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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0 [맥가엘TS]
- 2016.12.20 [맥가엘] Who's the Titania
- 2016.12.14 [낙서]
- 2016.12.08 [맥가엘] Carta
- 2016.12.06 [적청] 3월과 사자와 조련사
글
[맥가엘TS]
생리통.
아침과 저녁이라는 가시적인 시간 개념이 없는 우주공간에서는 반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준수하는 게 중요하다. 우주 표준시 AM 09 : 00. 맥길리스 파리드는 언제나처럼 조식을 먹고 방에 앉아 몇 가지 자료를 보고 있었다. 이례적인 콜이 울리기 전까지는.
「파리드 특무소령, 소위 아인 달튼입니다.」
아인 달튼은 화성에서 만난 인물로 죽은 상관의 복수를 하겠다며 동행 시켜 달라고 요청한 갓 임관한 소위였다. 개인의 목적을 위한 사사로운 소속 이전은 있을 수 없지만 맥길리스는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알겠다 답하곤 가엘리오에게 떠넘겼다. 처음에는 상의도 없이 이러기냐, 감사관의 호위 자격인 제게 부관이 붙는 건 이상하지 않냐 불만을 내비치더니 이내 그가 썩 맘에 들었는지 가엘리오가 가는 곳마다 아인이 붙어있었다. 물론 아인도, 처음엔 미묘한 표정이더니 요즘은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이 퍽 묘해졌다.
그것이 맥길리스는 거슬렸고, 아마 아인도 느꼈을 것이다. 화성 지부라는 소속과 혼혈이라는 출신, 그리고 자신도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맘이 없어 보이는 아인 달튼은 사적인 용무로는 결코 타인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으며 맥길리스와는 공적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콜?
무심코 가엘리오라고 생각했던 맥길리스는 통신장치에 손을 뻗어 화면을 열었다. 홀로그램 너머로 보이는 아인은 빳빳하게 굳어서 몹시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이런 연유로 연락 드리는 게 외람됨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어진 말에 달력을 확인한 맥길리스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인을 제자리로 보내고 - "내일까지 휴가를 주겠네, 소위. 자네 상관은 내일까지 병가니까." - 맥길리스는 의례적인 노크를 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락이 걸리지 않은 도어에 한숨을 쉬다가도 문 열고 나오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는 가엘리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녀의 부주의함을 탓할 수도 없다. 탓해야 되는 건 부주의가 아니라 미련함인가? 아니면 그녀의 체질?
"가엘리오."
답이 없을 걸 알면서 맥길리스는 괜스레 이름을 불러본다.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청자색의 머리카락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흐드러진 등나무 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반듯한 그 등이 태아처럼 바짝 웅크려 굽어있는 것을 본다. 찡그리며 감은 눈꺼풀 위에 땀에 젖어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가엘리오는 원발성 월경곤란증상, 요컨대 생리통, 을 심하게 겪었다. 남들보다 성장이 조금 더뎠던 가엘리오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인상을 쓰다가, 점점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내더니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맥길리스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유 없이 가팔라진 숨에 어떻게든 진정해보려 하다가도, 그녀를 부축하려고 등에 닿은 손 언저리에 묻은 축축한 것이 붉은 얼룩임을 알았을 땐 맥길리스도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카르타가 아니었다면 가엘리오는 생리통으로, 맥길리스는 쇼크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초경을 그대로 맞이한 후 한동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피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게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를 한층 더 가깝게 만들었다. 보드윈의 자긍심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이미 못 볼 꼴 다 본 맥길리스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그 이상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가엘리오를 챙겨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맥길리스 뿐이다. 아인 달튼 소위는 어떻게든 고군분투하며 그녀를 침대 위로 끌어다 놓고, 진통제를 먹이는 데까진 성공한 모양이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맥길리스는 매번 일상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제복을 갖춰 입는 가엘리오의 성실함에 혀를 찼다.
"벗긴다, 가엘리오."
퍽 건전하게 들리지만은 않는 문장이지만 가엘리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추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풀어내면 이미 식은땀에 젖은 흰 셔츠가 도드라진 어깨와 가슴, 움푹 들어간 허리까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제발 이런 걸 아무에게나 보이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자신에게도.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제복의 재킷과 셔츠를 벗긴다. 부드러운 가슴을 제외하면 군살이라곤 하나 없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신체다. 어중이떠중이 남자 다섯은 눈 감고도 때려눕힐 수 있는 육신이 어쩔 수 없이 무력해질 때마다 맥길리스는 그녀가 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맥…길리, 스……."
신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찬숨과 산뜻한 라벤더 향과 섞여 닿는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목덜미와 얼굴을 닦아내면 가엘리오가 가늘게 눈을 뜨고 맥길리스를 바라본다.
"아인이 있,었는데,"
"그에겐 내일까지 휴가를 줬어.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해."
"상관으로서 못 볼 꼴을 보였어."
"어쩔 수 없지."
오늘 내일은 푹 쉬도록 해, 가엘리오.
남몰래 긴 머리카락 끝에 입 맞추며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눕히고 이불을 정돈해주었다. 고통 때문에 여전히 태아처럼 웅크린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본다. 눈을 감고서도 가엘리오는 무방비하게 그 온기에 만족하며 미소 짓는다. 지근거리에서 저를 꿰뚫는 녹색 눈이 어떤 형태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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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Who's the Titania
D 님의 썰을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제목은 임의.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해본 적 있어, 가엘리오?
나는 있는데. 나는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지. 선택 아닌 선택을 강요받는 궁지에 몰린 느낌 말야.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었는데, 별 건 아니고. 그냥 흔한 액션 영화였거든. 주인공은 달리는 기차 지붕 위에 있지. 저 앞에는 터널이 있는데, 기차 높이랑 딱 맞아서 도저히 거기 있을 수가 없어.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땐 저 멀리 있었어. 아주 멀리.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지. 밑은 늘 그렇듯 깊은 호수야. 그러면 주인공에겐 선택지가 사실 단 하나 뿐이지. 터널에 갈려 죽기는 싫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은 호수로 뛰어내리는 것 뿐이야. 물론 확률이 높다는 거지, 그가 100% 안전하다는 얘기는 아니야.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떨어지는 즉시 커다란 소리를 내고, 올라오는 기포 사이로 가라앉을 거란 사실이지. 방금 전, 네 잔 안에서 녹았던 흰 정제처럼. 어떤 통계물리학자는 운명도 이미 확률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소리를 했었는데, 글쎄. 그 위에 서 있는 게 나라면, 이미 정해진 운명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몇 퍼센트 정도 될까.
듣고 있어, 가엘리오?
"……아,니."
평소엔 지나칠 정도로 크게 떠져 있던 눈꺼풀이 느릿하고, 힘겹게 깜박인다. 들리는 소리의 반은 무엇인지 인식하지도 못할텐데 끝끝내 의식을 붙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의 성실함을 느낀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빈 잔을 느슨하게 쥔 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부러 내 손가락에 감기는 온기들을 확인한다. 깍지 낀 손의 굳은 살마저 언제나처럼 익숙했다.
자도 돼.
너는 응하듯이 내 손을 꽉 잡는다. 자도 돼, 가엘리오. 침실이 아니란 것만 빼면 예전과 다를 바는 없었다. 오른쪽 어깨에 온전히 기대어진 무게가 힘에 부치긴 했으나 그 무게에 늘 위로 받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엔 같은 침대에, 자주, 누웠는데, 그 때마다―
"아뇨. 택시는 괜찮습니다. 일행만 마셨어요. 가끔, 이래서."
사람은 미소 지으면 금세 호감을 갖게 된다고, 내게 그 말을 해준 건 너였지 가엘리오.
안전벨트가 필요할까 생각하면서, 네 목이 아플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아픈 것도 아프다고 느낄 수나 있을지. 알쏭달쏭한 고민을 하면서 나는 일단 안전벨트를 채운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너는 이런 얘길 하는 걸 좋아했는데. 우주, 요즘 들어 배우기 시작한 창술,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소녀,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쌍성, 제비는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지.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엑셀을 밟고,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치는, 이런 얘기는 내가 해줬지. 내가 아는 이야기는 이런 것 뿐이었으니까. 싸구려 영화, 죽어간 여자, 시시껄렁한 색사.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도망쳤고, 때렸고, 음식물 쓰레기는 염분이 너무 높아 물을 잘 마셔야 된대. 내가 비꼬듯이, 너를 괴롭히고 싶어서 한 말을, 너는 인상을 쓰면서도 듣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 손을 꼭 잡았어. 이유는 모르겠네. 왜 잡았을까. 내 눈을 보고, 내 손을 잡고, 그러다가 너는 기계처럼 시간이 되면 잠이 들었는데.
나는 도망치는 걸까. 네가 이 여행을 하자고 얘기했을 때, 너는 어디론가 도망치려고 했던 걸까. 어디로 갈래? 하고 물었을 때 너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아무 데나.
주사위를 지도 위에 던지고, 어떤 계절이 될지도 모른 채 짐을 쌌다. 충동은 내 안엔 늘 있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것들이지. 반대로 네게 충동이란 있을까?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치고 밀려오는 것. 네가 얼마나 유순한 사람인지 나는 알지. 신후하고 성실한 가엘리오. 그런 너는, 네게 없을 충동처럼 여행을 얘기했던 주제에 우리의 모든 여정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어. 언제나 차창 밖을 향하는 시선에서, 가끔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너에게선 찬바람과 그래도 태양의 냄새가 났고
우리는 지금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 있지. 등 뒤로 닿는 단단하고 축축한 아스팔트의 한기, 새벽 안개에 젖은 희미한 흙먼지, 매캐한 먼지, 아주 얇은 싸구려 야전 침낭을 보급 받고 영구동토의 참호에 누운 것처럼 - 사실 그것도 없지만 - 나는 누워서 첫 날을 생각해. 잠들려고 애써보지만 잘 안됐어. 내 첫 날들은 언제나 실패했어. 너는 모르지만 가엘리오, 내 첫 날들은 모조리 실패했어. 모든 게 그저 지나가기만을 눈을 감고 얌전히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처럼 누워있었지만 아무도 내 소원을 들어주진 않았어. 잠들지도 못했고, 꿈을 꾸지도 못했고, 도망치지도, 포기하지도 못했지. 숨을 쉬는 것을 멈추지도 못했고, 무거운 바퀴가 뼈를 으스러뜨리고, 내장을 짓이기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모든 축축한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튀어나와 이윽고 모든 의식이 악몽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아직도 알지 못해.
듣고 있어, 가엘리오?
가엘리오 보드윈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옹송그리거나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없이 바른 자세였다. 부드럽게 상하로 움직이는 흉곽의 움직임을 맥길리스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맥길리스는 동물 도감을 자주 읽었지만 가엘리오는 가리는 게 없었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다. 오로지 하나의 선택지만이 눈 앞에 있었던 맥길리스와는 달리 가엘리오에게 세상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에겐 수만 가지의 길이 있었고 그 중 수 천개에 적성이 있었으며, 흥미로워 하는 건 수 백개, 그리고 택한 것은 훌륭히 주변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가엘리오 보드윈이 선택할 수 있던 길 중 하나엔 분명 '이야기꾼'이 있었을 거라고 맥길리스는 생각하곤 했다. 가엘리오는 천일 밤을 새울 만큼의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었지만 늘 일찍 잠드느라 한 번도 밤새지 못한 불운한 세헤라자데였다. 죽은 아내를 소생시켜 저승에서 돌아올 때, 지상으로 올라올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던 그 남자의 이야기도 아마 가엘리오가 해주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때는 고작 그런 간단한 금기조차 지키지 못한 남자의 머저리 같음을 비웃었으나 나는 갑작스럽게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식은땀이 났다. 폐부가 쑥 내려앉는 절망이 턱 끝까지 치밀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초조해졌다. 더듬더듬 네게 닿은 손가락에서 온기는 느껴졌으나 반응은 없었다. 심장이 손가락 끝에서 뛰고 있었다. 왼쪽 갈비뼈 밑은 순식간에 텅 비어서, 빈 자리를 채우는 것처럼 찌르는 격통으로 조여 왔다.
우리가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너는 내 손을 꼭 잡았어. 내 눈을 보고, 내 손을 잡고, 왜 잡지 않을까. 너는 습관처럼 내 손을 잡지도, 내 눈을 보지도 않은 채 반듯하게 누워서――
어디선가 기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혹은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터널이 눈 앞에 온 것이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운명론자도 통계물리학자도, 목사도, 신부도 아니며 비로자나불을 믿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제 운명을 계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충동이었다.
*
이국의 도시에서 잠을 깨는 건 언제나 낯설었다. 3일째 같은 숙소에 머물면서도 언제나 커튼 치는 것을 깜박한다. 오늘은 체크아웃을 하고 다음 숙소는 절대 동쪽으로 창이 난 곳을 잡지 말아야지, 가엘리오 보드윈은 그런 생각을 했다.
ㅁ…, ……. …자?
오빠의 이름보다 오빠 친구의 이름을 먼저 익힌 여동생은 맥길리스를 맛키라고 부른다. 부주의한 실수를 할 뻔 했다는 사실에 입을 틀어막고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드 옆 의자에 기대 곤히 자는 맥길리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있었다. 뭐야. 어디 갔다오려면 나도 깨우지. 투덜대면서도 가엘리오는 살금살금 카펫 위에서도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갔다가, 다시 살금살금 돌아와 친우의 어깨에 담요를 걸어주었다. 뻗은 손가락이 잠깐, 충동처럼 마른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간단한 세안 후 새 셔츠와 슬랙스를 골라내어 매무시한 뒤 가엘리오는 방을 나섰다. 아침의 비밀스러운 산책은 이 여행에서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했다. 어제 입은 코트는 무엇을 했는지 어깨 끝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스팔트와 새벽 이끼, 안개에 젖은 흙먼지는 흰 손가락 끝에서 간단하게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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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맥가엘 전제의 비다르+줄리에타?
아리안로드엔 풀페이스의 가면을 쓴 남자가 있다. 피부 한 조각 보이지 않는 군복이 장신을 감싸고 손조차 흰 장갑으로 꽁꽁 싸맨.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군복 위로도 드러나는 단단한 흉갑과 단련된 팔다리, MS 파일럿, 전함에 익숙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원래부터 군인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혹여 그가 여성이 아닐까 하는 낭설도 있었지만 - 더불어 그런 이유로 러스탈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헛소리도 - 그의 장신과 신체적 특징을 보면 그렇진 않고, 전신에 흉측한 상처가 있다든가 하는 소문도 있지만 그가 얼굴을 보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줄리에타 쥬리스는 그런 그를 전혀 믿지 않지만, 때로 아리안로드의 최고 지휘권자인 러스탈 에리온이 그를 작전회의에 참여시키거나 그의 의견을 채택하기도 하고, 쿠잔의 당주인 이오크와 동등한 취급을 하는 등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 배신은 하지 않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러스탈 에리온의 결정은 그녀에겐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 이상의 불신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적으로 줄리에타도 그에 대해서 궁금증은 갖고 있다. 가면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대하기가 껄끄러우면서도 약간은 편했다.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때때로 다른 이들이 보이는 경멸이나 얕잡아 보는 표정은 꽤나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그는 그녀와 대화할 때 그녀를 경멸하거나 얕잡아 보는 표정은 짓지 않는 것 같았다. '같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는 전투에 들어갔을 땐 기뻐하는 것 같았고, 속으로 웃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한 얘기를 할 땐 약간 애정을 담기도 하고 그리고 지금은
'당황하고 있군.'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줄리에타보다 위로는 머리 두 개 만큼, 옆으로는 1.5배만큼 커다란 남자는 아무도 없는 격납고에 앉아 조그만 상자를 앞에 두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줄리에타는 안다. 커다란 자허토르테다. 러스탈 에리온이 자택의 요리사에게 부탁해 만든 것으로, 실컷 고기를 먹고 난 뒤에 줄리에타도 한 조각을 거뜬히 먹어 치운 초콜릿 케이크. 디저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러스탈이 무슨 연유로 우주까지 저 케이크 조각을 들고오나 했더니 저 남자를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줄리에타는 러스탈의 편애를 받는 이 남자가 조금 부럽기도 하고, 저 덩치에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하는 건가 의외의 식성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그래서 그를 보고 있었다.
신주단지 모시듯 그는 케이크 상자를 앞에 두고 5분이 넘게 그러고 있었다. 줄리에타가 보고 있던 것만 5분이니 그 전에도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러스탈 님이 주신 걸 먹지 않는 건가요?"
그래서 결국 짜증이 난 건 줄리에타였다. 기껏 챙겨왔는데 선물 받은 쪽은 손도 안 대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무엇보다 러스탈 님이 직접 주신 건데!
"아……."
정말로 그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아니, 표정일 것이다.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탁한 기계음으로 변조되어 가면 밑에서 흘러나왔다.
"러스탈 님이 직접 준비하신 건데요."
"그런가."
"그걸 알면서도 먹지 않는 건가요? 그 가면을 쓰고서는 당연히 먹을 수 없겠지만."
"에리온 공이 특별히 신경썼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렇지만 이건……."
너무 달아.
한숨처럼 터져 나온 푸념은 줄리에타에겐 뜻밖의 것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부모님한테 혼나긴 싫지만, 싫어하는 걸 먹을 수는 없는 편식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런 어린애는 딱 질색인데도, 그렇게 덩치가 큰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고작 케이크 한 조각에 고뇌하는 것을 보니 동정심이 절로 든다. 마치 전투 중의 이오크 쿠잔을 보는 듯 했다. 물론 그는 동정할 가치도 없는 무능력한 바보지만 이 남자는 전투만큼은 우아하게 해낼 줄 아는 파일럿이 아닌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요?"
"좋아하지 않아. 특히 초콜릿은, 싫어."
그의 단호한 대답에선 어떤 종류의 분노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왜 러스탈 님은 특별히 준비했을까요? 당신을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닐텐데."
"에리온 공이 오해했을 수도 있지. 아마… 오해일 거다. 싫어하지만,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으니까. 에리온 공도 아마 그랬겠지."
줄리에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이토록 명백하게 싫어하는데 어떻게 착각을 한단 말인가?
"예전에 같이 다니던 파트너가 초콜릿을 꽤나 좋아해서."
"꽤나 순정적이었네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한기가 줄리에타의 목덜미를 스치고 갔다.
"그 사람이 복수의 대상인가요"
"…글쎄."
약간의 침묵 후에 나온 대답은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이었다. 남들한테 오해를 살 정도로 믿었던 파트너에게 실컷 배신 당한 모양이었다. 그 멍청함이 한심하다가도 줄리에타는 더 비꼬는 대신 마음을 바꿨다.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게요."
"그래주겠나?"
남자는 금방 화색을 띈 목소리로 답한다. 정말로 싫었나보다.
"착각하지 마세요. 러스탈 님이 주신 맛있는 케이크가 버려지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게 싫을 뿐이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건 만들어준 사람에게도 실례지."
그의 대답에선 진지함이 묻어 나온다. 음식 남기는 것도 엄청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빈민가 출신인 줄리에타에게 음식을 남기는 건 대단한 사치였다. 지금은 보급이 끊일 일이 없어도 습관처럼 싹싹 긁어먹는데 이 남자도 그런걸까. 의외의 동질감을 느끼며 줄리에타는 그가 내민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였다.
용케 무너지지 않은 작은 케이크를 일회용 포크로 쿡 찍어 먹으면서 줄리에타는 제게 닿는 시선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뭘 봐요?"
"아니. 잘 먹는구나 싶어서."
"칭찬인가요?"
"칭찬이다."
"고마워요."
줄리에타는 약간 들뜬 기분으로 케이크를 크게 한 입 떴다. 뜻밖의 디저트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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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Carta
정확히는 카르타<가엘리오<맥길리스
1기 25화 이후
카르타.
종이에 글씨를 쓰는 건 오랜만이라 어떨지는 잘 모르겠어. 글씨를 쓰는 법은 어땠지? 처음으로 펜을 잡았을 때 잉크가 번져가는 게 신기해서 펜을 꾹 누르고 있다가 고장 났던 게 생각나는군. 네가 엄청 화를 내면서 그거 하나도 제대로 못 쓰냐고 뭐라 그랬었지. 음… 갑자기 화가 나는데, 고작 펜 하나 고장 냈다고 그렇게 면박 줄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애초에 그 펜은 내 거였다고? 네 펜도 아닌데 대체 왜 네가 화낸 거였지? 정작 선생님은 친절하게 새 펜으로 바꿔줬는데. 그리고 너도, 그 지난주 작문 수업에서 분명 하나 고장 내지 않았어? 그 다음에는 종이를 찢었다고 화를 냈지. 분명히 실수였는데 너는 언제나 화를 냈지. 그 다음에 나는 움츠러들었고, 이제 와서는 좀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아?
정말 이제 와서 말이지만, 아니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 가끔 방에 들어가면 서러워서 울었다. 이제는 네가 놀릴 일도 없으니까 뭐. 그럴 땐 진짜 내일이면 다시 보지 말아야지, 아는 척도 안 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음날이면 같이 놀았던 내가 멍청한 건지. 쓸데없이 때리기도 때리고, 면박도 주고, 분명 선생님은 사람을 함부로 때려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너는 나를 왜 그렇게 자주 때렸는지 모르겠어. 그래놓고 정작 상처가 크게 나면 놀라고. 놀랄 거면 처음부터 때리지나 말지.
언젠가였나, 나무 위에서 말싸움을 하다가 네가 왁- 소리를 질렀는데 내가 떨어질 뻔했잖아. 네가 그래 놓고, 너도 놀라서 허둥지둥 손을 뻗어 잡아줬지. 나는 아직도 그게 기억나. 정말로 죽을 것 같으면 뭔가 슬로우모션으로 지나가더라고. 아찔하고, 심장이 뛰고, 어딘가 훅- 하고 진공 상태가 되는데 네가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뻗는 거야. 손바닥은 땀에 젖어서 미끄러지는데 네 얼굴은 점점 새빨개지고, 당황스럽고, 놀라서 눈은 커다래지고, 순식간에 앞머리가 척척하게 이마에 들러붙었지.
나는 순간적으로 거기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네가 울기 직전까지 가는 모습이 너무 천천히 보이는 거야. 네가 울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처한 상황은 모두 잊어버리고 안절부절 못하게 됐어. 달래줘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양 손은 전부 뻗을 수가 없었는데. 차라리 손을 놔버릴까. 그러면 정말 네가 울어버릴 것 같았지. 명예로운 걀라르호른의 전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지만 네가 울어버리면 나는, 나는 그게 무서웠다.
너는 눈에 눈물이 고였고, 간신히 하인들이 와서 무사히 구조는 됐는데(사실 떨어졌어도 다리만 부러졌을 것 같지?), 그렇게 나무에서 내려온 너는 안 그런 척, 눈물을 훔치고는 내게 화를 냈다. 혼자 놀다가 위험하게 발을 헛디디면 어떻게 하냐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혼날 것 같아서 그랬겠지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어처구니 없어서 또 크게 울어버렸는데. 그 뒤로 찔리는 건 있어서 전보다 훨씬 얌전해졌지. 그걸 생각하면 차라리 한 번쯤은 그런 경험도 있었어야 했던 것 같다. 그 즈음에 맥길리스가 와서 그랬었나?
아, 그래. 맥길리스 얘기를 해야겠군. 사실 방금 너를 보고 왔다. 맥길리스와 연락도 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곧 온다고 했어. 너와 맥길리스는 언제 만났지? 내가 듣기로는 지난 번 회의 때 봤다고 했는데 맞나? 우리 셋이 만난 건 언제였지? 까마득하네. 사실 그렇게 아쉽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우리의 휴가는 너무 짧고, 관할 구역이 전혀 다르니까. 안부 인사를 물을 필요도 없지. 우리는 무난하게 잘 지냈고, 앞으로 얼굴 볼 일은 끊임없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나만 보면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헐뜯고, 지난번에도 부관이 있는 앞에서 하필이면……. 아니. 이 얘기도 아냐.
어쨌든, 굳이 연락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지. 앞으로 계속 볼 얼굴이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가끔 연락을 했을까? 후회는 남지만, 솔직히 역시 안 했을 것 같지. 맥길리스라면 몰라도 네가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후회하려면, 내가 조금 더 일찍 갔었다면……. 아니. 이것도 후회하진 않겠다. 너는 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했고 그건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사과할게. 마지막이 하필이면 나라서 미안해, 카르타. 너에게 거짓말을 해버려서 미안해. 맥길리스가 아니라, 내가 나라서. 네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맥길리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지. 생일파티, 프롬, 성인식의 초대장, 어느 오후의 피크닉, 그것도 모두 사과할게. 사실은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어. 그래, 이제 와서 모두 사과한다. 그 수많은 거짓말들을.
하지만 마지막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너는 끝까지 긍지를 지켰다. 너는 훌륭한 전사였고 명예로운 전투를 했으며 다만 상대의 어리석음에, 명예도 긍지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의 불명예스러운 행위에 휘말렸을 뿐이다. 그러니 울지 말았으면 해, 카르타. 나는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날의 네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보고 싶은 얼굴이었어서.
발할라에서 평화롭기를 바란다, 전우여.
"준장."
매캐한 연기가 아슬아슬하게 화재경보기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이스루기 카미체는 평정심과 암묵을 군인의 제1미덕으로 손꼽는 자였으므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조용히 창문을 열며 물었다. 이스루기는 그의 상관이자 새로운 파리드 가의 당주를 꽤나 좋아했는데 그 또한 이스루기의 이러한 신념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파리드 가의 서출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흠 잡을 데 없이 유능한 남자였다. 조심성과 추진력을 동시에 갖고 있었으며, 걀라르호른 내에서도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감사국 업무를 2년 동안의 임기에서 한 번의 실수 없이 마무리 지었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성격 탓에 일반 병사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인망도 쌓았다. 이슈와 보드윈의 후계자가 갑작스럽게 공석이 된 이상, 한 세대가 지나갈 즈음엔 파리드가 실질적으로 세븐스타즈를 이끄는 제1통수권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는 언제나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고, 넓은 식견과 혜안을 가졌으며 시간 낭비를 싫어해 무가치한 일은 하지 않았다.
요컨대, 실내에서 쓸데없이 불장난 할 사람은 아니란 소리였다.
매끄러운 원목 테이블 위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핏 들여다보면 작은 다기 안에서 타들어가는 건 몇 장의 종이었다. 종이 위에 쓰여진 유려한 필체는 이스루기의 눈에도 어쩐지 익숙한 것이었다. 이제는 채 손가락 한 마디도 남지 않은 종이가 끝에서부터 빨갛게 오그라들어 한 줌 재가 되는 광경을 맥길리스는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끌까요."
끝자락까지 타버린 종이의 불씨가 조만간 꺼질 것을 알면서도 이스루기는 물었다. 맥길리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생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의자에 기대어 요동치고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스루기."
한참이 흘렀다. 이스루기는 부동 자세로 서있다 맥길리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기 안의 모든 것이 재로 화하고, 불씨의 온기조차 남지 않아 방 안에 희미한 재의 냄새와 찬바람만이 섞이게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귀중한 것을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써버리는 걸 우리는 사치라고 하지."
"……."
"요즘 같은 시대에 종이를 태우는 건 분명히 사치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맥길리스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침잠한 눈동자는 평소의 투명함을 잃고 석양 속에서 지고 있었다. 내리 깐 눈꺼풀 밑으로 스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건 일개 부관이 알아야 할 것은 아니다.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야 이 모든 게 사치가 아니게 되지?"
"피곤하신 것 같군요. 창문 닫겠습니다. 차라도 드릴까요."
"…아. 부탁하네."
이스루기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젊은 야심가는 지쳐있었고, 기분전환용 카페인과 당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스루기 본인에겐, 평정심은 아까 써버렸으니, 암묵이 필요했다. 이스루기는 틴케이스에 쓰인 눈에 익은 유려한 필체를 무시한 채 찻잎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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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청] 3월과 사자와 조련사
2013년 K 온리전에서 판매했던 적청 소설본 공개합니다. 겨울이라 심심하네요.
전생 소재.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이 아는 사람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왕이면 평생을 살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그런 얘기는 어느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 혹은 실제로도 꽤 빈번하지만 어디까지고 남의 얘기라고 무나카타는 생각하고 있었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이미 부딪혀 굳어버린 시선을 회피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눈동자가 어디를 봐야 될지 몰라 애매하게 구른다. 아는 척을 해야 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친한 척을 해야 할까. 그 전에 자신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는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우연에 경탄할 만도 하지만 그런 감상도 나중이었으면 한다.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아 부러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려고 하면 목소리는 사슬이 되어 걸음을 묶었다.
“무나카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놀랍도록 생소하고 동시에 어제도 들었던 것 마냥 기억에 꼭 들어맞는다. 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으면 새삼스럽게 공백의 시간이 그만큼이나 되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길 일 같은 건 별로 없었기에 그 때의 기억들은 되새겨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단어는 이토록 선명하다.
“스오우.”
의도치 않았는데도 혀는 매끄럽고 유연하게 굴러 제 위치를 찾아 발음을 만든다. 약간의 오차라면 갑작스런 발성에 놀라 메여버린 목소리일까. 그 작은 흠결을 지워내기 위해 무나카타는 재빠르게 문장을 덧붙였다.
“기억력도 좋지 않은 당신이 제 이름을 기억할 줄이야.”
“…네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시비냐.”
“시비는 아닙니다. 산뜻한 재회 소감이죠. 예. 오랜만입니다.”
재회. 오랜만이라는 인사. 어쩐지 생소하기만 한 것들을 곱씹어 본다. 표면적인 관계에서 무나카타 레이시와 스오우 미코토의 관계는 고등학교 동창, 살갑게 인사할 만한 사이도 아니다. 한 명은 그림으로 그린 듯 자기주장 확고한 모범생이었고 한 명은 머리는 나쁘지 않았지만 수업을 자주 빼먹어 성적은 간신히 유급만을 피하고, 한낮에도 학교 밖을 싸돌아다니거나 밖에서는 이상한 폭력사건에 휘말렸다느니 어쩐지 뒷소문이 무성한 불량학생이었다. 극과 극. 무나카타도 아마 그 정도였다면 상대조차 하지 않고 이름이나 얼굴을 정확히 외울 일도 없었겠지만.
“재회.”
무나카타가 속으로 곱씹고 있던 단어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스오우도 한 번 중얼거린다. 저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스오우가 다시 무나카타와 시선을 맞춘다.
“그래. 재회지.”
“단어의 사용이 잘못 되었습니까?”
“아니.”
상대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그저 그런 동창이었다. 지나가다 만난다면 그저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잠깐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정도의. 이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끝맺어야 될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을 대사를 생각하고 있으려면 상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다.
“모처럼인데 바쁘지만 않으면 잠깐 대화나 하지 그래?”
“대화…?”
눈을 깜박이고, 되묻는다. 기이한 단어였다. 대화라니. 무나카타가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던 수많은 상황들 중에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선택지였다.
“바쁜가? 그럼 전화번호라든가….”
“아니. 아닙니다. 지금은 외근 이후에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상사의 허가도 있었으니까요.”
“허가? 상사? …네가?”
“또 단어의 용례가 잘못된 겁니까?”
“…아니.”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문지르던 스오우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말도 없이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따라오라는 뜻이겠지. 왠지 끌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만 그런 부분 하나하나까지 시비를 걸기엔 사실 무나카타에겐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대화도 모자라 시간이 없으면 전화번호라니. 지나가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간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한 번 더 불러낸다는 뜻이었다. 외근 이후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상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가급적이면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재회에 따르는 향수는 그럭저럭 추억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었지만 반추할 기억은 그토록 길었고 그 긴 시간 동안 감내해야 했던 것들에 대해선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스오우를 따라 들어간 카페는 회사 근처라 무나카타도 몇 번 들렀던 곳이다. 평일 오후라 한산한 실내에서 익숙한 곳인지 망설임도 없이 창가자리의, 햇살이 부드럽게 머물어 아늑한 곳으로 찾아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커피 마셨던가? 선명한 기억 속에서도 술 이외에는 음료의 취향을 가늠할 만한 것이 잡히지 않는다.
“빚진 것도 있고 내가 붙잡았으니 계산은 이쪽에서 하지. 뭘 마실 거냐?”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그건 뭐…?”
“홍차입니다. 보통의 카페에선 말차나 하다못해 녹차도 거의 팔지 않으니까.”
여전히 늙은이 입맛이구만.
중얼거려야 될 게 무에 그리 많은지 혼잣말이 잦다. 스오우가 느긋하게 걸어 카운터로 향하면 무나카타는 할 일이 없었다. 대화. 서로 주고받을 말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약간, 초조할 지도 모른다. 거북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면 자신의 꼴이 몹시 우습다고 문득 깨닫는다. 딱히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무나카타가 거북해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약간 남은 긴장이 사라지지 않아 무나카타는 직물로 짜인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로수의 가지가 물이 올라 윤기를 머금고 그 끝마다 작게 봉우리가 옹기종기 붙어있다.
벚꽃나무다.
카운터로 간 스오우가 주문을 하고 몇 분 그 앞을 서성이다 엷은 갈색으로 우러나는 투명한 유리의 티팟 세트와 머그잔을 쟁반에 받쳐 가져올 때까지 무나카타는 그 가지 끝 작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창가로 바람이 스며든다. 다정하고 온유했지만 아직 그 끝에는 서늘한 내음을 담은 바람이었다. 쭉 뻗은 벚꽃 나무에는 여린 몽우리 밑에서 엷은 붉은 빛이 보인다. 곧 있으면 그 얇고 부드러운 다섯 장의 꽃잎이 만개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눈처럼 휘날리리라. 이미 피어나고 있는 수명이 짧은 목련의 가련한 흰색과 동시에 볼 수 있을까?
무나카타 레이시는 눈부신 해그림자 아래서 그런 감상적인 생각들을 곱게 개켜 안으로 밀어두고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프린트를 꽉 눌러 쥐었다. 이렇게 바람이 불어서야 프린트를 돌리는 건 수업시간 직전이 나을 지도 모른다. 5교시의 수업자료를 막 교무실에서 받아 온 무나카타는 이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교실의 대부분은 텅텅 비어있어 주인 잃은 프린트가 부는 바람에 교실 안에 꽃잎처럼 휘날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한창의 고등학생이 유일한 자유를 헛되이 교실 안에서 보낼 리가 없었다. 가방 안에서 꺼낸 게임기를 돌려보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기 바빴다. 야, 거기 공 - 패스패스!! 우렁찬 목소리가 창밖에서 울려 무심코 고개를 창가로 돌리면 눈이, 마주친다.
매점이나 어슬렁어슬렁 다녀와서 바로 자는 줄 알았더니 그 눈에 잠기운은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생생한, 지금까지의 묵직한 나른함은 모두 가짜였던 것처럼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섣불리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이를 드러내고 목줄기를 뜯어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자. 제가 위축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무나카타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주 보았다. 스오우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떨어지고 꾸물꾸물 얼굴을 다시 엎드린 팔 사이에 밀어 넣으면 불꽃이 꺼진다.
스오우 미코토는 그랬다. 무슨 운인지, 아니면 지극히 당연한 인력 - 그러니까 폭력, 이라든가 - 이 작용한 것인지 그의 자리는 2주에 한 번인 제비뽑기를 두 번이나 한 이후에도 늘 창가의 맨 뒷자리였다. 자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수업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키는 무나카타와 비슷하지만 체격은 그가 더 좋았다. 사교성은 없어 보이지만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교실 뒷문을 뻥뻥 차며 들어오는 이상한 사투리 억양의 선배도 있고 은근히 주변에 사람은 많았다.
사자. 사자 같다고 자신은 그렇게 말했던가.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어울린다. 습도도 낮은 건조한 뙤약볕의 사파리에 드러누워 꼼짝도 않는 주어지는 먹이나 받아먹는 숫사자. 가끔 오수에서 깨어나 어슬렁어슬렁 움직이지만 그걸 보고 사자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명실상부 그 야생의 공간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고 정점에 있는 숫사자는 그만큼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다닌다. 누군가 던져주는 먹이를 느릿하게 받아먹고 뒤에 무리를 줄줄 끌고 다니는 게 어디에서 본 듯 위화감이 없어 무나카타는 슬쩍 웃으며 흘끔 다시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큼큼거리면서 다시 재빨리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리지만 그 입이 비죽이는 것이 망막의 끄트머리에 맺혀 사라지지 않는다. 읽고 있던 책의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뜻―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 아, 여기다.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하곤 한다. 끼어든 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니, 애초에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다만. 다만. 이제 겨우 봄인데 강렬한 여름의 태양 아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서있는 기분이다. 등 뒤가 따끔따끔하다. 저런 에너지가 남았다면 쉬는 시간마다 잠이나 잘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움직이고나 오지? 무어라 한 마디 할까 싶다가도 아까 무심코 웃어버린 게 맘에 걸린다. 눈이 마주쳤으니 만약 무나카타가 먼저 말을 꺼내면 저 쪽에서 먼저 아까의 일을 꺼내겠지.
그것은 무나카타에게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당신의 게으름이 사자를 닮은 것 같아 웃었다고? 20살이 넘으면 불량배 무리를 이끌고 그네들이 주는 것을 덥썩덥썩 받으며 살 것 같았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상상돼서 웃어버렸다고?
남의 태도에 관하여 무나카타가 왈가왈부 할 자격은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저 침묵하고 무시하는 수밖에.
그러나 스오우의 집요한 시선은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수업 예비종이 칠 때까지 계속 되어 무나카타는 결국 마지막으로부터 이어진 한 문장만을 간신히 읽고는 운동장에서 귀환, 체육복을 갈아입거나 화장실을 갔다 오고 수업준비를 하느라 분주해진 교실에서 프린트 배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앞에 나가 분단별로 숫자를 세어 두다 힐끔 바라 보면 스오우는 무심하게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다만 일찍 끼어드느냐 늦게 끼어드느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삶도 없다.』[각주:1]
* * *
저 남자가 언제부터 이 삶에 끼어들었는가 생각해본다. 사실은 잘못된 명제이기도 하다.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삶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그저 그 오래되고 기이한 돌덩이가 강요한 선 위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 순으로 따지자면 외려 무나카타가 스오우의 생에 끼어들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빨강과 파랑, 그 대척점에서 지독히도 맞지 않는 주제에 일곱 명의 왕 중에서도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아 비등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붉은 클랜은 무나카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아름다움도 반듯함도 날카로움도 없다. 그저 거칠고 제멋대로지만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굴러갔다.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고 획일화 된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체가 가질 수 있는 통일의 미려함은 그들에겐 결코 없었지만 모닥불이 눈앞에서 타고 있으면 무심코 그 불규칙한 불꽃의 너울을 보게 되는 것처럼 상대를 사로잡기도 했다.
“취향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겹치는 걸까요, 스오우.”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무나카타.”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깔끔한 칵테일과 독한 양주의 스트레이트는 맞지 않을 텐데도 스오우와는 종종 동선이 겹치곤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본거지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술의 종류에 대해선 해박하고 조주 능력도 나쁘지 않은 박식한 바텐더가 운영하는 바(Bar)다. 어째서 돈을 낭비하면서 밖에서 먹는 걸까. 이유는 물론 알고 있다.
가끔은 기분전환으로.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다. 무나카타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건 별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뒷골목에 위치해 작고 조용하고 그리고, 스오우 미코토가 찾는 곳이기 때문에. 사실 이 곳에 한해서는 우연이 아니다. 무나카타는 그가 이 가게에 종종 들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왜 자신이 여기에 오는지는 몰랐다. 그저 흥미가 동했고 한 번 왔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그 다음은 이미 습관이었다. 모든 일이 습관이 되는 것은 어려운 절차가 아니다. 어떤 이유든 두어 번 이상 반복되면 그 다음은 관성으로 몸에 배인다.
“오늘도, 반복입니까.”
“글쎄.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무나카타.”
치졸한 대답이다. 능글맞게 웃어 보이면서 스오우는 무나카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지긋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타닥거리며 불씨를 흩날리는 밤의 모닥불처럼 선명하다. 무나카타는 전혀 취향이 아닌 중후한 향의 와일드 터키를 단번에 들이켰다. 입에 남는 묵직한 향과 씁쓸한 맛 사이의 은근한 단 맛이 쉬이 가시질 않지만 확실히 스오우에게 어울리는 술이었고 여전히 무나카타의 입맛엔 맞지 않는 술이기도 했다.
“그럼 가죠.”
“…의외군.”
탁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으면 스오우가 무나카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뭐가 말입니까?”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점이?”
“언제나의 순서였으니까요.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걸 인정했다는 게 말이지.”
“몹쓸 습관이군요. 습관이 제일 무섭다고는 하지만.”
지갑에서 지폐를 내밀어 계산한다. 내친 김에 스오우의 것까지 계산해버리면 그것도 의외였나 막 입을 열려는 것을 무나카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었습니다.”
“더블이 너무 독했나? 자존심 세우지 말고 온더락으로 마시지 그랬어, 무나카타. 아니면 귀엽게 우유 같은 것도 좋겠지.”
“그 정도에 취하진 않습니다. 사람의 호의는 비꼴 게 아니라 감사히 받아두고 다음에 한 잔 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스오우.”
“뭐. 좋아.”
“그럼 다른 얘긴 없겠군요. 가시죠.”
먼저 앞서 나가는 남자의 등 뒤를 따라 걷는다. 밖에 나오니 어느 새 만개한 벚꽃이 살짝 이는 바람에 밤하늘에 하얗게 눈처럼 나린다. 엷고 부드러운 꽃잎이 내려앉은 그 등은 무너질 것 같지 않게 든든하고 앞서나가는 걸음은 느릿하지만 머뭇거리진 않는다. 그의 클랜은 이 등을 믿고 있겠지만 불행히도 무나카타는 그런 것에 현혹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화려하게 타오르다 해가 밝으면 어느 새 재만 남아 열기만을 흔적으로 품고 사라진다. 결코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종막은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이 등은 쉬이, 흩날리는 꽃잎에도 부스러질 것이다. 실로 평등한 위치에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축복인지 저주일지 모를 혜안이었다.
오늘의 술값은 저 생에 함부로 난입한 것에 대한 값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나카타와 스오우는 어느 한 쪽이 끝장날 때까지 부딪힐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는 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저 가게에서 스오우를 만나고, 어둠이 내린 시간을 같이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덜어내려 억지로 시간을 공유하고 그를 이해하려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을 들이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제 손으로 낼 것이기에.
스오우의 흰 셔츠 위에 내려앉은 엷은 꽃잎을 눌러 쥐면 덧없이 손 안에서 뭉그러진다. 어깨를 스치는 느낌에 스오우가 뒤를 돌아본다.
“꽃잎이 붙었기에.”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꼴이 이상하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떼어내면 가만히 지켜보던 스오우의 손이 머리를 가볍게 훑고 지나간다.
“너도, 붙었군.”
냉큼 손을 뻗었던 것과는 달리 한참의 정적 후에 스오우는 입을 열었다. 미묘한 정적이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무나카타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앞을 향해 걷는 스오우의 등 뒤를 좇았다.
언젠가 술이나, 하다못해 차 한 잔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도 그런 것을 느꼈던 걸까? 눅진하게 들러붙은 방금 전의 침묵을 생각한다. 그 한 잔을 얻어먹을 시간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감이, 흰 꽃잎처럼 선명하게 깃들어 있는 밤이었다.
* * *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스오우.”
“차는 내가 샀으니 말 정도는 네가 먼저 꺼내지 그래 무나카타.”
“절 붙잡은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것도 그에 대한 값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차는 감사히 마시겠지만 이쪽에서 먼저 할 얘기는 없으니 할 말이 없다면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죠.”
생각해보면, 그 오래 전에 얻어 마셔야 될 것이 있었다. 그 밤의 예감은 훌륭하게 들어맞아 계절이 세 번이나 지나도록 스오우는 빚을 갚지 못했고 무나카타의 명징한 혜안이 현실이 되며 영영 끝났다. 우연치고는 제법 잘 들어맞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무나카타가 적당히 우러난 차를 잔에 곱게 따르면 스오우는 그것을 보고만 있는다. 새까만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아 입에 대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모양이었다.
“그냥 회포를 푸는 정도, 라고 하면 안되나?”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회포 같은 게 있었습니까?”
“나름대로?”
“고등학교 시절, 딱 1년이 말입니까?”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지 스오우는 눈살을 찡그리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다. 또. 그건 기분이 나쁠 때 나타나는 스오우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고치질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고등학교 1년.”
“딱히 접점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있었어.”
“가령?”
“한 번, 옆자리였지.”
“아. 제비뽑기해서 2주 동안 같이 앉는 그거 말입니까? 1년 55주에서 방학을 제외한 40주, 그 사이에 2주?”
“그런 식으로 계산하지 말지 그래?”
“아니. 전체의 5%밖에 차지하지 않는 시간이 ‘회포’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수 있을 정도인가 싶어서.”
그 2주는 확실히 서로에겐 의외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다음의 발전이라면 글쎄. 적어도 어느 정도의 사담은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얘기가 목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무나카타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거기까지 했다간 스오우의 찡그린 미간이 아주 굳어버릴 것 같아 대신 무나카타는 손을 뻗어 스오우의 미간을 눌러 폈다.
“아직도 습관을 못 고치셨군요.”
“무슨 습관?”
“뭔가 맘에 안들 때마다 인상 찡그리는 습관 말입니다. 미간에 주름 생긴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가뜩이나 당신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니까.”
그 말에 스오우가 눈을 깜박이다 희미하게 웃는다. 불꽃의 열기에 이지러지는 아지랑이 마냥 주변이 일렁거리는 웃음은 반추하던 몇 년 전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까마득한 시절의,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도 하지 못하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스오우는 빳빳하기만 한 싸구려 시트와 때 탄 벽지,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 사이에서 밤이 시작과 혹은 끝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습관처럼 반쯤 긴장하고 있으려면 스오우의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너. 기억하고 있군.”
* * *
손에 들린 제비뽑기 종이를 들고 무나카타는 칠판 앞에 쓰여 진 책상의 위치와 자리를 맞춰 보았다. 반장이라는 명목으로 본인이 노트를 찢어 쓴 숫자였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단정한 숫자가 가리키는 대로 가방을 들고 자리를 옮긴다. 청소시간이라 복도도 요란하고 교실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책상 서랍의 교과서와 노트들을 꺼내기 싫다는 이유로 책상 째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해 시끌벅적한데 딱 사람 하나 있는 그 자리만이 조용하다. 빈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두는 인기척이 들려도 옆자리의 스오우는 그저 엎드려만 있다.
입학하고 나서 두 달이 넘도록 숙제를 걷는다든가,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 이외에 스오우와 무나카타의 대화는 전무했다. 같은 교실에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 말고는 접점이 없었다. 무나카타는 묘하게 스오우가 껄끄러웠다. 껄끄럽다기 보단 어려운 걸까? 말도 없이 과묵하기만 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을 다루는 법은 아직 몰랐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을 터였다. 스오우 미코토는 중학교 때 같이 올라온 친구들이나 몇몇 애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조용했다. 무언가 트러블이 생길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보단 마음이 편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머지 책들을 꺼내 와 내일 시간표대로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 얼추 자리를 잡은 듯 하면 교탁 앞의 담임선생님이 의례적인 몇 마디를 한 뒤 무나카타에게 눈짓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나카타는 일상이 되어버린 동작을 취한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인사소리가 경쾌하다. 고요했던 교실이 그 말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는다. 어느 새 가방을 들쳐메고 뛰쳐나간 무리가 있는가하면 다 같이 모여 어디를 갈지 정하는 무리도 있고 질리지도 않는 지 방과후에도 축구 한 판 더 하자는 소리를 하는 애들도 있다. 인사를 마친 무나카타가 자리에 앉으면 스오우가 눈을 껌벅거리며 무나카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오우.”
제비뽑기 따윈 아랑곳없이 스오우의 자리는 이번에도 창가 옆 맨 끝자리다. 제 짝이 무나카타일 줄은 몰랐던 듯 껌벅이던 눈이 무나카타를 한 번, 이제는 깨끗하게 지워진 칠판을 한 번 바라보다 다시 무나카타에게로 돌아온다.
“너일 줄은 몰랐는데.”
“불만이십니까?”
“아니. 그렇다기 보단….”
너는 모범생이잖아.
툭 튀어나온 말이 뜬금없어 무나카타는 순간 실소했다. 저만 상대가 부담스러웠던 게 아니었나 보다. 스오우의 눈에 순간 스쳐 지나간 곤혹의 기색이 무나카타의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약간 남아있는 긴장마저 우습도록 사라진다.
“제비뽑기니까. 운이지. 매번 자리가 바뀌지 않는 누구와는 달리 말야.”
“나는 그냥 이 자리가 좋은 거야.”
“나도 선호하는 자리 정도는 있어.”
“앞자리?”
“중간이 좋은데.”
딱 잘라 말한 무나카타의 대답에 스오우의 눈이 다시 깜박인다. 무언가 유쾌해진 기분이었다. 단박에 꼭짓점까지 상승해 가는 기분의 곡선이 무서울 정도다.
“모범생이라면 앞자리만을 선호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으니.”
무나카타가 스오우의 기저를 박살내는 문장을 덧붙이면 스오우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툭 한 마디 뱉는다.
“…의외네.”
어느 새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교실에서 스오우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넌 집에 안 가냐.”
“갈 거야.”
“그래. 잘 가라.”
무나카타를 뒤에 남겨두고 가방을 어깨 뒤로 든 채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려던 스오우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무나카타를 돌아본다.
“내일 보지, 무나카타.”
멋쩍게 내뱉고는 재빨리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 무나카타는 결국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의외라니. 그건 이쪽이 할 말이었다. 어느 날엔가 등 뒤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스오우 미코토의 시선에 부담스러워 숨이 죽을 것 같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제가 불편해서 그렇게 느꼈었던 것뿐이었다. 외모나 분위기에 섣불리 휘둘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도 어느 새 그런 거에 깜박 속아 넘어갔을 지도 모르지.
무나카타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뒤편, 사물함 맨 끝에 있는 작은 화분받침에서 열쇠를 꺼내들던 무나카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빈 책걸상이 주욱 열을 지어 맞춰져 있다. 지금은 주인이 떠나간 자리에서 무나카타는 가벼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내일. 스오우.”
스오우의 입에서 지난 3일 동안 의외라는 말은 총 13번 나왔다. 가끔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벌컥 열어 재낄 때, 귀찮은 상대를 대하고 조용히 그에 대한 비난을 씹어 넘길 때 혹은 수업시간에 간간히 풀어져 의자에 주욱 늘어져 버릴 때. 무나카타는 스오우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자신이 그렇게도 정도正道를 벗어난 건지 때 아닌 자아성찰을 해야만 했다.
모두가 축 쳐져 조는 늙은 역사 선생의 느릿한 말투는 무나카타도 싫었다. 복잡한 수식을 딱딱한 말투로 설명하는 수학 시간은 지루했고 젊고 의욕 넘치는 사회 선생은 그 의욕을 주체하지 못해 재미없는 농담을 치기도 했다. 적당히 요령을 부려가며 조는 것은 남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죽어도 싫은 무나카타의 자존심과 10여년의 의무교육 기간이 부여한 특기였다. 어쩐지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오전부터 저 세 과목이 주르륵 연속으로 들어 적당히 시선을 피해가며 졸고 있으려면 어느 새 스오우가 일어나 그를 관찰하고 있다.
“의외….”
“지겹지도 않냐, 그만 둬.”
피곤이 겹쳐 짜증 섞인 말투로 말끝을 잘라내면 스오우의 입이 달싹이다 닫힌다. 자신의 지금 태도가 의외, 라는 것이겠지. 타인과의 선을 긋는 존댓말은 동급생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으나 스오우의 앞에서는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단어 하나, 태도 하나에도 상대의 반응은 민감하게 변하지만 스오우는 ‘의외’라는 지긋지긋한 감상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오후수업을 기어이 빼먹은 스오우의 자리는 마지막 시간이 되도록 비어있다. 스오우 미코토가 수업을 빠지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거기에 대하여 신경 써 본 적 없었는데 빈자리는 불현듯 무나카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방은 그대로니 학교 밖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수업 시간 내내 샤프로 교과서를 툭툭 찍으며 통 집중하지 못하던 무나카타는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렬로 늘어진 복도의 화장실을 전부 뒤지고 교정, 운동장을 샅샅이 뒤져도 그림자 하나 보이질 않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면 10분의 쉬는 시간은 너무 짧아 얼마 안 가 수업종이 칠 터였다. 지금 교실에 들어가면 늦진 않을 텐데. 냉정한 사고가 그렇게 판단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교실은 4층이고 교사는 총 5층이다. 옥상까지 갔다 오는 데는 빠르면 1분도 채 걸리지 않겠지. 마지막으로 옥상에 한 번 가보자. 그렇게 생각한 무나카타는 재게 걸음을 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사람이 오가지 않아 을씨년스럽다.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차갑고 뻑뻑한 손잡이를 돌리면 그 끝에 스오우가 있었다.
“스오우.”
부르는 이름에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의 한 손에는 자연스레 담배 한 개피가 들려있다. 그가 흡연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남고에는 언제나 일찍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철부지가 많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옥상에서 이렇게 대놓고 당당하게 흡연이라니.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 기가 차 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교내 흡연은 금지입니다.”
“보통은 미성년자 얘기부터 나오지 않나?”
“어차피 학교에 흡연자는 널렸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는 무나카타에 스오우도 기가 막힌지 그저 웃고 만다.
“그래서 용건은?”
“옆자리가 계속 비어있어서 자꾸 눈치 보입니다.”
“흐응?”
“수업시작 종이 치기 전에 들어가죠, 스오우. 수업 중간에 들어가는 건 질색이고 전 수업 땡땡이 쳐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무나카타가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순간, 낭랑한 시작종이 덩그러니 옥상에 울려 퍼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나카타는 성실한 학교생활을 즐겨왔던 지라 수업 종이 울린 직후에 교실로 돌아가는 법을 몰랐다.
“이미 늦었는데.”
처음으로 일그러지는 무나카타의 표정이 내심 즐거워 스오우는 씨익 웃고는 얄밉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땡땡이 한 번도 쳐 본 적 없는 모범생이라니 이건 좀 상식적이군.”
“남의 곤란을 즐기지 마.”
“이왕 이렇게 된 거 일탈 좀 즐겨보지 그래, 무나카타? 너도 한 번 펴 볼 거냐?”
찌푸린 미간으로 퉁명스레 쏘아붙이면 외려 그게 더 재밌는지 스오우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무나카타에게 건네준다.
“적당히 남고생이라면 말이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라며?”
“교내는 흡연금지라니까요.”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연기에 눈이 맵다. 가늘게 치켜 뜬 눈으로 스오우를 보면 여전히 그 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의외란 말이 지겨우면 해보시지, 무나카타.”
깔짝깔짝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 도발이란 걸 알면서도 욱하는 치기가 올라와 무나카타는 스오우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이미 반쯤 타 재가 바닥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무나카타는 낯선 필터의 촉감을 느끼며 입에 물었다. 멋모르고 확 빨아들이면 뜨거운 연기가 목에 꽉 메이며 머리가 순간 핑 돈다. 역겨운 쓴 맛에 뱉어내려는 것을 억지로 들이마시면 잔뜩 인상 쓴 무나카타의 얼굴에 기어이 스오우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지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네, 정말.”
“이…것도, 의,외입니까?”
목이 메어오며 눈물까지 찔끔 배어 나온다. 숨을 내쉬며 겨우 연기를 내뱉으면 흰 연기가 살짝 입에서 빠져나온다.
“아니. 너다워.”
무의미하게 연소되어 필터 끝까지 다가온 불꽃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밟는다. 신경 쓰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울컥, 밀려오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시계를 확인 하면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45분. 앞으로 뭘 하지? 수업 무단결석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어 이런 때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냥 돌아다니다 선생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그건 무나카타 레이시의 이미지엔 치명적이다. 결국 꼼짝 없이 남은 시간을 스오우와 보내야 된다. 갑작스레 밀려온 황망함에 짜증 섞인 푸념을 무나카타는 뱉었다.
“전부 네 탓이다, 스오우.”
“여유를 가지라고 무나카타.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잖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말을 뱉어 놓고 무나카타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스오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고는 다시 한 대를 빼문다. 익숙하게 라이터의 톱니바퀴를 돌리면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불꽃들이 허공에서 점멸하고, 이윽고 어른거리는 불 그림자를 만들어내고는 곧 담배 끝으로 옮겨 붙는다. 종이가 조용한 불꽃에 천천히 타들어가고 흰 연기가 스오우의 숨과 함께 길게 빠져나와 흩뿌려진다.
그 모습을 무나카타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스오우의 모습은 희미한 위화감이 있긴 하지만 어딘지 전에 본 듯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과 어지러운 머리, 입에 남은 타들어가는 쓴 맛. 그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쳐오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쾌함도, 이 낯선 짜증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나머지 45분의 시간이 어딘가 익숙해 무나카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 * *
담배는, 무나카타 레이시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기호품은 아니다. 처음 입에 물었을 때의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나 태연을 가장하며 스오우의 담배를 뺏었으니 도로 뱉을 수도 없었다. 속으로 그 역겨움을 꾹꾹 눌러 삼키는 무나카타를 보며 스오우는 무리하지 말라 했으나 그 말끝에 남은 비웃음은 무나카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럭저럭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희뿌연 연기를 관찰할 정도의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주로 관찰하는 것은 스오우의 것이었지만.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종이와 잎에 옮겨 붙고 빨간 점이 되어 모든 것을 재로 환원하는 것을 지켜보다 무나카타는 창문을 열었다.
“창문 정도는 열어놓지, 스오우.”
“아. 일어났나.”
“진즉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 기분 나쁩니다.”
“그건 네 쪽의 특기 아냐?”
“…환기 정도는 해주는 배려심은 갖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말고 한 대 물지.”
“당신 건 너무 독해서 아침부터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제 거 주세요. 제복 안주머니에. 라이터는 맞은 편.”
“라이터는 필요 없잖아.”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해도 한 달에 한 갑이나 새로 살까말까. 비닐 포장된 부분을 제외하면 구겨진 곳은 없지만 모서리가 닳아 종이가 부드럽게 일어난 케이스의 뚜껑을 연다. 안경이 없어 찡그린 눈으로 담배를 빼물면 스오우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갖다 댄다. 끝을 맞대고 빨아들이면 조금씩 옮겨 붙는 열.
밀려오는 바람에 하늘 위로 곧게 피어오르던 연기의 모양이 하늘하늘 흩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까지 정상궤도로 진입하지 못한 컨디션에 한 모금 빨아 뱉으려면 속이 울렁거린다. 연기가 눈으로 들어와 따끔거려 무나카타는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주변을 더듬었다. 잔뜩 더러워져 찝찝함에 그나마 두께가 있는 부드러운 시트를 걷어 던져 놓은 지라 빳빳하고 거친 싸구려 린넨 커버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한참을 더듬어도 일관된 시트의 감촉과 침대헤드의 윤곽뿐, 무나카타의 안경은 어디에도 없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면 제 물건은 영 엉뚱한 사람의 얼굴에 가서 얹어져 있었다.
“주세요, 스오우.”
“…생각보다 어지럽군.”
“그러니까 주시죠. 인상까지 쓰면서 굳이 남의 안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봐봐, 또.”
무나카타는 손을 뻗어 스오우의 스오우의 찡그린 미간을 눌러 폈다. 스오우 미코토의 의중을 표정으로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즉각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게 저 버릇이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스오우는 인상을 찡그렸는데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 오른쪽 눈썹의 끝이 왼쪽보다 아주 미세하게 높이 올라간다.
갑자기 얼굴에 닿은 손에 안경을 쓴 채로 스오우가 무나카타를 돌아본다.
“당신, 뭔가 맘에 안 들 때 바로 인상 쓰는 거 모르지.”
“…….”
“가뜩이나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인데 자꾸 인상 쓰면 미간에 주름 생깁니다. 고치도록 하세요, 스오우. 안경도 이리 주시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냉큼 안경을 낚아채면 스오우는 그저 픽 웃고 만다.
“그래, 경험은 충분했으니까.”
“무슨 경험 말입니까?”
“너 같은 놈이 보는 시야가 궁금했거든.”
의외의 대답에 입 안에서 혀가 움직여야 할 모양을 잃고 헛돈다. 숨 쉬는 방법도 잊어버려 모든 기능이 정지한다. 녹 슨 뻑뻑한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는 것처럼 힘겹게, 천천히, 삐걱거리는 사고를 움직여 무나카타는 간신히 통상적인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고작 안경 하나로 그게 됩니까?”
“안경 벗고도 멀쩡하길래 시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 줄 알았는데 꽝이군.”
“안경을 벗는다고 장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무나카타가 렌즈에 남은 지문을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스오우의 티셔츠로 닦아내고 쓰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스오우는 다시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뭡니까.”
“너도 그렇지?”
“……?”
“담배.”
그렇게 말하며 스오우가 가르키는 것은 무나카타의 담배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면 스오우는 씨익 웃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나 때문에 피우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런 건, 계속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3분짜리 기호품이 가져다주는 상대적인 유대감 혹은 박탈감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허공으로 돌려 흰 연기를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시간까지 이어 올 대화가 둘 사이에 있을 리가 없었다.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3분, 180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 오기로 손에 그 가벼운 한 개비를 물었을 때.
“멍청한 선택이었죠.”
울렁거리고, 기분 나쁘고, 이상한 부유감에 머리도 어지럽고 입은 텁텁하고 쓰고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스오우 미코토의 세계를 조금, 엿 본 기분이 들었다.
“거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스오우가 웃는다. 그 얼굴에 무나카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입 안은 쓰지만 시야 대신에 숨을 나누었기에, 그걸로 만족했다.
* * *
2주는 짧았다. 약간의 일탈, 생각했던 것보단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접점은 끝이었다. 스오우의 자리는 언제나 그곳이었으나 무나카타의 자리는 한 번도 뒤편이 나온 적 없었다. 1년은 빨랐고 남은 2년 동안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드물었다. 졸업. 숫자는 무심히 변했으나 계절은 아직 바뀌지 않은 시기였다. 아직 3월조차 되지 못한 것 같은 하늘은 그저 흐렸다. 잿빛 하늘 밑 저 쪽에서 강렬한 색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고 가볍게 목례했다.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호박같이 투명한 것만이, 그 날의 감상이었다.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졸업앨범 뒤 쪽에 전화번호나 집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집도, 진학을 어디로 했는지도 모른다. 구하려면 스오우 미코토의 연락처쯤이야 쉬이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인연까진 아니라 그만두었다.
그렇게 넘겼는데, 그렇게 아득한데, 떫을 정도로 덜 여물었던 10대의 마지막의 겨울이 어째서 상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종이가 물을 천천히 흡수하여 이윽고 완전히 젖어버리듯이 기억은 머릿속을 잠식하더니 어느 순간 숨통을 틀어 막았다. 제 것인, 또한 제 것이 아닌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매일 같이 돌아갔다.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것들에 대하여 놀라기 전에 무나카타는 질식할 것 같은 기나긴 여운을 허덕이며 버텨야 했다.
붉은 왕의 자리는 아주 오랫동안 공백이었다. 몇 번의 고통스런 겨울을 반복하여 보내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제 검이 빛으로 화하는 장면이었다. 퍼져나가는 빛무리를 보며 무나카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겨우 마지막이라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구나. 겨우, 그 눈 쌓인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스런 생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저주였다. 조금만 더 빨리 기억했더라면 실보다 가늘다 하더라도 그 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같은 시야를, 같은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숨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의 관계도 그걸로 끝이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둘을 엮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왕이라는 굴레도, 아슬아슬하게 폭주하는 검도 없었다. 자유로워진 그는 뜻대로 모든 걸 할 수 있겠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이끄는 것만은 여전하여 어느 봄날, 그의 뒤를 따르는 한 무리를 상상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무나카타는 다시 굴레에서 허덕이는데도 스오우는 자유였다. 그것이 못내 분하고 화가 나 울분을 토해낸 밤도 있었다.
모든 것이 과거형인 이유는 무나카타는 또 이를 갈무리 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숨을 공유했던 시간을 한 번 더 살며 그를 보냈던 겨울이 되어 그를 보냈는데. 왜, 어째서.
어긋났던 시간들이 맞물려 돌아간다.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
“무…슨.”
“어렴풋하게 어디서 봤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워낙 잘나신 무나카타 레이시라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만두세요, 스오우.”
“이제야 전부 기억했거든. 외로웠나?”
“그만 둬.”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왕이면 얼굴이라도 자주 볼 때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저는 싫습니다.”
“계속 담배는 폈나? 그 다음은 어땠지?”
“끊었어. 그리고 괜찮았지.”
거짓말이다. 기억력은 좋았다.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스오우의 담배 상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 전이랑은 다른 브랜드였지만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아시나카학원에서의 겨울 이후엔 흡연량이 조금 늘었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를 소대원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꼭 그만큼 폈다.
“나보고 인상 쓰지 말라더니 네가 더 쓰는군, 무나카타.”
스오우의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다. 낯선 감촉에 움찔, 머리를 뒤로 빼면 날렵한 손이 안경을 뺏어 쓴다.
“안경은 그 때만큼 어지러운 거 같고.”
“추억을 곱씹고 싶으시다면 혼자 하세요, 스오우. 저는 사양합니다.”
“아니.”
어색하게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면서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 스오우는 입을 연다.
“그 말도 기억하나?”
“뭘 말입니까.”
“내가 사자라면 네가 조련사를 하겠다고. 불행히도 다시 사람이지만.”
“…….”
“이 나이가 되고서는 볼 수도 없었지. 기억은 필요 없어. 사자 비슷한 건 되어줄 테니, 어때?”
무어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숨을 죽이면 줄곧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 손이 닿는다. 공백의 끝에 맞닿은 숨이 공유되는 3월이었다.
* * *
“당신은 당신 친구 말대로 사자로 태어나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스오우.”
“지금은 사람이니 별 수 없잖아. 맘에 안 드나 무나카타?”
“글쎄요. 확실히 그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내가 사자면 너는 뭐지? 조련사?”
“그건 좀 재밌을 것 같네요. 먹이를 주면서 재롱이라도 부리게 시켜볼까.”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기대하고 있지.”
둘 다 하염없이 낄낄거렸다. 우스갯소리지만 상상은 꽤나 즐거웠었다. 그런 건 좀 진즉 기억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스오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찾아보지 뭐. 무나카타 레이시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 FIN
- 이승우, 『오래된 일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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