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때때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제 얼굴을 궁금해 하기 때문이지요. 허나 저는 그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고, 당신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명합니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예전엔 그것이 제 온전한 기쁨이 되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 조금 슬플 따름입니다.
당신은 자리를 얻었더군요. 저도 익히 아는 자리입니다. 맞닿은 수평선이 아니라면 하늘과 똑같은 푸른 색의 바다가 있는 곳이지요. 온통 푸른 곳에서 상념에 젖어있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 때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당신은 그 때에도 나의 절망을 바라고 있었을까요.
당신, 나는 당신을 모두 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당신, 당신이 가면을 쓰기 전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기에 저의 동경이었지요. 곁에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가면을 쓴 이후에도, 여전히 당신은 나의 동경이었습니다. 당신의 시선이 제게 닿길 바랐던 이유는,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겐 너무나도 먼 존재였기에 가깝고 싶어졌을까요. 잠 못 드는 밤마다 당신에게 저는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몇 번이나 내칠 때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리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절망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이 주는 절망을 너무 쉽게 생각하였지요. 그리고 간절했기에, 당신이 내미는 손을 너무 쉽게 잡았습니다. 그것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요. 어리석은 나날이었습니다.
당신, 우리가 당연한 수순으로 기체를 탈 때 교관이 제일 먼저 주의를 주는 게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뒤집히는 선체 안에서 순간의 파랑에 넋을 잃지 않을 것을 배웁니다. 수면 밑과 하늘 위는 엄연히 다르지만 같은 색이기에 우리는 위로 올라갈 희망과 수심 밑으로 추락하는 절망을 가끔 착각하고 말아버립니다. 끝없이 떨어지는 고도를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말지요. 계기판이 알려주는 붉은 등은 이미 협소한 시야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균형을 잃고 바다에 처박히지 않는 것을 배웁니다.
나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그리 좋지 않아 그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파일럿은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기체를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은 종종 제게 그랬습니다. 흥분해서 앞서나간다고, 훌륭한 기술이 감정적인 연유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몇 번이고 경험했고 그렇기에 고쳤어야 했는데 자만하고야 말았습니다. 나의 실력을 너무 믿은 탓이지요. 저는 그리하여 한 번 하늘로 올라간다 믿었다가 저 깊은 수심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뒤늦은 돈오입니다. 자, 나에게서 배웠으니 이제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저는 여전히 당신이 제가 동경하던 존재로 남기를 바랍니다. 나의 평생을 그랬기에, 이제와 당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엔 가슴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꽃이 저물었어도 내년에 다시 꽃이 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이 간절함이 들렸으면 합니다. 저의 이 짧은 글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지요.
그러니 그저 당신의 절망이 내 것이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먼 옛날에 약속했던 것처럼.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나의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라고. 나의 작금의 절망이 당신이 준 것이듯 당신의 절망 또한. 허나 명확하게 말해두고 싶군요. 저는 저의 신념의 무게와 가치를 여전히 져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다시 하늘로 향합니다. 푸른 창공을 비행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입니다. 이번엔 고도를 똑바로 보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닿지 않을 편지가 너무 길었습니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행복하길 빕니다.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
금일(2017.01.31) 맥가엘 합동지를 모두 발송하였습니다. 우체국 등기 형태이며 빠르면 내일, 늦으면 내일 모레까지는 충분히 배송될 것입니다. 혹여 이번 주 안에 수령하지 못하셨거나 혹은 수량이나 기타 문제가 있으신 분은 이 페이지 댓글이나 트위터 멘션, DM 등으로 연락주세요.
그리고 미리 사과 드립니다.
오늘 출력본 확인 결과, 소설 분량 몇몇 페이지가 105% 정도 확대된 형태로 인쇄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판 및 편집 과정에서 파일 변환 도중 오류가 발생했을 것이라 추측되며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내용을 읽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아마 출력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합동지는 저 Pred(@methylpred)가 원고를 받아 편집 및 조판, 출력, 배송하는 형식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다른 멤버분들은 원본 파일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제 불찰입니다.
다만 사정상 파일을 수정한 형태로 재출력은 불가하며 교환이나 환불 역시 불가능하기에 그저 양해를 구합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끔찍한 두통과 함께 일어났다.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기상에도 불구하고 시각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으로, 북반구의 겨울에 속하는 이 계절엔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시각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치미는 울렁거림에 손을 뻗어 침대 옆의 물을 마시고 보니 입에 닿는 컵의 촉감이 평소와는 다르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낯선, 널찍한 트윈베드룸, 옆 침대에서 조용히 잠든 친우의 금발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보고 가엘리오 보드윈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또 사고쳤군.’
그렇다. 또다.
보드윈은 술에 강하다. 입에 잘 대지는 않지만 가벼운 식전주로 와인 한 병을 비울 수 있는 어머니와 젊은 시절엔 밤새 탁상공론을 하며 양주 한 병을 스트레이트로 비울 수 있던 아버지. 보드윈의 계보를 올라가면 와인 농가를 했다는 집도 있다지만 이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양친의 상태가 그러하니 보드윈이 술에 강한 것은 유전자로 증명된 명백한 사실이다. 가엘리오도 그랬어야 했으나 어디에서 유전자 배열이 꼬인 건지 술은 잘 마셔도 어딘가에서 필름이 끊겨버리는 술버릇이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안 건 사관학교 시절로, 엄격하게 주류 반입이 금지된 기숙사에 누군가 몰래 술을 가져와 치기 어린 술 게임을 했을 때 알았다. 평소엔 높으신 도련님들이라며 묘하게 벽을 치던 동기들이, 혹시 사감에게 걸려도, 무리에 세븐스타즈가 끼어 있다면 덜 혼날까 싶어 말을 걸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기뻤고 그래서 냉큼 맥길리스도 불렀다.
그게 잘못이었다. 가엘리오는 둘째치고 맥길리스는 첩의 자식이네, 양자네, 이러저러한 소문도 많은 편이었다. 운 좋은 녀석이라며 맥길리스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단 사실을 가엘리오는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다. 집요하게 술게임의 표적은 맥길리스가 되었고, 아직 열일곱. 가벼운 과실주나 몇 잔 음미해 본 경험이 있는 그에게 과할 정도의 알코올이 주어졌다. 가엘리오는 본인의 실수라고 자청하며 계속 맥길리스의 잔을 뺏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 가엘리오.’
반사적으로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하려다 가엘리오는 채 상체를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생전 처음 겪는 아찔한 숙취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가엘리오를 보고 맥길리스는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조금 쉬는 게 좋겠어. 어젠 무리했으니까.’
커튼을 쳤으나 사이로 스미는 빛은 분명 가엘리오가 일어나던 시각의 것은 아니었다.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방은 분명히 맥길리스와 같이 지내는 제 방이고, 옷은 어느 새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숨쉬기도 버거운 울렁임 속에서 가엘리오는 제가 방으로 들어와 옷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의 과정을 상기해보려 했으나 컵 가득 따라진 증류주를 억지로 들이켜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식도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잔뜩 메인 깔깔한 목으로, 어떻게 된 거야,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숨을 고르며 물으면 맥길리스는 그저 웃었다.
‘취하면 기억이 안 나는 게 술버릇인가 봐.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
교과서에서나 나올 것 같은, 참으로 맥길리스 파리드다운 대답이었다. 남의 시선도 있고, 그런 시선이 아니라도 반듯한 성정의 맥길리스를 그런 데 끼워 들였다는 죄책감에 가엘리오도 그 뒤는 더 묻지 않았다. 만취해 기억을 잃은 본인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동기들은 그 뒤로 가엘리오와 더더욱 명백하게 벽을 두었고, 가엘리오는 그것을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렇게 술을 안 마시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다짐은 언제나 부질없다.
푸른빛을 띠는 연한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가 그렇듯, 보드윈의 애주가 특성 또한 유전이라 가엘리오는 슬프게도 위스키와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맥길리스와 둘이 마시면, 마음이 편한 탓인지 꼭 이렇게 되고 만다. 매번 맥길리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맥길리스는 괜찮다고 웃어넘기지만 취객을 부축해 데려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가엘리오는 본인이 취한 다음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걸음은 걷긴 하는지, 누구에게 시비를 걸진 않는지, 아예 기절해버리는 건지 아니면 정상적으로 행동은 하는데 기억에만 없는 건지. 일어나면 몸에 특별히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안도 깨끗이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것 같으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고 해도 음주의 뒤처리가 온전히 친우의 몫으로 돌아가는 건 백 번 사죄해도 모자란 일이다.
맥길리스가 일어나기 전에 간단한 조식이라도 주문해 놓을까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방에 비치된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지금까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는데 호텔 이름을 보니 감이 온다. 자주…까지는 아니고 두어 번 와 본 곳이다. 임관 이후 작은 일탈을 하고 싶을 때마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는 빈골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무래도 전장 10km 밖에 되지 않는, 모두가 가엘리오와 맥길리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곳에선 자유로운 휴가를 즐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먹으면서 한 잔, 자리를 옮겨서 한 잔, 키핑해 둔 와인이 생각나서 한 잔, 그 다음엔…….
음. 자리를 옮긴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거기가 기점인 듯했다. 가엘리오는 새삼 사유물을 확인했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어제 입었던 셔츠는 약간 구김은 있지만 얼룩이 묻은 곳은 없다. 어두운 색의 청바지 밑단에는 약간 흙이 묻어있지만, 어젠 내내 추적추적 비가 왔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주머니의 휴대용 단말기도 멀쩡-, 멀쩡해 보였다. 어디 금 간 데도 없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밤새 배터리가 방전됐나 보다.
가엘리오는 단말기의 배터리를 충전하며 룸서비스 버튼을 눌렀다. 샌드위치, 팬케이크, 에그 베네딕트, 커피 두 잔, 맥길리스가 먹을 초콜릿이랑 또……. 여전히 숙취의 울렁임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만 먹으면 모두 해결된다는 괴상한 진리가 통하는 가엘리오에겐 위장에 뭐라도 밀어 넣는 게 이득이었다. 신나게 눌러놓고 나니 금액이 꽤 나온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의 휴가이기도 하고, 맥길리스에겐 어제 폐를 끼쳤으니 사죄하는 의미에서!
실컷 합리화를 해두고 가엘리오는 결제를 위해 단말기를 켰…는데,
“우, 왓, 잠―”
켜지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하게 쏟아지는 알람에 가엘리오는 황급히 전면 스피커를 손으로 막았다가, 후면 스피커를 막았다가, 그래도 안 되겠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슨 알람이 이렇게 우다다다 울리는지 무음으로 돌리는 와중에도 알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조용한 방 안에서 가엘리오는 슬쩍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맞은 편 침대에 옆으로 돌아 누운 친우의 등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가엘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부재중 전화가 60통에 메시지가 34건, 음성메시지가 1건. 뭐야 간밤에 전쟁이라도 났나? 테러? 가엘리오는 바닥을 기어 내려가 커튼을 들춰봤지만 밖은 멀쩡했다. 이제 막 밝아오는 사위에 바다가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하고 따뜻한 날씨라 어제 저녁의 계획대로 산책 좀 하고, 알미리아에게 줄 선물을 사서 돌아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가엘리오는 창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아서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 예순 통 중에 다섯 통은 모르는 번호, 스물세 통은 집, 서른 통은 카르타…. 뭐야. 카르타가 왜 전화 해?
가엘리오는 의아함을 가득 품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급하면 문자로 용건이나 남겨주면 좋으련만 다들 쓸모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연락요망’이라든가 ‘어디니?’라든가 ‘오빠 제일 싫어!!!’, ‘너 ㅐ체 뭐ㄹ ㅎ거 싸돌앋ㅏ녀’ …….
…거기까지 읽으니 가엘리오는 퍼뜩 몸이 굳는다. 지은 죄가 없다기엔 가엘리오는 지난 여덟 시간의 기억이 통째로 없었다. 설마 술 마시고 아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한 시간씩 떠들어 댔나?! 가엘리오는 기나긴 통화목록을 내렸지만 이쪽에서의 발신 내역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누구랑 싸움이라도? 민간인 폭행은 아무리 세븐스타즈라도 최소 영창행이다. 아니, 오히려 세븐스타즈라는 이름 하에선 가중처벌이나 안 되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제 몸 어디에도 타박상은 없고 옷은 멀끔했다.
그럼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사실 이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술주정’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은 안전 불감증이었다. 호텔은 익숙한 곳이고, 하나뿐인 친우가 옆에 있었으며, 분실한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고, 크게 상처가 나거나 다치지도 않았고, 옷엔 찢어진 부분도 없다. 이상이 있다면 배터리 전력이 다 떨어진 단말기뿐이지만, 만약 일반 통신이 아니라 위성 통신으로 카르타에게 연락 했다면 사용요금이 어마무시하게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정체를 모르는 지난밤에 대해서 가엘리오는 크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으로 연락해도 잔소리가 된통 쏟아질 것 같아서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될지, 그것만이 고민되었다.
진상을 규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맥길리스에게 묻는 것이지만.
가엘리오는 무슨 일일지 몰라도 어젯밤, 저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것 같은 친우를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저와는 달리 맥길리스는 늦게 자고 아침에는 유독 힘들어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아무리 수면을 충분히 취해도 기상 두 시간 후부터나 제대로 돌았다. 새벽 늦게 들어왔다면 일반적인 기상 시각을 넘긴 지금도 그에겐 무리가 될 것이고, 모처럼의 휴가인데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는 건 일상 최대의 비극이다.
가엘리오는 제게 남겨진 통화목록 중 가장 잔소리를 덜할 아버지를 골랐다. 마침 조식도 끝나고 한가롭게 아침 뉴스를 볼 시간이었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 줄 아는 아버지 쪽이 매를 맞더라도 훨씬 편할 것이다. 근데 아침부터 걸려온 이 모르는 번호 다섯 통은 뭘까. 스팸?
가엘리오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들리는 건 맑은 음색의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로 시작하는 수신 불가 알림음이었다. 뭐지? 가엘리오는 의아하게 여기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이도 마찬가지, 저택의 공용전화는 아예 선이 뽑혀져 있는지 먹통이었다. 가엘리오는 점점 찜찜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다음 타자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알미리아의 개인 회선은 살아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신호음은 끊기지 않았다.
“아, 알미리아. 오빠인데 어ㅈ”
「오라버니는 바보예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알미리아는 왁왁대며 온갖 욕을 다한다. 해삼! 멍게! 말미잘!!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해산물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요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알미리아는, 그러나 명백한 이유로 화가 나고 속상한 게 분명했다. 평소에는 온갖 예쁜 척은 다 해가며 집안에서도 새초롬하게 꾸미고 있을 알미리아의 얼굴은 벌써 한참을 울었는지 코와 눈시울이 아플 정도로 빨갰다.
대체 내가 뭔 짓을 저질렀길래?!
평소에야 시끄럽기 짝이 없는 귀찮은 여동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혈육인데 저 정도로 낙심해 있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법이다. 가엘리오는 제 죄도 모르면서 일단 알미리아에게 사과부터 했다.
“알미리아, 오빠가 그러려던 건 아니고, 응? 뭔지 몰라도 실수했,”
「그건 더더욱 실망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실수로 할 수가 있어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경망스러운 사람이었다니! 어떻, 어떻게 그런 무례하고 긍지 없는―!」
“어, 아니, 그럼 실수, 실수는 아니고!”
가엘리오가 재빠르게 태도를 바꾸자 알미리아가 화면 너머에서 사라졌다. 요란하게 코 푸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가 겹쳐 울린다.
아, 뭐야 진짜.
가엘리오는 시곗바늘을 돌려 어젯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지 몰라도 처음부터 기절시켜서 호텔 방에 던져 주는 게 모든 일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럴 방법은 도저히 없으니 일단 알미리아부터 잘 달래고 아버지를 바꿔달라고 하는 게 낫겠다. 가엘리오는 알미리아가 제발 빨리 진정하기를 기도했다. 한참을 훌쩍이던 알미리아가 결연한 의지를 품고 다시 화면 너머로 나타났다.
「진심이었다는 건가요?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는 거지요?」
“아? 어, 아, 그래 진짜야. 무심코, 그러니까 술 마시니까 해이해져서 그만 본심이 나와 버린 거다. 하지만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그럼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저도… 오라버니가 그러시다면…….」
그러고 나서는 또 크으응-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난다. 아직 애는 애지. 레이디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알미리아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알미리아. 그 얘긴 내가 직접 할게. 아버지와 연결해주겠어? 집에 계시지? 어머니는? 자택에 통신이 전부 끊겨 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돌고 돌아 드디어 본론이다. 별 얘기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게 이제야 슬슬 뭔가 사고를 쳤다는 긴장감이 오나보다.
「아버지는 당연히 집에 안 계시죠.」
“왜 당연히 집에 안 계셔?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거야 바보 같은 오라버니가 친 사고 때문이죠. 아마 곧 있으면 기자회견이 시작될걸요!」
“기자회견?”
기자회견이라고? 아니 기자회견은 또 뭐야? 예상치도 못한 스케일에 가엘리오의 목 뒤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숙취가 몰려오는 아찔함이, 일이 잘못 돼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절대중립의 걀라르호른, 인류를 멸망시킬 뻔한 액재전 이후 3세기 동안 걀라르호른을, 세계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을 해왔던 보드윈의 이름에 먹칠을 할 정도의 사고를 쳐버렸단 말인가. 게다가 그 불명예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수습해야 한다니, 이 이상의 수치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나?
가엘리오는 끔찍한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알미리아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 알았어. 알미리아. 오빠가 저지른 일은 오빠가 수습할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곧 들어가서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전해줘.”
「알겠어요. 맛키…도, 킁, 잘 부탁해요, 오라버니.」
“응? 어, 아. 그래. 그래야지…….”
알미리아의 마지막 말에 잊고 있던 친우가 생각났다. 제가 어제 무슨 짓을 벌였다면 맥길리스에게도 상당한 피해가 갔음은 분명했다. 제 명예뿐만 아니라 친우의 명예마저 망쳐버리다니! 까맣게 꺼진 화면을 두고도 가엘리오는 패닉 상태에 빠져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후- 하- 후- 하-
긴 심호흡 끝에 간신히 굳은 마음을 먹은 가엘리오는 포털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기자회견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분명 저에 대한 기사가 잔뜩 올라와 있을 것이고, 그럼 과거의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누구의 입을 더럽히며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단두대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눈을 질끈 감았던 가엘리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단말기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가엘리오의 푸른 눈동자에 보인 것은,
“우와아아아악!!!”
「사랑과 우정사이… 걀라르호른, 가엘리오 보드윈–맥길리스 파리드 깜짝 결혼?」
궁서체 72pt로 걸린 낯부끄러운 헤드라인이었다.
(중략)
“일단 이걸 언론사에 제보한 병사는 비밀 준수의 의무를 어겼으니 처벌이 필요할 것 같고.”
“감사하자.”
“감사는 1년에 한 번이야, 가엘리오.”
“특별 조사가 필요해. 당주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특별 조사를 시행할 수 있어.”
“사적인 이유가 들어가면 징계 받는 건 네 쪽인걸. 게다가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 것 같고, 설령 조사한다고 해도 적법절차를 거친 혼인 신고는 무효가 되지 않을걸.”
“그럼 어떻게 하라고! 나는 심신미약에 판단 능력을 잃은 상태였단 말이야!”
“세븐스타즈의 적자가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이라니 개탄스러운 현실이군.”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가엘리오는 숫제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살면서 가엘리오가 이렇게 끙끙댄 적이 있을까. 맥길리스의 기억으로는 열 살이 되던 해 이불에 실례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가루스 경은 뭐라고 하시지?”
“연락은 전혀 못했어. 기자회견은 한시라는데.”
맥길리스는 흘끗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막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애매한 시각이었다. 빗발치는 언론사들과 의문의 전화를 피해 어느 쪽이나 단말기를 꺼두긴 매한가지였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 수도 없고 빈골프로 돌아가긴 해야 할 텐데 오늘 안에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밝혀지는 것들이 많았다. 이미 둘의 휴가 내역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상태였고 어제 이곳에 올 때 탑승했던 비행기의 승무원과 인터뷰 한 방송국도 있었다 - 아 그 두 분이요? 언제나처럼 사이가 좋아보였죠. 가끔 뵌 적 있습니다. 워낙 인물이 출중하신 분들이니 잊기가 힘들죠 -. 감사국의 장교들은 노코멘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말들이 오갈 것이다.
빈골프 내부로만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된다. 하지만 걀라르호른 군 공항에 배수진을 쳤을 기자들을 피해 망망대해 빈골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맥길리스의 생각으론 도저히 무리였다. 설령 피해서 들어갈 수 있다 해도, 당장 내일부터 출근이니 시간의 망각에 구원을 바라기는 무리수였다. 오늘 안에는 결국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1차적인 답변이 되는 건 조금 후에 있을 기자회견이겠지.
기자회견이 한시라면 지금은 다들 대책회의라도 하고 있으려나. 맥길리스는 제 양부의 엄격한 얼굴을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것을 제 손 안에 넣고 굴리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이 우발적인 일에 당황해 미간을 일그러뜨렸을 것이라 생각하면 앞으로의 고행도 잊어버릴 만큼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나중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심한 맥길리스는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이대로 놔뒀다간 가엘리오는 그대로 녹아 책상에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그럼 카르타는?”
“몰라. 당연히 연락 못했지. 카르타는 널……. 아니. 그러네. 카르타에게도 연락을 해야 되는데.”
내내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턱을 괴고 진지한 얼굴로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장난 같던 패닉 상태를 지나 드디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그 방아쇠가 하필이면 카르타 이슈의 얘기가 된 것이 맥길리스는 약간 불쾌했다.
맥길리스와 가엘리오가 어영부영 해피웨딩하는 원작이랑 아무 상관 없는 얘기로 대략적인 소재와 스토리는 디님에게서 빌려왔습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끔찍한 두통과 함께 일어났다.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기상에도 불구하고 시각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으로 여기서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시각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치미는 울렁거림에 손을 뻗어 침대 옆의 물을 마시고 보니 입에 닿는 컵의 촉감이 평소와는 다르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널찍한 트윈베드룸, 옆 침대에서 조용히 잠든 친우의 금발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보고 가엘리오 보드윈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또 사고쳤군.'
그렇다. 또다.
보드윈은 술에 강하다. 입에 잘 대지는 않지만 가벼운 식전주로 와인 한 병을 비울 수 있는 어머니와 젊은 시절엔 밤새 탁상공론을 하며 양주 한 병을 스트레이트로 비울 수 있던 아버지. 보드윈의 계보를 올라가면 와인 농가를 했다는 집도 있다지만 이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양친의 상태가 그러하니 보드윈이 술에 강한 것은 유전자로 증명된 명백한 사실이다. 가엘리오도 그랬어야 했으나 어디에서 유전자 배열이 꼬인 건지 술은 잘 마셔도 어딘가에서 필름이 끊겨버리는 술버릇이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안 건 사관학교 시절로, 엄격하게 주류 반입이 금지된 기숙사에 누군가 몰래 술을 가져와 치기 어린 술 게임을 했을 때 알았다. 평소엔 세븐스타즈 도련님들이라며 묘하게 벽을 치던 동기들이, 혹시 사감에게 걸려도 세븐스타즈가 끼어 있다면 걸려도 덜 혼날까 싶어 말을 걸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기뻤고 그래서 냉큼 맥길리스도 불렀다.
그게 잘못이었다.
가엘리오는 둘째치고 맥길리스는 첩의 자식이네, 양자네, 이러저러한 소문도 많은 편이었다. 운 좋은 녀석이라며 맥길리스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단 사실을 가엘리오는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다. 집요하게 술게임의 표적은 맥길리스가 되었고, 아직 열일곱. 가벼운 과실주나 몇 잔 음미해 본 경험이 있는 그에게 과할 정도의 알콜이 주어졌다. 가엘리오는 본인의 실수라고 자청하며 계속 맥길리스의 잔을 뺏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 가엘리오.'
반사적으로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하려다 가엘리오는 채 상체를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생전 처음 겪는 아찔한 숙취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가엘리오를 보고 맥길리스는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조금 쉬는 게 좋겠어. 어젠 무리했으니까.'
커튼을 쳤으나 사이로 스미는 빛은 분명 가엘리오가 일어나던 시각의 것은 아니었다.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방은 분명히 맥길리스와 같이 지내는 제 방이고, 옷은 어느 새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숨쉬기도 버거운 울렁임 속에서 가엘리오는 제가 방으로 들어와 옷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의 과정을 상기해보려 했으나 컵 가득 따라진 증류주를 억지로 들이켜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식도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잔뜩 메인 깔깔한 목으로, 어떻게 된 거야,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숨을 고르며 물으면 맥길리스는 그저 웃었다.
'취하면 기억이 안 나는 게 술버릇인가 봐, 가엘리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
교과서에서나 나올 것 같은, 참으로 맥길리스 파리드다운 대답이었다. 남의 시선도 있고, 그런 시선이 아니라도 반듯한 성정의 맥길리스를 그런 데 끼어들였다는 죄책감에 가엘리오도 그 뒤는 더 묻지 않았다. 만취해 기억을 잃은 본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동기들은 그 뒤로 가엘리오와 더더욱 명백하게 벽을 두었고, 가엘리오는 그것을 뼈저린 교훈 삼아 다시는 그렇게 술을 안 마시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다짐은 언제나 부질없다.
푸른 빛을 띄는 연한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그렇듯, 보드윈의 애주가 특성 또한 유전이라 가엘리오는 슬프게도 위스키와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맥길리스와 둘이 마시면, 마음이 편한 탓인지 꼭 이렇게 되고 만다. 매번 맥길리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맥길리스는 괜찮다고 웃어 넘기지만 취객을 부축해 데려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가엘리오는 본인이 취한 다음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걸음은 걷긴 하는지, 누구에게 시비를 걸진 않는지, 아예 기절해버리는 건지 아니면 정상적으로 행동은 하는데 기억에만 없는 건지. 일어나면 몸에 특별히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안도 깨끗이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것 같으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고 해도 음주의 뒤처리가 온전히 친우의 몫으로 돌아가는 건 백 번 사죄해도 모자른 일이다.
맥길리스가 일어나기 전에 간단한 조식이라도 주문해 놓을까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방에 비치된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지금까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는데 호텔 이름을 보니 감이 온다. 자주…까지는 아니고 두어 번 와 본 곳이다. 임관 이후 작은 일탈을 하고 싶을 때마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는 빈골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무래도 전장 10km 밖에 되지 않는, 모두가 가엘리오와 맥길리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곳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먹으면서 한 잔, 자리를 옮겨서 한 잔, 키핑해 둔 와인이 생각나서 한 잔, 그 다음엔…….
음. 자리를 옮긴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거기가 기점인 모양이다. 가엘리오는 새삼 사유물을 확인했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어제 입었던 셔츠는 약간 구김은 있지만 얼룩이 묻은 곳은 없다. 어두운 색의 청바지 밑단에는 약간 흙이 묻어있지만, 어젠 내내 추적추적 비가 왔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주머니의 휴대용 단말기도 멀쩡-, 멀쩡해 보였다. 어디 금 간 데도 없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밤새 배터리가 방전됐나 보다.
가엘리오는 단말기의 배터리를 충전하며 룸서비스 버튼을 눌렀다. 샌드위치, 팬케이크, 에그 베네딕트, 커피 두 잔, 맥길리스가 먹을 초콜릿이랑 또……. 여전히 숙취의 울렁임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만 먹으면 모두 해결된다는 괴상한 진리가 통하는 가엘리오에겐 오히려 위장에 뭐라도 밀어 넣는 게 이득이었다. 신나게 눌러놓고 나니 금액이 꽤 나온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의 휴가이기도 하고, 맥길리스에겐 어제 폐를 끼쳤으니 사죄하는 의미에서!
실컷 합리화를 해두고 가엘리오는 결제를 위해 단말기를 켰…는데,
“우, 왓, 잠―”
켜지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하게 쏟아지는 알람에 가엘리오는 황급히 전면 스피커를 손으로 막았다가, 후면 스피커를 막았다가, 그래도 안되겠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슨 알람이 이렇게 우다다다 울리는지 무음으로 돌리는 와중에도 알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조용한 방 안에서 가엘리오는 슬쩍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맞은 편 침대에 옆으로 돌아 누운 친우의 등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가엘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부재중 전화가 60통에 메시지가 34건, 음성메시지가 1건. 뭐야 간밤에 전쟁이라도 났나? 테러? 가엘리오는 바닥을 기어 내려가 커튼을 들춰봤지만 밖은 멀쩡했다. 이제 막 밝아오는 사위에 바다가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하고 따뜻한 날씨라 어제 저녁의 계획대로 산책 좀 하고, 알미리아에게 줄 선물을 사서 돌아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가엘리오는 창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아서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 예순 통 중에 다섯 통은 모르는 번호, 스물세 통은 집, 서른 통은 카르타…. 뭐야. 카르타가 왜 전화 해?
가엘리오는 의아함을 가득 품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급하면 문자로 용건이나 남겨주면 좋으련만 다들 쓸모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연락요망’이라든가 ‘어디니?’라든가 ‘오빠 제일 싫어!!!’, ‘너 ㅐ체 뭐ㄹ ㅎ거 싸돌앋ㅏ녀’, …….
…거기까지 읽으니 가엘리오는 퍼뜩 몸이 굳는다. 지은 죄가 없다기엔 가엘리오는 지난 여덟 시간의 기억이 통째로 없었다. 설마 술 마시고 아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한 시간씩 떠들어 댔나?! 가엘리오는 기나긴 통화목록을 내렸지만 이쪽에서의 발신 내역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누구랑 싸움이라도? 민간인 폭행은 아무리 세븐스타즈라도 최소 영창행이다. 아니, 오히려 세븐스타즈라는 이름 하에선 가중처벌이나 안되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제 몸 어디에도 타박상은 없고 옷은 멀끔했다.
그럼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사실 이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술주정’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은 안전 불감증이었다. 호텔은 익숙한 곳이고, 하나뿐인 친우가 옆에 있었으며, 분실한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고, 크게 상처가 나거나 다치지도 않았고, 옷엔 찢어진 부분도 없다. 이상이 있다면 배터리 전력이 다 떨어진 단말기뿐이지만, 만약 일반 통신이 아니라 위성 통신으로 카르타에게 연락 했다면 사용요금이 어마무시하게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정체를 모르는 지난밤에 대해서 가엘리오는 크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으로 연락해도 잔소리가 된통 쏟아질 것 같아서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될지, 그것만이 고민되었다.
사실 진상을 규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맥길리스에게 묻는 것이지만.
가엘리오는 무슨 일일지 몰라도 어젯밤, 저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것 같은 친우를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저와는 달리 맥길리스는 늦게 자고 아침에는 유독 힘들어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명석한 뇌는 아무리 수면을 충분히 취해도 기상 두 시간 후부터나 제대로 돌았다. 새벽 늦게 들어왔다면 일반적인 기상 시각을 넘긴 지금도 그에겐 무리가 될 것이고, 모처럼의 휴일에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는 건 일상 최대의 비극이다.
가엘리오는 제게 남겨진 통화목록 중 가장 잔소리를 덜할 아버지를 골랐다. 마침 조식도 끝나고 한가롭게 아침 뉴스를 볼 시간이었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 줄 아는 아버지 쪽이 매를 맞더라도 훨씬 편할 것이다. 근데 아침부터 걸려온 이 모르는 번호 다섯 통은 뭘까. 스팸인가?
가엘리오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들리는 건 맑은 음색의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로 시작하는 수신 불가 알림음이었다. 뭐지? 가엘리오는 의아하게 여기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이도 마찬가지, 저택의 공용전화는 아예 선이 뽑혀져 있는지 먹통이었다. 가엘리오는 점점 찜찜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다음 타자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알미리아의 개인 회선은 살아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신호음은 끊기지 않았다.
“아, 알미리아. 오빠인데 어ㅈ”
「오빤 바보에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알미리아는 왁왁대며 온갖 욕을 다한다. 해삼! 멍게! 말미잘!!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해산물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요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알미리아는, 그러나 명백한 이유로 화가 나고 속상한 게 분명했다. 평소에는 온갖 예쁜 척은 다 해가며 집안에서도 새초롬하게 꾸미고 있을 알미리아의 얼굴은 벌써 한참을 울었는지 코와 눈시울이 아플 정도로 빨갰다.
대체 내가 뭔 짓을 저질렀길래?!
평소에야 시끄럽기 짝이 없는 귀찮은 여동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혈육인데 저 정도로 낙심해 있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법이다. 가엘리오는 제 죄도 모르면서 일단 알미리아에게 사과부터 했다.
“알미리아, 오빠가 그러려던 건 아니고, 응? 뭔지 몰라도 실수했,”
「그건 더더욱 실망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실수로 할 수가 있어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경망스러운 사람이었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런 무례하고 긍지 없는―!」
“어, 아니, 그럼 실수, 실수는 아니고!”
가엘리오가 빠르게 태도를 바꾸자 알미리아가 화면 너머에서 사라졌다. 요란하게 코푸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가 겹쳐 울린다. 아, 뭐야 진짜.
가엘리오는 시곗바늘을 돌려 어젯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지 몰라도 처음부터 기절시켜서 호텔 방에 던져 주는 게 모든 일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럴 방법은 도저히 없으니 일단 알미리아부터 잘 달래고 아버지를 바꿔달라고 하는 게 낫겠다. 가엘리오는 알미리아가 제발 빨리 진정하기를 기도했다. 한참을 훌쩍이던 알미리아가 결연한 의지를 품고 다시 화면 너머로 나타났다.
「진심이었다는 건가요?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는 거지요?」
“아? 어, 아, 그래 진짜야. 무심코, 그러니까 술 마시니까 해이해져서 그만 본심이 나와 버린 거다. 하지만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그럼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저도… 오라버니가 그러시다면…….」
그러고 나서는 또 크으응-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난다. 아직 애는 애지. 레이디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알미리아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알미리아. 그 얘긴 내가 직접 할게. 아버지와 연결해주겠어? 집에 계시지? 어머니는? 자택에 통신이 전부 끊겨 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돌고 돌아 드디어 본론이다. 별 얘기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게 이제야 슬슬 뭔가 사고를 쳤다는 긴장감이 오나보다.
「아버지요? 당연히 집에 안 계시죠.」
“왜 당연히 집에 안 계셔?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거야 바보 같은 오라버니가 친 사고 때문이죠. 아마 곧 있으면 기자회견이 시작될 텐데.」
“기자회견?”
기자회견이라고? 아니 기자회견은 또 뭐야? 예상치도 못한 스케일에 가엘리오의 목 뒤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숙취가 몰려오는 아찔함이, 일이 잘못 돼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절대중립의 걀라르호른, 인류를 멸망시킬 뻔한 액재전 이후 3세기 동안 걀라르호른을, 세계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을 해왔던 보드윈의 이름에 먹칠을 할 정도의 사고를 쳐버렸단 말인가. 게다가 그 불명예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수습해야 한다니, 이 이상의 수치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나?
가엘리오는 끔찍한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알미리아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 알았어. 알미리아. 오빠가 저지른 일은 오빠가 수습할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곧 들어가서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전해줘.”
「알겠어요. 맛키…도 잘 부탁해요, 오라버니.」
“응? 어, 아. 그래. 그래야지…….”
알미리아의 마지막 말에 잊고 있던 친우가 생각났다. 제가 어제 무슨 짓을 벌였다면 맥길리스에게도 상당한 피해가 갔음은 분명했다. 제 명예뿐만 아니라 친우의 명예마저 망쳐버리다니! 까맣게 꺼진 화면을 두고도 가엘리오는 패닉 상태에 빠져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후- 하- 후- 하-
긴 심호흡 끝에 간신히 굳은 마음을 먹은 가엘리오는 포털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기자회견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분명 저에 대한 기사가 잔뜩 올라와 있을 것이고, 그럼 과거의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누구의 입을 더럽히며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단두대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눈을 질끈 감았던 가엘리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단말기 화면을 응시했다.
이후의 이야기. 가엘리오는 공식적으로 화장되었고 맥길리스는 그의 장례식엔 참가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전부 날조가 되었습니다.
궤도 추적
맥길리스 파리드가 보드윈 가를 방문하는 빈도는 정확하진 않지만 그가 자의로 파리드 가에 들어가는 일보다는 잦았다. 맥길리스는 처음엔 그것이 가엘리오의 초대에 마지못해 응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같은 화목함을 자랑하는 보드윈이 가족행사를 치르고 나면 으레 찍는 단체사진을 아홉 번쯤 같이 찍은 뒤 그런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열 살 때 여름 휴가인가? 아, 이건 졸업 기념 스키캠프. 이건 처음으로 카운트다운에 성공한 해다. 보이지, 뒤에 시계? …미안한데, 사실 난 그 전에도 카운트다운 봤어. 거…짓말. 진짜? 어떻게 나를 빼놓고 그럴 수가 있어? 넌 지금도 일찍 자는 타입이니까 너무 억울해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그으래애. 그건 일단 넘어가고, 이건….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돌봐주던 유모가 아주 집으로 간대서 네가 울고불고 매달리던 크리스마스 아냐 가엘리오? 아, 음……. 기억력 좋구나, 맥길리스. 그런 건 좀 잊어줘도 좋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맥길리스는 이 집을 '도피처'로 명명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래봤자 달라진 건, 그 전까지는 가엘리오를 통해 이미지 파일 한 장을 받았다면 그 뒤로는 가엘리오와 똑같은 사진전용 슬라이드 프레임을 선물 받고 연도와 날짜별로 정리된 폴더를 갖게 되었다는 점 뿐이었다.
육아 - 뿐만 아니라 사실 맥길리스와 관련된 모든 것 - 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이즈나리오 대신 맥길리스의 성장기록은 그리하여 보드윈이 선물한 저 프레임 속에 쌓이게 되었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란다. 어리고 가는 팔다리가 근육과 뼈의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발그레하고 통통한 젖빛 뺨도 각자의 색으로 여물어갔다. 이마, 단단한 콧대, 깊어지는 눈매, 다부진 입매, 턱선, 어깨, 팔, 다리. 시간의 흐름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늘지고 약간은 수척하며, 배타적인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냉막한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부드럽게 웃을 줄 알게 되었고, 어딘가 뚱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소년은 호쾌하게 웃게 되었다. 어색한 거리감으로 나란히 서있던 사진 속에서 피사체들의 간격은 해가 갈수록 가까워졌다. 처음엔 한 명이 눈에 띄게 컸으나 사관학교의 제복을 입는 시점에선 키가 엇비슷해졌고 임관 무렵엔 미세하지만 작았던 한 쪽이 더 커졌다.
서로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했다. 가엘리오는 그의 하나뿐인 친우에 대하여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약간의 사교적인 거짓말은 할 줄 알았지만 악의적으로 상대를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거짓 칭찬을 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유능하니까요, 맥길리스는.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서류를 검토하는데 정확함도 빠질 수가 없답니다. 네. 그에게도 슈발베가 필요하죠. 지휘관기 그 이상으로, 일반적인 기체로는 그의 반사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요. 그만한 인재를 단순한 사무직으로 썩히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
입에 발린 말을 줄기차게 해대면서도 그 안에 약간의 진실성을 담는 것은 정말로 가엘리오만이 할 수 있던 특기였다. 아주 내성적이진 않았으나 사람과 부대끼는 걸 즐기지 않았던 그의 어린시절을 맥길리스가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도 이젠 아무도 믿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너에 관한 말은 거짓이 아닌걸, 맥길리스."
정말이야. 걀라르호른에서 가장 잘생긴 20대 장교 님.
아아. 저건 뭐였더라. 걀라르호른 내 2·30대 여성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특집 앙케트랬나.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던 잡지를 들고 와 맥길리스의 앞에 그 페이지를 쫙 펴 내밀던 가엘리오는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그 후로 가엘리오는 잊을만하면 그 얘길 들먹이곤 했다. 정작 그 앙케트의 상위권에 본인 이름이 있었던 건 기억도 못할 거면서.
긴 한숨을 뱉으면서 맥길리스는 고개를 들어 눈을 두어번 깜박이고, 스트레칭을 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사위가 어둑했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알미리아가 고개를 내민다. 그 인기척에 집중력이 흐려졌던 것인지, 마침 그녀가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맛키, 저녁 안 먹어? 아까부터 불렀는데."
"알미리아."
"준비 다 됐다고 내려오래."
"미안."
맥길리스 파리드가 보드윈 가를 방문하는 빈도는 정확하진 않지만 그가 자의로 파리드 가에 들어가는 일보다는 잦았다. 이즈나리오가 없어도 그 집은 언제나 껄끄러운 모양이고, 따라서 가엘리오가 없는 보드윈 가는 여전히 그의 도피처로 남았다.
샹들리에의 은은한 불빛, 활기찬 공기, 왁자한 사람의 소리들은 모두 과거의 영광으로 스러져 지금은 적막하기 짝이 없는 저택. 그래도 회복이 빨랐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고, 이 걀라르호른이 역사의 패자가 될 때까지 영원히 재기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핼쑥하게 내려앉았던 구성원의 면면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당장 알미리아의 얼굴도 그랬다. 말수는 줄었고 예전만큼 말괄량이는 아니었으나 대신 얼굴에는 성숙함이 깃들었다. 보드윈의 유전자를 증명하는 것처럼 점점 성숙해지는 알미리아의 얼굴 어딘가에선 희미하게 가엘리오의 어린시절이 보이기도 했다.
맥길리스는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사진들을 기억했다. 그의 오라비는 열셋부터 급격하게 키가 컸다. 얼굴의 젖살이 빠지기 시작한 건 그 다음해였고 지금의 얼굴에 가깝게 된 건 열일곱이었다. 아마 알미리아도 그 즈음부터 본인의 얼굴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맥길리스는 제 자리에 앉았다.
본디 가엘리오가 앉았어야 할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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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길리스 파리드는 알미리아 보드윈의 약혼자이자 파리드의 당주로서, 그리고 가엘리오 보드윈의 오랜 친우였던 과거에 힘입어 보드윈 가 내에서 가엘리오가 마땅히 해야할 것을 대신하곤 했다. 그의 집에 가고, 그의 방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고, 그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묵인되었다. 그것들은 아직까진 가엘리오 보드윈의 빈 자리였으나 이윽고 맥길리스 파리드의 자리가 될 것이다. 꽤나 흡족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맥길리스는 어딘지 부족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 때 양아버지의 것이었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잔을 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서류를 보며 든 잔에선 으레 생각한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라도, 준장?"
맥길리스의 의아함을 기민하게 눈치 챈 것은 새로 들어온 부관이다. 맥길리스의 시선은 무심코 그의 머리 끝을 향했다가 겨우 눈높이로 내려왔다. 이스루기 카미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감사국에서도 손 꼽히던 유능한 인재였다. 물론 상관의 커피를 타는 것도. 맥길리스의 책상 위에 있던 수 종의 틴케이스를 모두 치우고 로스팅 된 커피 원두를 올려둔 것도 그였다. 물론 맥길리스가 지시한 것이다. 맥길리스는 가만히 잔 안의 내용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휴식을 갖지. 이 서류는 나중에 보내줄테니 나가보도록 해."
깍듯한 경례와 함께 뒤돌아 나가는 이스루기의 뒷모습을 보며 맥길리스는 서랍을 열어 초콜릿을 하나 꺼냈다. 금박의 포장지를 벗겨내며 입 안으로 밀어넣으려니 문득 서랍의 바닥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집무실의 첫 번째 서랍에는 늘 작은 초콜릿이 한 봉지 이상 들어있었고,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초콜릿을 제가 사다 넣은 적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맥길리스는 바스락거리는 빈 포장지를 작게 접어 구기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렇군.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다. 그걸 채워넣었던 건――. 그렇게 생각하니 입에 들어있는 초콜릿도 익숙한 맛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입 안에 엉기는 단 맛이 텁텁하기 짝이 없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셔도 생각했던 맛이 아닌지라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다. 새로운 자리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일까. 가끔 생각지도 않게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있곤 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함에 희미하게 밀려오는 초조함이 있었다. 죄책감? 그런 건 아니었다. 솔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봐도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상상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천장이 높고 푸른 카펫이 깔려있던 커다란 집무실은 맥길리스의 것이 되었다. 금빛 늑대의 휘장 밑에 앉게 된 것도 맥길리스가 되었고, 영면한 친우는 상상 이상으로 감상적인 정경을 환기시켰다. 그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도 이 이질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맥길리스는 흘끔 옆을 쳐다보았다. 예전 맥길리스의 집무실 한쪽에는 소파가 놓여있었다. 그 소파는 방의 주인인 맥길리스보다 가엘리오가 더 자주 썼다. 가엘리오는 하루의 스케줄이 기계처럼 정확한 사람이었다. 성실하다는 건 아니고, 쉬는 시간을 잘 지켰다는 얘기다. 특히 티 타임을. 그는 때가 되면 잘 우러난 차를 들고 와서 맥길리스의 책상 위에 내밀었고, 본인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누가 보기에 좋은 꼴은 아닌데, 가엘리오.
맥길리스가 타박을 주면 가엘리오는 소파 팔걸이에 누인 목을 뒤로 젖히고 맥길리스를 보며 답하곤 했다. 언제나 정갈한 머리카락이 중력을 못 이기고 흐트러져 쏟아져 내렸다. 살짝 처진 눈꼬리가 거꾸로 맥길리스를 훑었다.
너는 싫어하지 않잖아.
그렇게 단언하는 가엘리오에게 무얼 어쩌겠는가. 서류 작업이 많다느니, 감사기간은 질색이라느니, 책상에 앉아만 있다간 뱃살이 늘어날 것 같다며 투덜거리면 맥길리스는 그 맞은 편으로 옮겨가 어쩔 수 없이 강제적인 휴식을 가져야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드윈 도련님을 버릇없는 근무태만자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저도 어울리는 척은 해야지.
긴 팔다리가 소파에서 늘어져 땅에 닿는 것도 가엘리오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다음엔 무얼 했더라. 그 뒤가 흐렸다. 거기에 앉아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낭비되었다는 사실만이 기억났다.
맥길리스는 마른 세수를 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 탓이다. 지금은 이 넓은 방엔 소파는커녕, 어디에도 타인이 앉을 곳은 없다. 철저하게 상대에게 계급을 상기시키는 방식이다. 이 곳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그들은 서있거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쉬고 싶군."
맥길리스는 문득 본인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소파가 그리워졌다. 그 소파의 색이나 모양도 기억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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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맥길리스의 입맛은 조금 더 변했다. 초콜릿의 브랜드를 바꿨지만 어느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커피는 어디 빠지는 데 없이 완벽했지만 언제나 무언가 어색했다. 보다 말수가 적고, 키가 작은 부관에도 맥길리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함을 잔뜩 안고 퇴근하는 나날이었다. 맥길리스는 자연스럽게 그의 도피처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아무도 없는, 완전하게 그를 위해 준비된 자택보다 남의 집이 익숙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곳은 도피처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맥길리스가 보드윈 가에 출입하는 일이 전보다 훨씬 잦아진 것을 남들은 이상하게 보곤 했지만 한편으론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는 정말 오래된 친우였고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는 게 훨씬 익숙했다. 죽은 친우를 그토록 오래 애도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맥길리스는 속으로 코웃음쳤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런 이미지인 게 나았으니 내버려뒀다. 가엘리오의 방은 주인이 없어도 늘 청결하게 유지되었다. 그의 방엔 여전히 세 송이의 흰 칼라꽃이 시드는 일 없이 놓여있다.
아무도 없는 빈 방, 가엘리오가 앉던 의자에 맥길리스가 앉는 것도 당연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고 의아하게 여기는 이도 없었다. 그의 침대에서 자고 가는 일은 없었지만 맥길리스를 위한 방 또한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보드윈의 하녀들은 특별히 요구가 없어도 맥길리스에게 적당한 다과를 가져다 주었다. 다만 여기서는 늘 그렇듯 커피가 아니라 수색이 엷은 홍차였다. 적당히 우러나 투명한 오렌지빛을 띄는 차를 음미하면서 맥길리스는 한 때 여기에 앉아있던 남자를 생각했다.
질리지도 않게 사진을 보고, 그의 방에 놓인 사유물을 훑어본다. 먼지 한 톨 얹혀지는 일 없고,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방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맥길리스가 기억하던 온기는 사라지고 있었다.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맥길리스는 이 방의 문이 잠기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맥길리스가 알미리아와 결혼할 즈음이 되면 그럴지도 몰랐다. 꽃병엔 아무것도 놓이지 않고, 이 모든 사유물에 먼지가 쌓이고 그의 얼굴은 흐릿해져 사진을 보아도 낯설어질 것이다.
목덜미를 스치는 스산함에 맥길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발코니로 향하는 하나뿐인 창은 분명 굳게 닫혀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맥길리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 창 옆에는 맥길리스와 가엘리오가 앉아 담소하곤 했던 작은 테이블이 있다. 그 날, 이 테이블에 앉아 가엘리오를 생각했었다. 무채색의 상복마저도 빛나게 어울렸던 그를 보며 그를 이해하려고 하다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맥길리스는 어쩐지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었다는 사실만 있을 뿐, 구체적인 이미지가 흐렸다.
맥길리스는 황급히 앨범을 펼쳤다. 수십 장의 사진 속에서 성장하는 가엘리오가 보였다. 아홉 살, 열 살, 열 한 살, 열 세살, 기초학교의 입학식과 졸업식, 열 일곱 살에 갔던 휴가, 둘이 갔던 캠핑, 연말 파티, 카운트다운 불꽃, 사관학교 제복, 첫 임관.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그 다음이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여기 있었다. 있는데, 그만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어색함과 이질의 원인이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아마. 맥길리스 파리드를 맥길리스라고 부르는 건 가엘리오 뿐이었다.
"가엘리오?"
맥길리스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만큼은 아직 낯설지 않았으나 당연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화답이 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서 그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을 맥길리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까지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다니. 저녁이 된 방에 분명 전등은 켜있었으나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다. 굳게 잠긴 창에선 여전히 찬 바람이 스몄다.
필사적으로 그를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저를 부르던 목소리를, 그 남자는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이해가 필요했다. 맥길리스는 한 번도 그를 이해하려 해 본 적 없으나 그는 맥길리스를 이해하고 있었다. 맥길리스에게 무의미한 감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랍에 초콜릿을 넣어주는 배려도 있었다.
사무치게 명징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애정, 우정, 신뢰에 대하여 갑작스럽게 맥길리스는 확신을 잃었다. 모든 기억이 혼란스러운 탓이다. 망각은 이토록 빨랐고, 그래서 맥길리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제가 여기 앉아서 그를 생각했던 것, 그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었나.
"……가엘리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만은 분명하게 실체가 있었으나 답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밀도 높은 공허만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