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Orphans/SS에 해당되는 글 19건
- 2016.07.24 [건담오펀즈/맥가엘]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 2016.05.22 [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 2016.05.15 [건담오펀즈/아인가엘아인] 춤
- 2016.04.12 [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글
[건담오펀즈/맥가엘]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지인이 돌린 진단메이커에서 나온 맥가엘 키워드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마지못해 내민 손의 온기를 기억한다. 언젠가의 무더운 여름, 맞잡은 손바닥의 틈에 축축한 땀이 고여 가엘리오는 부끄러웠다. 당장이라도 손바닥을 닦고 싶었으나 한 번 손을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가엘리오.
메마른 목소리가 내뱉은 제 이름은 철자 하나하나가 이질적이었다. 앞으로 익숙해져야지. 속으로 그 음절들, 목소리, 분절되지 않는 파동의 덩어리를 꼭꼭 짓씹어 또 되새기며 가엘리오는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많이 제 이름을 부르길 원했다. 더 오래 손을 잡고 싶었다.
첫 친구였다. 당장 함장이 되어 우주로 나가고 싶어하는, 고작 세 살 어린 가엘리오 앞에서 어른인 체하는 카르타가 아니라, 정말로 똑같은 나이의. 손을 잡고 드넓은 잔디언덕을 굴러떨어질 것처럼 내달리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가엘리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쁨이 색색깔의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펑- 입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하하-, 달음박질친 언덕의 끝머리에서 속력이 잦아들 무렵엔 할딱이는 숨소리엔 기어이 웃음이 섞이고 말았다. 그렇게 저도 못이기고 가엘리오는 소리를 내고 말았는데, 문득 반짝거리는 금발의 뒷통수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여름의 무성한 녹음과 같은 눈동자가 여름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가엘리오를 응시했다.
뱀과 눈이 마주친 쥐새끼마냥 가엘리오는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방금 전까지의 행복감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입 안에서는 공허한 마른 소리만 났다. 방금 전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불쾌한 단내가 혀 밑에서 느껴졌다.
"아…어, 그, 손… 놓을까?"
마른 입술을 핥으면서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심 그의 대답이 긍정일까 두려웠다. 내쳐지기 전에 미리 슬금슬금 빼는 손가락을 맥길리스는 꽉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 말야-…….
그 다음 나올 단어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가엘리오는 꼴깍, 침을 삼켰다.
*
비린내엔 익숙했다. 망망대해도. 어느 연합에도 속하는 일 없이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걀라르호른의 일곱 가문은 반드시 내륙에서 떨어진 곳에 거주해야 했다. 따라서 일곱 가문 모두가 폐함선을 가라앉혀 만든 인공섬 위에 가택을 갖고 있었고, 편의를 위한 일부 지역만이 완전 중립구역으로 지정되어 안정감 있는 대지 위에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는 어딜까.
별의 위치와 해가 뜨고 지는 방향, 시간을 가늠해 봤을 때 남반구의 어디쯤이란 사실까진 알 수 있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위도와 경도는 수치상의 얘기일 뿐이었다. 비행선과 우주여객선의 항로를 모두 비켜나가는 바다 한 가운데, 열여덟에 머리가 터져나가라 외운 1:75000 축척의 세계지도에도 없을 곳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걸 가엘리오가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창을 열어둘 리가 없었다.
그 어떤 고문이라도 달게 받으리라 다짐했으나 그런 일은커녕, 지나칠 정도로 안락한 생활이었다. 방은 널찍하고, 음식은 신선했다. 가엘리오는 특별히 묶여있지도 않았다. 커다란 2층 저택의 어느 방이든 들어갈 수 있었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현관을 나가 주변을 산책할 수도 있었다. 유일한 하녀인 슬라브 계 아가씨는 귀가 멀고 혀가 잘렸어도 독순술을 할 줄 알았으나 굳이 가엘리오가 반듯하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커다랗고 예쁜 눈을 깜박이며 귀신같이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곤 했다. 문자를 쓸 줄도 알아 간단한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가엘리오는 시시한 잡담에 은근슬쩍 유도 신문을 넣어봤으나 그녀도 여기가 어디인지, 누구의 집인지,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모르는 듯 했다.
하루는 너무 길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열두살부터 시험공부를 하느라 철야한 다음 날 빼고는 일곱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빈 시간에 공식적으로 정해진 일과는 오로지 식사시간 뿐이었다.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운동하고―
"―과자집에 갇힌 헨젤이잖아."
"그 동화 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들려 가엘리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청력이 떨어졌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제로 무뎌졌음도 사실이겠지. 일상을 잃은 신체는 하루가 다르게 퇴보했다. 근력은 떨어졌고 손바닥의 굳은살은 허벅지 안 쪽만큼이나 부드러워졌다. 그 지루한 날들 속에서 가엘리오는 꼬박꼬박 하루 네 시간씩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언어를 모두 까먹고 백치가 되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맥, 길리스."
말하면서도 제가 부르는 것이 누구인지, 이 이름이 맞는지, 이렇게 발음하는 거였는지, 철자는 무엇이었는지 가엘리오는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숨은 어떻게 쉬는 거지? 하고 물어보면 숨 쉬는 법을 까먹는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하루 열 두번도 넘게 부르던 이름의 낯섦이 가엘리오를 과거와 그를 명백하게 유리한다.
"잘 지내고 있단 얘긴 들었어."
"…안 그러면 억울할 거 같아서."
어금니가 맞물려 뿌득뿌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맥길리스는 평소와 같았다. 행거에 걸리는 재킷과 잘 차려입은 쓰리피스의 정장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포켓에 들어있는 푸른 실크 행커치프는 익숙했다. 가엘리오가 그의 스무살 생일에 선물한 것이었다. 자주 착용하지는 않는 손목시계는 다이얼판이 컷팅된 운석이었고, 구두는 맥길리스가 애용하는 브랜드의 스테디셀러 라인이었다. 가엘리오 보드윈이 맥길리스 파리드에 대해 아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넌 과자는 별로 안 좋아해서, 그 남매가 이해가 안간다고 했잖아."
사실 난 이해했는데. 과자를 좋아해서는 아니고, 물론 너보단 좋아하지만, 딱 그만큼 굶어봤거든. 약간의 냉소 섞인 우아한 미소도 가엘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언제나 가엘리오를 보면서 그렇게 웃었다.
아인이 그렇게, 되고 난 이후에 - 가엘리오는 이 때를 회상할 때마다 제 머리에 20구경짜리 구멍을 내고 싶었다 -, 여동생의 약혼식 파티에서 - 이걸 생각하면 벽을 내리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러다 손가락이 세 개 부러졌다 -, 화성에서 지구로 오는 함선에서, 또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는 함선에서, 처음으로 제복을 입었을 때, 네가 사관학교 입학선서를 읊으러 가기 전, 우리가 같은 방을 쓰던 학창시절, 가을 축제에서 마창술 시범전을 끝마치고 말에서 내려오다가, 숙제를 까먹고 선생님한테 혼나면서, 같은 침대를 쓰던 별장에서의 여름방학, 그 때마다 너는 한결같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역겨움에 속이 뒤집힌다. 가엘리오가 입을 틀어막으면 맥길리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 구석의 빈 통을 내밀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쏟아내는 바람에 아예 그런 용도의 체면도 뭣도 없이 시큼한 위산이 식도를 역류해 쏟아졌다.
오늘 밥 조금 먹어서 다행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찡하고 매운 코 끝에 가엘리오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처음 눈을 뜨고 바라본 천장이 가엘리오에게 좀 더 익숙한 것이었다면 가엘리오는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무른 눈꼬리의 쓰라림과 온 몸을 압도하는 근육통, 카르타의 창백한 얼굴과 패널 위로 빛나던 그레이즈 아인의 콕핏 내부같은 것들을 모두 꿈으로 치부하고 맥길리스에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아. 맥길리스. 나, 지금 살면서 가장 끔찍한 꿈을 꿨어.
어렸을 때라면 분명 자다가 오줌 쌌을 거 같아. 대기권에서 맨몸으로 낙하하고, 심장이 열 두번 바닥으로 처박혀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그런,
"가엘리오."
이 곳에서 눈을 뜬 첫 날, 가엘리오가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하면 맥길리스는 그 옛날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엘리오를 불렀다.
달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커질 때까지 가엘리오는 기억을 반추하기도 버거웠다.
인류가 평균 한 세기를 살아내는 세상에서 가엘리오는 그 1/3도 채 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짧은 생일 수도 있었으나 가엘리오에겐 인생의 전부였다. 그래, 전부까진 아니더라도 90% 정도는 됐다.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차에서 내린 금발의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날 이후로, 모든 기억의 페이지엔 그가 있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던 순간들과 약간 흐린 날들, 무난하게 밝았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억나지도 않는 시절들조차 그가 옆에 있었을 거라고 가엘리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한 페이지의 어느 한 점에서도 맥길리스의 본심을 몰랐다는 사실이 가엘리오는 괴로웠다.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그 약간의 이상함을, 삐걱거림을 눈치챌 수 있었다면 괜찮지 않았을까. 자만임을 알면서도 할 수 있다면 가엘리오는 뭐든지 하고 싶었다. 처음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다정히, 너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좀 더 사랑하고, 아끼고, 속삭이고, 물어보고, 들었더라면――.
돌이키고 돌이키고 돌이켜보다 열이 올라 열흘을 앓아 누웠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릴 적에도 이렇게 많이 울어본 것 같진 않아.
그 얘길 했었을까. 너에게, 네가 없던 시절의 내 얘기를. 사실은 어두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우주가 무서웠다고. 그 시절엔 오롯이 혼자였다. 블랙홀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광막한 허무를 견딜 수 없어 겁에 질려 베갯잇을 적시고 잠드는 바람에 다음날엔 눈이 떠지지 않았다. 지금은 잊어버린 까마득한 옛날이라, 그러고보니 네가 그 얘길 듣고 코웃음쳤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기어이 네가 없던 시간들마저도 전부 너에게 나눠주었을까. 그래서 내 기억은 영원히 너와 함께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믿었을까.
내게 남은 것 한 줌 없이 나누어주어도 너는 전부 버렸을텐데.
어울리지 않는 지혜열이 내리고 난 뒤 가엘리오는 꽤나 명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온 몸이 진흙에 개어져 덩어리로 빚어진 것 같은 각성이었으나 곧 흙이 굳어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벼워졌다. 가끔씩 따라오는 후유증 같은 두통과 반사적인 구역질을 제외하면 컨디션은 좋았다. 가엘리오가 그럭저럭 맥길리스와 대화 비스무레한 걸 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공식상으로 죽은 남자를 왜 이 빈 집에 가둬 살찌우는지 궁금했으나 가엘리오는 묻지 않았다. 원래 세상엔 이토록 부조리한 일도 있는 법이었다. 남은 평생을 곱씹으며 살아야 할 지독한 배신의 순간이.
그래서 여전히, 일평생이 그러했듯 맥길리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가엘리오 보드윈은 귀가 멀고 혀가 잘린 벙어리 아가씨와 둘이 산다. 맥길리스는 한 달에 두어번 정도 왔다 갔다. 저녁은 함께해야 했고 핏물이 진득하게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면서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에게 선심쓰듯 가족의 얘길 해주었다. 멍청하게 속아넘어간 제 탓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가문의 이름과 칩거하신 아버지와 앓아누운 어머니, 풀 죽은 여동생의 이야기를. 약속한다는 말처럼, - 아직까진 - 성실하게 맥길리스는 알미리아에게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으로 돌아간 뒤엔 손에 잡히는 걸 전부 집어던진다 해도, 일단 이야기를 들을 땐 인내심을 갖고 있어야 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서로에게 빤히 보이는 패였으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너를 죽여야지. 열흘 동안의 머리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너를 죽여야지.
그건 복수심이나 배신감이라기 보단…, 그가 처한 고난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명확한 적. 공격해야 할 대상만 명확하다면 가엘리오는 모든 게임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눈 앞의 남자는 적이고, 그 외의 정보는 필요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는 미련도, 슬픔도, 분노도 없는 상태가 이상했다.
나는 어쩌면 너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가엘리오는 식어 엉긴 기름과 고깃덩이를 포크로 헤집으며 실소했다. 맥길리스가 간혹 이 곳에 올 때마다 의식처럼 치뤄지는 저녁 식사는 가엘리오에겐 늘 고역이었다.
맥길리스가 저를 살찌우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줄 때 받아먹어야 했다. 계획이 어떻게 되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전투를 앞둔 군인의 의무였다. 그런 의무감으로 가엘리오는 하루 세 끼의 식사를 마다하지 않고 꼬박꼬박 받아먹었으나 이 상태가 된 이후 기름진 음식은 통 소화시키지 못하는 위장 탓이었다.
음식은 뭐가 되어도 남기지 않는 게 자랑이었는데.
가엘리오는 더 억울해졌다. 제가 맥길리스 덕에 잃어버린 게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였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
맞은편에 앉은 맥길리스는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술을 훔치며 묻는다. 아-니. 너어무우 잘 맞는데. 이죽이며 대꾸했으나 도무지 식욕이 생기질 않는다. 그 뒤로 결국 한 조각도 먹지 못한 채 깨작대던 상을 무르고 가엘리오는 볼이 불퉁하게 부어있었다. 그 꼴을 보고 맥길리스는 뭐가 웃긴지 키득댔다.
"왜 웃어."
괜히 의자를 한 번 걷어차 보았으나 제 발만 아팠다. 아오, 이런 젠장. 낑낑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 맥길리스는 더 크게 웃는다. 분하게도, 이 남자는 이제 친구도 뭣도 아니지만 여전히 얼굴만은 잘생겼다. 저 얼굴이 저를 보며 미소 짓기를 희망한 적도 있었다. 희망이 현실이 된 뒤에는 조금 기뻤던 기억도 난다. 사실, 많이 기뻤다.
가엘리오는 불현듯 까마득한 과거를 상기했다. 처음으로 맥길리스와 대화다운 대화를 했던 날이었다. 손을 잡고 언덕배기를 달음박질쳐 내려갔다. 숨이 벅차도록 달렸고, 그보다 더 크게 감정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날, 맥길리스가 제게 뭐라고 했더라. 바보처럼 긴장해서 손바닥이 축축해졌고, 그게 부끄러웠고, 맥길리스가 돌아보면서.
"이상하지, 가엘리오."
"…뭐가."
"너는 지금 웃고 있는 날 보고 있지만, 예전엔 완전 반대였거든. 내가 너를 보았어. 네가 소리 내서 웃는 걸 그 날 처음 봤거든."
아. 젠장.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한껏 찡그린 가엘리오의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맥길리스는 말을 이었다.
"웃는 게 예쁘구나."
언젠가의 맥길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맥길리스도 무언가 생각하고 말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얼빠진 헛소리였는데, 그걸 갑자기 듣고 나서 가엘리오는 뭔가, 부끄러웠다. 칭찬? 칭찬인가, 그거? 어른들이야 그런 소리는 많이 했다. 가엘리오도 그 즈음엔 똑부러지게 감사합니다, 라고 답하는 법을 배웠으나 동갑내기 친구에게 듣기는 또 처음이라 무어라 답해야 될지 몰랐다. 어, 응. 어…….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답을 생각하던 사이 맥길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놀고, 사용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도련님들을 찾으러 올 때까지 내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웃는 게 잘 어울린다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웃지를 않는군."
"이런 환경에서 잘도 웃겠다."
"그게 이상한 거야."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가엘리오를 붙들고 살짝 눈꼬리를 휘면, 문득 가엘리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고 만다. 어딘지도 모르고, 단조로운 일상만 반복되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우리 둘이 있던 내 방, 응접실, 감사국의 사무실, 그런 장소에서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고 있다고.
"네가 웃는 게 싫었거든. 엄청 싫었어."
"……."
"그런데 가끔, 아쉬워서."
그렇게 말하는 맥길리스의 목소리는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가엘리오는 그냥 눈을 감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맥길리스는, 맥길리스는 어땠을지 몰라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버렸다. 그의 소중한 친우는 가엘리오와 같이 죽어,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엘리오의 닫힌 눈꺼풀 밑에서는 아름답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맥길리스는 그 닫힌 눈꺼풀을 보고만 있었다.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가엘] 사랑의 인사 (0) | 2016.10.26 |
---|---|
[맥가엘] (0) | 2016.10.24 |
[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0) | 2016.05.22 |
[건담오펀즈/아인가엘아인] 춤 (0) | 2016.05.15 |
[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0) | 2016.04.1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마냥 가엘리오를 핥는다. 약간 캐붕일지도.
0.
짐승은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하지만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겠지. 언어를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만의 특성, 우월성의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동물에 속하는 다른 것들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빈도가 인간보다 훨씬 낮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대신 시선으로 말한다.
욕망으로 광휘로운 눈동자.
1.
가엘리오는 고개를 들어 맥길리스를 보았다. 응? 층층이 쌓인 밀푀유는 아무리 좋게 먹으려고 해도 도무지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사실 밀푀유는, 가엘리오는 썩 좋아하지 않는 간식이었다. 혀가 녹아버리게 단 것 같은 디저트들은 도무지 가엘리오의 취향이 아니었다. 너무 단 걸 먹으면 속이 메슥거려서 그가 티타임 때 먹는 것은 세 개의 쿠키 뿐. 선호하는 디저트는 신선한 과일이다. 날 것이어야 한다. 익은 것도 싫었다. 물컹한 애플파이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라면 가엘리오는 케이크를 선택했다. 물론 채 한 조각도 먹지 못하지만.
그래서 가엘리오가 매번 한 두입 먹어보고, 매번 후회하는 디저트들은 맥길리스를 위한 것이었다.
도련님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하시다니 별 일이네요.
가엘리오가 바닥을 기어다닐 무렵부터 있었다는 주방장은 허리께까지 오는 작은 도련님의 부탁을 의아해했지만, 이내 그의 요청이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만이란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엔 묻지도 않고 알아서 화려한 티푸드를 준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전공은, 도무지 입맛 담백한 보드윈 가에선 선보일 일이 없었으나, 화려한 프랑스 식 디저트였다.
그리고 가엘리오는 손님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꼭꼭 한 입을 먼저 먹었다. 주방장이 잔뜩 멋을 부린 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디저트를 성심성의껏 포크로 으스러뜨렸다.
아 정말 밀푀유는 너무 먹기 힘들어.
투덜대면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핥아내는 혀는 말간 붉은 색이었다. 어린 맥길리스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광택의 혀에 순간 눈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무슨 말을 하려고 가엘리오를 불렀는지 순간 잊어버리고 맥길리스는 이상스러운 기분에 다시 책에 고개를 처박는다. 그 때 손에 들고 있던 동물도감 책엔 섬세한 터치와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동물들의 그림이 면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표범. 광택이 나는 검고 부드러운 털은 당장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유리구슬 같이 매끄러운 샛노란 눈동자는 얼핏 보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종이 안 쪽에서 살아 숨쉬는 동물들에게 맥길리스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뺏겼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눈으로 발화하는 욕망들.
사람의 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음 페이지의 풀을 뜯어먹는 가젤에게선 그런 날카로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까맣고 커다란 동공은 그저 무뎠다. 맥길리스는 조심스럽게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는 가엘리오를 훔쳐보았다. 가엘리오의 눈은 가젤과 닮아있었다.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하지만 저는. 만약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2.
"미안."
"괜찮아. 시간의 전후로 따진다면 이 쪽이 후자겠지."
"아니. 잊어버린 건 내 탓이니. 나중에 보상하지."
보상? 그래봤자 밥이라든가, 술이라든가 산다는 얘기겠지. 어느 쪽이든 맥길리스에겐 딱히 아쉬운 얘기는 아니다. 아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다음 휴일도 책임져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굳이 '보상'이 아니더라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휴일을 함께했다. '보상'은 좀 더 적당한 구실이 될 뿐이었다.
이즈나리오는 맥길리스가 집에 오든 오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엘리오는 혹여나 무슨 뒷말이 나올까 싶어 늘 이유를 만들어두었다. 제가 실수한 게 있어서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훈련을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 가끔은 맥길리스도 기함했다. 파티나 정치나 머리 복잡한 건 질색이라면서 뼛속부터 '세븐스타즈'라는 건지. 맥길리스는 가볍게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엘리오를 보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엘리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나이 지긋한 남자는 맥길리스도 몇 번 본 적 있는 솜씨 좋은 재단사다. 요즘 시대에는 드물게 원단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며 본을 뜨는 것부터 가봉까지 전부 직접한다는 장인이었다. 보드윈 가에선 행사가 있으면 늘 그에게 옷을 부탁했다. 가엘리오의 생일, 겸 결혼 시장이 코 앞이니 아마 그 때문이겠지.
맥길리스는 테이블에 앉아 기호에 맞지 않는 홍차와 여전히 다디 단 밀푀유를 포크로 잘라내며 맥길리스는 읽던 책을 엎어두고 가엘리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전신 거울 너머의 그는 골똘히 제게 맞은 원단을 고르기 시작한다.
인형이 된 것 같아서 난 싫은데 말야.
가엘리오는 재단사가 이것저것 원단을 대보고 수많은 샘플들을 입혀보고 거울 앞에서 품평 당하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 그 모든 과정을 질색했지만 그의 사교술은 그것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건 맥길리스 뿐이란 사실이 그의 은밀한 독점욕을 만족시켰다.
햇빛이 들이치는 방 안에서 희고 얇은 셔츠 밑 근육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탄탄하고 견고한 육체다. 넓은 어깨, 도드라진 견갑골, 팽팽하게 당겨진 광배근 사이의 움푹 패인 꼿꼿한 척추, 군살 하나 없이 들어간 허리, 오밀조밀하게 꽉 들어찬 실루엣은 튀어나온 곳 없이 매끈한 선을 그린다. 그 중 곡선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승모근의 목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랜스를 주로 쓰는 보드윈의 특성상 누구보다 발달된 - 아마 맥길리스보다도 - 승모근은 퍽 아름답다. 실루엣으로 본다면 그 단단한 근육에 비해선 한 장의 얇은 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선이 가엘리오 보드윈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지탱하는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맥길리스의 시선은 그의 어깨와 목에서, 이윽고 앞으로 돌아간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잘 조형된 삼각의 흉쇄유돌근, 튀어나온 목젖, 깊게 들어간 턱을 따라가면 또렷한 옆선이 얼굴에 입체감을 선사한다. 커다란 눈동자가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얇게 층진 쌍커풀이 말려 올라가는 게 신기했다.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재단사는 익숙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손때 묻은 줄자를 가엘리오의 목에 두른다.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에 당황한 가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 저 목에는 초커 같은 것도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가엘리오는 목이 졸리는 걸 싫어해서 목 위로 높이 올라오는 셔츠나 터틀넥은 절대 입지 않는다. 규격이 정해져 있는 군복조차 부러 몰래 몇 밀리쯤 낮은 목깃의 셔츠를 만들어 입는 가엘리오다. 어색하게 그 목을 조를 검은 선과, 기분 나빠하면서도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차마 벗지는 못하고 머뭇거릴 가엘리오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랫배가 뻐근해진다.
그의 무른 성정은 아무리 싫은 것이라도 제가 호의를 보내는 사람의 것이면 거절하지 못한다.
농담인 척하면서 정말로 선물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맥길리스는 포크로 밀푀유를 찍어 입에 넣는다. 밀푀유의 얇은 층들이 입 안에서 바스라지고 녹아내린다. 밀푀유의 부스러기를 핥아먹던 그 말간 혀가 제게 준 충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들의 시발점인 모양이다. 그 날의 생경함을 맥길리스는 지금은 늙은, 그러나 손맛은 여전히 견고한 보드윈 가 주방장의 밀푀유를 먹을 때마다 떠올렸다.
재단사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 하나만큼 상체가 넓은 그를 애처럼 다룬다. 겨드랑이 사이로 훅 손을 넣고 가슴 둘레를 잰다. 딱 달라붙은 셔츠 밑에서 긴장한 대흉근이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가엘리오는 저런 것들이 싫은 거겠지. 뭔가 보살핌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그 느낌이.
내내 안온한 온실 속에서 자란 주제에 돌봄 당하는 걸 싫어하다니 이상한 모순이다.
그러다 문득 거울 너머의 가엘리오와 시선이 마주친다. 사뭇 비즈니스적이었던 얼굴이 맥길리스의 녹색 눈과 마주치자마자 하늘하게 풀어진다. 비록 멋쩍고 쑥스러워하는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데에 필요한 대략 50개의 근육들이 맥길리스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얘기였다.
그러나 시선을 주고 받을 시간도 없이 가엘리오에겐 다시 새 원단이 들이대진다. 미처 무언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가엘리오는 허둥지둥 시선을 돌린다. 맥길리스는 거울 속에서 홀로 남은 제 시선과 눈이 마주쳐 버리고 만다.
가엘리오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 톰슨 가젤은 일견 갸냘퍼 보이지만 여전히 대초원에서 그 개체를 유지하며 살아남는 동물이다. 순간 시속은 약 100km/h에 달할 정도로 역시 날렵하고 단단한 앞다리 근육을 갖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동물 도감의 삽화와 내용들을 떠올려본다. 맥길리스는 그런 초식동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흉폭한 육식동물이 되고 싶었다. 날카롭게 좁아지는 샛노란 눈동자. 맥길리스의 시선을 한 때 잡았던 움직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은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아마, 욕망이겠지.
도망치는 가젤의 뒤꽁무니를 쫓아, 따라잡아, 그 목덜미를 낚아채고 앞발로 누르고 짓이기고 얽힌 팽팽한 근육들 사이에 이를 박아넣는 생존본능의 욕망. 맥길리스는 그러한 욕망들을 제 눈에서 읽어낸다. 언어는 인간의 특징이라 다행이었다. 갈무리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제 눈에서 흘러넘치는 데도 가엘리오는 그것들을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본능에 가까운 흉폭한 욕망들은 그에게선 거리가 멀었다.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말로 하지 않는 이상 가엘리오는 그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길고 긴 인형놀이에 지친 듯한 가엘리오가 털썩 맥길리스의 앞에 주저 앉는다. 언제 겪어도 피곤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 식은 홍차를 들이켜는 가엘리오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맛없어. 맥길리스는 여전한 그의 투덜거림에 가볍게 웃으면서 제 욕망을 갈무리한다.
" 그래서 보상은 뭘로 해줄 거지, 가엘리오."
"뭘 원해, 맥길리스?"
한 쪽 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가엘리오는 눈을 마주친다. 뭘 원하냐고? 물론, 너를 원해 가엘리오. 너를 우악스럽게 짓누르고 깔아뭉개고 목덜미를 물어뜯고 겁에 질린 눈동자를 보고 싶어.
그런 말은 결코 할 수 없지.
"밀푀유, 하나 더 만들어달래서 싸줄까."
"고생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너희 집 주방장이잖아."
"뭐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맛있지? 다 먹었네."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보며 가엘리오가 말한다.
"아. 만족스러웠어."
맥길리스는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혀 끝에 남은 감칠맛들을 차로 씻어낸다.
뜻밖의 디저트에 풍족한 티타임이었다.
3.
게걸스럽고 우아한 희구.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가엘] 사랑의 인사 (0) | 2016.10.26 |
---|---|
[맥가엘] (0) | 2016.10.24 |
[건담오펀즈/맥가엘]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0) | 2016.07.24 |
[건담오펀즈/아인가엘아인] 춤 (0) | 2016.05.15 |
[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0) | 2016.04.1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건담오펀즈/아인가엘아인] 춤
동명의 두 곡을 모티브로, 전체 네타 있음. 커플링 성향이라기보단 아인+가엘 정도.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는 행복한 미래의 꿈을 꾸었다.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니 괜찮다니까. 정말. 괜…찮……,……. ……. 가엘리오의 제복 재킷은 옛날옛적에 집어던져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어느새 후끈해진 실내 공기에 공조장치의 팬은 맹렬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물 한 통을 그대로 다 비운 가엘리오가 빈 병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제가 떠오……, 아니야 아인. 괜찮아.
오늘 몇 번이나 듣는 괜찮아, 라는 말이 아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튀어나온다. 또박또박 발음하는 목소리가 이를 악 문 것 같은 건 제 기분 탓일까.
아니, 그래도…….
끈기 하나만큼은 같은 기수 중 베스트라고 조교에게 칭찬 들은 적도 있는 아인이었다. 아인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출신 화려한 특무소령. 먹은 짬부터 차원이 달랐다.
여긴 내 배고, 소위는 어제 승함했고. 아직 구조도 잘 모르지 않아?
…그래서 물을 핑계로 도망치려던 아인의 시도는 장렬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는 상관의 눈에선 이상한 귀기마저 도는 듯해 아인은 한껏 움츠렸다.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게 이런 느낌일까.
"아인."
"네."
긴 한숨을 내쉰 가엘리오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아인을 불러 아인도 덩달아 진지하게 답했다. 아인보다 꼭 머리 하나가 큰 상관은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아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자."
"ㄴ,네!"
아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양 팔을 벌린 가엘리오의 손을 맞잡았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으로 거슬러 간다.
"승함한 감상은?"
"좋습니다."
"방은?"
"아주 좋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대꾸하는 가엘리오의 얼굴에 아인은 사실은 별로입니다, 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었으나 참았다. 농담으로도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인의 새 거처는 좋았다.
지구 강하 허가를 받지 못한 아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념품이라도 갖고 올게, 라고 말했던 아인의 새 상관은 정말 기념품을 갖고 왔다. 아니, 이걸 기념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주 쥐들을 쫓아다니려면 탈 것이 필요하잖아?"
말로만 듣던 세븐스타즈의 위용이란 실로 굉장했다. 글래즈헤임에 착함 신호를 보내는 전함을 구경하면서도 아인은 그 배에 가엘리오가 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려 개인 전함이라니. 매일 태연하게 말을 걸던 상관이 사실은 굉장한 사람이고 앞으로 더 굉장한 사람이 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움츠러들면서도 동시에 아인은 제가 부끄러웠다. 빌어먹을 쥐새끼들을 잡아 족치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방법에 대해선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도 알았기 때문이다.
가엘리오가 저를 위해 움직일 필요는 없다. 가엘리오 보드윈의 보좌라는 직함은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가엘리오가 아인을 귀찮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화성 본대로 보낼 수도 있었고 데리고는 있으면서도 아무 일이나 주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 실제로 가엘리오는 맨 처음, 아인을 노골적으로 귀찮아했다 -. 그렇다 해도 아인은 할 말이 없었다. 아인 달튼은 아무것도 아닌 일개 소위일 뿐이며, 철화단을 쫓겠다는 건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원한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임관한 소위의 아집에 지나지 않는 원념을 풀어주기 위해 원래는 아인과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상관은 정말로 있는 힘을 다 해 도와주고 있었다. 가엘리오 개인의 소망이라고 해도 아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인은 짐을 들고 슬레이프니르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보드윈 가 전용함 슬레이프니르의 승함을 허가하지, 아인.
문이 열리자마자 아인의 손을 잡아 끈 가엘리오는 손수 아인에게 복잡한 내부를 소개시켜줬다. 정비실, 브릿지, 트레이닝룸, 식당, 샤워실……. 오늘 하루는 푹 쉬라며 주어진 방은 가엘리오의 사실 바로 옆, 아인의 계급에는 걸맞지 않은 영관급 개인실이었다. 깜짝 놀라 아인이 다른 방은 없냐고 물어보면 가엘리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방은 남아도는걸. 다들 그렇게 써."
그러나 주변의 다른 방은 비어있는 걸로 보았을 때 이레귤러임이 분명했다. 안절부절못하다가도 에라 싶어서 드러누운 침대는, 의도치 않게 그대로 숙면해버릴 정도로 편했다. 그러니 어떻게 별로라는 농을 칠 수가 있겠는가. 대신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았습니다, 편했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덧붙일 수도 있을텐데 머뭇거리는 사이 아인은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뿌듯해 보이는 표정의 가엘리오는 슬슬 그게 다냐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다음의 화제가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상토록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흐르면서 가엘리오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뒷짐을 지고 있는 손가락은 저들끼리 엉켜 난리고 머리도 꼬이고, 입은 딱 붙었다.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침묵을 버텨내던 아인을 올려다보던 가엘리오가 푹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연다.
"혼자 있으면서 재밌는 얘깃거리 좀 생각해 두라고 했는데."
"시정하겠습니다."
"정 할 말이 없으면 근황이라도 물어보는 게 어때."
"휴가는 편안하셨습니까."
"…너한테 그런 재주가 전혀 없다는 건 잘 알겠어, 아인. 휴가……. 휴가는 뭐, 좋았지."
냉큼 가엘리오의 말을 주워다 하는 아인의 얼굴을 보며 가엘리오는 또 한숨을 쉬더니 휴가기간에 있던 얘기를 해주었다. 솔직히 아인 입장에선 가엘리오가 휴가 기간의 일을 말하고 싶어 물꼬를 튼 건지, 아니면 정말 이게 상관과 부하의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묵묵히 들었다. 주된 내용은 여동생의 약혼 파티였다. 지구로 오는 길에도 잠깐 들었지만 정말로 파리드 특무소령과 보드윈 특무소령의 아홉살짜리 여동생이 약혼식을 치른 모양이었다. 길고 지루한 파티, 정치엔 자신이 없는데다 아직은 정략결혼이나 약혼 따윈 하기 싫다며 요리조리 피해다녔지만 결국 어디어디의 영애와 춤을 췄다는 얘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맥길리스가 약혼하니 내가 앙갚음 당한 거 같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아무리 못 춰도 그렇게까지 못 출 순 없다고. 아인, 너는 춤을 잘 추나?"
"춤… 말입니까?
여러번 발을 밟힌 게 그렇게 분했는지 실컷 화풀이하던 가엘리오의 화두가 갑자기 제게로 향해 아인은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답했다.
"없… 는데요."
"뭐?"
이번엔 가엘리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춤, 춘 적이 없어서."
"없다고?"
"일반적으론, 아마, 안 추지 않나요?"
"화성에선 연말 파티 안 하나?"
"술만 마시는 파티라면."
"아…? 어……. 그럼 배워 본 적은? 사관학교 졸업파티 하잖아?"
"지구는 몰라도 화성에선 안 합니다."
아인의 단호한 말에 가엘리오는 큰 눈을 깜박이더니 손으로 턱을 괴고는 신음했다. 그럼 안되는데, 곤란한데……. 대체 뭐가 곤란하고 뭐가 안되는지 모르겠지만 가엘리오가 저렇게 조용하게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 된 것은 처음인지라 아인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춤, 폴카는 출 줄 안다고 말했어야 했나? 취해서 배운 폴카는, 그러나 가엘리오가 원하는 종류는 아닐 것이다. 아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드넓은 홀, 엄마 취향으로 꾸벅꾸벅 졸며 보던 고전 명화에 나오던 차림새들 사이에서 싸구려 럼주를 들이붓고 토하기 직전까지 춤추는 주정뱅이 폴카를 추는 제 꼴을 생각하니 웃겨서 죽어버릴 것 같다.
"웃을 일이 아냐, 아인.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비식 웃음이 새어나온 모양인지 가엘리오가 엄하게 대꾸한다. 마주친 눈동자는 단호했으나 아인의 웃음이 냉소에 가깝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체 화성 혼혈 뜨내기가 춤 같은 걸 알아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미적지근한 단 맛이 나는 상관의 어설픈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하지만 탓할 기분도 짬밥도 되지 않아 아인은 복잡한 심정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춤을 추지 못한다고 해서 제 군사적 능력이 미달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아니. 필요해, 아인.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당장 시작하자."
"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가엘리오의 말에 아인은 벙벙한 눈으로 가엘리오를 올려다보았다. 굳게 다짐한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해서 아인은 반사적으로 경례했다. Sir, yes Sir.
그리고 시간은 다시 현재로 온다.
들어본 적 없는 우아한 현악기의 흐름 속에서 아인은 어깨에 둘러진 단단한 팔과 유연한 다리의 움직임을 느낀다. 배의 주인을 위한 방은 다른 곳보다도 훨씬 컸고 뒤로 특별히 연결된 갤러리까지 있었지만 이 함선의 제작과 관련된 그 누구도 키 2m에 육박하는 남자 둘이 끌어안고 우주 한복판에서 왈츠를 추는 건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홀딩과 스텝부터 시작했다. 어깨는 아래로 내리고 목은 곧게 위로 끌어올린다. 몸이 아름다운 일직선을 그릴 수 있도록 가볍게 긴장해 서있는 것만으로도 아인은 피곤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엘리오는 다음을 계속했다. 발은 모으고, 무릎을 붙이고, 대신 손은 힘을 빼고. 여기까진 나름 분위기가 좋았다.
"한 번 리드할 테니까 어떻게 하는지 몸으로 익혀 봐. 몸으로 하는 게 훨씬 편하잖아?"
몸을 쭉 뻗고 붙든 가엘리오의 손은 아인보다 컸고 손바닥은 제법 딱딱하고 두꺼웠다. 그런데도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아인의 손을 붙들고 천천히, 그리고 매끄럽게 가엘리오의 다리는 바닥을 미끄러졌다. 아인은 그저 끌려가기만 하는데도, 스텝이 엉키지 않게 가엘리오는 무릎으로 아인의 방향을 유도하고 또 받쳐주었다. 여기까지도 분위기는 좋았다.
"그럼, 이대로 해봐."
"지, 지금요?"
"레이디가 아니라 불만이야? 뭐, 어쩔 수 없잖아. 다음엔 팔 안에 쏙 들어가는 아가씨를 파트너로 해줄테니까."
"네? 네."
과연 그런 다음이 있을까, 아인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즐거운 분위기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아인, 팔꿈치 내리지 마. 좀 더 부드럽게. 아니 거기는 힘을 주고. 고개는 들고. 무릎만 굽혀, 엉덩이는 빼지 마, 어깨에 둘러진 팔은 아인이 실수할 때마다 아인의 어깨를 억세게 바로 잡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시- 에 맞춘 스텝은 자꾸만 엉켜 가엘리오의 부츠엔 모르긴 몰라도 그럴 때마다 아인의 입에서는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같은 사과의 말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고, 가엘리오의 얼굴은 점차 굳어지고, 재킷을 벗고,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아-……."
마침내 아인이 가엘리오의 발을 서른 여섯번쯤 밟았을 때 가엘리오의 입에서 길고 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인."
"네……."
다 꺼져가는 목소리가 기어가듯 흘러나온다. 이젠 아인도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분명 춤을 췄는데 왜 목소리가 갈라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기기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가엘리오의 눈동자는 연민과 좌절로 복잡해 보였다.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천천히 하자.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 입니까."
지금을 마지막으로 해도 좋을텐데. 진심어린 소망을 애써 눌러삼키고 아인은 가엘리오의 긴 손가락이 시작 버튼을 누르는 걸 지켜보았다. 오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부드럽고 가벼운 클라리넷 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아, 정말이지 발만 그만 밟았으면 좋겠다. 이걸 상관 폭행, 하극상으로 치부한다면 아인은 분명 영창감이었다. 마지막. 마지막이니까.
몇 번을 되뇌며 아인은 가엘리오가 가르쳐 준 것들을 떠올렸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아도 좋아. 교감은 손 끝으로만 해도 되니까.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 속, 굳은살 박인 가엘리오의 손 끝은 그래도 부드러웠다. 작은 정전기가 찌릿하게 오르는 것 같다. 발목,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 아인보다 훨씬 두꺼운 근육과 키를 가진 남자가 놀랍게도 늘씬해 보였다. 원, 투, 쓰리, 다시- 좋아. 다리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시뮬레이터에 기록되어 있던 슈발베의 움직임도 그랬다. 육중한 기체는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슬로스터의 출력으로 조절되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탄력있는 움직임, 안정적인 균형, 급작스러운 방향전환에서도 속력을 잃지 않고 격돌하는 창 끝은 매끄럽고 예리했다. 아인의 의식은 거대한 기체에서 다시 상대방의 육체로 돌아온다. 아라야식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움직임이 그대로 기체에 투영될 수 있을까. 얇은 셔츠 밑으로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들, 그 밑에 흐르고 있을 혈관들, 심장의 수축, 팽창, 고동. 우주의 유영, 카나리아가 지저귀는 듯한 플룻의 음색 밑으로 그 모든 것들이 아인에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아―――.
발 끝을 가지런하게 모은다. 벅차오르는 숨소리 사이에서 노래는 어느 새 끝나 있었다.
"보드윈, 특무소령님?"
아인은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찰나 마주친 눈동자가 기묘했다. 엷은 푸른색, 새벽, 동 트는 하늘을 닮은 홍채가, 아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쩔 줄 모르게 가까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눈은 마음의 창. 흐림 없는 올곧은 눈동자 위로 얇은 눈꺼풀이, 긴 눈꼬리를 따라 촘촘하게 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잘 하잖아."
그리고 가엘리오는 웃었다. 두어번 깜박이던 눈꺼풀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다. 함뿍 웃는 얼굴에 아인도 따라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이번엔 조소가 아니었다. 맞닿은 손끝에서 웃음이 전염되듯 아인을 간질였다.
"좋아. 잘했어, 아인."
개를 칭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홀딩 자세를 풀었다. 한 번 머리를 쓰다듬은 손이 떠나가고 가엘리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제서야 아인은 제가 이 분위기에 몰입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훅 떠나가는 온기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음악이 끝나고, 춤이 끝나고, 파티도 끝난다. 여전히 공기는 달아오른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환기팬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데도 무언가 아쉬웠다.
"이대로면 문제 없겠네."
"뭐가 말입니까."
"이번 '연습훈련'이 끝나면 널 지구에 데려갈 생각이야."
굳은살 박인 손이 닿았던 손가락을 매만지며 아인이 잠긴 목소리로 물으면 가엘리오는 또 다시 의외의 폭탄을 내던졌다.
"슈발베 그레이즈에 기록된 움직임이면 충분하겠지. MS 운용 실력은 우수하고, 충성심도 있다. 맡은 일을 다 하는 책임감, 사명감, 그 정도면 충분해. 지금같은 임시가 아니라 너를 내 직속으로 넣을 생각이야. 집에다가도 운은 띄워놨다. 너의 재능은 출신을 압도해. 이번 일로 무훈을 쌓으면 연말 파티에 얼굴을 내비칠 자격도 있지."
"아니, 잠깐, 저는 그냥,"
"상관의 말에 토다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 소위."
"죄송, 합, 아니, 그렇지만."
"상관의 명령을 거절하나?"
"―아닙니다."
"그렇게 나와야지. 그러니까 왈츠 정도는 제대로 익혀두도록 해. 나머진 내가 다 책임질 수 있어도 오늘처럼 레이디의 발을 우악스럽게 밟아대서 욕 먹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맥길리스의 앙갚음으로 밟힌 것보다 훨씬 아팠다고. 밟힌 자국이 역력한 부츠 끝을 손으로 터는 가엘리오의 모습에 아인은 아뿔싸 싶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죄송합니다' 같은 말은 오늘 너무 많이 했다. 이 상황에 걸맞은 최적의 말을 찾아 아인은 간신히 입을 뗀다.
"감사합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드윈 특무소령."
미안하단 말 대신, 처음으로 나온 솔직한 말에 가엘리오는 또 한 번 쾌활하게 웃었다.
――위, ―달ㅌ――,
아인.
익숙한 목소리에 아인은 눈을 뜬다. 잠을 잤나. 꿈을 꿨을까. 몽롱한 시야에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아인은 난간과 전선과 갑판의 모습을 확인하고 정신이 든다. 밖으로 연결된 '눈'은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야간 모드로 전환된다. 에이합 리액터가 구동되는 소리만이 육중하고 빈 창고엔 아무도 없었다. 헛것을 들었을까.
굳이 고개를 움직이지 않아도 시야는 원하는대로 왼쪽, 오른쪽, 아래, 위, 360도를 돌아 다시 정면으로 온다. 인간의 육체에서 벗어난 신경이란 기이한 감각이었다. 어쩐지 현실감 없는 감각 속에서 아인은 시야를 약간 아래로 조정했다.
그런가. 그런가…….
아인의 맞은편에 선 상관의 손은 흰 장갑 속에 숨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 작은 떨림이 클로즈업 되어 보였으나 아인은 기쁨에 취해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렸다. 왜였을까. 그 손을 맞잡은 적이 있었단 사실이 엉망으로 엉킨 기억 속에서 부유하듯 떠오른다. 전투에 투입되기 전까진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점검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슬립 모드를 유지한다. 어째서 아무도 없는 지금 자동적으로 의식이 떠올랐는지 아인은 알 수 없었으나,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몸이 되고 난 후에 움직임은 훨씬 재빨라졌지만 머리는 이상하게 두 가지 이상을 생각하기 벅찼다.
집음기에서는 엔진 구동음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어디에선가 자꾸만 노랫소리가 들린다. 촉각은 잃었는데 그 날 느꼈던 것들이 총체적으로 흘러 들어온다. 환각, 환청, 이건 연구원을 불러야 되는데. 밀려오는 다양한 감각들에 허우적대면서도 아인은 빠져든다. 맞닿았던 손끝, 찌릿하게 떨리던 신경, 나의 호흡과 당신의 호흡이 같았다. 심장이 같이 떨렸다. 나는 당신의 움직임을 닮아가고, 익숙해지고, 이윽고 하나가 된다. 아인은 그 뒤로도 가끔 그 날의 노래를 기억했다. 빈 방에서 홀딩 자세를 취해보기도 했다. 등, 어깨, 팔, 목을 꼿꼿이 펴고 상대방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쥔다. 스텝은 하나, 둘, 셋. 다시 한다면 더 이상 당신의 발을 밟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널 지구에 데려갈 생각이야.
이미 이 곳은 지구였다.
나머진 내가 다 책임질 수 있어도 오늘처럼 레이디의 발을 우악스럽게 밟아대서 욕 먹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엘리오 특무소령.
그렇게 대답했는데, 이 상태로는 춤은 도저히 추지 못할 것이다. 손을 붙잡을 수도 없고, 그 날 느꼈던 일체감도, 어떤 종류의 교감도 아마 느낄 수 없겠지. 그건 참 아쉬운 얘기였다. 기껏 연습했던 스텝들이 아깝게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뭘 어쩌겠어. 가엘리오 소령님이 힘써주셔서 아직까지도 이 의식은, 육체는 기능한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크랭크 중위의 원수를 갚아 그 더러운 쥐새끼들을 죽이고, 찢어 발기고, 짓밟아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아인은 이름도 모르는 노래의 선율을 흥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우주의 밤이 길었다. 당신이 웃었다.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가엘] 사랑의 인사 (0) | 2016.10.26 |
---|---|
[맥가엘] (0) | 2016.10.24 |
[건담오펀즈/맥가엘]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0) | 2016.07.24 |
[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0) | 2016.05.22 |
[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0) | 2016.04.1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25화 이후. 설정 날조 있음.
가엘리오는 PV부터 ----할 애라서 언제 ----할까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버리다니, 근데 엄청 예쁘군요. 사실 2기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장례식 얘기가 써보고 싶었습니다. 오펀즈 메인은 유진이었는데 막화 이후로 차애 가엘리오가 치고 올라왔습니다. 저 둘 오른쪽으로 파시는 분들 대환영.
색이 부족했다. 장교용 제복의 푸른 소매, 푸른 망토, 장식성이 다분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금색 단추도 오늘은 없었다. 소매는 검었고 어깨에 두른 망토는 짙은 회색, 단추는 은빛이었다. 그 둥근 단추에 양각으로 새겨진 뿔피리를 부는 새만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지나치게 쾌청한 하늘을 한 번 보았다가, 결코 푸른 잎을 잃지 않고 계절별로 반드시 세 종류 이상의 꽃이 피게끔 설계되어 있는 보드윈 가의 정원을 보고, 다시 눈 앞의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좋은 날씨에, 사방에서 빛을 듬뿍 머금은 색이 흘러넘치는 데도 평소라면 여름의 원색처럼 눈부실 남자는 보기 드물게 무채색이었고, 보기 드물게 우울해 있었다.
"누구?"
맥길리스와 가엘리오 둘 다 장교용 관사에서 생활하지만 지난 주말부터 사흘 동안 연휴였고,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맥길리스는 천천히 추측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하녀가 꽃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세븐스타즈의 꽃이 필요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다음. 회색이 아닌 푸른 정복을 입는 사람이라면 맥길리스에게도 연락이 왔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다음. 최근 우주 전역 어디에서 전투가 있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해적은 도처에 있었으나 걀라르호른의 이름에 상처를 낼 만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있다고 해도 없던 것처럼 되었다. 걀라르호른은 예식용 제복을 늘 두 개씩 나눠주지만, 전투 중 사상자에 대한 얘기는 결코 공식적으로 꺼낸 적이 없어 공식적으로 그 제복을 입을 일도 없었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하면서도 맥길리스는 죽은 누군가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맥길리스가 모르는 이름일 것이고, 사실 가엘리오에게도 대단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관학교 선배의 세 번 본 부관의 부하의 부하라든가, 동기의 친척의 친구라든가, 아니면 아예 얼굴도 본 적 없는 갓 들어온 MS 파일럿이라든가.
지극히 한정적인 모빌슈츠 연습환경에서 간단한 임무에도 조종미숙으로 죽는 신참들은 1년에 13명쯤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네 다리를 건너 가엘리오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그는 충분히 보드윈 가의 잘 자란 흰 꽃을 한아름 안고 가 직접 건네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되새김질 할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정이 넘쳤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헤펐다. 기쁨과 슬픔에 쉽게 휩쓸리는 폭넓은 감수성이 맥길리스는 가끔 부러우면서도 진절머리 났다. 한 번도 진창이 된 대지를 디뎌보지 않은 자의 순수였다.
"빈 말이라도 고맙긴 하네."
우중충한 얼굴이 고개를 들어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그럼에도 날카로웠고 이슈의 무남독녀처럼 버릇없지도 않았다. 300년 전부터 보드윈은 전사의 이름이었고, 그래서 무관이 된 남자는 지나치게 감성적이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동시에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귀하게 큰 사람이 그러하듯 누군가에게 감정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비난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애도 섞인 목소리였는데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목소리에 단 1mg의 슬픔도 섞이지 않았음을 눈치챘고, 그 빈말이라도 저를 위로해주는 맥길리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가엘리오의 그 말에 대꾸를 잃은 건 맥길리스 쪽이었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슬픔에 더 이상 입을 여는 것도 어색해 맥길리스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가엘리오의 맞은 편에 앉았다.
10분쯤 지나면 그는 제 감정을 추스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하녀에게 차를 부탁하고, 맥길리스에게 곁들일 과자를 물어보겠지. 정말 매너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손님을 방치하진 않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맥길리스이기에 허용된 여유였다.
맥길리스는 세 번 정도 입어 본 장례식용 정복을 가엘리오는 몇 번이나 입었을까. 가엘리오를 보며 맥길리스도 상념에 잠긴다.
제가 입을 땐 몰랐는데 가슴의 일곱 별은 은사로 수놓여 있었다. 검은 소매는 푸른색보다 팔이 길어보였고, 회색 바이어스는 목과 손목을 늘씬하게 보이게 했다. 온통 원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친우에겐 무채색도 썩 괜찮았다. 입만 다물면 우수에 찬 미남이 된다던 사교계의 소문은 술에 잔뜩 취한 극소수의 아가씨들이 떠벌리던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다.인도양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얼굴은 우중충했으나 보기 나쁘진 않았다.
인도양을 끼고 있는 오세아니아 연방은 둘 다 아직 가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다. 가본 적 없는 나라의 겪어보지 못한 날씨의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그래서 이질이었다. 수리력과 공간지각력, 논리력은 뛰어나도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은 빈곤하기 짝이 없는 맥길리스에게 그는 자꾸만 무언가 색다른 문장을 만들길 종용하곤 했다. 십여 년을 붙어있었는데도 맥길리스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만들어내야 하는 문장들이 그에게 수식되었다.
그는 맥길리스에게 언제나 무언가의 처음이 되었다. 손을 내밀고, 이름을 부르고, 우정과 신뢰, 애정이 담긴 시선이 가엘리오에게서부터 맥길리스에게로 향했다. 만족스러운 온화함이 늘 주변에 있다는 것. 무념한 맥길리스조차도 가끔 깜박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안락함이 언제나 가엘리오와 함께 했다. 보드윈 가의 방은 꾀죄죄한 몰골로 끌려온 날 하사받은 제 방보다도 훨씬 편했다. 그 모든 걸 만드는 건 언제나 가엘리오였다.
"그러고보니."
"응?"
"보드윈 가는 칼라였지."
"아― 아, 응."
걀라르호른을 지탱하는 일곱 개의 별은 전부 저들만의 예식용 꽃을 갖고 있다. 대체로 흰 색이었고, 희고 기품있는 꽃 따윈 몇 되지 않기에 사실 겹칠 때가 많았지만 보드윈은 늘 오래된 유리온실에서 칼라를 키웠다.
"네가 그 꽃을 한 다발 들고 있는 건 어쩐지 상상이 안돼."
"그거, 비웃는 거?"
"글쎄."
비웃는다기 보단, 순수한 의문이었다. 단정한 검은 제복을 입고, 수려한 흰 꽃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 슬픔에 젖어있을 가엘리오를 상상하면, 뭐랄까, 아무래도 맥길리스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 밖의 광경인지라―…….
"한 번쯤 보고 싶지만 그걸 보고 싶다고 하면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으니 예의는 아닌 거 같고……. 그러면 내 장례식 뿐인가?"
"…네 말대로 그런 건 예의가 아니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말마따나 농담인 걸 알면서도 가엘리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싫은 표정이었다. 물론 맥길리스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맥길리스는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걀라르호른의 누군가가 죽어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도, 지구의 권력이 개편되고 콜로니를 포함한 전 우주의 인류가 1/10로 줄더라도 맥길리스 파리드는 살아남아야 했다. 종말을 목도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승리자 뿐이니.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오래 기다렸군. 하녀를 부르지. 차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네가 고르는 차는 다 별로니까. 하지만 과자는 선택권을 줄게. 사실 그것도 선택권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째서?"
"알미리아가 어제 초콜릿 쿠키를 구웠거든."
방금 전까지의 우울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상대에게선 다시 색이 흘러넘친다. 가엘리오의 슬픔을 증명하는 건 그 몸에 두른 우중충한 제복 뿐이었다. 그조차 분위기가 바뀌니, 방금 전까지 딱 맞았던 게 어쩐지 어색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보기 드물게 감수성이 넘쳐 흐르는 남자였으나 전사였다. 제 감정에 충실하고 난 뒤엔 언제나처럼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그를 맥길리스는 늘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초콜릿 쿠키로."
강요당한 선택지를 고르고 맥길리스는 소란을 떠는 가엘리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꽃병에 꽂힌 싱싱한 세 송이의 우아한 칼라가 가엘리오에게 잘 어울릴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의 답은 틀리지 않았다.
핏기 빠진 창백한 얼굴은 맥길리스의 생각보다 멀쩡했다. 블레이드가 꿰뚫은 콕핏의 위치를 고려하면 심각하게 훼손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피부 한 조각마저 온전했다. 차갑게 굳어 방부처리 된 품에 놓인 세 송이의 칼라가 아름다웠다. 그토록 사랑했던 혈육에게도 어린 아가씨는 차마 작별의 키스를 하지 못했다. 온기 없는 뺨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신 맥길리스가 성호를 그어주었다. 장례식은 조촐했다. 카르타의 장녀가 죽었을 때는 다 죽어가는 노인네 대신 이즈나리오가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지금은 그 이즈나리오도 없고, 보드윈 가의 안주인은 드러누웠으며 걀라르호른 자체가 어수선한지라 식을 크게 치룰 여유가 없었다.
책임감 있는 보드윈 가의 장자, 다정한 오빠, 존경 받는 유능한 상사였으며 뛰어난 무력으로도 항시 겸손하여, 결코 굽히지 않는 정의와 때묻지 않은 순수를 지닌 용감한 전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민을 지키기 위해 그 젊은 생명을 바쳐 짧은 생을 마감했나니…….
날씨는 기억 속 그 어느 날처럼 좋았다. 그 날 지금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생각했던 것이 모두 현실이 된 날이었다. 누군가의 장례식도, 맥길리스 본인이 죽은 것도 아닌, 남은 하나의 가능성, 가엘리오 본인의 장례식에서 그 품에 안긴 꽃은 맥길리스가 표현할 수 있는 어휘 밖의 묘사를 강요했다.
느긋하게 부는 바람에는 태양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정, 애정, 신뢰. 무념한 맥길리스도 깜박하면 정신을 놓아버리는 만족스러운 온화함, 안락함이 주인을 잃은 방에서도 여전히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이 방도 온기를 잃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아쉬움이 쓸쓸하게 어깨를 스쳤다. 잃어버린 것에 미련은 없다만, 그러나 여전히 처음 겪는 것들이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주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맥길리스는 그 옛날 가엘리오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정물처럼 턱을 괴고 침음에 잠긴다.
그 남자는 이 자리에 앉아 인도양의 태풍이 몰아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깊게 애도하고, 슬퍼하고 있었던가? 그가 겪었던 슬픔을 상상해보려 해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맥길리스 파리드는 빈곤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토록 쉽게 간파당한 가장된 연민을 버리고 맥길리스는 마지막 첫 경험의 감상을 내뱉었다.
"아름답군."
평균 남성보다 10cm는 크고 매일 세 시간의 트레이닝을 빼놓지 않았던 직업군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 이외엔 맥길리스가 아는 한도 내에서 딱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이 주는 처음은 전부 가엘리오 보드윈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표현할 말 없는 단어였고, 다시 쓰이지 못할 예외의 적합성을 고민하는 건 비경제적인 활동이었다.
"아름다워."
눈물 젖은 비통한 목소리가, 끝까지 버리지 못하던 그 애정이, 여전히 제게로 닿던 신뢰가, 영원히 기억할 어린 날의 온기와 굳은 뺨의 냉기가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단지 그 뿐이라는 게 가엘리오 보드윈에겐 비극이었다.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맥가엘] 사랑의 인사 (0) | 2016.10.26 |
---|---|
[맥가엘] (0) | 2016.10.24 |
[건담오펀즈/맥가엘]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0) | 2016.07.24 |
[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0) | 2016.05.22 |
[건담오펀즈/아인가엘아인] 춤 (0) | 201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