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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흑] 네가 보는 세계
사실 쿠로코까진 나올 생각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쿠로바스 처음 볼 때 쓰고 싶은 게 이거였습니다. 미도리마는 감각이라고 해도 어쨌든 3점슛은 노력으로 이뤄진 감이고
키세는 일단 센스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농구에 대해서 시각도 다르고 세계도 다르겠죠. 아오미네를 동경이라고 한다면 미도리마는 존경? 같은 느낌으로. 아니 뭐 이건 나중에 한 번 쓰게 될 지도 모르는데 녹황 얘기일 거 같고.
하여튼 미도리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미도리마의 세계를 보는 키세가 보고 싶었습니다. 겨우 쓰고 싶은 걸 쓰게 돼서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금 선선해진 부드러운 미풍, 낡은 체육관의 페인트가 갈라진 우둘투둘한 벽, 융이 결을 만드는 부드러운 시트, 가죽가방 손잡이의 미세한 균열, 맞닿은 손의 체온, 희미하게 들뜬 열기. 코트 위에서 공을 잡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테이핑 되어 있는 너의 손가락은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걸까.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너의 그 손가락이라도 맞닿아 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미도리마의 손가락은 늘 테이핑 되어 있다. 손톱은 언제나 짧게 가다듬어져 있고 농구공을 잡을 때의 그 손가락은 한치의 결점도 없이 매끄럽다. 그 정도로 정밀한 감각을 유지하려면 당연하지만 키세는 늘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테이핑, 입니까?"
쿠로코가 기가 막힌 듯 밀크쉐이크를 빨대로 빨아들이며 물었다.
"그렇슴다. 미도리맛치는 코트 위의 감각 대신에 평소에 감각을 전부 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미도리맛치가 보는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늘 그렇듯이 키세가 교복을 입고 불쑥 나타났다 싶더니 자랑스럽게 짜잔, 하고 보여준 열손가락은 확실히 꽁꽁 감겨져 있었다.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키세답게 테이프는 조금 엉망진창으로 감겨져 있었지만.
"그래서 어때요?"
"불편함다."
딱 잘라 말한 대답에 쿠로코는 먹고 있던 밀크쉐이크를 조금, 뱉을뻔했다. 그런 걸 도대체 왜? 라고 묻고 싶지만 키세의 의중도 대충 짐작이 가니 할 말이 없었다. 중학교 때의 키세도 그런 말을 했었다. 미도리맛치 안 불편합니까? 미도리마는 전혀,라고 대답했지만 그 때부터 키세는 어딘가 눈을 반짝이며 미도리마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겨우 실행에 옮겨진 거겠지. 남의 연애사정에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자격도 없지만 쿠로코는 헤어지기 전 키세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키세 군."
"네? 왜요, 쿠로콧치?"
"그렇게 한다고 미도리마의 맘을 알 수 있는건 아니에요."
좀 더 돌려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복잡한 건 쿠로코는 할 수 없다. 해가 길어져 이제야 겨우 노을이 지는 길목에서 쿠로코는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키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이 얼마나 불쌍한 짝사랑인지.
키세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모든 사람은 아니고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한다. 숨길 줄도 모른다. 문자도, 전화도 끊이지 않고 만나면 늘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달라붙는다. 조금 불편한가, 생각도 해보지만 누군가 전력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그걸 전력으로 표현할 일도 없으니 의외로 이건 기적이 아닐까 쿠로코는 가끔 생각해본다. 키세에게 쿠로코는 독특한 팀메이트, 아오미네는 동경의 사람, 무라사키바라는 신기하고 - 아마 여러가지 의미로? - 아카시는 존경하는 캡틴, 최근엔 카가미도 그 대열에 올랐다. 아마 키세 안에서는 농구 잘하는, 괜찮은 쿠로코의 친구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도리마는?
-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키세의 문제점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아요 한 마디면 몽땅 해결되니 미도리마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이를 키세 본인도 모른다는 점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쿠로코는 양치질을 하다 문득 어제 키세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생각할 때면 늘 그렇게 웃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언제나 하이텐션인 키세라도 불쌍해져서 쿠로코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To. 미도리마 신타로.
키세군은 역시 모르겠지. 석양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미소는 피는 순간 져버릴 것 같은,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처연하다는 걸.
쿠로코가 키세를 동정하고 있거나 말거나 전해지는 일도 없는 마음을 끌어안고 짝사랑 2년 째, 키세 료타, 카이조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10월 어느 날의 아침은 특별한 전조도 없이 평범하게 밝았다.
솔직히 테이핑은 불편하다. 처음의 답답함은 곧 익숙해졌고 풀고 나서 공을 잡을 때의 감각이 조금 민감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손가락이 보호가 되는걸까? 정말로 보호하고 싶으면 벙어리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문득 한여름에도 벙어리 장갑을 끼고 다니는 미도리마를 상상하곤 웃어버렸다. 아아, 확실히 미도리마라면 한여름에 럭키아이템으로 벙어리장갑이 나온다고 해도 끼고 다닐 것 같지만 음. 보기엔 좋지 않지. 그리고 그랬으면 키세는 정말 미도리마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테고 그러면 이런 짓, 애초에 하지 않았을까.
"그럼 좋았을텐데."
부활동이 끝나고 연습한답시고 늦게까지 남아있느라 이미 텅 빈 탈의실에 쓸쓸한 목소리만 울린다. 미도리마를 감싸는 공기는 늘 이렇게 정적이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 너무 진지해서 탈이지만 - 먼저 입을 열지 않고서야 말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남자에게 왜 반했을까. 키세는 늘 그게 의문이었다. 이왕이면 아오미넷치나 쿠로콧치 쪽이 훨씬 나았어요! 아오미넷치는 그 땐 1on1 정도는 해줬고 쿠로콧치는 귀여우니까! 혼자 속으로 툴툴대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샌가, 어디가 좋아서인지도 모르게 좋아해버렸다. 신경쓰이고,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골대를 응시하다 이윽고 공을 던지는 가벼운 손목의 스냅,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처음엔 그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미도리마는 집에서도 저러고 있는걸까? 농구공을 잡을 때 빼고는 늘상 테이핑을 하고 있는걸까? 그러면 모르는 걸까. 조금 선선해진 부드러운 미풍, 낡은 체육관의 페인트가 갈라진 우둘투둘한 벽, 융이 결을 만드는 부드러운 시트, 늘 들고 다니는 학교 가죽가방 손잡이의 미세한 균열, 너에게 슬쩍 뻗은 손가락 끝으로 내가 느끼는 손의 체온,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들떠버리는 나의 희미한 열기. 그런 건 전부 모르니까, 아마 닿지 않으니까 너는 모르는 거겠지.
그러니까 키세도 손가락을 감아두는 것 뿐이었다. 중학 시절은 꿈이었던 것처럼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예전의 팀원들을 그리워 하지도 않고 서로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팀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오히려 그 쪽에 가서 마음에 맞는, 무려 리어카로 모셔다주는 친구를 만났으니 키세 따윈 맘에도 없겠지. 손가락 끝으로 그런 공기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쿠로코에게는 말했지만 사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미도리마가 둔해지면 키세 본인도 무뎌지면 그만이었다. 예민한 손가락 끝의 감각을 온통 묶어버려서 그런 건 잊어버리고 싶었다.
"겨우 다 됐네."
미도리마처럼 예쁘게 감기진 않았지만 테이프로 꽁꽁 묶인 열 손가락을 바라본다. 피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묶어버려 옥죄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손 끝으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싫었다. 기분전환으로 볼을 두어번 치고 키세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가서 숙제도 하고 다음주 스케쥴 확인도 좀 하고 그리고 또―
해야할 일을 하나씩 손으로 꼽으며 락커룸을 나서 걸어가던 키세는 그러나 시야에 잡힌 인영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미, 미도리맛치?"
아무리 눈을 부비고 깜박여봐도 눈 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미도리마였다. 어느 새 해도 져 캄캄한데 미도리마는 언제부터 있었는데 남의 학교에서 버젓이 다른 교복을 입고 락커룸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게 사실이었군."
"에?"
"'카이조의 키세가 슈토쿠의 미도리마를 따라잡으려고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라는 소문."
"그런거 아님다. 그 전에 이게 '이상한 짓'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에요?"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그런다고 3점슛 확률이 올라갈 일은 없는 거다."
"너무해요, 미도리맛치! 아무리 미도리맛치보다 못해도 저는 올라운더라구요! 슈팅도 자신있거든요?"
"그래봤자 넌 안되는 거다."
물론 3점슛을 쏘기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지만 딱 잘라서 단호하게 말하는 미도리마의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 뭐가요? 뭐가 안되는 건데요? 내가 미도리맛치를 잊는 거? 포기하는 거? 다시 원래대로의 키세 료타로 돌아가는 거?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안돼요?
무언가 울컥-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눌러참고 간신히 키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미도리맛치가 신경 쓸 바 아님다. 그나저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미도리맛치 집에 안 갑니까? 왜 남의 학교에?"
"네가 늦게 나온 탓이다. 이렇게 늦을 줄은 나도 몰랐어. 매일 이 시간까지 연습하는 건가?"
"매일은 아닌데, 거의? '저 쪽'의 스케쥴도 있어서 못하는 만큼 해야되니까요."
"성실하네."
"전 아오미넷치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미도리맛치 다른 용건 있어서 온 거 아닙니까?"
대화를 하며 학교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미도리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걷던 키세는 학교 밖으로 빠져나오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미도리마가 용건도 없이 남의 학교를 올 사람이 아닌데?
"너 때문이라고 얘기한 거다."
"왜요? 손 때문이라면 그냥 문자만 보내는 게 낫잖아요? 보내도 답신도 안하는 미도리맛치지만."
아니면 '죽어' 라든가.
오지 않는 답신을 기다리기 싫어 미도리마에게 안부문자를 보내지 않은 지도 꽤 된 것 같다. 답신을 받아봤자 기껏해야 '죽어'라든가 냉정한 대답뿐인데 거기에 목매 열심히 저장함에 옮겨둔 적도 있더랬지. 그래, 집에 가면 숙제 하고 스케쥴 체크하고 그것부터 지워버리자. 그런 생각을 하며 키세가 터벅터벅 걷고 있으려면 옆에서 미도리마도 말 없이 따라오다가 갑자기 또 툭 내뱉었다.
"쓸데없는 짓인 거다."
"뭐가요?"
"그 테이핑. 네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니 나까지 소문에 휩쓸리게 된다. 그런 건 싫어."
"별로 미도리맛치한테 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특허낸 것도 아니고."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다. 당장 풀어."
"저도 싫슴다. 계속 하고 다닐 거에요."
"풀라고."
"싫슴다."
"그런 걸 카피한다고 농구실력이 늘진 않는 거다. 그러니까 하지 마."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다니까요!!!!"
억지로 키세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 끝의 테이프를 뜯어내려는 미도리마의 팔을 키세는 쳐내면서 소리쳤다. 키세의 격렬한 반응에 미도리마도 놀랐는지 잠깐 멍하니 키세를 응시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까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걸 카피한다고…"
"카피라고 하지 마!!!! 쓸데없다고도 하지 마!!!!!"
소리 친 키세 본인도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악을 지르듯이 내뱉는 키세를 미도리마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끔벅끔벅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미도리맛치는 아무것도 몰라요! 카피가 아냐! 머리만 좋지 둔하고, 맨날 그렇게 손을 다 묶어두니까 아무것도 안 닿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그만 할 거에요! 미도리맛치한테 문자도 안 보낼거고, 연락도 안 할 거고, 구경도 안 가고, 그럼 되잖아요! 이런 것 정도는 하게 해줘요!! 어차피 안될건데 나도 좀 잊어보게!!! 둔해서, 눈치라곤 꽝이니까!!! 나도 그것 좀 닮아보자구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한적한 공원 근처라고 해도 밤중에 남고생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 누구든지 흘끔흘끔 쳐다보기 마련이다. 미도리마는 그게 몹시 신경 쓰였는지 주변 눈치를 보는 듯 했지만 키세는 그것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데도 손가락으로 훔치면 테이핑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눈물은 차가울까 따뜻할까, 젖어가고 있는 걸까, 얼굴은 뜨거울까. 멍청한 미도리맛치. 바보같은 미도리맛치.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잖아요, 이거.
"저… 키세?"
미도리마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주저앉은 키세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키세는 맹렬하게 뿌리쳤다. 늘 그렇듯 테이핑 된 미도리마의 손에 닿는 감각을 키세는 이제도 안다. 아무리 닿으려고 해도 닿지 않는다. 닿지도 않을 진심은 필요 없었다.
"가요. 늦었고, 내일부턴 안 할테니까, 가요, 미도리맛치."
"어이…"
"소리질러서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탓은 아니에요. 다 내 잘못이죠.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진짜였어요. 전 진 거에요. 미도리맛치를 못 이겨요. 안되는 게 당연하죠. 미도리맛치가 늘 말하는 것처럼 이런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에요. 이제 그만둘래요, 진짜 전부 다."
"키세."
"미안해요.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다시는 이런 짓 안할게요. 그냥, 궁금했었어요. 매일같이 좋다고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미도리맛치 옆에 있으면 들떠서 못살겠는데, 쿠로콧치는 티 좀 그만 내라고 불쌍한 듯이 쳐다보는데 정말 미도리맛치는 눈치를 못챈걸까, 모르는 척 하는걸까 그래서 해봤어요. 진짜로 이거 하고 있으면 뭔가 감각이 둔하네요. 왠지 쉽게 접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키세 료타."
"지금 그렇게 부르지 마요. 좀만 시간을 줘요. 나 그러면 완벽하게 그냥 중학 동창쯤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면, 그 정도도 안됨까?"
"사람 말하는데 중간에 말 자르지 마!"
고개를 땅바닥에 쳐박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키세는 갑작스런 미도리마의 일갈에 고개를 들었다. 미도리마의 화가 났 듯 찡그린 얼굴에 키세는 그제서야 자기가 할 말 못 할 말 몽땅 털어내버렸단 걸 깨닫고는 눈물을 훔치며 사과했다.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화났슴까?"
"화 안 났어."
"미안해요. 그냥, 그냥,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
"말 끝까지 들어. 화 안 났다고 얘기하는거다, 나는."
"그, 그래도 미도리맛치 화 난 얼굴이잖아요?"
멍청하니 그렇게 되물으면 미도리마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멋대로 시작하고 멋대로 끝내니까 안되는 거다, 너는."
"네?"
"확실히, 네가 말할 때까진 하나도 몰랐어."
"뭐가요?"
"그러니까 그… 먼저 반했다… 든가, 들떴다든…가…"
차마 낯 부끄러워 말할 수가 없는지 더듬더듬 얘기를 꺼내는 목소리에 키세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쳤지. 미쳤구나, 키세 료타!! 그냥 혼자 시간 죽이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잊혀질 걸 왜 말을 꺼내서! 입을 열어서!!! 이 가벼운 주둥아리를 찰싹찰싹 치고 싶은 것을 느끼며 키세는 입을 꽉 다물었다. 키세가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면 미도리마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테이프는 풀어."
"왜 얘기가 또 그 쪽으로 갑니까. 그냥 내버려 달라구요."
"정말로 테이핑을 두 명이나 해버리면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단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네?"
헛걸 들었나 싶어 키세가 다시 고개를 올려다보면 미도리마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 결국 키세의 손을 잡고 같이 쭈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테이프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야 어디까지나 신중한 슛을 위해서라지만 너는 필요도 없고… 거슬리는 거다."
"…?"
"테이프 말야. 손, 잡아도 느낌도 안나고 무엇보다 너는 안 어울려. 얼굴도 아니고 손가락도 너는 예쁘니까…."
"미도리맛치, 뭐 잘못 먹었슴까? 열 나나? 괜찮아요?"
호들갑을 떨며 이마에 손을 대보는 키세의 행동에 미도리마가 다시 한 번 푹 한숨을 쉬더니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네가 좋다고 말하는 거다."
그 말에 키세는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다가 미도리마의 이마로 가 있던 손을 자기 머리에 대보고는 중얼 거렸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왜 환청이…."
"환청 아냐.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꿈도 아니다. 똑바로 들었으면 한 번에 알아들어야 되는 거다. 어디까지 모자른 짓만 할건가, 키세."
그제서야 간신히 키세는 미도리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뚝뚝 쏟아져 내린다. 당황해 허둥지둥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는 미도리마의 손을 붙잡고 키세는 물었다.
"정말로 꿈 아닙니까?"
"진짜다."
"미도리맛치가 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냐."
"내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아냐. 아니니까 그만 울어."
키세에게 붙잡힌 한 쪽 손 대신 다른 쪽 손으로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꺼낸 미도리마가 눈물범벅인 키세의 얼굴을 닦아주는데도 이상하게 아까보다 눈물이 더 펑펑 쏟아져내렸다. 테이프를 푼 손가락으로 떨어진 눈물은 따뜻했고 테이핑 된 미도리마의 손가락도 어쩐지 따뜻한 것 같았다.
"키세 군, 그래서 이제 테이핑은 안하는 거에요?"
"그렇슴다! 역시 체질에 안 맞아요!"
"미도리마 군의 세계는 어떻던가요?"
"조금 불편하지만 나름대로 재밌었슴다. 다시는 안 할 거지만."
어느 날과 같이 또 짜잔, 하고 나타난 키세의 열 손가락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고 흰 손가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쿠로코는 안도하고 밀크쉐이크를 들이켰다.
"저도 이해는 해요."
"뭘 말입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기분요."
"어라, 쿠로콧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겁니까?"
"있어요."
너무 단숨에 나온 말에 키세가 잠시 이해를 못했는지 버벅거리다가 으에에에에에?! 하는 괴성을 내뱉었다. 시끄러워요, 키세 군. 주변에 민폐에요. 죄송함다, 쿠로콧치. 그렇지만 누구요? 몰랐는데! 쿠로콧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나한테 얘기도 안하고 너무해요!
쭈욱 빨아먹던 밀크쉐이크가 어느 새 사라졌는지 빈 컵의 공기만이 요란하게 빨리는 소리에 쿠로코는 물고 있던 빨대를 뺐다.
"그 사람의 세계를 저는 너무 잘 이해했어요."
"엣, 그럼 사귀게 된 거?"
키세의 말에 쿠로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뇨.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했거든요. 그 사람의 시야는 온통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것 뿐이었으니까."
"그럼? 쿠로콧치는 그냥 포기한 겁니까?"
"별 수 있겠어요. 그걸 알고나면 할 수 있는 건 그냥 행복하도록 밀어주는 수밖에 없죠."
"쿠로콧치, 굉장한 로맨티스트네요."
"키세 군이 행복해졌으니까 됐어요. 여기서 헤어질게요. 잘 가요, 키세 군."
쿠로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나보다. 팔을 붕붕 흔드는 키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쿠로코는 발걸음을 옮겼다.
키세의 세계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보였다. 키세를 보고 있으면 키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 지도 보였고 버릇처럼 말하는 '좋아한다'는 단어가 한 사람에게만 특별하단 것도 깨달았다. 쿠로코가 파고들 틈도 없이 키세의 세계는 온통 미도리마를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키세가 행복해졌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그 날의 문자는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쿠로코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미도리마에게 그 날 자신이 문자를 보내지 않았으면, 키세가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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