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인어공주 맥가엘
인어인 가에가 보고 싶어서 짧게 맥가엘 현대패러렐...누가 써줬으면 좋겠다
푸른 빛의 너울을 좇고 있노라면 긴 꼬리의 그림자가 시선 밖에서 스쳤다 사라졌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광원을 제외하곤 수족관은 칠흑이라 그 자체로 혹은 우주 같았고 간간히 비추는 빛은 그래서 각기 다른 별 같았다. 우리는 때때로 그 우주에서 아슬아슬한 시간을 즐겼다. 아름답게 유영하는 푸른 빛꼬리를 쫓아가면 그 곳에 네가 있었다. 지상에 발 붙이고도 우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자유분방함이 너였다. 그러나 방랑자의 고독은 네게 없었다. 네겐 언제나 돌아갈 대지가 있는 거 같았고 실제로 그러했으며 그렇기에 어디론가 사라져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했는가. 나에게 대지는 없었고 우주는 자유로웠지만 불안정함 그 자체였다. 간혹 나는 맨몸으로 우주 한복판에 내쳐질까 두려웠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나도 잘 아는 어둠이, 숨을 내쉬는 대로 그대로 내 육신을 얼어붙게 할 것이었고 부서지기 전까지 한낱 데브리가 되어 떠돌 비참함에 몸서리쳐지는 날이 있었다. 너는 그런 두려움 없이 용맹하게 우주를 누빈다. 사지가 달린 커다란 고철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춤추며, 인어 같은 꼬리가――…
"――――"
끄으으으응, 하고 앓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바짝 마른 입을 입술로 억지로 축이며 맥길리스는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을 꺼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지옥이다. 기억도 안 나는 찝찝한 꿈을 꾸고 난 뒤엔 더더욱. 간밤에 보일러가 꺼진건가. 이불을 걷어내니 한기에 몸서리가 처진다. 역시 내게 규칙적인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아. 조금 더 게으른 인생을 살고 싶다. 회사를 차릴까. 아니 그것도 출근해야 되잖아. 역시 건물주가 좋겠어. 건물을 사자. 무의미한 소망을 되새기며 맥길리스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침이 싫었다. 일어나면 일상생활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저혈압이라는 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주 골을 때리는 게 영 기분이 더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지각을 한 적은 없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인 현대 샐러리맨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누가 알기나 하나. 맥길리스는 정말 규칙적인 생활이 싫은 사람이었다. 취미가 뭐에요? 휴일엔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물으면 성심성의껏 독서와 클래식 감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제 완벽해보이는 인생과 얼굴에 어울리는 삶이 완성되니까. '아, 그렇구나 정말 그러실 거 같아요.' 하는 상대방의 대답에 맥길리스는 '취미는 프라 조립이고, 특기는 집에서 빈둥대는 겁니다.' 같은 대답을 목구멍으로 욱여넣고 그저 웃곤 했다.
그러고 보면 프라, 안 한 지 오래됐다.
맥길리스는 방구석에 쌓인 초합금 티타늄 바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달 전 예약 걸어놓은 게 드디어 배송왔는데 일이 바빠 뽀얗게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연말이라 처리할 일은 산더미고 매일같이 회식에 그렇다고 해서 휴일까지 반납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최근엔 그 외에도 할 일이 생겨서 도저히 개인적으로 뒹굴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원흉은 이 문 너머에 있다. 맥길리스는 무겁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눈꺼풀을 손으로 비비며 욕실의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맥길리스!"
어두컴컴한 욕실에서 아침은 대체 어떻게 알아채는 거지. 형광등을 켜면 물에 젖은 푸른 비늘이 반짝였다. 매일 아침 보는 광경이지만 매일마다 비현실적이라 맥길리스는 간혹 이게 꿈인가 생각하고, 그 다음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엔 좋아서 물을 찰박대는, 찰박대다 못해 펑펑 튕겨내서 얼굴에 기분나쁘게 끼얹어지는 물방울에 역시 현실이구나 생각하며 칫솔을 입에 문다.
"매일 아침 건강하구나, 가엘리오."
칫솔을 입에 물고 웅얼대는 맥길리스를 보며 가엘리오는 튼튼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는다. 저게 '사람'이라면 꽤나 호감가는 모양새일 것이다. 오묘하게 빛나는 푸른 머리카락, 어떻게 관리되는 건지 탱글탱글한 옆머리, 제 얼굴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에 늘 쾌활하고 붙임성도 좋다. 맥길리스는 양치질을 하면서 멍하니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첫만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맥길리스는 우주와 바다에 약했다. 공포증, 이라고 전문적인 진단을 내릴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끝도 없는 우주나 바닥 없는 심해를 생각하면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할 수 없어 외계생명체가 나오는 영화는 질색이었다. 인류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생명체가 아니란 말야. 불퉁한 소리를 내뱉으면 옆에서 가엘리오가 "응? 뭐라 그랬어?" 하고 묻는다.
"아무것도 아냐."
동물도 싫고 식물도 싫고 인간도 싫고 친구라면 플라스틱 로봇이면 족한데 왜 제 옆엔 인간이 아닌 생명체가 있는 걸까요.
맥길리스는 거울 너머로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 가엘리오를 본다. 얼굴은 사람이다. 긴 목과 제법 근육이 있는 각 잡힌 어깨와 가슴, 허리, 여기까지도 사람이다. 그에게도 심장은 있고 목에 아가미는 없다. 그렇지만 허리, 허리를 넘어가면 거기서부턴 기묘한 형태가 된다. 어느 부분을 경계로 부드러운 피부는 단단한 낱개의 비늘이 된다. 그가 사람이라면 필시 그 상체와 같이 탄탄한 근육으로 짜여져있을 다리 대신 길고 푸른 꼬리가 있다. 그 유명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어랑 정말 똑같다. 그렇다. 그는 인어였다. 인어. 위는 사람, 밑은 물고기. 인외 생명체 주제에 인간의 인지범위 내에 있는 형체라는 점에서 맥길리스는 그게 제 환각이 아닐까 의심했다.
좀 더 물고기처럼 생겨야 되는 거 아냐? 인어가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부터 너무 인간친화적이잖아.
그러나 그는 환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욕실 바닥에 널린 세면대의 파편을 보며 맥길리스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는지 모른다.
"안녕."
그 쾌활한 목소리에 결국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맥길리스와 비슷한, 아니 더 큰가?, 덩치에 하다못해 예쁜 여자라면 그럭저럭 로맨스 판타지를 생각할 수라도 있지. 그는, 아마도, 남자였다. 염색체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외형을 생각해본다면 일단은 남자가 분명했다. 사람 말도 했고, 이름도 말했다. 가엘리오.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오늘도 출근해 맥길리스?"
"응."
"언제 돌아와?"
"글쎄. 해지고, 다섯시간 더 지나서."
"오늘도 늦게 오는구나, 맥길리스."
힘차게 찰박대던 꼬리가 조금은 힘없이 흔들리는 것같기도 했지만 맥길리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쉐이빙크림을 씻어냈다. 첫만남. 해산물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회식으로 조개찜을 먹은 것부터 잘못됐다. 구색 맞추려고 억지로 먹은 커다란 대합에 무언가 씹혀서 봤더니 진주였다. 제법 큰 거라 '혹시 이거 팔 수 있지 않을까?'하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온 것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일단 세면대에 담가놓은 것도 잘못됐다. 무언가 와장창하고 박살나는 커다란 소리에 숙취에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더니 진주 대신 맥길리스만한 사람, 아니 인어가 나타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내다버렸을 것이다. 욕조 밖을 나갈 수 없는 가엘리오 덕분에 2주가 지난 지금도 맥길리스의 욕실엔 세면대가 없었다. 아. 그래. 진짜 저게 다 원흉이지. 불편한 샤워, 먼지 쌓인 프라박스, 추워 죽겠는데 주말마다 욕실에서 가엘리오와 놀아줘야 되고 바닷물의 염도를 맞추기 위해 소금을 몇 킬로나 사고 - 설마 중학교 수학에서 염도 맞추는 문제가 그렇게나 나오던 이유는 언젠가 나타날 인어를 위한 것이었을까? - 언제 고칠지 모르는 세면대의 수리비도 꽤나 들 것이다. 식비. 그래, 식비도 있다. 가엘리오는 꽤 대식가다. 생선을 냠냠 먹는다. 보고 있노라면 흉물스럽기 그지 없어 그의 식사시간은 되도록 방해하지 않지만 바다와 관련된 전반이 싫은 맥길리스는 생물고등어나 갈치를 사오는 것만도 곤욕이다.
"확 실험실에 넘겨버릴까."
"거기 가면 맥길리스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생선의 종류라면 기가 막히게 알아 맞히지만 인간생활에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어인 가엘리오는 아무것도 모른다. 글쎄. 거기 가면 커다란 수조에 들어가서 헤엄치게 될까? 맥길리스는 아쿠아리움의 고래를 생각한다. 긴 원통형의 수조 속에서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벨루가, 기껏해야 농구장만한 크기의 물 속에서 뱅뱅 돌기만 하는 상어. 분명 간신히 몸이나 담그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이 욕조보단 넓겠지만 일단 가엘리오가 실험실에 넘어간다면 그 전에 짐작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 세상은 위험하다고 그랬대며. 사실은 위험한 데가 맞아."
"그럼 그 말은 농담이겠네. 맥길리스는 날 위험하게 하지 않을테니까."
"나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믿어?"
"지지난주?"
"넌 2주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맥길리스는 나한테 욕조도 내줬고 쉬는 날엔 나랑 놀아주잖아."
아냐? 반문하는 맑은 푸른 눈에 맥길리스는 말문이 막힌다. 순진하고 사람을 너무 잘 믿는 도련님 같으니라고. 속으로 궁시렁대지만 이런 종류의 절대적인 믿음은 뭐랄까…….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
맥길리스는 걸터앉아 있던 욕조에서 일어나 욕실 밖으로 나갔다. 매일 기를 쓰고 일찍 일어나도 가엘리오와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서 매일 아슬아슬하게 집에서 나가게 된다. 잘 다려진 셔츠, 슈트, 코트를 걸치고 맥길리스는 욕실의 불을 끈다. 심해의 저온과 어둠에 익숙한 가엘리오는 오히려 추운 겨울 기후와 어두운 욕실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가엘리오의 고향은 어느 깊은 바다라고 했지만 대합의 원산지를 고려하면 그렇게 한류도 아닐 것이다. 바다의 기온이 아무리 낮아도 건조한 영하의 기온만큼 추울 수 있을까?
"다녀올게."
"다녀와, 맥길리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비늘의 끝머리가 문득 오늘의 꿈과 겹친다. 어둠을 가르는 커다란 빛무리. 우주를 유영하는 아름다운― 뭐였더라? 그냥 나가려다가 결국 욕실 안으로 들어가 한 번 머리를 쓰다듬고 만다. 착한 애완동물처럼 가엘리오는 머리를 한껏 맥길리스의 손에 비빈다. "정말로, 간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몸이 단순히 출근하기 싫어서인지 어쩐지 모르는 채로 맥길리스는 추운 겨울 밖으로 나섰다. 출근해서 돈 벌어야지. 돈 벌어서 건물을 사야겠다. 지하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 주택을. 바다만큼은 못해도 수족관보다 훨씬 큰 수영장이 있는 집을 사면 가엘리오도 조금은 자유로울지 모른다. 최소 실험실보단 낫겠지.
그렇게 마음 먹고, 통장을 스치는 월급에 절망했던 맥길리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맥길리스, 어서와!"
가엘리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에. 문… 앞에, 서 있…?
맥길리스보다 살짝 높은 눈높이로, 목, 어깨, 허리, 다리와…… "가엘리오." 맥길리스는 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응 맥길리스! 어때? 괜찮아? 맥길리스는 위에서 봐도 잘생겼구나!" 같은 말을 재잘대는 가엘리오의 어깨를 잡으며 맥길리스는 입을 열었다.
"일단, 옷을 입자."
가엘리오는 서 있었다. 푸른 빛을 반사하는 비늘 달린 긴 꼬리가 아니라 다리로, 나체로.
*
퇴근하자마자 졸지에 남의 나체부터 보게 된 맥길리스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가엘리오에게 난데없이 다리가 생긴 것도 모자라, 가엘리오는 그 다리로 어떻게 서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몰랐다. 고장난 로봇처럼 어기적대며 한발자국씩 떼다 끝내 바닥에 엎어지다시피 주저 앉는 가엘리오를 질질 끌고 방까지 데려가 긴다리를 구부리고 펴고, 뜯지 않은 새 속옷과 제가 입던 바지를 입혀놓고 나니 한겨울에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불편해애애애."
애처럼 말을 질질 끌며 불퉁한 표정을 하는 가엘리오는 다리를 꿈지럭대긴 했지만 맥길리스의 탈진한 얼굴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새삼 주변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놀라고 덥고 거치적거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코트와 슈트재킷에 주름이 간 것도 그렇고 걸리적거리게 긴 다리가 구부려지지도 않고 쭉 뻗어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도 그랬다. 그제야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다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가엘리오?"
긴 다리는 맥길리스의 생각보다 훨씬 길고 유연해보였다. 적당히 근육이 붙어있어 탄탄했고 맥길리스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발도 그러했다. 모난 데 없이 매끄러운 다리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꾹꾹 눌러대면 가엘리오가 간지러운 듯 무릎을 움찔거리다 묻는다.
"맘에 들어 맥길리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잖아, 가엘리오. 설마 처음부터 다리가 있었던 건 아니고."
가엘리오의 꼬리는 맥길리스가 확인해봤다. 설마 특수분장인가 싶어서 허리부터 비늘이 난 부분을 몇번이고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도 했다. 진짜 생선비늘처럼 매끄럽고 기이했으며 누르면 인간의 체온보다 차갑고 인간의 근육보다 더 물렁하게 들어가는 그 꼬리가 분장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만지고 난 후엔 손바닥에 남은 기묘한 촉감과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것 같은 비린내에 맥길리스는 실례되지만, 만진 후엔 손을 박박 씻기도 했다. 소름끼치도록 낯선 그것을 맥길리스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제 손바닥에 와닿는 건 인간의 피부, 인간의 근육이었다. 체온만큼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래도 전보단 훨씬 따뜻했다.
"정말…사람 같네."
"그렇지?"
칭찬으로 알아들은 건지 가엘리오는 퍽 뿌듯한 표정이다. 이리저리 제 다리를 돌리고 뻗고 발목울 돌렸다가 구부렸다가 하는 게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리고 묻는 말엔 회피하고.' 맥길리스는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로 보고 있으나 다른 행동을 하는 가엘리오는 정말 모르는 건지.
그럴 리는 없다.
맥길리스가 보기에 가엘리오는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다. 어떤 마술인지 몰라도 그들의 대화는 처음부터 가능했다. "왜일까? 나는 처음부터 인간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어." 가엘리오의 말을 생각해 보면 인어 중에서도 인간과 의사소통이 되는 건 극히 드문 부류일 것이다. 아니면 유일한. "그래서 가끔 해안가에 놀러 나오기도 하고. 인간한테 걸리면 큰일난다고 엄청 혼났지만 그래도 재밌는걸." 그래서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제스처나 대화의 흐름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했다. 파도에 묻어오는 소리의 편린들을 엮어 상식을 만들었다. 언어만 안다고 해서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니 어떤 눈치와 문맥의 흐름을 읽는 건 분명 가엘리오의 영민함 덕이었다. 그러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묻는 말에 꾸준히 회피할 것이고, 끊임없이 물어본다면 아마 대답은 해주겠지만
'그렇게까지 뭘 물어봐야 되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단 이 어지러진 방을 치워야 되고, 이 커다란 인어가 욕실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어떻게든 해야하고
"우와와앗!"
가엘리오의 비명과 함께 쾅-, 쿵-, 쨍그랑-, 뚜둑- 같은 소음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다 훅 그쳐버리고 말았다. 가엘리오가 서툰 다리로 또 한번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미끄러진 게 분명했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있던 컵이 어느 새 바닥에 떨어져 유리조각들이 비산해 있었고 그 위로 흩날린 서류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가엘리오와 테이블 밑에 있던 MG 바알 초합금 티타늄 박스가 구겨져…….
맥길리스의 사고는 거기에서 뚝- 하고 멈춰버렸다. 아무리 바빠 좀 내버려두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됐다. 마지막에 들린 뚜둑- 소리가 너무나도 불길하기 짝이 없어 맥길리스는 호흡이 가빠졌다가,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가 간신히 숨이 트이고,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가엘리오―!"
작은 방에 머리를 쥐어싸맨 두 사람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나란히 겹쳐졌다.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0) | 2018.12.30 |
---|---|
[맥가엘] 리퀘박스 여덟 번째 (0) | 2017.06.02 |
[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0) | 2017.05.27 |
[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0) | 2017.03.28 |
[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0) | 2017.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