 묻는다.
"하지만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야?"
"글쎄……. …아직 고민만 하고 있으니까."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맘에도 없는 헛소리였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구성되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실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세븐스타즈는 걀라르호른, 세계의 균형을 지킬 군인만을 배출하기 위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첩의 자식 - 사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 인 내가 '파리드'의 이름을 갖고 다른 선택이 가능할 거라고 가엘리오는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가엘리오는 정말 믿고 있는 것 같았다. 5일 후에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절망한 표정이었다. 가엘리오는. 내가 그것을 곁눈질하여 보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자기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내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왜? 뭔가 문제가 있어? 혹시 뭔가……."
가엘리오는 수정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선 어떤 단어들이 떠돌고 있을까. 집단따돌림이라든가 괴롭힘이라든가 그런 저열하고 수준 낮은, 내 출신 때문에 익히 있어왔던 소문들, 그리고 으레 붙어올 행위들이 그려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내게 직접 말하면 내가 자존심 상해 할 거라고? 그의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투명하고 내 신분을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 가엘리오라고 생각하면 나는 또 빈정이 상해버리고 만다. 대등한 척 하지만 내가 그러하듯, 그는 그대로 이 관계에서 제가 우위라고 생각하나 보다. 나와 다른 건, 그는 의도하지 않아도 언제나 누군가의 우위에 있었으니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숨쉬는 것보다 당연하다는 점이다.
"아냐, 잊어줘 가엘리오. 농담이었어."
아예 몸을 돌려버리는 나의 냉담한 대응에 가엘리오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허우적대다 "어, 어…." 석연찮게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이제 보지 않고도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수심의 색과 형태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색이지. 의미 없이 펜을 달각거리며 나는 내 등 뒤로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의 웃는 얼굴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고뇌를 대신 떠안을 것이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그는 나의 말도 안되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지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언제 어디서나 정신 차리고 보면 가엘리오의 시선이 내게 닿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말을 걸고, 혹은 내가 말을 걸면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도 억지로 웃는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진지한 감정, 걱정에 나는 좀 더 들뜨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휴일에 둘이 어디 가지 않을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게 가엘리오는 내게 묻는다.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단 간청이나 애원에 가까웠다. 나는 잠시 고민해 본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나의 망설임이 길어질 수록 가엘리오가 초조해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입 안에서 초콜릿을 녹여 먹는 것처럼 진득한 단맛이 배어 나온다.
"네가 싫으면"
"아니. 그래 좋아."
"정말?"
그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 있게 말한다. "즐거운 일이 될 거야." 뒤에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걱정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경의를 담아 조소했다.
*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는 전혀 다른, 산 중턱에 위치한 보드윈의 겨울 별장이었다. "지금은 겨울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경치도 좋거든." 가엘리오는 나의 눈치를 본다.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일부러 내버려 둔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거친 단면이 혹여 내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은 미숙한 그의 운전실력도 한 몫 했다. 엑셀을 밟을 때마다 거칠게 올라가는 배기음을 들으면서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 보았다. 가엘리오는 전전긍긍하며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곳임은 알 수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에 상쾌한 공기였다. 저 먼 곳에서는 험준한 산맥과는 동떨어진 너른 평원이었다. 아기자기한 지붕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다. 밤이 되면 별이 닿을 것처럼 보여. 우리는 그 별의 실체를 알고 있다. 뭉쳐진 먼지 내부가 타오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토록 멀어 보이는 투명하게 흰 달이 사실은 회색의 먼지가 뒤덮인 돌덩이인 것도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위에도 기지를 지어 놓았다. 그 모든 것을 실제로 보기까지 했으면서도 가엘리오는 여전히 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갖고 있는 낭만적인 함의들을 버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착했어."
감속과 주차는 성공적이었다. 브레이크를 걸고 시동을 끌 때 가엘리오의 바짝 서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꽤나 신사답게 먼저 내려 나의 문을 내려주고 짐을 꺼내 안으로 옮긴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인들이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은 아니다 보니 실내는 어딘지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가엘리오는 애써 그것들을 모르는 척 한다. 게다가 즐거운 일이 될 거라던 가엘리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날씨는 흐렸다.
"이래서야 저녁에 별 구경은 전혀 못 하겠는 걸."
"……."
"내일 낚시도 불가능할지 몰라."
가엘리오가 끙끙대며 짐을 옮기고 불을 켠다, 난방을 올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창밖의 호수를 보았다. 저녁엔 별을 보고 다음날엔 낚시를 하고 산책이나 하자던 가엘리오의 멋진 계획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엘리오는 내심 걱정하고 있던 불안들이 내 입에서 나오자 맘에 안드는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쩔 수 없이 체념해버리고 만다.
"그러게."
"일단 일기예보에선 잠깐 내리는 비라고 했으니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빌어야겠어."
"으응."
"그래서 이젠 뭘 할래, 가엘리오?"
나는 모르는 척 그에게 묻는다. 철저하게 모든 결정을 가엘리오에게 떠넘기는 말이었다. 가엘리오는 대체로 모든 결정을 내게 맡겼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는 몹시 약했다.
"너는 일단 TV라도 보고 있지 그래?"
"너는?"
"나는 저녁을 해야겠지?"
"저녁? 네가?"
"응. 데우기만 하면 되지만 약간 조리가 필요한 것도 있으니까."
가엘리오는 자랑스럽게 밑에 내려둔 아이스박스를 탕탕 치며 말한다. 어쩐지 짐이 많더라니 식재료가 아니라 이미 완제품이라 더 부피가 컸던 모양이다. 하긴. 이 도련님이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약간의 의아함과 흥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나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줘, 맥길리스."
방금 전까지의 낙담은 사라지고 쾌활하게 웃는 얼굴로 가엘리오는 말한다. 그의 그늘이 너무나 쉽게 걷히는 것을 보며 외려 내가 낙담하고 말아 버린다. 그는 정말로 완전하다.
TV에선 관심 없는 엔터테인먼트들만이 한창이었다. 공용어도 아닌 언어들로 방송되고 있어 이 프로가 토크쇼인지 개그프로그램인지도 알 수 없는데 무대에 선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하니 화면 너머의 방청객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채널을 돌린다. 뉴스, 다큐멘터리, 혹은 드라마, 여전히 흥미 없는 것들만이었다. 어두워진 사위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창 밖에선 어느 새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엘리오?"
그러나 빗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가운데 실내는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소파에 뉘었던 몸을 느릿하게 움직여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엔 사람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열린 아이스박스 안엔 미처 정리되지 못한 재료들이 있었다. 식빵, 잘린 야채들, 과일, 내일 낚시하러 가면 먹게 되는 건 샌드위치인가? 냄비 안에는 포토푀가 끓고 있었고 버터에 예쁘게 구운 감자는 어느새 식어 희게 뜬 기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하며 낯선 집 안의 곳곳을 뒤진다. 2층, 다락방, 화장실, 거실, 문 뒤, 옷장 안, 탁자 밑까지 둘러보는데도 가엘리오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부엌을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없었다. 가엘리오가, 어디에도.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자마자 빗방울이 거세게 얼굴을 때렸다. 우산을 찾아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산의 해는 가뜩이나 빨리 지는 데다 이미 어둑해지고 비에 젖어 미끄러지는 산에선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대신 신발장을 뒤져 커다란 랜턴 하나를 찾았다. 초조함이 신물처럼 목을 타고 역류한다. 순식간에 머리와 옷이 젖어가는데도 이상하게 목만은 바짝 말랐다.
"가엘리오!"
차는 있었다. 그는 어디 갈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여기 방문한 것도 아니다. 산장 주변,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여전히 그의 흔적은 없었다. 흥취를 위한 벽난로에 던져 넣을 장작이라도 찾으러 간 걸까? 건물 뒤에 쌓인 장작더미들을 보니 그건 아니다. 차로 왔던 큰길을 따라 500m쯤 걷다가 보이는 게 우리가 타고 온 차의 바퀴자국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돌아왔다. 관찰력이 떨어졌다. 나는 분명하게도, 당황하고 있었다. 가엘리오는 어디 갔지? 그의 부재가 어쩐지 나를 심히 공포스럽게 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불안이 내 안에서 세를 불리고 있었다. 비구름만큼이나 무겁고 흐리며 형체가 없었다. 특정 짓지 못하는 것들이야말로 사람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악마의 계약, 신의 분노, 악귀, 원혼, 비가시적인 무언가들이 그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엘리오 보드윈 또한 그러한가? 그는 보이지 않아서 공포가 되는가? 알 수 없었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나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혀 밑에서 뛰는 것 같았다. 발자국, 발자국을 찾아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산장으로 돌아와 바닥을 훑는다. 낙엽과 비와 진흙 사이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너의 흔적을 쫓았다. 몇 번이나 바닥에 붙을 것처럼 훑어 보면 있었다, 측면의 저 끝 비탈길로 향하는 걸음, 끝에서 미끄러진―
"가엘리오!"
10m쯤 되는 급경사의 비탈길이었다.
"아, 하하… 안녕, 맥길리스. 저녁, 많이 늦었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가엘리오는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거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이미 듬뿍 젖어 달라붙은 셔츠 색과 같았다. 움츠린 어깨를 어떻게든 펴보려고 가엘리오는 애쓰지만 이미 체온이 떨어져 긴장해 움츠러든 근육들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엔 안도와 낭패감이 뒤범벅 되어 있었다.
"멍청이냐, 너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노호성에 가까웠다. 놀란 것은 나와 가엘리오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엘리오는 서툰 변명을 하려다가 대신 손을 뻗었다.
"나 좀 부축해줄래? 미끄러져서 발목을 삐어 버렸어."
혼자서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비탈길을 비슷한 체격의 남자를 부축하고, 비가 잔뜩 쏟아지고 있는데 이미 해가 완벽하게 진 어둠 속에서 올라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고행이라 간신히 실내로 돌아왔을 땐 저녁 시간은 애저녁에 지나 있었다.
잔뜩 젖은 신발을 집어 던지고 일부러 소리를 죽이지 않은 채 쿵쾅대며 수건을 찾아내, 간신히 의자에 앉은 가엘리오에게 던졌다. 밝은 곳에서 보니 가엘리오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흙투성이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사라진다. 가엘리오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든 빠르게 일을 수습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신발을 벗고,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주 늦었지만 다시 완벽한 저녁을 차리는 그런 것들.
한참을 끙끙대며 가엘리오는 찬 빗속에서 얼어 곱은 손으로 신발끈을 풀었다.
"내가 할게, 가엘리오."
난처해하는 포정을 보면서도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목을 본다. 생각 이상으로 심하게 삔 모양인지 가는 발목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부어 있었고 열감도 심했다. 어설프게 스쳐 지나간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도 거기만 홧홧할 정도로 뜨거웠다. 살짝 손을 얹기만 했을 뿐인데도 가엘리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불멸자인 신의 아들에겐 단 한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강에서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미가 붙잡고 있었다 발 뒤꿈치라고 했다. '뒤꿈치는 아니지만.' 나는 탄식과 고소가 섞인 잡생각을 내치며 묻는다.
"구급상자는?"
"TV 밑에."
"그냥 겹질린 정도인 게 확실해?"
"부러진 건 아니야."
가엘리오의 목소리는 어쩐지 남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맥길리스에게 간혹 하던 '아프지 않아?'라는 말을 할 때의 가엘리오와도 괴리가 있었다. 무감했고 그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는 태연하다. 그는 난공불락의 성이고 영원히 무결할 것이다. 하. 이 얼마나, 완전하고, 오만한――!
"화났어?"
"내가 화 날 이유는 없어 가엘리오."
"배도 고플 테고, 비 오는데 쓸데없이 고생했고."
"……."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먼저 씻고 나오도록 해 모처럼 재밌게 놀자고 초대한 건데 외려 일을 불려서 미안해, 맥길리스."
"너는―,"
"응?"
고개를 들어 올리면 가엘리오의 푸른 눈과 마주친다. 그림자 하나 없는 맑은 눈동자다. 저도 모르게 그의 발목에 얹혀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고, "맥길리스? 저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엔 흐림이 없다. 그 얼굴이 흐려지는 것은 오로지 나를 볼 때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기쁨, 기쁨? 혼효된 감정들이 갈아서 곤죽이 된 야채 주스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맥길리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올려다보는 가엘리오의 시선에 평소와는 정반대의 위치가 되어 있었음을, 내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엘리오가 무어라 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가엘리오의 시선은 여전히 이 곳으로 닿고 있을까? 그 눈동자는 어떤 색일지, 평소와는 달리 전혀 짐작 되지 않았다. 혹은, 내가 그를 보는 시선, 이.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딘지 웃고 있는 혹은 당황해 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는.
알 수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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