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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9 [맥가엘] 리퀘박스 황제 가엘리오와 맥길리스
- 2017.03.06 [맥가엘] 오활한 당신
- 2017.01.03 아직 제목 없음
글
[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리퀘박스 여섯 번째 : 관심받고싶어서 가엘리오한테 너만 알아둬, 곧 퇴직할 생각이야(혹은 사관학교시절로 자퇴선언) 폭탄선언하는 맥길리스 써주세요🙏
그 다음에 뭐 어떻게 하란 말이 없어서 장르는 제 맘대로.
시작은 아주 작은 생채기였다. 피가 난 줄도 몰라서 카르타가 작은 비명을 지르고서야 알았다. 네잎클로버를 찾던 가엘리오의 시선도 이 쪽을 향했다. 하늘에 흐린 구름이 가득 끼는 것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별 거 아닙…ㄴ네."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혀를 깨물 뻔해 엉뚱하게 흐트러진 어미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정원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팔뚝에 조금씩 방울져 배어나오는 피 같은 건 혀로 몇 번 핥으면 그만인 것을 다들 한번도 다쳐보지 않은 것처럼 난리였다. 나는 습관처럼 혀를 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런 '불결'한 짓은 여기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멀뚱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다그쳤다. "너! 있잖아!" 주어가 없는 문장을 가엘리오는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주머니를 뒤져 잘 다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엷은 푸른색에 자색실로 꼼꼼하게 테두리가 마감된 손수건 끝엔 필기 자수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G. Bauduin. 물건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건 소유가 약속된 자들의 오만이다. 작은 손가락이 내 팔뚝에 서툴게 매듭을 묶고 말했다.
"이따가 우리 집 가면 약 발라줄게. 많이 아파?"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 가엘리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사실 말을 꺼내기 전엔 아예 몰랐고, 지금도 느낌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약간."
거짓말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욱신거리고, 팔뚝에 매인 손수건의 감촉은 부드럽고, 어설프게 매듭진 손수건의 끝을 가엘리오가 눈치채지 못하게 잡아 당겼다. 너무 꽉 매여 눌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좋았다.
*
"대체 왜 그러지?"
"글쎄."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붕대를 잘 매게 되었다. 필수 이수 과목인 보건이 도움이 되었을까.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고 시트를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이조차 못했다. 보드윈의 하녀들이 만류하는데도 기어이 본인이 하겠다며 커다란 응급상자를 받아 들고 삐뚤빼뚤하게 가위질을 했다. 깔끔하게 펴지도, 붙이지도 못해 몇 번이나 떼었다 붙였다 하는 바람에 접착력을 잃은 시트가 손등 위에 너덜너덜하게 얹혀진 것을 가엘리오는 미안함과 뿌듯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나를 보곤 했다.
그렇게 보는 가엘리오는 보상을 바라는 개인 동시에 그 지루하고 쓸데없던 시간을 인내했던 나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도 보였다. "고마워." 하고 한 마디 하면 가엘리오는 세상 제일 좋은 어려운 일을 해낸 꼬마처럼 웃었다. 내 손가락 하나에 누군가가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관계의 우위,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권력이었다. 그 땐 미처 몰랐지만 그 기분은 정의하고 나면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희열이었다.
가엘리오는 변덕스럽게 다채로운 카레이도스코프처럼 눈을 가져다 대고 약간만 각도를 바꿔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곳을 향해 있던 무표정한 얼굴이 말을 걸면 웃고, 비꼬면 화를 내고, 칭찬하면 웃고, 내가 상처 입으면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표정을 짓는다. 이상한 일이다. 정작 본인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으면서 나의 고통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황홀하게 아름다웠으나 비극이 희극보다 감명 깊듯, 슬프게도, 가엘리오의 분노와 슬픔은 그의 기쁨보다 내게 훨씬 감명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에게 주기는 쉽지 않다.
이 때를 빌어 말하건대, 가엘리오 보드윈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다. 물리적인 상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고귀한 자긍심과 오만한 선의나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완전무결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는 신의 아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눈동자, 우월한 혈통, 건장한 신체. 키가 작고 부드럽고, 때로 유약해 보이던 얼굴은 성장하며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선을 갖고 있었지만 시선은 나날이 깊어졌고 억세지는 턱선 같은 게 눈에 띄었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엷은 보랏빛, 밝은 빛에선 투명하게 엷은 푸른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어린 시절처럼 언밸런스한 단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약간 처진 눈꼬리는 얼핏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을 꽤나 붙임성 있고 부드럽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여려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 그는 과연 태어나서 이미 저승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신의 아들인 것인가.
그렇다면 상처 입는 건 나여야만 했다. 물론 상처 입는 것은 쉽다. 그에게는 나의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 약간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실로 가시적인, 육체적인 고통이면 되었다. 고의라는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긁어낸다. 도구는 어느 것이라도 좋다. 종이책의 단면, 낡은 건물의 거친 벽돌벽, 부서진 유리의 끝. 가엘리오는 그러면 놀란 얼굴로 내게 와서 화를 내고, 내게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통들을 마치 제 살이 파이기라도 한 양 아파한다. 그는 나의 잦은, 자잘한 부상들에 놀라고, "너는 왜 이런 일에만 부주의한 거야?", 의아해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일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앞에서 기꺼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다.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을 굳건한 신체가 내 앞에서는 스스럼없이 낮아지고 나는 그러면 어떤 포만감을 느끼면서 너의 숙인 뒤통수를 바라본다.
"사관학교를 그만둘까 해."
"뭐?"
화들짝 놀라 갑자기 고개를 드는 작은 머리에 턱이 부딪혔다.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우왓, 괜찮아?" 다급하게 얼굴에 손이 닿는다. 마디진 손가락, 예전보다 훨씬 억세고 커진 강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턱, 아랫입술 끝을 문지른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가엘리오." 내가 황급히 그의 손을 쳐내면 가엘리오는 '아.'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미안." 짧게 사과하고는 묻는다.
"하지만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야?"
"글쎄……. …아직 고민만 하고 있으니까."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맘에도 없는 헛소리였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구성되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실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세븐스타즈는 걀라르호른, 세계의 균형을 지킬 군인만을 배출하기 위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첩의 자식 - 사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 인 내가 '파리드'의 이름을 갖고 다른 선택이 가능할 거라고 가엘리오는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가엘리오는 정말 믿고 있는 것 같았다. 5일 후에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절망한 표정이었다. 가엘리오는. 내가 그것을 곁눈질하여 보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자기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내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왜? 뭔가 문제가 있어? 혹시 뭔가……."
가엘리오는 수정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선 어떤 단어들이 떠돌고 있을까. 집단따돌림이라든가 괴롭힘이라든가 그런 저열하고 수준 낮은, 내 출신 때문에 익히 있어왔던 소문들, 그리고 으레 붙어올 행위들이 그려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내게 직접 말하면 내가 자존심 상해 할 거라고? 그의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투명하고 내 신분을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 가엘리오라고 생각하면 나는 또 빈정이 상해버리고 만다. 대등한 척 하지만 내가 그러하듯, 그는 그대로 이 관계에서 제가 우위라고 생각하나 보다. 나와 다른 건, 그는 의도하지 않아도 언제나 누군가의 우위에 있었으니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숨쉬는 것보다 당연하다는 점이다.
"아냐, 잊어줘 가엘리오. 농담이었어."
아예 몸을 돌려버리는 나의 냉담한 대응에 가엘리오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허우적대다 "어, 어…." 석연찮게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이제 보지 않고도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수심의 색과 형태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색이지. 의미 없이 펜을 달각거리며 나는 내 등 뒤로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의 웃는 얼굴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고뇌를 대신 떠안을 것이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그는 나의 말도 안되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지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언제 어디서나 정신 차리고 보면 가엘리오의 시선이 내게 닿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말을 걸고, 혹은 내가 말을 걸면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도 억지로 웃는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진지한 감정, 걱정에 나는 좀 더 들뜨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휴일에 둘이 어디 가지 않을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게 가엘리오는 내게 묻는다.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단 간청이나 애원에 가까웠다. 나는 잠시 고민해 본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나의 망설임이 길어질 수록 가엘리오가 초조해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입 안에서 초콜릿을 녹여 먹는 것처럼 진득한 단맛이 배어 나온다.
"네가 싫으면"
"아니. 그래 좋아."
"정말?"
그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 있게 말한다. "즐거운 일이 될 거야." 뒤에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걱정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경의를 담아 조소했다.
*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는 전혀 다른, 산 중턱에 위치한 보드윈의 겨울 별장이었다. "지금은 겨울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경치도 좋거든." 가엘리오는 나의 눈치를 본다.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일부러 내버려 둔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거친 단면이 혹여 내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은 미숙한 그의 운전실력도 한 몫 했다. 엑셀을 밟을 때마다 거칠게 올라가는 배기음을 들으면서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 보았다. 가엘리오는 전전긍긍하며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곳임은 알 수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에 상쾌한 공기였다. 저 먼 곳에서는 험준한 산맥과는 동떨어진 너른 평원이었다. 아기자기한 지붕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다. 밤이 되면 별이 닿을 것처럼 보여. 우리는 그 별의 실체를 알고 있다. 뭉쳐진 먼지 내부가 타오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토록 멀어 보이는 투명하게 흰 달이 사실은 회색의 먼지가 뒤덮인 돌덩이인 것도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위에도 기지를 지어 놓았다. 그 모든 것을 실제로 보기까지 했으면서도 가엘리오는 여전히 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갖고 있는 낭만적인 함의들을 버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착했어."
감속과 주차는 성공적이었다. 브레이크를 걸고 시동을 끌 때 가엘리오의 바짝 서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꽤나 신사답게 먼저 내려 나의 문을 내려주고 짐을 꺼내 안으로 옮긴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인들이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은 아니다 보니 실내는 어딘지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가엘리오는 애써 그것들을 모르는 척 한다. 게다가 즐거운 일이 될 거라던 가엘리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날씨는 흐렸다.
"이래서야 저녁에 별 구경은 전혀 못 하겠는 걸."
"……."
"내일 낚시도 불가능할지 몰라."
가엘리오가 끙끙대며 짐을 옮기고 불을 켠다, 난방을 올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창밖의 호수를 보았다. 저녁엔 별을 보고 다음날엔 낚시를 하고 산책이나 하자던 가엘리오의 멋진 계획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엘리오는 내심 걱정하고 있던 불안들이 내 입에서 나오자 맘에 안드는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쩔 수 없이 체념해버리고 만다.
"그러게."
"일단 일기예보에선 잠깐 내리는 비라고 했으니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빌어야겠어."
"으응."
"그래서 이젠 뭘 할래, 가엘리오?"
나는 모르는 척 그에게 묻는다. 철저하게 모든 결정을 가엘리오에게 떠넘기는 말이었다. 가엘리오는 대체로 모든 결정을 내게 맡겼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는 몹시 약했다.
"너는 일단 TV라도 보고 있지 그래?"
"너는?"
"나는 저녁을 해야겠지?"
"저녁? 네가?"
"응. 데우기만 하면 되지만 약간 조리가 필요한 것도 있으니까."
가엘리오는 자랑스럽게 밑에 내려둔 아이스박스를 탕탕 치며 말한다. 어쩐지 짐이 많더라니 식재료가 아니라 이미 완제품이라 더 부피가 컸던 모양이다. 하긴. 이 도련님이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약간의 의아함과 흥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나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줘, 맥길리스."
방금 전까지의 낙담은 사라지고 쾌활하게 웃는 얼굴로 가엘리오는 말한다. 그의 그늘이 너무나 쉽게 걷히는 것을 보며 외려 내가 낙담하고 말아 버린다. 그는 정말로 완전하다.
TV에선 관심 없는 엔터테인먼트들만이 한창이었다. 공용어도 아닌 언어들로 방송되고 있어 이 프로가 토크쇼인지 개그프로그램인지도 알 수 없는데 무대에 선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하니 화면 너머의 방청객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채널을 돌린다. 뉴스, 다큐멘터리, 혹은 드라마, 여전히 흥미 없는 것들만이었다. 어두워진 사위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창 밖에선 어느 새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엘리오?"
그러나 빗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가운데 실내는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소파에 뉘었던 몸을 느릿하게 움직여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엔 사람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열린 아이스박스 안엔 미처 정리되지 못한 재료들이 있었다. 식빵, 잘린 야채들, 과일, 내일 낚시하러 가면 먹게 되는 건 샌드위치인가? 냄비 안에는 포토푀가 끓고 있었고 버터에 예쁘게 구운 감자는 어느새 식어 희게 뜬 기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하며 낯선 집 안의 곳곳을 뒤진다. 2층, 다락방, 화장실, 거실, 문 뒤, 옷장 안, 탁자 밑까지 둘러보는데도 가엘리오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부엌을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없었다. 가엘리오가, 어디에도.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자마자 빗방울이 거세게 얼굴을 때렸다. 우산을 찾아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산의 해는 가뜩이나 빨리 지는 데다 이미 어둑해지고 비에 젖어 미끄러지는 산에선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대신 신발장을 뒤져 커다란 랜턴 하나를 찾았다. 초조함이 신물처럼 목을 타고 역류한다. 순식간에 머리와 옷이 젖어가는데도 이상하게 목만은 바짝 말랐다.
"가엘리오!"
차는 있었다. 그는 어디 갈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여기 방문한 것도 아니다. 산장 주변,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여전히 그의 흔적은 없었다. 흥취를 위한 벽난로에 던져 넣을 장작이라도 찾으러 간 걸까? 건물 뒤에 쌓인 장작더미들을 보니 그건 아니다. 차로 왔던 큰길을 따라 500m쯤 걷다가 보이는 게 우리가 타고 온 차의 바퀴자국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돌아왔다. 관찰력이 떨어졌다. 나는 분명하게도, 당황하고 있었다. 가엘리오는 어디 갔지? 그의 부재가 어쩐지 나를 심히 공포스럽게 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불안이 내 안에서 세를 불리고 있었다. 비구름만큼이나 무겁고 흐리며 형체가 없었다. 특정 짓지 못하는 것들이야말로 사람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악마의 계약, 신의 분노, 악귀, 원혼, 비가시적인 무언가들이 그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엘리오 보드윈 또한 그러한가? 그는 보이지 않아서 공포가 되는가? 알 수 없었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나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혀 밑에서 뛰는 것 같았다. 발자국, 발자국을 찾아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산장으로 돌아와 바닥을 훑는다. 낙엽과 비와 진흙 사이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너의 흔적을 쫓았다. 몇 번이나 바닥에 붙을 것처럼 훑어 보면 있었다, 측면의 저 끝 비탈길로 향하는 걸음, 끝에서 미끄러진―
"가엘리오!"
10m쯤 되는 급경사의 비탈길이었다.
"아, 하하… 안녕, 맥길리스. 저녁, 많이 늦었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가엘리오는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거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이미 듬뿍 젖어 달라붙은 셔츠 색과 같았다. 움츠린 어깨를 어떻게든 펴보려고 가엘리오는 애쓰지만 이미 체온이 떨어져 긴장해 움츠러든 근육들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엔 안도와 낭패감이 뒤범벅 되어 있었다.
"멍청이냐, 너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노호성에 가까웠다. 놀란 것은 나와 가엘리오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엘리오는 서툰 변명을 하려다가 대신 손을 뻗었다.
"나 좀 부축해줄래? 미끄러져서 발목을 삐어 버렸어."
혼자서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비탈길을 비슷한 체격의 남자를 부축하고, 비가 잔뜩 쏟아지고 있는데 이미 해가 완벽하게 진 어둠 속에서 올라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고행이라 간신히 실내로 돌아왔을 땐 저녁 시간은 애저녁에 지나 있었다.
잔뜩 젖은 신발을 집어 던지고 일부러 소리를 죽이지 않은 채 쿵쾅대며 수건을 찾아내, 간신히 의자에 앉은 가엘리오에게 던졌다. 밝은 곳에서 보니 가엘리오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흙투성이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사라진다. 가엘리오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든 빠르게 일을 수습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신발을 벗고,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주 늦었지만 다시 완벽한 저녁을 차리는 그런 것들.
한참을 끙끙대며 가엘리오는 찬 빗속에서 얼어 곱은 손으로 신발끈을 풀었다.
"내가 할게, 가엘리오."
난처해하는 포정을 보면서도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목을 본다. 생각 이상으로 심하게 삔 모양인지 가는 발목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부어 있었고 열감도 심했다. 어설프게 스쳐 지나간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도 거기만 홧홧할 정도로 뜨거웠다. 살짝 손을 얹기만 했을 뿐인데도 가엘리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불멸자인 신의 아들에겐 단 한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강에서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미가 붙잡고 있었다 발 뒤꿈치라고 했다. '뒤꿈치는 아니지만.' 나는 탄식과 고소가 섞인 잡생각을 내치며 묻는다.
"구급상자는?"
"TV 밑에."
"그냥 겹질린 정도인 게 확실해?"
"부러진 건 아니야."
가엘리오의 목소리는 어쩐지 남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맥길리스에게 간혹 하던 '아프지 않아?'라는 말을 할 때의 가엘리오와도 괴리가 있었다. 무감했고 그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는 태연하다. 그는 난공불락의 성이고 영원히 무결할 것이다. 하. 이 얼마나, 완전하고, 오만한――!
"화났어?"
"내가 화 날 이유는 없어 가엘리오."
"배도 고플 테고, 비 오는데 쓸데없이 고생했고."
"……."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먼저 씻고 나오도록 해 모처럼 재밌게 놀자고 초대한 건데 외려 일을 불려서 미안해, 맥길리스."
"너는―,"
"응?"
고개를 들어 올리면 가엘리오의 푸른 눈과 마주친다. 그림자 하나 없는 맑은 눈동자다. 저도 모르게 그의 발목에 얹혀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고, "맥길리스? 저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엔 흐림이 없다. 그 얼굴이 흐려지는 것은 오로지 나를 볼 때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기쁨, 기쁨? 혼효된 감정들이 갈아서 곤죽이 된 야채 주스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맥길리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올려다보는 가엘리오의 시선에 평소와는 정반대의 위치가 되어 있었음을, 내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엘리오가 무어라 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가엘리오의 시선은 여전히 이 곳으로 닿고 있을까? 그 눈동자는 어떤 색일지, 평소와는 달리 전혀 짐작 되지 않았다. 혹은, 내가 그를 보는 시선, 이.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딘지 웃고 있는 혹은 당황해 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는.
알 수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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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글
[맥가엘] 리퀘박스 다섯 번째
본편 전개는 동인질에 하등 도움이 안되니까 마음이 급하군요.
리퀘박스 다섯 번째, '어느날 눈떠보니 좀 멍청해진 맥길리스가 가엘리오 좋아하는게 보고시퍼요,,,'
그래서 맥길리스가 좀 멍청합니다.
가엘리오는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날았다. 뭔가 이상하지만 여긴 그런 표현도 된다. 우주니까. 뛰는 것보단 나는 게 빠르지만 속도를 내려면 그만큼의 작용이 필요하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복도를 내달려 가엘리오는 전함 가장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영관급 장교들의 1인용 숙소 가장 끝은 의외로 구석지고 의외로 인적이 드물다.
"맥길리스가 의식을 차렸다면 바로 구속해서 끌고 가면 될 텐데 왜……."
"성격이 급해졌군."
"……."
러스탈의 가벼운 훈계에 가엘리오는 문을 열자마자 떠들어대던 입을 딱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머리에 잔뜩 열이 올라 지나치게 조바심 내고 있었다. 아직도 못 고친 걸까? 가엘리오는 마른 입술의 거스러미를 이로 질근댔다. 예전에는 쉽게 흥분해 가끔 앞뒤를 잊어버리고 골몰하곤 했다. 가엘리오가 낯선 전함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가장 먼저 주의하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엘리오의 기억 가장 마지막에 있는 저 평야에서의 전투는 전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조야했다. 냉정했더라면 비등하게는 싸울 수 있었겠지. 전투 중의 고양감이야말로 전투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는 훈련교관의 말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만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조했다. 그래서, 애쓰고 있었는데 방금은 전에 없이 무언가 초조해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그 간단한 문장이 가엘리오의 의식을 순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인양된 기체, 파일럿 의식 불명. 그렇게 만든 것은 가엘리오 본인이었고 그를 콕핏 안에서 끌어내는 것도 멀찍이나마 눈으로 확인했다. 눈에 띄는 직접적인 상처는 없었다. 제네바 조약에 의거해 그는 구금되기 이전에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기 위해 의료실도 이동되었고……. 자신은 그가 온전하기를 바랐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가엘리오가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려 애쓰며 뱉은 말에 러스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러스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침상이 보인다. 약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뺀다면 평범하게 잠들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면 분명하게 숨도 쉬고 있다. 사지도 멀쩡해 보이고, 붕대나 거즈 같은 게 붙은 부분도 없다. 안도감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엘리오는 다시 러스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맥길리스 파리드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워 질 것 같다."
"…뭐?"
혹시 이대로 빈사 상태라는 건가? 가엘리오는 다시금 치미는 초조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결과인가. 권력, 위력, 폭력, 그가 믿던 가치에 그대로 패배한 남자의 말로인가. 아득해지는 의식에 가엘리오는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 때까지 주먹을 꽉 쥐어 본다.
"아니,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맞겠군."
"본론은 빠를 수록 좋아, 에리온 공."
팔짱을 낀 가엘리오의 가시 돋친 말에 러스탈은 한 번 웃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처음엔 경미한 뇌진탕이라고 진단했지. 틀리지도 않았어. 뇌기능에도 별 이상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Amnesia. 아무래도 그는 지난 과거를 통째로 잊어버린 것 같아.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면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지. 그의 인생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
러스탈은 침상에서 잠든 맥길리스와 서 있는 가엘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설탕이 가라앉은 라벤더 시럽 같은 눈에 희미한 동요가 떠올랐다. 이전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언제나 가벼웠고 미래를, 올바른 가치를 짊어지기엔 지금의 무게가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스탈은 그 시럽 같은 달콤함,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그의 청렴결백함도 꽤 좋아했다. 현실이 아무리 혼란하고 척박하다 해도 한 명쯤은 그 순박하고 어리석기까지한 결벽한 의지를 관철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비록 친구를 죽이고, 저까지 죽일 뻔하고, 여동생을 농락한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우애하고 동정하며 연민하는 가엘리오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를 정식 재판에 회부하는 건 무리지. 일반 병실에 그냥 둘 수도 없어. 명백하게 그는 이 체제의 붕괴를 모사했다. 많은 장교들이 목숨을 잃었어. 혹시 모르지. 그에게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은 사람이 사적으로 그를 처단할 수도 있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어디까지지?"
"확실하지 않아. 여러가지 확인해 봤지. 이름은 무엇인지, 인적사항은 어떻게 되는지,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은 있는지. 인적사항과 교우관계에 대해선 훌륭하게 대답했다. 신병 인수자로 자네를 지목했지.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은 모호해. 어느 시점까지 기억이 없다면 어제의 날짜라도 대답해야 되는데 그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은 아주 없고 생도시절과 임관 이후, 그 즈음에서 혼란하고 있어.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뇌의 문제는 아니고 심적인 이유라는 것 같더군. 앞으로의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게 결론이야."
"1급 경호체제로 돌리고 지구로 이송해."
"아리안로드 함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지구 본부는 그 쪽대로 지휘체계 및 반역에 참가한 장교들의 처우 관련 문제로 정신이 없네. 당분간은 여기에서 그를 책임져야 해."
"그…래서?"
가엘리오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는 팔목을 슬쩍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예감이 아니라 정황 근거로 도출된 가정이라는 쪽이 더 맞는 말이며 가엘리오 보드윈의 인지 추론 능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자네가 그를 좀 지켜봐야겠어."
러스탈 에리온은 활짝 웃으며 가엘리오에게 새로운 직무를 부여했다.
…
*
가엘리오는 잠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자신은 남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전투 스킬을 가졌다. 공간 감각은 좋았다. 논리력은 살짝 떨어졌지만 그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절대적인 수치에선 모자람 없다. 파일럿은 기계와 시스템을 이해해야 하기에 그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은 있다. 예술은 문외한이지만 기계적으로 외운 탓에 아직도 파블로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켰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정확한 바이올린 보잉을 위해선 어깨를 움직이는 게 중요하단 것도 안다. 가구엔 인체공학이 필요하고 심적으로 편안한 공간배치를 위한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기억을 잃은 전 친우이자 현 원수를 다루… 아니, 돌보는 법은 모른다.
"왜 그래 가엘리오 어디 안 좋아? 기분 나빠? 왜?."
"그을쎄에."
너 때문인데. 전부 너 때문이지.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꾹 억누르며 가엘리오는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을 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기억상실이란 말만 했지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한 것 같은데. 가엘리오는 다시금 골머리를 싸맸다.
맥길리스가 깨어나자마자 보인 이상행동에 당장 러스탈에게 연락했지만 「그건 새로운 증상이군. 의료팀에 전달해 두지.」 하고 러스탈은 단박에 통신을 끊어버렸다. 가엘리오는 당장 쫓아 올라가 그에게 따지고 싶었으나 가엘리오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날라치면 맥길리스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다.
"가지 마, 가엘리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을 애처롭게 내리 깔고 조금만 있으면 눈물을 드리울 것 같은 우수에 찬 얼굴은 어느 화보에나 나올 듯 아름답다. 사관학교? 임관 직후? 다 헛소리다. 맥길리스는 막 태어났을 때도 우는 대신 근엄하게 '응애' 소리만 냈을 게 분명했다. 완전 사람이 바뀌었다고!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보낼 수 없다면 자신이 대신 가고 싶었다. 자신은 아발론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이 쪽이 아니었던가.
몇 안되는 사유물을 들고 방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가엘리오는 이런 걸 걱정하지 않았다.
생도 시절과 임관 직후, 그 즈음의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는 막 우정을 쌓고 있었다. 그토록 오래 붙어있었으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 대해 아는 건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몰랐던 사실을 조금씩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이상, 꿈꾸는 미래, 그는 단 맛을 좋아한다. 그를 위해서 가엘리오는 몇 종류의 가향차를 새로 샀다. 캐러멜이나 초콜릿이 첨가된 것들을 맥길리스는 좋아했다. 풍부한 크림이 들어간 시트 케이크, 생초콜릿을 녹여 만든 음료, 디저트를 잔뜩 알아봤다. 맥길리스는 의외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그래서 종종 대련을 부탁했다. 펜싱이나 맨손 격투, 어느 쪽도 맥길리스는 능숙해서 가엘리오는 매번 패배의 쓴 맛을 보았지만 그것도 재밌었다. 예전처럼 억울하거나 위축되는 것보단 어쩔 수 없지, 하는 체념과 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더 컸다. 맥길리스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할 때 낯부끄럽지만 꽃다발도 준비했다. 화려한 생도 예장도 맥길리스에겐 모자랐다. 세상 모든 영예가 그의 머리에 관처럼 얹어져 있는 것 같았다. 대리석으로 깎은 듯 완벽하고 빈틈없는 맥길리스가 그에게만은 살짝 속내를 보여주는 것에, 그러한 자신의 위치가 그토록 만족스러웠다. 어리석을 정도의 친애였다. 한치의 의심도 없던 과거를 잘 연기할 수 있을까. 그가 내비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철저하게 가엘리오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될지,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속내를 까발리면 혹여나 그 생생한 증오를 보여줄까. 그렇다면 그 혐오를, 같은 공간 안에서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지.
가엘리오가 걱정하던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턱을 괴고 앉아 누워있는 맥길리스를 보고 있을 때, 결국은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 지경이 된 지금까지 맥길리스는 여전히 가엘리오에게 어떤 감정들을 주고 있었다. 분노나 증오나 혐오가 아니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과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들어올려졌다. 흰자위엔 핏줄이 터진 자국도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 쪽으로 돌아왔다. 시력도 멀쩡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초록이 가엘리오를 응시한다. '안녕, 가엘리오.' 그는 의례적으로 그런 말을 하겠지.
"안녕, 가엘리오."
대사는 예상대로였으나 예상을 벗어난 건 그의 표정이었다. 봉오리 진 꽃이 눈 앞에서 만개하듯 맥길리스는 활짝 웃었다. 웃어? 그야 맥길리스는 언제나 미소 짓고 있었다. 적당히 예의 갖춘, 얇은 입술로 길게 호선을 그리면서 다정하게. 그러나 이건, 좀, 달랐다.
"눈을 떴더니 전혀 모르는 곳이라 놀랐어. 아깐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여긴 어디지? 머리는 왜 그래? 껌이라도 붙었었나? 그러게 조심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니거든."
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 없어 코웃음 치는 사이 침상에서 일어난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머리에 손을 뻗는다. 방금 전과는 달리 한껏 침울해진 얼굴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애수 어린 시선으로, 가볍게 가엘리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맥길리스의 손길이 낯설었다.
"아깝게. 네 머리카락, 좋아했는데. 그래도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네. 아닌가, 어른이 된 건가?"
내 기억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단 얘기를 들었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가 있을 거라고. 맥길리스는 전에 없이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몇 살이지, 가엘리오? 간지러운 한숨이 코끝에 닿는다. 가엘리오가 몸을 뒤로 뺀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가엘리오의 머리에 닿던 손은 그대로 멈춰 허공에 떠 있었다.
기억을 잃으면 다 이렇게 되나?
가엘리오는 약간 신선한 느낌으로 맥길리스를 보고 있었다.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맥길리스는 전과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생애 한번도 없었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맥길리스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맥길리스는 꽉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뭐?"
"왜 피해?"
"왜, 냐니, 그거야……." 그거야. 가엘리오는 말을 골랐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지극히 사실적인 말이었다. 맥길리스는 한 번도 가엘리오에게 먼저 손 뻗은 적 없었다. 가엘리오도 말로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한 번도 맥길리스가 먼저 가엘리오를 향해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친구 사이에서 빈번한 스킨십이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가끔 어깨를 짚거나 가볍게 두드리는 것도. 모든 것은 가엘리오의 착각이고 헛된 꿈이었다. "너는 나를 싫어하니까." 이 말은 가엘리오가 미처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별안간 억울함이 치민 까닭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맥길리스는 크게 뜬 눈으로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뻔뻔하긴. 그의 심신안정을 위해 말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후회했지만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속이려 하다니. 이왕 내뱉은 말 차라리 솔직하게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밀어붙였다.
"싫은 게 아니면, 그래―, 싫은 건 아니었겠지. 너는 나나 카르타를 장기말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잘해주었지. 감정은 논리와 이성을 이겨. 한 사람에 대한 존경, 애정, 우정, 신뢰. 너는 그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것들을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존재는 인정하고, 이용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눈꼬리가 처졌다.
"솔직해져, 맥길리스. 아무 탓도 하지 않을게.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나는 여전히 너에게 화는 나지 않아. 그냥 조금 슬플 뿐이야. 진심을 얘기해 준다면―."
진심을 얘기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엘리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냥 그랬구나. 처음부터. 가엘리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었다. 맥길리스가 건네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점이,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아직도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자고 일어나면 익숙한 자기 방이고 제복을 입고 출근하면 어느 복도에서 맥길리스를 만나 인사하지 않을까 그런 헛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은 독이고 덫이고 족쇄였다.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다리를 붙들고 옥죄고 육체와 정신을 좀먹고 헐어버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나 맥길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맥길리스의 과장된 동작은 전에는 몰랐는데, 꽤 기이한 버릇이었다. 그는 잔뜩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 누구나 몰입할 정도로 호소력 있는 표정이었다. 얘는 연기를 했어야 했는데 -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야, 가엘리오. 나는 너를 사랑해."
극적인 무대에 극적인 연출. 가엘리오는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거짓말. 가엘리오가 그렇게 읊조리면 맥길리스는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내 말을 믿지 않아? 그거야 네가 그럴 짓을 했으니까.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슬펐다. 자신은 더 이상 맥길리스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맥길리스에게도 꽤 충격이었는지 내내 이 상태다. 가엘리오가 어디 가려고 하면 옷을 붙잡고, 어디 가냐고 묻고, 불안정한 환경과 의식이 맥길리스의 심층심리에 대체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가엘리오로서는 당최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어미를 좇는 새끼오리처럼 가엘리오를 쫓아다녔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엘리오에게 의존했고 끊임없이 가엘리오에게 되뇌였다.
"사랑해. 이 말에 거짓은 없어."
(중략)
특별히 허가를 받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함정 안에만,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 있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 - 사실 가엘리오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 MS도 없이 우주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슈츠를 챙겨입는 맥길리스는 예전과 같았다. 첫 항해에서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꼬드겨 몰래 이렇게 전함 밖으로 나왔었다. 무중력과 고요의 세계에서 단 둘만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로맨티스트가 아닌 가엘리오조차도 설레게 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아마 그것을 동경해서 대지를 벗어나 하늘로, 이 아득한 우주로 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맥길리스에게 손을 뻗는다. 그는 좀 놀란듯 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가엘리오의 손을 잡았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손을 내내 거부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조차 잊어버린, 지금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맥길리스'에게 지금까지 너무 가혹했던 걸까. 가엘리오는 과거의 맥길리스와는 별개로 그를 연민했다. 어쩌면 이건 맥길리스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가 냉정한 이성과 이상에 대한 의지로 져버리고 있었던 솔직한 진심.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믿기 힘들었지만.
제일 처음, 의료용 캡슐에서 눈을 떴을 때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깨달았던 건 제가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그 열정, 맹목, 전부 사랑이었다. 그에게 가는 애정이 우정과 친애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란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까.
지난 2년 동안 그런 수많은 가정들이 가엘리오의 머리를 스쳐가곤 했다. 맥길리스를 좀 더 자세히 알았다면, 그를 경계했더라면, 아니 그를 완전히 사랑했더라면,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아니 이 가정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실현될 수 없지. 그러나 모든 가정, 후회는 실재가 되지 못한 것들이며 실재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이고 이것은 그 어떤 우주에서도 반대가 되지 않는 절대적 진리다.
가엘리오는 충동적으로 헬멧을 벗었다. 맥길리스가 놀란듯 허둥댄다. 이전의 맥길리스라면 전혀 그러지 않았겠지. 아마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러나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야, 가엘리오.'
알아.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나중에 기억을 되찾은 맥길리스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억한다 해도 가엘리오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지금은 지금이다. 간신히 지금의 그와 예전의 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맥길리스는 여기 실재하고 있다. 저를 사랑하는 맥길리스가. 예전과는 별개로, 제게 사랑을 말하는 이를 그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존귀한 사랑에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대기가 없는 우주에선 그 어떤 소리도 소리가 되지 못한다.
너, 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산소가 부족한 탓일까. 가엘리오는 흐려지는 시야로 생각했다.
사,
맥길리스가 헬멧을 벗었다.
랑했,
우주에서는 탄 고기 냄새가 난다고 한다. 달에서는 독특한 화약 냄새가, 혹자는 달큰한 라즈베리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그 어느 것도 맡지 못했다. 지금 코끝으로 맡을 수 있는 건, 달작지근한 초콜릿 냄새, 이건 아까 맥길리스가 마신 캐러멜 가향차 냄새일까. 모르겠다. 숨이 벅차서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할 수 있는 키스였기에 가엘리오는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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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님의 썰을 빌려서 카피본...으로 나올지도 모르는 책의 인트로.
맥길리스와 가엘리오가 어영부영 해피웨딩하는 원작이랑 아무 상관 없는 얘기로 대략적인 소재와 스토리는 디님에게서 빌려왔습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끔찍한 두통과 함께 일어났다. 상쾌함과는 거리가 먼 기상에도 불구하고 시각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으로 여기서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시각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치미는 울렁거림에 손을 뻗어 침대 옆의 물을 마시고 보니 입에 닿는 컵의 촉감이 평소와는 다르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널찍한 트윈베드룸, 옆 침대에서 조용히 잠든 친우의 금발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보고 가엘리오 보드윈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또 사고쳤군.'
그렇다. 또다.
보드윈은 술에 강하다. 입에 잘 대지는 않지만 가벼운 식전주로 와인 한 병을 비울 수 있는 어머니와 젊은 시절엔 밤새 탁상공론을 하며 양주 한 병을 스트레이트로 비울 수 있던 아버지. 보드윈의 계보를 올라가면 와인 농가를 했다는 집도 있다지만 이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양친의 상태가 그러하니 보드윈이 술에 강한 것은 유전자로 증명된 명백한 사실이다. 가엘리오도 그랬어야 했으나 어디에서 유전자 배열이 꼬인 건지 술은 잘 마셔도 어딘가에서 필름이 끊겨버리는 술버릇이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안 건 사관학교 시절로, 엄격하게 주류 반입이 금지된 기숙사에 누군가 몰래 술을 가져와 치기 어린 술 게임을 했을 때 알았다. 평소엔 세븐스타즈 도련님들이라며 묘하게 벽을 치던 동기들이, 혹시 사감에게 걸려도 세븐스타즈가 끼어 있다면 걸려도 덜 혼날까 싶어 말을 걸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기뻤고 그래서 냉큼 맥길리스도 불렀다.
그게 잘못이었다.
가엘리오는 둘째치고 맥길리스는 첩의 자식이네, 양자네, 이러저러한 소문도 많은 편이었다. 운 좋은 녀석이라며 맥길리스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단 사실을 가엘리오는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다. 집요하게 술게임의 표적은 맥길리스가 되었고, 아직 열일곱. 가벼운 과실주나 몇 잔 음미해 본 경험이 있는 그에게 과할 정도의 알콜이 주어졌다. 가엘리오는 본인의 실수라고 자청하며 계속 맥길리스의 잔을 뺏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 가엘리오.'
반사적으로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하려다 가엘리오는 채 상체를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생전 처음 겪는 아찔한 숙취에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가엘리오를 보고 맥길리스는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조금 쉬는 게 좋겠어. 어젠 무리했으니까.'
커튼을 쳤으나 사이로 스미는 빛은 분명 가엘리오가 일어나던 시각의 것은 아니었다.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방은 분명히 맥길리스와 같이 지내는 제 방이고, 옷은 어느 새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숨쉬기도 버거운 울렁임 속에서 가엘리오는 제가 방으로 들어와 옷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의 과정을 상기해보려 했으나 컵 가득 따라진 증류주를 억지로 들이켜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식도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잔뜩 메인 깔깔한 목으로, 어떻게 된 거야,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숨을 고르며 물으면 맥길리스는 그저 웃었다.
'취하면 기억이 안 나는 게 술버릇인가 봐, 가엘리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
교과서에서나 나올 것 같은, 참으로 맥길리스 파리드다운 대답이었다. 남의 시선도 있고, 그런 시선이 아니라도 반듯한 성정의 맥길리스를 그런 데 끼어들였다는 죄책감에 가엘리오도 그 뒤는 더 묻지 않았다. 만취해 기억을 잃은 본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동기들은 그 뒤로 가엘리오와 더더욱 명백하게 벽을 두었고, 가엘리오는 그것을 뼈저린 교훈 삼아 다시는 그렇게 술을 안 마시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다짐은 언제나 부질없다.
푸른 빛을 띄는 연한 보랏빛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그렇듯, 보드윈의 애주가 특성 또한 유전이라 가엘리오는 슬프게도 위스키와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맥길리스와 둘이 마시면, 마음이 편한 탓인지 꼭 이렇게 되고 만다. 매번 맥길리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맥길리스는 괜찮다고 웃어 넘기지만 취객을 부축해 데려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가엘리오는 본인이 취한 다음에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걸음은 걷긴 하는지, 누구에게 시비를 걸진 않는지, 아예 기절해버리는 건지 아니면 정상적으로 행동은 하는데 기억에만 없는 건지. 일어나면 몸에 특별히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안도 깨끗이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것 같으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고 해도 음주의 뒤처리가 온전히 친우의 몫으로 돌아가는 건 백 번 사죄해도 모자른 일이다.
맥길리스가 일어나기 전에 간단한 조식이라도 주문해 놓을까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방에 비치된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지금까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는데 호텔 이름을 보니 감이 온다. 자주…까지는 아니고 두어 번 와 본 곳이다. 임관 이후 작은 일탈을 하고 싶을 때마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는 빈골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무래도 전장 10km 밖에 되지 않는, 모두가 가엘리오와 맥길리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곳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먹으면서 한 잔, 자리를 옮겨서 한 잔, 키핑해 둔 와인이 생각나서 한 잔, 그 다음엔…….
음. 자리를 옮긴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거기가 기점인 모양이다. 가엘리오는 새삼 사유물을 확인했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어제 입었던 셔츠는 약간 구김은 있지만 얼룩이 묻은 곳은 없다. 어두운 색의 청바지 밑단에는 약간 흙이 묻어있지만, 어젠 내내 추적추적 비가 왔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주머니의 휴대용 단말기도 멀쩡-, 멀쩡해 보였다. 어디 금 간 데도 없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밤새 배터리가 방전됐나 보다.
가엘리오는 단말기의 배터리를 충전하며 룸서비스 버튼을 눌렀다. 샌드위치, 팬케이크, 에그 베네딕트, 커피 두 잔, 맥길리스가 먹을 초콜릿이랑 또……. 여전히 숙취의 울렁임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만 먹으면 모두 해결된다는 괴상한 진리가 통하는 가엘리오에겐 오히려 위장에 뭐라도 밀어 넣는 게 이득이었다. 신나게 눌러놓고 나니 금액이 꽤 나온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의 휴가이기도 하고, 맥길리스에겐 어제 폐를 끼쳤으니 사죄하는 의미에서!
실컷 합리화를 해두고 가엘리오는 결제를 위해 단말기를 켰…는데,
“우, 왓, 잠―”
켜지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하게 쏟아지는 알람에 가엘리오는 황급히 전면 스피커를 손으로 막았다가, 후면 스피커를 막았다가, 그래도 안되겠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슨 알람이 이렇게 우다다다 울리는지 무음으로 돌리는 와중에도 알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조용한 방 안에서 가엘리오는 슬쩍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맞은 편 침대에 옆으로 돌아 누운 친우의 등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가엘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부재중 전화가 60통에 메시지가 34건, 음성메시지가 1건. 뭐야 간밤에 전쟁이라도 났나? 테러? 가엘리오는 바닥을 기어 내려가 커튼을 들춰봤지만 밖은 멀쩡했다. 이제 막 밝아오는 사위에 바다가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하고 따뜻한 날씨라 어제 저녁의 계획대로 산책 좀 하고, 알미리아에게 줄 선물을 사서 돌아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가엘리오는 창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아서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 예순 통 중에 다섯 통은 모르는 번호, 스물세 통은 집, 서른 통은 카르타…. 뭐야. 카르타가 왜 전화 해?
가엘리오는 의아함을 가득 품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급하면 문자로 용건이나 남겨주면 좋으련만 다들 쓸모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연락요망’이라든가 ‘어디니?’라든가 ‘오빠 제일 싫어!!!’, ‘너 ㅐ체 뭐ㄹ ㅎ거 싸돌앋ㅏ녀’, …….
…거기까지 읽으니 가엘리오는 퍼뜩 몸이 굳는다. 지은 죄가 없다기엔 가엘리오는 지난 여덟 시간의 기억이 통째로 없었다. 설마 술 마시고 아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한 시간씩 떠들어 댔나?! 가엘리오는 기나긴 통화목록을 내렸지만 이쪽에서의 발신 내역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누구랑 싸움이라도? 민간인 폭행은 아무리 세븐스타즈라도 최소 영창행이다. 아니, 오히려 세븐스타즈라는 이름 하에선 가중처벌이나 안되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제 몸 어디에도 타박상은 없고 옷은 멀끔했다.
그럼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사실 이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술주정’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은 안전 불감증이었다. 호텔은 익숙한 곳이고, 하나뿐인 친우가 옆에 있었으며, 분실한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고, 크게 상처가 나거나 다치지도 않았고, 옷엔 찢어진 부분도 없다. 이상이 있다면 배터리 전력이 다 떨어진 단말기뿐이지만, 만약 일반 통신이 아니라 위성 통신으로 카르타에게 연락 했다면 사용요금이 어마무시하게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정체를 모르는 지난밤에 대해서 가엘리오는 크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으로 연락해도 잔소리가 된통 쏟아질 것 같아서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될지, 그것만이 고민되었다.
사실 진상을 규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맥길리스에게 묻는 것이지만.
가엘리오는 무슨 일일지 몰라도 어젯밤, 저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것 같은 친우를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저와는 달리 맥길리스는 늦게 자고 아침에는 유독 힘들어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명석한 뇌는 아무리 수면을 충분히 취해도 기상 두 시간 후부터나 제대로 돌았다. 새벽 늦게 들어왔다면 일반적인 기상 시각을 넘긴 지금도 그에겐 무리가 될 것이고, 모처럼의 휴일에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는 건 일상 최대의 비극이다.
가엘리오는 제게 남겨진 통화목록 중 가장 잔소리를 덜할 아버지를 골랐다. 마침 조식도 끝나고 한가롭게 아침 뉴스를 볼 시간이었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 줄 아는 아버지 쪽이 매를 맞더라도 훨씬 편할 것이다. 근데 아침부터 걸려온 이 모르는 번호 다섯 통은 뭘까. 스팸인가?
가엘리오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들리는 건 맑은 음색의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로 시작하는 수신 불가 알림음이었다. 뭐지? 가엘리오는 의아하게 여기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이도 마찬가지, 저택의 공용전화는 아예 선이 뽑혀져 있는지 먹통이었다. 가엘리오는 점점 찜찜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다음 타자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알미리아의 개인 회선은 살아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신호음은 끊기지 않았다.
“아, 알미리아. 오빠인데 어ㅈ”
「오빤 바보에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알미리아는 왁왁대며 온갖 욕을 다한다. 해삼! 멍게! 말미잘!!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해산물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요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알미리아는, 그러나 명백한 이유로 화가 나고 속상한 게 분명했다. 평소에는 온갖 예쁜 척은 다 해가며 집안에서도 새초롬하게 꾸미고 있을 알미리아의 얼굴은 벌써 한참을 울었는지 코와 눈시울이 아플 정도로 빨갰다.
대체 내가 뭔 짓을 저질렀길래?!
평소에야 시끄럽기 짝이 없는 귀찮은 여동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혈육인데 저 정도로 낙심해 있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법이다. 가엘리오는 제 죄도 모르면서 일단 알미리아에게 사과부터 했다.
“알미리아, 오빠가 그러려던 건 아니고, 응? 뭔지 몰라도 실수했,”
「그건 더더욱 실망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실수로 할 수가 있어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경망스러운 사람이었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런 무례하고 긍지 없는―!」
“어, 아니, 그럼 실수, 실수는 아니고!”
가엘리오가 빠르게 태도를 바꾸자 알미리아가 화면 너머에서 사라졌다. 요란하게 코푸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가 겹쳐 울린다. 아, 뭐야 진짜.
가엘리오는 시곗바늘을 돌려 어젯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지 몰라도 처음부터 기절시켜서 호텔 방에 던져 주는 게 모든 일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럴 방법은 도저히 없으니 일단 알미리아부터 잘 달래고 아버지를 바꿔달라고 하는 게 낫겠다. 가엘리오는 알미리아가 제발 빨리 진정하기를 기도했다. 한참을 훌쩍이던 알미리아가 결연한 의지를 품고 다시 화면 너머로 나타났다.
「진심이었다는 건가요?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는 거지요?」
“아? 어, 아, 그래 진짜야. 무심코, 그러니까 술 마시니까 해이해져서 그만 본심이 나와 버린 거다. 하지만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그럼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저도… 오라버니가 그러시다면…….」
그러고 나서는 또 크으응-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난다. 아직 애는 애지. 레이디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알미리아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알미리아. 그 얘긴 내가 직접 할게. 아버지와 연결해주겠어? 집에 계시지? 어머니는? 자택에 통신이 전부 끊겨 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돌고 돌아 드디어 본론이다. 별 얘기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게 이제야 슬슬 뭔가 사고를 쳤다는 긴장감이 오나보다.
「아버지요? 당연히 집에 안 계시죠.」
“왜 당연히 집에 안 계셔?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거야 바보 같은 오라버니가 친 사고 때문이죠. 아마 곧 있으면 기자회견이 시작될 텐데.」
“기자회견?”
기자회견이라고? 아니 기자회견은 또 뭐야? 예상치도 못한 스케일에 가엘리오의 목 뒤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숙취가 몰려오는 아찔함이, 일이 잘못 돼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절대중립의 걀라르호른, 인류를 멸망시킬 뻔한 액재전 이후 3세기 동안 걀라르호른을, 세계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을 해왔던 보드윈의 이름에 먹칠을 할 정도의 사고를 쳐버렸단 말인가. 게다가 그 불명예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수습해야 한다니, 이 이상의 수치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나?
가엘리오는 끔찍한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알미리아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 알았어. 알미리아. 오빠가 저지른 일은 오빠가 수습할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곧 들어가서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전해줘.”
「알겠어요. 맛키…도 잘 부탁해요, 오라버니.」
“응? 어, 아. 그래. 그래야지…….”
알미리아의 마지막 말에 잊고 있던 친우가 생각났다. 제가 어제 무슨 짓을 벌였다면 맥길리스에게도 상당한 피해가 갔음은 분명했다. 제 명예뿐만 아니라 친우의 명예마저 망쳐버리다니! 까맣게 꺼진 화면을 두고도 가엘리오는 패닉 상태에 빠져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후- 하- 후- 하-
긴 심호흡 끝에 간신히 굳은 마음을 먹은 가엘리오는 포털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기자회견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분명 저에 대한 기사가 잔뜩 올라와 있을 것이고, 그럼 과거의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누구의 입을 더럽히며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단두대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눈을 질끈 감았던 가엘리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단말기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가엘리오의 푸른 눈동자에 보인 것은,
“우와아아아악!!!”
『맥길리스 파리드 – 가엘리오 보드윈, 결혼?』
대문짝만하게 걸린 충격적인 헤드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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