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오미사쿄가 사귀고 대신 감독에게 애인이 생깁니다. 사쿄는 이상하게 박복할 거 같아서 실연이 잘 어울림...
"오늘은 이쯤에서 연습 그만 할까요."
"아?"
"아무래도 요 며칠 과제 때문에 밤을 샜더니."
멋쩍게 웃으며 오미는 사쿄를 본다. 리더는 어디까지나 반리지만 대체로 가을조의 주도권은 사쿄가 쥐고 있었다. 연장자에 대한 배려라기 보단 그가 가진 위압감이 큰 탓이리라. 사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반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할까, 리더?" "만전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이 이상 연습을 하는 것도 의미 없죠? 자 그럼 오늘은 해산!" 반리의 쾌활한 박수를 끝으로 레슨실에 팽팽하게 감돌았던 긴장감이 툭 끊긴다. 열기가 가득했던 레슨실을 나오면서도 오미의 시선은 사쿄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건 핑계다. 좋지 않은 것은 오히려 사쿄 씨 쪽이지. 오미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처진 어깨는 기분탓이었으면 좋겠지만 사쿄의 컨디션은 요즘 썩 좋지 않다. 아마도 일주일 전부터.
"…차라리 스마트폰이라도 되고 싶어."
"항상 하던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 말하니까 엄청 패기 없는 발언이네."
물이라도 마실까 하고 오미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소파를 끌어안고 쭈그려앉아 있는 마스미와 봄조의 면면이 보인다. 마스미는 일주일 전부터 우울의 바닥에 떨어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밥도 남기고 잠도 못 자는 것 같다고 츠즈루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무성의하게 막대사탕을 우득우득 깨물며 게임을 하고 있는 이타루지만 어쨌든 그도 마스미가 걱정돼서 옆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럴만도 하지. 오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스미가 열렬한 연정을 숨기지 않았던 상대는 최근 연애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20명이 넘는 남자들을 책임지던 감독은 사생활도 없다시피 극단의 일에 열심이었는데 최근엔 조금씩 귀가가 늦어지거나 행선지를 숨긴 채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다들 감독에겐 감독의 사생활이 있으니까, 하며 화두에 올리는 것을 피했지만 일주일 전 심야에 하필이면 마스미가 낯선 남자의 차에서 내리는 감독을 보고 만 것이다.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은 마스미가 그 원인을 말하지 않을 리도 없고 감독의 연애소식을 일파만파 순식간에 기숙사에 퍼져 그 결과가 이것이다.
"아저씨가 좀 말려봐."
사쿄가 감독과 단둘이 얘기라도 하려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던 마스미가 사쿄에게 자발적으로 말을 건 건 아마 그게 처음이 아닐까. 거실에서 일어난 소란은 얇은 벽을 타고 방 곳곳까지 퍼져 오미도 타이치와 함께 나왔었다.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오미가 걱정했던 건 마스미보단 사쿄였는데 사쿄는 코웃음 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축하파티의 건의인가? 예산은 만들 수도 있어."
"그 얘기가 아니잖아."
"어이, 꼬맹이. 너처럼 요란하게 실연하는 녀석도 없을 거다.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그 때 사쿄의 패기가 어찌나 흉흉했는지 마스미를 둘러싼 극단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스미도 입을 딱 다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하고 귀가한 감독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건 오미였다. 사쿄는 고개만 끄덕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극단원들은 자연스럽게 해산. 마스미만이 마지막까지 감독 앞에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츠즈루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마스미처럼 눈에 보이게 티를 내면 좋을 텐데.
학교에 갔다와 감독이 없으면 주인 잃은 개처럼 현관 앞을 배회하는 마스미에겐 배려의 손길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 배려를 마스미 본인이 달가워하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위로를 해준다는 건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사쿄 씨는? 오미는 그 날 이후로 사쿄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첫사랑이 감독이라는 건 극단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첫사랑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 순애보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것도 아마 알 사람은 알 것이리라.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희미하게 누그러지는 분위기, 부드러운 미소, 가끔은 지나친 과잉보호. 누군가는 딸을 보는 아빠 같다고 말했지만 마스미가 사쿄를 공공연히 연적으로 삼고 있는 이상 그의 애정이 엷고도 길게, 오랜 시간에 걸쳐 살아있다는 사실을 오미는 알고 있었다. 매일 새롭게 절망하고 있는 마스미를 보며 사쿄는 혀를 찼지만 그런 사쿄의 마음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타이치가 곤히 자는 소리가 들리지만 오미는 걱정 때문에 뒤척거리느라 통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사쿄의 견고한 등은 온통 빈틈 투성이였다. 일주일 내 잘 버티고 있었지만 오늘도 합이 안 맞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게 몇 번인지. 차라리 그럴 거면 남한테 기대면 안돼요? 같은 말이 어물어물 튀어나갈 것 같은 것도 몇 번이었다.
아니. 아니지. 전부 걱정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자신은 비겁하고 비열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 견고한 등의 빈틈이 오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평소엔 상상도 못했던, 1%의 가능성도 없었던 일에 자꾸만 희망과도 비슷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츠즈루는 사람 보는 눈이 꽤 좋은 거 아닐까. 오미는 깊게 심호흡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들은 무의식 중에 숨은 자신의 어두운 일면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도 깊게 잠들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오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쉴 무렵 옆방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미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도 오미의 신경을 건드리던 등이 어둠 속에서 복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부엌으로 향했던 것처럼 보였던 등은 무언가를 챙겨 중원으로 향한다. 오미는 서둘러 그 뒤를 쫓아나갔다.
"사쿄 씨."
중원의 테이블에 앉은 사쿄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후시미? 피곤하다던 녀석이?" 앗차. 그런 핑계로 연습을 일찍 끝냈었지. 거짓말이 들통날까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더니 오히려 중간에 깨버려서요." 둘러댄 변명을 다행히 사쿄는 믿는 듯 했다.
"마실건가?"
냉장고에서 챙겨 온 건 맥주 두 캔이었다.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오미를 보는 사쿄의 눈은 퍽 피곤해 보였다.
"사쿄 씨는 안 주무세요?"
"이상하게 잠이 안와서. 늙으면 잠이 줄어든다던데 벌써 그걸지도 모르지."
"거짓말이죠."
무심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전혀 아니었는데 오미의 입은 멋대로 움직여 마음 속에 숨겨놨던 말을 뱉고 만다. 당황해 크게 뜨인 사쿄의 눈을 보며 오미는 이왕 한 얘기 끝까지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쿄 씨 요즘 전혀 집중 못하고 있잖아요. 오늘 연습도, 몇 번 안 맞았던 거 아시죠?"
"…눈치가 빠르군."
"다른 애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네가 좀만 더 어렸으면 좋았을 텐데."
"사쿄 씨가 나이가 더 많아도 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할 걸요."
"꼴사나운가?"
마주보던 시선을 외면하고 사쿄는 캔을 기울인다.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올라간 입꼬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오미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반성을 하는 건 좋지만 자조는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지. 유조도 한 번 지적했던 태도다. 누구보다 근성 있고 노력파인 주제에 어떤 부분에선 이상하게 포기가 빠르지. 오미가 보는 사쿄는 그랬다. 그리고 자기반성은 순식간에 단계를 건너뛰어 거울 너머를 비웃곤 했다. 그럴 거면 빨리 포기해버리지. 깔끔하게 잊어버리지.
"뭐랄까. 어차피 생각은 없었지만… 딸 보내는 아버지 마음이 정말 이럴지도 모르지."
"그것도 거짓말이죠."
"사실 나도 몰라."
"힘들어요?"
"글쎄."
순식간에 한 캔을 비운 사쿄는 오미가 한 모금 마셨던 캔을 슥 빼앗아 마신다. 이상하게 붉은 열도 올라오지 않은 뺨이 오히려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틈, 서늘하게 부는 바람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그럼 말이죠." 육식동물들은 먹잇감을 포착하면 주변을 맴돌다가 상대가 방심하고 등을 돌렸을 때 빠르게 돌진한다고 한다. "저랑 사귀는 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말에 사쿄의 고개가 갸우뚱하게 기울어진다. 오미가 사쿄의 손목을 낚아챈 건 순식간이었다. 내용물이 아직 남은 캔이 푹신한 잔디밭 위에 소리도 없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 남자가 싫어하는 걸 안다. 남이 아플 바엔 자기가 아프고 말겠다는 그럴듯한 자기희생. 한 걸음 물러서는 반사적인 태도를 오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부분에서 사쿄와 오미는 비슷하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힘들다면서요, 실연.
마음 먹으면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씁쓸한 알콜맛이 나는 상대방의 마른 입술을 훑으며 오미는 생각했다. 아. 츠즈루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좋은가 봐. 사쿄 씨의 역할도 그랬지. 고집스럽고 아량은 넓고 배려심 있고 충직한 데다 순정파인. 좋아해요. 아마 당신이 감독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저를 힘들게 할 거에요?
저항하려던 손에 힘이 빠진다. 숨통을 물어뜯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단 한번의 기회도, 후시미 오미는 놓치지 않았다.
조수석 문을 닫는 소리가 경쾌하다. 오미는 차분하게 앉아있었지만 어딘가 들뜬 기분이 역력했다. 안전벨트를 매는 오미를 곁눈질로 확인한 뒤 사쿄는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걸리는 엔진소리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활기차게 들린다. 자신이 남에게 이렇게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나. 사쿄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목적지는 어디?"
"아. 내비게이션으로 입력할게요."
휴대폰이 모든 걸 대체하지 않았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사쿄라면 모를까 요즘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에 무언가를 적어놓곤 한다. 미성년자의 비중이 압도적인 극단 내에서 그나마 연장자인 츠무기나 타스쿠도 휴대폰에 필기를 대신하는 마당에 오미는 종이에 꼼꼼하게 무언가를 적어 왔다.
"보통 휴대폰에 저장하는 거 아닌가?"
"정리하려면 그래도 종이에 필기하는 쪽이 편하거든요."
"꽤나 아날로그하군."
"이런 부분이 의외로 연상에게 어필하는 점이 될까요?"
"…글쎄다. 목적지는… 일단은 점심?"
"네."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사쿄는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이 동네에선 조금 떨어진 도심의 레스토랑. 이동경로를 읽은 사쿄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겠는데."
"그런가요?"
"주말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막히겠지."
"참고하겠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직진, 우회전, 도심으로 나가는 큰 도로를 타고 직진하던 사쿄는 시간을 보다 오른쪽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주말 이 도로는 특히 막히니까 여차하면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아."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사쿄의 말에 오미는 볼펜으로 메모장에 꼼꼼히 적어나간다. 가뜩이나 장신의 오미는 그 키에 비례하게 손도 크다. 룸미러로 곁눈질 해 보는 오미의 손에 잡힌 볼펜은 이상하게 작아보여서 사쿄는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뭔가 있었나요, 사쿄 씨?"
"아니. 꽤나 학구열에 불탄다고 생각해서 말야. 학점은 좋을 거 같네."
"열심히는 하고 있어요."
"그런가."
평일 점심의 도로는 교통량이 적어 한가하다. 많이 따뜻해진 봄날씨에 하늘도 제법 새파래진 느낌이다. 여자는 봄,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이 있지만 계절의 변화는 원래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겨울의 창백한 푸른 색과는 다른 채도 높은 하늘색에 사쿄도 때론 다른 상상을 할 때가 있다. 가을조는 활동량 높은 액션 공연 담당이지만 여름조 같은 코미디를 하면 어떻게 될까. 러브 코미디도 괜찮겠지. 극단원 중 여성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극단에서 러브코미디? 여장을 하게 되는 건 또 타이치일까. 아니. 결과적으로는 그저 난폭한 액션이 섞인 치정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더 너를 사랑해.'
"아. 저기에요."
골목골목을 꺾어 들어가 오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면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간판이 보인다. 3층까지 전면 유리로 인테리어 된 레스토랑을 확인한 사쿄는 건물 옆으로 들어갔다.
"사쿄 씨?"
"이 정도 규모의 레스토랑이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면 당연히 주차장은 건물 뒤편이겠지. 아니면 주차 타워라든가."
사쿄의 말대로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은 레스토랑의 규모에 맞게 제법 컸다. 주차요원에게 차를 맡기고 나온 사쿄와 오미는 바로 연결된 뒷문으로 식당 내부로 들어갔다. "두 분이신가요?" 그렇게 묻는 직원의 말에 오미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창가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선 한 눈에 동네의 경치가 보인다. 도심이라고는 해도 대로에서 한블럭 벗어나 있으니 제법 한가로운 경치다. "바로 앞엔 작지만 강이 있어서요." 오미는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특히 강변을 따라 벚꽃이 심어져 있어서 꽃이 피면 아주 예쁘다고 하더라구요."
사쿄는 그 말에 가늘게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몽우리도 지지 않은 가지는 앙상했으나 오미의 말마따나 괜찮은 풍경이 될 것이다. 희고 엷은 분홍빛의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며 먹는 점심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점심이 되겠지. 사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 편에 앉은 상대를 보았다. 점심의 태양이 몹시도 밝고 찬란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태양이 바로 들어오지 않으니 사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마 오미의 기분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좋네.
코스로 나온 요리도 나쁘지 않았다. 샐러드는 아삭했고 유자와 레몬, 올리브 오일이 섞인 드레싱은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식전빵도 부드러웠다. 사쿄의 입맛에 크림 파스타는 조금 느끼했지만 할라피뇨와 먹으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감칠맛이 있었다. 오미가 시킨 스테이크는 웰던이라도 부드러웠고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는 산미가 보통의 것보단 높았지만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 땐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았다. 적당히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사쿄가 계산을 하고 오미를 데리고 나오면 오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대학생이겠지."
"제가 사쿄 씨를 데리고 나온 거잖아요."
"어차피 돈 쓸 일도 많으니 이런 아저씨한테 쓰지 말고 아껴둬."
사쿄는 코웃음치며 답했다. 다음 코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 요즘 유행하는 아기자기한 카페일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맛이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앤티크 가구와 우아한 색채를 가진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카페에서 사쿄와 오미는 스콘 하나와 차를 시켰다.
"대학생 취향이 아닌데."
"연상이니까요."
"그렇군."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이 집 스콘은 그렇게 달지 않아서 괜찮네요."
"그런 것 같네. 그렇다고 해도."
사쿄는 나이프로 스콘에 버터를 듬뿍 바르면서 말을 이었다.
"나야 이런 종류는 많이 안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네가 만드는 쪽이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발라서 스콘의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버터 자체는 상등의 무염 버터인데도 사쿄는 어쩐지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뜻밖의 칭찬에 "감사합니다."하고 쑥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오미는 평소보다 어려보인다. 아까 하던 상상을 사쿄는 계속 했다. 츠즈루는 사실 러브 코미디는 잘 못 쓴다. 만약 그런 게 필요하다면 무쿠의 순정만화를 빌려 오겠지? 액션 치정극에 순정만화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대사 정도는 몇 개 빼올 수 있다. 사쿄는 무쿠가 추천해 준 몇 권의 순정만화에 흔히 있던 패턴을 생각한다. 혹은 드라마를. 인공적으로 내리는 비는 여름의 장대비만큼 무겁고 세차게 떨어진다. 몇 분만 나가 있어도 옷이 흠뻑 젖는 폭우 아래에서 선택받지 못한 남자는 두 가지 루트로 나뉜다. 왜 안 돼? 라고 묻는 사람과 안녕. 하고 이별을 고하는 사람. 어느 쪽이든 사실 사쿄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건 이기적이다. 거절해야 하는 사람은 분명 무겁고 괴로운 마음일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사쿄는 간혹 부러웠다.
"이봐, 후시미."
"네?"
"우리 다음 공연은 어떤 게 좋을 것 같지?"
"글쎄요. 지금까지 한 건 마피아, 야쿠자, SF인데… 청춘이나 러브코미디 같은 건 저희한텐 안 어울리죠."
"그렇지."
"사쿄 씨는 생각해 둔 게 있나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유행이니 영웅물은 어때."
"그걸 연극으로 할 수 있나요?"
"농담이다."
사쿄가 부드럽게 우러난 수색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이면 오미는 그저 웃었다. 봄은 겨울보다 해가 길어져서 아직도 창가로 스미는 햇빛 아래 보이는 오미의 얼굴이 밝고 눈부시다.
오미가 계획한 데이트 코스는 이 뒤로 영화관이었지만 사쿄도 오미도 영화까지 보고 갈 시간은 없어 그 부분은 생략했다.
"어떤 거 같아요, 사쿄 씨?"
"아. 식당도 카페도 나쁘지 않았네. 밥 먹고 바로 카페라니 조금 부담스러운 감도 있지만 첫 데이트니까."
"그런가요?"
"솔직하게 말하면 점심, 카페, 영화관 순서는 너무 식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하하 역시 그렇죠. 그래도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서요."
"연상이 상대라면 오히려 그런 점이 더 풋풋해 보일지도 모르지."
"풋풋……. 저랑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네요."
"20대니까."
"사쿄 씨도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잖아요."
"글쎄다. 나야말로 오늘 도움은 됐나? 하필이면 데이트 예행 같은 걸 나한테 부탁하는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뇨.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일단은 연상이고 회사원인데다 엄청난 커리어우먼이거든요. 반면에 저는 경험도 없고."
"저 근처라면 괜찮은 분위기의 술집도 알고 있지. 나쁘진 않을 거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 망설인다면 무알콜 칵테일도 파는 곳이니 그걸 추천하도록 해."
"정말요? 감사합니다. 사쿄 씨의 추천이라면 믿을만 하네요."
극단 앞에 도착하면 슬슬 시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스름하게 지평선 너머로 내려가고 있을 오늘의 태양을 생각하며 꽤 시간이 빨리 갔구나 사쿄는 생각했다.
"사쿄 씨는 안 내리나요."
"나는 볼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럼 저녁은요?"
"먹고 들어간다고 얘기해 줘. 오늘 당번은 미나기?"
"감독입니다. 아 설마 카레 먹기 싫어서 도망치시는 건 아니죠?"
머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차에서 내린 오미가 문을 닫으려다 말고 안을 쳐다보면 사쿄는 조금 미소 띈 얼굴로 말한다.
"감독한텐 비밀로 해줘. 치카게까지 거들면 울어버릴 테니까."
보기 드문 사쿄의 농담에 오미가 앗 하는 사이 사쿄의 차는 다시 부드럽게 출발한다. 백미러로 보이는 오미는 조금 이 쪽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가, 사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푸른 하늘에 사쿄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려다 말았다. 지금 상태에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기본적으로 가을조엔 러브코미디같은 건 어울리지도 않고, 비를 맞으면서 '왜 안돼?'라고 묻거나 '안녕.'이라고 이별을 고하는 건 만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극적이고 로맨틱한 방법이다. 현실은 이렇듯 쾌청한 날에 조용하게 시작해 조용하게 막을 내리는 것이다.
"뭐. 애초에 이 나이에 실연했다고 우는 것도 이상하잖아."
애초에 실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차피 가능성조차 갖지 않은 마음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영원히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린 채로 자라났으니 마음이 죽을 때까지 빙빙 같은 곳을 도는 거라고 후루이치 사쿄는 생각했다. 다만 차는 어디로든 가야 해서 사쿄는 그저 엑셀을 밟았다. 엔진소리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경쾌했다.
인간의 쓸데없는 욕망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해본다. 어떤 상황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본능일까. 학습된 결과는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 좋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아닐까. 사실은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첫키스는 레몬맛이라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몬맛도 아니었고 - 그냥, 그랬다 - . 하지만 보통 저건 다 좋다고 말하니까 역시 좋은 거 아닐까.
…하고 후시미 오미는 적막이 내려앉은 방에서 쓸데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스무 살, 후시미 오미의 애인은 서른 살, 후루이치 사쿄라는 남자다. 등이 올곧고 눈매가 무시무시하고 잔소리가 심하지만 안경을 벗으면 의외로 섬세한 이목구비에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 폭풍같던 시절은 옛날옛적에 지나간 줄 알았는데 어찌저찌 잠들지 못하는 밤과 깨어있지 못하는 낮을 반복하여 후시미 오미의 가슴 설레는 사랑은 간신히 해피엔딩으로 종지부를 찍…는듯 하였으나 드라마는 사귀는 과정까지만을 얘기하지 연애의 한중간을 보여주진 않는다.
20명의 극단원에 지배인, 감독까지 총 22명이 기거하고 있는 기숙사에서 연애는 고난과 역경의 대서사시다. 데이트 한 번이라도 하려고 하면 한 편의 스파이물을 방불케 했다. 철저하게 다른 종류의 메신저를 쓰면서 약속을 잡았고 극단에서 지하철로 다섯정거장쯤 떨어진 동네에서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고, 헤어질 땐 중간에 내려 각자 다른 시각에 집에 들어갔다. 오미도 그것에 반대하진 않는다. 극단에선 보는 눈이 많았고, 대외적으로도 열 살 차이에 같은 남자다. 게다가 사쿄의 직업은 일단은 썩 일반적인 종류의 것은 아니고 본인도 그것에 대해 생각이 많은 것 같으니 사쿄의 신중함과 조심성에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류의 데이트를 제외하면 대체 전과 달라진 게 뭐냔 말이야.
손도 잡고, 키스도 한다. 그거야. 좋지. 이전이라면 꿈도 못 꿀 얘기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쿄의 차 안에서만. 그 비좁은 시트에서 나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는 신기루같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애인이랑 같은 지붕에서 생활한다니 좋은 거 아니냐고.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물론 좋은 일이다. 연습이라도 하게 되면 몇 시간이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고 - 극본의 대사지만 - , 밥도 같이 먹는다 - 그 외 열 명 남짓이 함께하지만 -. 이전이라면 오히려 모르는 척 시선 한 두번이라도 더 마주쳤을 텐데 '애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니 사쿄는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는 바람에 전보다 못하게 됐다. 그나마 혼자 방을 쓰는 사쿄에게 야식을 배달한다는 핑계를 대고 밤에 몰래 가 그럭저럭 애인같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게 오미의 위안이었다.
사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생활은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면 금방 고개를 돌리는 얼굴에 희미하게 남은 쑥스러운 느낌을 보는 것도 좋았고,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지만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는 옆모습에 우월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한정된 공간이긴 해도 자신보다 조금 작은 손의 모양을 면밀하게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열네 살짜리 꼬마애처럼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다는 것, 상대방도 똑같은 열기를 느낀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굉장한 행복이다.
원인은 오늘 낮에 있었다.
"아 진짜 기분 끝내주더라니까."
숟가락까지 내려놓고 열변을 토하던 친구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속닥거렸다. "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기분이 와……. 눈은 떴는데 아직 정신은 못 차리고 있는 게 너무 귀여운 거야. 생각만 해도 좋은지 실룩대는 입술을 숨기려고 친구는 다시 맛도 없는 학식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남의 경험담 같은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지라 오미는 대충 흘려듣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퍼뜩 상상이 시작된 것이다.
극단원 대부분이 학생인 이상, 어른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모양인지 사쿄가 누군가의 앞에서 무방비한 일은 드물었다. 피곤해도 쉬는 시간에나 잠깐 눈을 감고 있다 뜨는 정도로,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에도 늘 잠은 제대로 본인 방에 들어가 자곤 했다. 오미가 밖에 있던 날, 기숙사 중원에 풀장을 만들어 놀았다는 사실은 아쉽지 않았지만 파라솔 밑에서 안경을 벗고 졸고 있던 사쿄가 감독이 미끄러지는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가 같이 미끄러져 빠졌다는 얘기엔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안경까지 벗고 태양 밑에서 졸고 있는 사쿄라니. 그 날 약속을 잡았던 제가 죄인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합숙을 갔을 때는 사쿄가 강제로 불을 끄는 바람에 잠든 얼굴 같은 건 보지도 못했고 깜짝 놀래키려고 하니 이미 말끔하게 일어나 있었다. 미지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본능이다. 기회가 있었는데도 보지를 못했으니 아쉬움은 두 배고, 한 번 시작한 상상은 멈출 수 없었다. 오미는 남은 오후 강의 내내 사쿄의 이런저런 자는 얼굴이나 잠에서 깨어나는 얼굴을 상상하느라 제대로 필기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회가 이렇게나 갑자기, 타이밍 좋게 눈 앞에 온 것이다.
"사쿄 씨?"
오늘도 핑계용으로 갓 구운 따끈한 스콘 두 개를 들고 오미는 106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기숙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했고 스콘을 굽고 있을 때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사쿄와도 한 번 마주쳤으니 방 안에 있는 것만은 확실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문은 쉽게도 열렸다. 어두운 방 안엔 스탠드가 켜있었고 책상 위엔 복잡한 서류들이 널려있었지만 방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 숨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들리는 전부였다.
숨소리…….
거기에서 퍼뜩 오미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슬쩍 침대를 보면 언제나 정갈하게 놓여있던 이불이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작은 금발도. 상식적으로는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방에 나가는 게 맞겠지만.
나는 애인이잖아? 그 정도는 볼 권리가 있는 거 아냐?
앞선 모든 고민들을 치워버리는 그럴듯한 명목이 이윽고 오미의 머리에 떠오르고야 말았다. 오미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이층 침대의 계단을 올랐다. 조금만 올라도 키가 큰 오미는 금방 그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가버리고 만다. 잠을 잘 생각까진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대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곤히 잠든 사쿄를 깨울까 말까 고민하던 오미는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안경을 벗겼다. 다행히 그 정도 자극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게 안경을 벗고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그 정갈한 면이 훨씬 두드러지는 데다 작은 눈물점들이 훨씬 맵시있게 보였다. 별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게 콩깍지일까.
오미가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면 그 때 사쿄의 눈썹이 조금씩 흔들렸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미처 숨지 못하고 보던 순간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눈동자가 오미를 향했다.
"―후시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게 키스를 한 왕자의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면 백설공주에게 키스한 왕자라든가? 친구의 말은 맞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맞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미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작은 인삿말이 꿈처럼 들렸다. 안녕하세요, 사쿄 씨. 오미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답하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사쿄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이더니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인상을 찡그리고 안경을 찾는 사쿄에게 오미는 제가 들고 있던 안경을 내미는 대신 허리를 굽혔다. 이제 막 눈을 뜬 사쿄의 눈이 다시 감긴다.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것처럼 오미는 열렬히 키스했다.
이치사쿄 전제의 켄→사쿄. 이치는 마키타 이치로입니다. 은천회 다각관계 맛있게 먹고 있는 지옥의 사쿄른.
전제가 되는 이치사쿄도 언젠가는 쓸 예정.
기본적으로 A3!는 기타 잡지 기사나 매체를 접할 여력은 없고 라이트한 신인 감독인데다 무과금 주의자이므로 모든 백스테를 열 수도 없고 일본어도 못해서 해석도 무리입니다. 고로 이래저래 날조가 많고 말투도 적절한 번역이 어려우므로 혹시 정보에 따라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오 컵라면 새로 나왔네. 이건 무슨 맛이냐? 출출한데 하나 살까. 야끼소바빵? 여긴 별로였는데. 초콜릿. 음 초콜릿은 괜찮지. 딸기? 우유? 쿠키앤크림? 아몬드? 아몬드라고 하면 역시 페레로로쉬인가. 좋아좋아. 그리고 자일리톨 껌 하나랑…….
사코다는 바구니를 들고 편의점을 세 바퀴쯤 돌았다. 온갖 물품을 들었다놨다 하면서도 별 의욕이 없어보이는 손님에게 점원의 눈이 꼿꼿이 향했지만 사코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도 더 이상 먹을 건 더 이상 살 게 없어서 생활용품코너까지 가서 다시 세 바퀴를 돌아 괜찮아 보이는 걸 바구니에 던져넣고는 사코다는 물건을 다시 계산대 앞에 와르르 쏟아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삑삑대는 바코드 소리가 끊기기를 기다리다가 "아아! 그리고 저기 저거. 핑크색. 아 왜 확-한 거 있잖냐 저 쪽에." 사코다는 카운터 너머 긴 진열장을 가리키며 마지막 물품을 구매했다. 성의 없이 확인창에 YES를 누르고 "수고하십셔!" 우렁차게 외치고 나오면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아 겁나 추워! 초등학생처럼 콧물이 나오는 걸 훌쩍대면서도 사코다는 밤길을 느리게 걸었다. 가장 가까운 집 앞의 편의점을 두고도 멀리 역 앞의 번화가까지 나왔다. 번화가라고는 해도 시간이 늦어 가게의 간판은 모두 꺼져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뒷골목엔 이자카야의 붉은 등같은 것만이 깜빡였다. 춥고 어두운 날은 언제나 쓸쓸한 감상을 자아내기 마련이었다.
아니지. 밝고 빛나는 날에도, 덥고 습한 날에도 쓸쓸한 때가 있다. 왜냐하면 처음엔 분명 여름이었으니까.
냉동실에 하나 남은 소다맛 아이스바를 빨아먹으면서 사코다는 부지런히 사쿄의 책상 위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사코다가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숫자놀음은 까막눈이고 잘하는 건 큰소리 치는 것, 운전(중장비 포함)은 자신있지만 실내에선 그다지 그 실력을 뽐낼 일이 없다. 없어야 되지만. 사코다는 형님들의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했고 혹은 연락책이었으며 그 외에 하는 일은 인상을 찡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쿄의 책상을 정리하거나, 책상 위의 빈 잔에 물이나 커피나 차를 채우거나 간식을 가져다주거나 사쿄의 주의를 환기시켜 쉴 시간을 만들거나 하는 일뿐이었다. 조직 내에서 사코다를 경멸하는 쪽은 '후루이치의 개'라고 불렀고 호감이 있는 쪽은 '충견'이라고 불렀지만 어느 쪽이든 개라는 데는 변함 없었고 사코다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 말이 못내 마음에 안드는듯 사쿄는 진지하게 "어이, 사코다. 너도 슬슬 일을 하나 줄까?" 말했지만 재주가 없는 건 사쿄도, 사코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형님의 충견이 될 수 있으면 영광임다!" 씩씩하게도 답하는 사코다를 보고 사쿄는 더 이상 얘기는 하지 않았다만, 지금도 넌지시 가끔 사코다를 바라보는 게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코다 켄,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 중의 남자이며 순정과 의리를 모두 형님에게 바쳤으니 충견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라는 그 말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제아무리 후루이치의 개, 사코다 켄이라도 조금은 심심했는데 사무실의 에어컨이 고장나 사쿄의 아파트로 옮겨왔기 때문이었다. 단 둘이서. 사코다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킬 형님들은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빠르게 휴일을 선언한 사쿄의 말에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사쿄의 곁을 떠나기 싫은 사코다만이 사쿄의 집에 있었다. 사쿄의 뒷바라지를 하러 왔다지만 방에서 일하고 있는 사쿄를 방해할 순 없으니 졸지에 사코다는 남의 집에서 빈둥대는 신세가 되었다.
"여어, 오늘도 고생이군 개."
"마키타 씨 오셨슴까."
그런 사코다를 구제해 준 것은 마키타 이치로였다. "사무실 문 닫았길래 보니 에어컨 고장나서 집에 갔다더라고?" 마키타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냉동실의 문을 열고 부스럭대는 아이스크림 한 뭉치를 집어넣었다. 사코다가 먹고 있는 소다맛 아이스크림이었다.
"용건이 있으면 전화로 끝내, 마키타."
"오, 후루이치. 꼼짝않고 방에 있을 줄 알았더니 용케 나왔네."
"닥쳐. 용건은?"
"그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정도로 건조한 사이 아니잖아."
한번 집중하면 주변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사쿄가 어쩐 일로 금방 방에서 나왔다 싶었더니 한번 마키타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헤에. 뭐 때문에 나오는지 모를 감탄사를 흘리며 사코다는 다 먹은 아이스바의 나무막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마키타 이치로는 사쿄보다 4살이나 어리지만 사쿄에게 반말을 쓴다. 얻어 듣기로는 마키타가 사쿄보다 먼저 조직에 들어왔다고 했고 혹자는 사쿄가 조직에 들어오기 직전 신나게 두드려 팬 게 마키타라는 얘기도 했다. 마키타 개인에게 악감정은 없으나 경애하고 존경하는 형님을 비오는 날 먼지나게 때린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그런 과거야 이런 조직에선 발끝에 채일만큼 흔한 얘기고, 당사자인 사쿄도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 사코다가 그 까마득한 과거의 일에 대해 감정을 드러낼 일은 없겠지만 가끔은 좀 그랬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마키타가 사쿄에 귓가에 무어라 친근하게 속삭이는 지금.
조직의 말단인 사코다가 들어서는 안되는 얘기는 언제나 있었다. 외부의 일을 맡고 있는 사쿄와는 달리 마키타는 내부의 사람이었다. 조직 간의 항쟁이나 후계자 싸움이라든가 하는 드라마같은 거창한 얘기는 아니지만, 영화에 보면 있지 않은가. TOP SECRET, 붉은 도장 쾅쾅. 그것을 들을 짬은 사코다에겐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어때? 남은 얘기는 방에서 하자고."
"뭐, 잠, …마키타!"
막무가내로 사쿄의 손목을 잡아채고 방으로 들어가는 마키타에 놀라서 사코다는 빈둥대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놀란 사코다의 외침에 사쿄의 얼굴이 사코다 쪽으로 휙 돌아갔다. 방황하는 시선으로 마키타와 사코다를 둘러보던 사쿄는 한번 혀를 차고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뒤져 꺼냈다.
"사코다."
"부르셨슴까, 형님!"
"담배 한 갑만 사와라."
"담배…임까?"
"아."
그러고는 사쿄는 마키타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당장이라도 울리는 퍽-하는 소리가 손속이 없어 마키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하게 명치에 들어오는 사쿄의 주먹은 한동안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아프다. "으, 우와, 진짜――." 제아무리 옛날옛적에 사쿄를 때려눕혔다던 마키타도 기습공격엔 당해낼 수 없다. 비틀거리며 상체를 굽힌 마키타의 종아리를 한 번 더 차면서 사쿄는 방으로 마키타를 밀어넣었다.
"―사코다."
"다, 다녀오겠슴다!"
방문을 닫기 전 저를 매섭게 째려보는 사쿄의 시선에 사코다는 후다닥 신발을 신고 문을 나왔다. 그렇게 나오고 나니 가장 중요한 것을 까먹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담배?"
편의점에서 파는 담배의 종류는 넉넉잡아 100개는 될 것이다. 사쿄가 흡연자였나 생각하면 아니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가끔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었으니 모를 일이었다. 사쿄가 흡연자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쿄는 사코다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시켰고 사코다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충실히 심부름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반쯤 쫓겨나듯 나온, 사코다의 존재가 무언가 방해가 되어 내보냈을 사쿄의 의지를 거스르고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과연 옳을까. 아니 이쯤되면 사실 사코다도 알고 있었다. 제가 궁금한 건 사와야 될 담배의 품목이 아니라 사쿄와 마키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궁금해서였다. 그저 방에 들어가는 걸로는 되지 않아서 사코다를 집 밖으로 내보내야 할 이유가 뭘까. 입에 물고 있는 나무막대가 물렁해지도록 질겅대던 사코다는 결국 단 한 번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사코다 켄이 죽을 때까지 모시고 살 후루이치 사쿄는 퍽 박학다식했다. 심심하면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사코다에게 제법 해줬는데 그가 해준 얘기 중엔 무슨 신화 얘기가 있었다. 신에게서 항아리를 선물받은 여자는 동시에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말도 듣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항아리를 열어버린다. 그 안에서는 갑자기 무언가 쏟아져 나오고 여자는 놀라 황급히 항아리를 닫지만 이미 세상은 혼돈이라. 그 후 인류는 온갖 질병과 재난, 가난, 전쟁, 슬픔과 같은 재앙에 휩싸이게 되었다, 고.
그 항아리 안엔 쓸쓸함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시기나 질투 같은 것도.
그 날 그 문을 열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사코다는 10분이면 되는 거리를 기어이 25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중간에 뭘 잃어버린 것 같아서 길을 다시 한 번 돌았고, 괜히 골목을 누볐으며, 길고양이와 눈싸움도 벌였다. 그러면서도 차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손잡이를 잡은 손은 곱아서 잘 구부러지지가 않았다.
"어이, 사코다."
"혀, 형님?!"
"어딜 싸돌아다니다 지금 들어와?"
"죄송함다! 마키타 씨는 가셨슴까?"
"당연한 소리."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밖이 꽤나 춥긴 한 모양이었다. 사코다는 실실 웃으며 사쿄의 옆에 앉았다.
"뭐냐."
테이블 위에 비닐봉지를 턱하니 얹어둔 사코다에게 사쿄는 짧게 묻는다. 사코다는 일단 봉투를 뒤져 핑크색 상자를 꺼냈다. "부탁하신 담배 사왔슴다." 사쿄는 마키타가 오면 늘 담배를 핑계로 사코다를 내보냈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사쿄가 사온 담배는 대체로 마키타에게 간다는 사실을 사코다는 잘 알았다. 마키타가 피우는 담배는 알고 있다. 중후한 맛에 깔끔한 패키지를 자랑해, 멘솔인데다 핑크색인 이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쿄도 그 앳된 분홍색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비흡연자가 알 도리는 없고, 이런 심부름을 시킨 직후의 사쿄는 필요도 없는 심부름에, 하필이면 미성년자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는 죄책감에 유독 말수가 줄어들곤 했다. 그 죄책감을 한껏 이용하며 사코다는 자일리톨 껌과 휴대용 양치 세트, 구강청결제, 탈취제 같은 걸 우르르 쏟아냈다.
"요즘은 이런 게 매너라는데요, 형님."
검소, 절제, 절약. 아끼는 것만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사쿄의 미간이 지나치게 좁혀져 사코다는 내심 움찔했지만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잖슴까." 냄새가 나긴 뭘 나. 비흡연자인 사쿄는 도무지 쓸 일이 없지만 어쨌든 사코다가 사왔으므로 누구에게 주지도 못할 것이다. 선물 받은 걸 남에게 주는 매너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이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보며 무언가 경각심을 갖게 되겠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런 심부름을 시키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사코다의 최종 목표였다.
"…수고했다."
전혀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사코다를 보는 사쿄의 얼굴에 사코다는 그저 웃었다. 항아리를 열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사코다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희미하게 붉어졌던 얼굴, 조금은 가빴던 숨, 감은 눈 끝에서 하늘하게 흔들리던 속눈썹들.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낫지. 사코다는 그렇게 위로한다. 언젠가 자각할 연심이었다면 빠를 수록 좋았고, 어차피 차일 것이라면 헛된 희망에 앓는 일 없이 빠르게 차이는 게 좋았다. 물론 자각과 동시에 깨지는 건 너무 무참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형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뭐든지 함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사코다 켄은 후루이치 사쿄에게 순정과 의리를 모두 바쳤으니 그저 충견만 되어도 만족한다.
좋은 기억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쁜 기억을 생각하는 쪽이 훨씬 많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누가 그랬지. 고독은 공기 중에 있어서 불현히 들이쉰 숨에서도 순식간에 감염되는 법이다. 상식적으로 그것은 이질이다. 함께 있는데 고독을 기억하는 것, 나쁜 기억을 생각해버리는 것, 사람은 원래 혼자서 태어나는 법이니까.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나름의 노하우를 알려준 선배가 있었다. "우리는 병에 걸린 거야."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해준 적은 없고 그녀도 자신의 얘기를 한 적 없다. 고독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동지애는 있었다. 유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고독에 익사해가고 있었으므로 같은 침대에 누워도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사쿄 군, 그거 알아? 그런 실험이 있었대.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고 그 사람의 손목을 긋는 거야. 아니, 칼 같은 거 말고. 그냥 조금 따끔한 그런 거. 상처는 나지 않아. 피부가 조금 불거지긴 할까? 그 팔목 위에 물이 뚝뚝 떨어져서 흐르게 만들고 말하는 거지. 당신은 지금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몇 시간 후에 당신은 실혈사할 수도 있겠네요. 그럼 어떻게 되게? 눈이 가려져 있으니 확인할 수도 없고, 손이 묶여 있으니 만져볼 수도 없지. 그럼 체온이 서서히 내려간대.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추위도 느끼지. 실내온도는 그렇게 춥지 않은데.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다는 거야.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는데 정말 실혈사하는 것처럼 천천히.
"술안주치곤 우중충한 얘기군, 유키시로."
"그래? 하지만 어른은 다 그렇지 않아? 사쿄 군은 어때. 외롭지 않았어?"
그렇게 물으면 상대방의 미간엔 살짝 골이 생긴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누구도 외롭지 않은 시간은 없겠지만 뭐라더라,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니까. 유키시로 아즈마는 자신의 고독을 누군가와 처음 나누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 고통을 본인만큼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해하고 기다려 줄 사람이 생겨서 기뻤다. 찬물과 더운물이 섞이는 것처럼, 푸른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처럼 같은 액체라도 휘저어줘야 똑같은 온도와 똑같은 성질의 무언가로 변한다. 아즈마는 그것을 기다려주고 있는 극단원들에게 감사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같은 성질의 고독을 아는 사람과의 유대는 좀 더 특별하다.
"외로움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었지."
아즈마도 본 적 있다. 초대 여름조의 공연 비디오. 저 멀리서 공연을 보고 있는 자그마한 꼬마가 사쿄 군이라고 해서 어쩐지 감격하고 또 웃고 말았다. 무뚝뚝한 사쿄 군에게도 저런 귀여운 시절이 있었구나. 잘 컸네. 하면서 머리를 쓱쓱 문지르면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쿄가 한 말이라곤 "…그런 건 학생들한테나 해주라고."뿐이었다. 고지식하게 장유유서가 확실한 사쿄가 극단원 중 유일하게 연상인 아즈마에게 함부로 소리 지르거나 잔소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아즈마를 포함한 모든 극단원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외롭다고 느꼈던 건 중학교까지다. 그 다음부턴 돈 벌 궁리만 잔뜩하고, 심심찮게 몰려드는 놈들이 있었으니 외롭진 않았지."
그렇게 말하며 사쿄는 악동처럼 웃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고등학생 때의 활극이라도 생각하는듯 악랄하게 불타올랐다가 사라졌다. 못된 얼굴. 아즈마는 조용히 웃었다.
"사쿄 군은 가끔 어린애처럼 웃어."
"아직 덜 자란 어린애일지도 모르지."
"사쿄 군이? 의외네.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항상 잔소리하고 어른스럽게 굴려고 노력하잖아. 가끔 보면 유치원 인솔 교사 같아."
"평균 17세의 유치원생들이라……. 흥미롭군."
하지만 뭐, 그래. 나는 고집스럽고, 자존심도 세니까. 그런 어리광은 고등학생의 특권이지. …세대차이하곤 별개의 얘기다, 유키시로. 냉정한 사쿄의 자기판단에 아즈마가 또 웃음을 터뜨리면 사쿄는 눈을 샐쭉이며 잔에 들어있던 사케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아즈마도 적당히 들고 있던 잔을 비우면 따뜻한 술은 이미 예전에 식은 모양이었다. 사쿄 군이랑 얘기하면 늘 이렇지. 시간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특별히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에겐 적당히 편한 공기가 있었다. 어린 애들은 벌벌 떨고 있지만 아즈마에겐 그가 잔뜩 꾸며낸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오랜 시간 속에 축적해 온 고독의 향취가 먼저 느껴졌다. 가을조는 이상하게 외로운 사람이 많지만 그의 것이, 아즈마는 자신의 것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다. 혹은 자신의 '손님'들과. 하지만 어떨까.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우리는 여기가 아니면 만날 일이 없었을 것 같아."
"다 비슷한 것 같은데. 내가 중학생하고 만나게 되면 그 다음에 만나는 건 짭새겠지."
아. 그 말에 아즈마도 저절로 상상이 된다. 온통 검은 옷에 인상 험악한 금발 남자와 그 옆엔 복장부터 시끄러운 딱 봐도 양아치, 그 앞엔. 그렇지. 성 플로라 중의 교복은 앙증맞은 세일러인데다 유키와 무쿠는 남자 중학생이라기엔 지나치게 얌전하고 예쁘장한 아이들이었다. 몇 마디 말만 섞어도 어쨌든 그 불온한 공기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번쯤 경찰을 생각해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경찰차를 탄 사쿄 군은…….
"어이, 유키시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상상할 필요는 없어."
불퉁한 얼굴의 사쿄는 한 번 또 째려보고는 술병을 털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 잔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즈마가 "한 병 더?"하면 사쿄는 고개를 젓는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얼굴은 느슨하고 여유롭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고독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고독에 익사해간다. 그것은 고쳐진 것 같아도 언제나 잠재된 바이러스이므로 시기가 맞는다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해 순식간에 영혼을 좀먹는다. 아무런 상처가 없어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고 고독은 그 정신 안에 있다.
그러나 후루이치 사쿄는 뭘까. 그에겐 그런 고독의 흉터가 있다. 일견 쓸쓸한 옆모습이 있다. 그에게도 홀로 있는 방이 지나치게 넓고, 어둠이 적막하여 반대로 눈이 감기지 않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이다. 영혼에 남은 흉터는 죽을 때가지 사라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긴 하지만 사쿄 군은 소이네야같은 건 찾지 않을 거니까."
아무리 외롭거나 고독해도 똑바로 대지를 딛는 견고함이 이상하게 그에겐 있었다. 유독 장신인 가을조에서 그는 불행하게도 타이치를 제외하면 가장 작은 신장이다.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니지만 꽤 험한 그의 직업이나 오랫동안 오는 시비 가는 시비를 가리지 않았다던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비교하면 마른 체구임엔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은 평소엔 잘 모른다. 옆에 오미 군이 있다면 꽤 작다 싶고, 욕실이 공동인 기숙사에서 가끔 볼 때도 새삼스럽게 놀라곤 한다. 생각보다 훨씬 마르고 작은데 사람들은, 아즈마도 그를 실제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소이네야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어항에서 익사해가지만, 후루이치 사쿄는 그 세계에 살면서도 유일하게 호흡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유영하며 가라앉는 사람들 속에서도 똑바로 다리를 펴고, 걷고, 숨을 쉰다. 그는 유키시로 아즈마가 아는 유일한, 불치병의 면역자였다.
"유키시로."
"응?"
어떻게 하면 숨을 쉴 수 있을까. 그 방법을 물어도 후루이치 사쿄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선천이고 후천이다. 지난한 세월과 경험과 그의 강인한 사고가 오랫동안 쌓아 만든 것이니 본인도 모르겠지. 아직도 쓸쓸한 그림자 속에서 있는 것같은 아즈마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봐. 눈이 와."
"아, 정말이네."
아즈마가 한껏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제법 눈의 크기가 컸다. 바람이 세게 불진 않아 두둥실, 천천히 가볍게 떨어지는 눈들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차게 반짝였다.
"겨울을 좋아해."
창 밖을 보던 사쿄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해도 빨리 지고 추우면 사람이 모이니까. 겨울엔 어머니가 일찍 일을 마치고 오셨거든. 밤에도 딱 붙어 자고. 그래서 좋았어."
"그렇구나."
나는 싫었는데. 아즈마는 약간 비웃고 싶은 기분이 됐다. 지독히도 추웠다. 아무도 없는 방이, 누구와 붙어있어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처럼 한기가 들어 이가 딱딱거렸다.
"눈은 얼음이니까 차갑지만 반짝거리지. 도쿄에선 내리는 일이 드무니까 밤새 내려서 새하얗게 쌓이기라도 하면 다들 모여서 눈싸움 하잖아."
"좋아하는 걸 말하는 시간이야?"
아즈마의 전에 없이 묘하게 날선 반응에도 사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 잠이 안 와서 나침반을 두고 어디가 동쪽인지 확인한 다음 해가 뜨는 걸 볼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햇살에 비친 눈이 반짝거려서, 아름다웠거든."
"사쿄 군?"
내내 창밖을 보고 있던 사쿄의 시선이 아즈마를 향한다.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엄격하고 적당히 쑥스럽고 다정한 얼굴이다. "좋은 이름이지." ……위로가 서툰데 정이 많은 남자는 정말 살기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아즈마는 사쿄의 길고 긴 말들이 결국 오늘따라 수상쩍을 정도로 외로워하던 저를 위한 위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지나친 에두름에 아즈마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사쿄를 바라보면 멋쩍은 얼굴의 사쿄는 큼큼거리며 일어나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는 쟁반을 들고 일어선다.
"오늘은 이만 하지."
"아주 귀여운 소리도 들었으니 그래야지."
"…시끄러워."
"내일 일어나서 눈이 쌓여있으면 다같이 눈싸움이라도 할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애들은 알아서 눈투성이가 될 거다. 눈투성이로 젖은 현관이라니 끔찍해."
"눈싸움 하는 거 좋다 그러지 않았어?"
방금 한 말을 기억하며 아즈마가 물으면 사쿄는 말이 막히는지 한참 있다 "눈싸움을 좋아한단 말은 안 했어."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 사이에도 잘 자라는 인사는 빼먹지 않는 것이 사쿄의 예의바름이다. 문이 닫히고, 밤은 깊었다. 술자리는 끝났으니 피부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잠이 들 시간이었다. 유키시로 아즈마는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면서 문득 생각한다. 혹시 나도 지금 숨을 쉬는 법을 배우고 있지 않을까, 하고. 아까까지는 입고 있는 옷 사이로도 한기가 들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춥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