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6 맥가엘 전력 『はじめまして』 . 가엘리오랑 맥길리스 이름은 절대 안 나옴.
하루에도 수십 척의 화물선이 오가는 항구도시에서 외지인은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다. 몸에 걸친 게 아무것도 없거나, 열흘을 굶은 자의 행색이어도 새삼스럽지 않다. 여기는 항구도시였고, 그러나 '도시'라는 단어에선 연상할 수 없을만큼 누추했으며, 그래서 온갖 사람이 몰렸다.
그 남자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완전 무일푼인 주제에 꽤나 서글서글하게 물었다. 방 하나와 일자리 하나를 구한다고.
읽고 쓸 줄 안다. 약간의 기계 정비도 가능하고, 모빌워커를 다룰 줄 알며, 회계장부를 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앉아만 있는 일은 싫다.
나는 억지로 뻣뻣한 억양을 흉내내려는 남자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려듣다 '회계장부'라는 말에 고개를 퍼뜩 들어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는 친절하게 내가 보던, 수지타산이 하나도 맞지 않는 회계장부가 띄워진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었다.
"이것보단 잘 할 수 있는데."
염색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지 귓바퀴에 묻은 검은 얼룩을 바라보다 나는 열쇠와 장부를 내밀었다. 여기 오는 사람 중 78%는 가명을 대지만 그래도 숙박장부는 필요했다. 남자는 빈 화면을 난처하게 바라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곧 이름을 적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분더'라고 불렀다. 이 어떻게 발음을 해야할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면 친절하게 그가 발음해 주었다. 낯선 표기와 발음 속에서 이국의 단어인 것만은 알았지만 어느 대륙, 어느 곳의 이름인지는 몰랐다. 찾아보려고 했더니 컴퓨터에 깔린 소프트웨어가 너무 느려 찾을 수 없었다.
키가 큰 분더는 꽤나 쓸만한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무엇에 쫓겨 이 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놀랄 정도로 성격이 좋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아침 여섯시에 그는 나간다. 여기에서 5km 떨어진 항구까지 가 한 바퀴 돌고 온다고 했다. 돌아오면 가볍게 샤워를 하고 일을 나간다. 그가 자주 나가는 곳은 철거 작업이 한창인 구 시가지다. 모빌워커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꽤나 드물었고, 그는 도망자 신분이기에 보험을 들 필요도 없었으며, 그렇기에 평균 이하의 보수를 받으면서도 평균 이상으로 정교하게 모빌워커를 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를 소개한 직업사무소 소장에게서 들은 얘기이고, 나야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더가 보기보다 섬세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키는 나보다 두 뼘 반이 크고 염색약이 귀와 목덜미까지 묻을 정도로 도망자 생활에 익숙하진 않지만 그는 확언했던 대로 회계를 잘 다룰 줄 알았고, 술주정뱅이 손님들을 적당히 쫓아낼 줄도 알았으며, 시장에서 대충 쌓아놓고 파는 차를 세 배는 비싼 찻잎처럼 끓일 줄도 알았다.
"…큰일났네."
"무슨 문제라도, 마담?"
"내가 끓인 차는 다신 못 마실 것 같아서."
그는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다 다시 드라이버를 돌렸다. 빈 말로도 좋은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는 조만간 떠날 것 같았다. 며칠을 비가 와서 공사가 중지되었다. 그는 이틀 동안 밥도 먹지 않고 방 안에만 있었다. 죽은 듯이 잠을 잔 것 같았다. 어제는 일어나서 조금은 수척한 얼굴로,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고, 오늘은 내가 예전에 부탁한 낡아빠진 컴퓨터를 고치는 중이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안을 뜯고 부품을 사오고, 몇 가지 부품을 빼고, 넣고 하더니 주변이 점점 깨끗해지는 걸 보면 작업은 거의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방인을 너무 믿지 마세요, 마담."
그리고 아는 사람도.
마지막 나사를 꽉 돌리며 그는 말했다. 비가 오는 날, 사람은 이상하게 감성적으로 변한다. 컴퓨터를 제 위치에 올려다놓고 그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누구였지?"
"친구요."
전과는 달리 쿨링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조금은 조용하다.
"지금 숨어지내는 것도…?"
"글쎄요."
낡은 모니터에 빛이 들어오고 또렷한 텍스트가 명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 힘이 들어갔다.
"저를 쫓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반대로 제게 시간이 필요해서요."
"다시 만날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어쨌든 꼭, 다시 만나고 싶어서."
"좋은 인사말이 나오진 않겠네."
"글쎄요. 그런 것도 생각해봐야 겠네요."
그리고 며칠 안 있어 그는 떠났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덤으로 내 차는 예전보다 훨씬 맛 없어 졌고, 그 뒤로도 며칠이나 후에야 비가 그쳤으며, 컴퓨터는 전보다 훨씬 잘 돌아간다. 나는 맛없는 차를 마시다가 문득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여기서 수만 킬로미터는 떨어진 나라의 언어였는데, 어쩐지 고통스러운 단어였다.
나는 세상에 그런 이름이 존재할까 싶으면서도, 어차피 가명인데 이름이야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살다 보면 이름이 머그컵인 사람도 있겠지. 나는 이 빠진 머그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요, 마담."
햇살 속에서 상대의 머리카락이 녹을 것처럼 빛났다. 본인을 숨기지 않는 이방인은 분위기부터 다르지만 이 남자는 좀 더 특별했다. 대지에 발을 딛고 숨을 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보였다. 수 개월 전의 그도 이런 삶을 살았을까.
"그 친구를 만나면, 인사말은 정했다고 했나요."
"그랬지."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순순히 답했다. 배신한 장본인이 무슨 이유로 찾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꽤나 절박해보였고 수 개월 전에 떠난 남자도 그를 아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약간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가, 부드럽게 눈썹을 휘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정말로 흡족한 대답을 들은건지 꽤나 희열에 찬 얼굴이었다.
"아, 마담이 그의 이름에 대해서 궁금해 하길래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그는 카운터에 걸린 장식용 팻말을 가리켰다.
"그는 r을 조금 흘려쓰는 버릇이 있어서. 숙박장부의 그건 잘못 찍힌 게 아니라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r'입니다."
우연이라고 해도, 하필이면 …인 게 기분 나쁘지만.
작게 읊조리는 말이 뭐였는지, 그 밝은 얼굴에 잠깐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음영이 드리웠다 가셨다. 마지막 뒷모습을 배웅하고 남자의 인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한 번 숙박장부를 보았다. 대충 쓴 이름의 끄트머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확실히 그건 얼룩이 아니라 'r'이었다.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걸려있는 팻말이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높이로는 아마 딱 맞았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뜻을 검색했다. 그건 꽤 괜찮은 뜻이었다. 아프지 않은 단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프지 않은 채로 인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