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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24 [미사후시] Leonids
- 2012.10.20 낙서. 2
- 2012.10.20 [녹황청] Triangular
- 2012.10.16 무나후시로 뱀파이어 AU
- 2012.10.14 [미사후시] Gra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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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후시] Leonids
Leonids ; 사자자리 유성우 입니다. 09년에 뉴스에서 떠들어대서 한 번 보려고 밤샜는데 엄청나게 추웠고 창문으론 보이지도 않아서 포기. 모처에서 리퀘 받은 겁니다. 진짜 비처럼 내리는 유성우는 3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98년이 최근이래요. 그럼 몇 년 남은거지?
"추워."
"그러니까 내가 껴입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추울 줄 몰랐지."
설령 알았다고 해도 후시미는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보이는 걸 대충 집어입고 나왔을 게 뻔했다. 11월의 새벽은 생각보다 몹시 바람이 찼다. 야타도 잔뜩 껴입었지만 옷과 피부 틈새로 스며드는 찬기에 몸이 서늘한데 후시미는 달랑 후드에 점퍼 하나다. 후드 사이로 드러난 목이 보기만 해도 서늘하고 차보여 야타는 후시미의 후드를 씌워줬다.
"왜."
"춥대며. 그거라도 뒤집어써라. 보는 내가 시리다."
"싫은데…."
중얼거리면서도 후드를 벗지 않는 걸 보니 춥긴 추운 모양이었다. 후드의 끈까지 잡아당겨 꽉 묶어주고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면 후시미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머니에 넣은 손은 끝까지 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새벽에 왜 여기까지 올라온건데?"
"좋은 거 보여주려고."
"나중에 보여주면 안되냐?"
"안돼."
새벽 야산을 올라올 때부터 후시미는 영 맘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잠에서 덜 깬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고 가늘게 뜬 눈은 야타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는 듯 했다.
"뭐 얼마나 좋은 걸 보여주려고. 10초 안에 안 보여주면 나 내려간다."
"좀 기다려야 돼."
"얼마나."
"나도 몰라."
솔직히 과연 야타의 생각대로 될 지도 미지수였다. 뉴스에서는 드디어 시기가 돌아왔다며 기대해도 좋다는 둥, 올해 마지막의 천문쇼라는 둥 실컷 떠들어댔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제대로 봤다는 사람도 드물었다. 추위 탓인지 원래도 참을성 없는 후시미는 할 일도 없이 새벽에 야산을 올라오는 너같은 멍청이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악담이야 야타도 질릴 정도로 들어봤지만 초조한 탓인지 그걸 모두 가뿐히 여유가 들지 않는다. 무시하자, 무시해. 속으로 치받는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이를 악물고 짙고 깨끗한 남색 위에 총총히 박힌 점같은 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면 후시미가 옆에서 다시 시비를 걸었다.
"너무 정곡이라 할 말도 잊었냐?"
"뭐가."
"네가 희대의 멍청이라는 데 대해서 말야."
"겉만 멀쩡하고 속은 어린애 같은 네 녀석보다 낫지."
"그리고 넌 겉도 속도 어린애고? 그러니까 매달리는 거잖아, 호무라에."
"야!"
턱- 하니 미사키의 머리 위에 얼굴을 얹으며 씨익 웃는 후시미의 얼굴은 정말로 미묘한 경멸을 담고 있어서 야타도 거기에 대해선 발끈할 수 밖에 없었다.
"왕이고 뭐고 일단 붙으려면 좀 그럴듯한 데 붙어야되지 않겠냐. 유대감 어쩌고 해도 실상은 그것 빼곤 아무것도 없잖아? 이건 뭐 먹고살기도 힘들고 난 내일도 아르바이트라고."
"미코토 씨를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미코토 씨가 너한테 해준 게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들러붙어? 차라리 둘만 있는 쪽이 벌이는 괜찮았을걸?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릴 게 분명해. 그리고 우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버리는 장기말이 될 걸."
"미코토 씨는 그럴 사람 아냐! 그리고 재밌다면서 계약하고 젤 신났던 게 누군데 그래!"
"너겠지, 이 머저리야. 신나서 사고만 뻥뻥치고 다니고."
"야!! 지난번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적당히 한 두대 패고 끝날 걸 아주 떡이 되도록 두들겼잖아. 덕분에 나도 쓸데없이 뛰었어야 되고 뭐냐 그건?"
"너도 안 말리고 옆에서 부추겼거든?"
"그거에 넘어가는 네가 병신이지. 너랑 다녀서 뭐 제대로 된 꼴을 내가 본 적이 없다. 키는 쪼끄매서 성질은 더럽고 툭하면 시끄럽고 말 많아, 사고뭉치에 머리도 안 좋고. 내가 너같은 거랑 왜 붙어다녀야 되는건데? 딱 질색이야."
"너만 그런 줄 아냐? 나도 그래! 넌 나보다 성격은 더 더럽고 기분 나쁘지, 세상에 너 좋아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거다! 지금도 친구 없어서 빌빌거리는 주제에 무슨. 네가 나한테 붙어다니는 거지 너 없어도 난 멀쩡히 잘 살 수 있거든?"
"아하, 그러세요?"
후시미의 눈이 밤하늘 밑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새벽공기만큼이나 차게 얼어붙은 얼굴이 비식거리며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무심한 잿빛이지만 가끔은 하늘의 색으로 빛났다. 오늘은 배경으로 삼은 하늘과 똑같은 깨끗하게 짙은 남색이다. 실컷 같이 떠들어놓고 예민한 척은 혼자 다하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야타는 참았다. 여기까지 말하면 후시미가 정말로 가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라질 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후시미는 자존심이 강하고 가뜩이나 집착도 없는데 살짝이라도 쥐고 있던 것도 한 번 놓아버리면 미련이 없다. 거리에서 마주쳐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잿빛으로 바라보겠지. 무심하게, 아주 무심하게 야타를 바라볼 터였다. 지금 화가 난 눈동자보다도 야타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여기선 붙잡아야 된다, 고 가속하던 비난에 브레이크가 걸리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먼저 사과하기는 죽도록 싫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되지? 후시미 말대로 자신은 진짜 멍청이인지도 모른다.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만 달싹이면 후시미는 한층 더 사납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간다. 잘 있어, 미사키."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발걸음에 그제서야 다급하게 야!! 하고 공기가 지잉- 하고 울릴 정도로 불러도 후시미는 멈추지 않았다.
"너 진짜 갈 거야?"
"추워. 그리고 지금 내려가서 짐 싸려면 빠듯하겠네."
"가, 갈 데도 없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든 되던데."
그야말로 후시미다운 대답이었다. 흔들림 없이 걷는 뒷모습이 어둠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때 밤하늘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아, 그렇지. 오늘 이 새벽에, 이 추위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저걸 보기 위해서였다.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요즘은 이미 영악해진 어린애들도 믿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같이 소원을 빌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여 주머니 속에 손을 밀어넣은채 가로등도 없는 우거진 산길을 잘도 내려가려는 후시미의 손목을 낚아채면 놀란 듯 잠깐 커진 눈동자가 야타를 향해 깜박였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거야?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싫냐?"
"……."
"뭐가 어찌됐든 이건 보고 가라."
질질 끌면 후시미의 다리가 잠깐 휘청거리다 맥없이 끌려온다. 하여튼 키 크면 싱겁다는 옛말이 틀린 건 없는 것 같다. 야, 이거 놔라. 하는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반해서 반항은 미약했다. 뿌리치려는 손목을 꽉 붙잡고 아까까지 서 있던 하늘까지 훤히 뚫린 공터로 와 다시 하늘을 바라보면 저 하늘 한 구석에서 다시 반짝, 하고 빛났다.
"봤어? 봤냐? 봤지?"
"유성?"
"오늘 사자자리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라더라. 예쁘지 않냐?"
"이거 보려고 이 밤중까지 왔냐. 매년 떨어지는거."
"어…?"
후시미의 말에 야타가 어라? 하고 눈을 깜박거리면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눈이 야타를 향하고 픽- 하고 웃었다.
"몰랐냐? 매년 유성우는 떨어져."
"거짓말!!"
"물론 비처럼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면 시기를 맞춰야겠지. 33년 주기로는 정말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더라. 최근엔 20년쯤 됐으니 앞으로 13년은 더 기다려야 되나."
"진짜?"
"그래. 이거 보여줄 거였냐. 그럼 난 봤으니까 내려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식이라면서 생전 처음 듣는 얘기들을 줄줄 읊는 후시미의 말에 야타는 억울함이 흘러넘쳤다. 세상에, 매년 떨어지는 걸 보겠다고, 심지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다는데 이 얼어죽을 것 같은 새벽에 나와 쓸데없이 불화까지 키웠다는게 야타는 억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타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후시미는 정말 내려가자마자 짐을 쌀 기세라 야타는 다시 후시미를 붙잡았다.
"야 자, 잠깐만! 진짜 갈 거야?"
"그것만 보고 가라며. 그래서 보고 가는데."
말만으로 그치지 않는 행동력은 가끔 무서울 정도다. 지난번에도 쿠사나기가 긴밀한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어느 쪽 팀에서 까불어댄다고 본거지로 가서 다 털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하면 돼죠, 후시미는 간단하게 말하고는 아주 죽사발을 내놓고 와서 야타까지 세트로 혼나야만 했다.
"정말 나 싫어?"
"…싫어."
"꼴보기 싫을 정도로?"
"……."
"진짜로 네가 바라는 게 그런 거야?"
키 큰 녀석들은 이래서 불편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아니꼬움을 느끼며 야타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잡고 내리눌렀다. 바람에 메말라 거스러미가 일어난 열린 아랫입술을 깨물고 혀에 닿는 차가운 피부에 한기를 느끼며 슬쩍 핥으면 후시미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엉거주춤하게 내려앉은 자세 그대로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싫은데."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에 후시미는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그 따뜻한 숨이 얼굴에 닿아 귓볼이 뜨거워지는 걸 야타는 하늘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 속에 들어간 후시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뭐하냐?"
한참 후에 후시미가 뱉은 말은 겨우 그거였다. 하늘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야타를 따라 시선을 돌리면서 물으면 야타는 계속 하늘을 주시하며 답했다.
"유성 찾아."
"뭐하게?"
"소원 빌어야지."
"무슨 소원?"
"말 안해."
그러니까 네가 어린애라는거지. 후시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야타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년 떨어진다고 해도 솔직히, 내년에도 이 고생을 해가며 기다릴 자신은 없고 후시미가 얌전히 따라올 리도 없으니 후시미와 보는 유성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였다. 그렇다면 어린애들도 안 믿는 속설이라고 해도 야타는 꼭 오늘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야, 미사키."
"왜. 그만 좀 불러. 매년 떨어진대도 난 오늘 다 보고 갈 거다. 소원 빌 거라고!"
"그냥 13년 기다려."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 때는 옷도 좀 제대로 입고 얌전하게 기다려 줄테니까 같이 소원 빌면 되잖아? 찾을 필요도 없이 유성은 비처럼 쏟아질거고."
응? 그렇지 미사키? 속삭이며 후시미는 씨익 웃는다. 매끄럽게 그리는 호선은 평소와는 다른 진짜 웃음이고 그대로 가까워지는 얼굴을 야타는 피할 수 없었다. 아까 야타가 했던 그대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를 내밀어 핥으면 따뜻하고 말캉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진다. 네가 비는 소원이래봤자 뻔하지.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간지럽다. 소원따위 빌지 않아도 네 옆에 있을테니까.
아. 후시미의 눈동자 뒤로 유성이 스쳐 지나간다. 빛무리보다 더 아름다운 눈동자를 야타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13년 후에도, 그것보다 더 오래오래 너와 있고 싶어. 그렇게 소원을 빌면 이뤄질까. 틀림없이 이뤄지겠지. 서로가 옆에 없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투닥거리면서도 사랑을 속삭이고 늘 옆에 있을 터였다. 늘. 아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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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이지러진 얼룩이 처음 생겼을 때의 고통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불꽃은 낙인시킬 때보다 지우려고 할 때 더 뜨겁게 타올랐다. 매캐하게 단백질이 타오르는 냄새와 한 쪽 어깨가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화끈한 고통, 온통 한 쪽으로 신경이 쏠려 다른 감각을 완전히 소실해버려 나중에 셔츠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걸 보고서야 피도 어느 정도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달군 쇠에 베이면서 동시에 익어버려 날카롭게 잘린 상처 주변의 살은 우둘투둘하게 부풀어 일그러져 있었다. 수백개의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처럼 욱씬거리고 심장이 거기에서 뛰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게 그렇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팠는지는,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후시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 때는 죽을 정도로 아팠다고 해도 지금에서는 그게 어느 정도로 아팠는지 가늠할 수 없다.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과 희미하고 단편적인 기억과 감각들만이 뒤섞여 어지러이 휘날린다. 정말로, 그렇게 아팠던 것은 아니었다. 화상은 생각보다 오래갔고 매일 소독약을 바르고 진물에 들러붙은 거즈를 떼어내는 일이 귀찮아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는 했었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 대신 이 통증은 아주 진득하고 오래오래, 매일 나타나는 건 아닐지라도 어딘가에 숨어있다 불현듯 튀어나와 긴 자취를 남겼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환각이었다. 몇 번이나 화끈거리는 고통에서 잠을 깨 병원에 가면 전혀 이상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진득하게 남아 뼈를 긁어내는 것처럼, 피부를 뒤집어 엎는 것처럼 들쑤시고 사라지는 환통을 후시미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시미는 그냥 적응하기로 했다. 호흡마저 가빠지는 통증을 짓누르고 잠이 든 밤이면 다음 날은 늘 긴 여운이 남았다.
오늘도 그러할 뿐이었다. 욱씬거리는 쇄골을, 거무죽죽한 흉이 남은 망가진 불꽃을 찬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후시미는 중얼거렸다.
"엇갈린건가."
너는 어떨까. 나와는 달리 온전한 모양을 지니고 그것을 긍지와 자랑으로 삼아, 감추고 사는 나와 달리 의연하게 드러내는 너는 이 지긋지긋한 고통따윈 전혀 모르겠지. 그래도 묻고 싶었다. 그래도 후시미 사루히코는 생각해본다. 네 손이 닿으면 이 통증도 사라지지 않을까. 이해하지 못해도, 너는 자업자득이라며 나를 타박하고 그래도 감싸주지 않을까. 그러면 틀림없이 이 형체없는 통증도 감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3화의 후시미는 왜 저기서 문신을 깠을까 에서 시작했는데 이걸로 무나후시든 미사후시든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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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청] Triangular
그 유명한 초시공신데렐라....가 아니라 생각해보니 저건 사카모토 마야였죠?
넹. 키세가 양날개엔딩을 맞이하는 정신나간 삼각관계.... 청황도 좋고 녹황도 좋고... 포기할 수가 없었던 나의 이 욕심....
이라고 할지 삼각관계는 그 때는 좋은데 늘 엔딩을 맞이하려면 씁쓸한 게 결국 한 명은 버려지는게 싫습니다.
사랑하는 건 똑같이 사랑하는데 왜 보답받지 못하는 거죠. 그런 느낌으로 썼지만 분량이 정신나갔어....
저렇게 원고를 했으면 하루에 카피본 두권은 쓴 셈인데 기가 막힐 지경. 그렇다고 하루에 쓴 건 아니고 합해서 진짜 14시간 정도 투자한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이후에 진이 빠져서 쿠로바스 쪽은 건드리질 못하겠어요.... 힘드네요...
키세는 너무 예뻤다...........ㅠㅠㅠㅠㅠㅠㅠㅠ
1.
키세 료타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불편했다.
왜냐고 물으면 아마 어영부영하다가 그냥 얼버무리고 말겠지. 미도리마가 딱히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소문이 나쁜 것도 아니다. 190cm가 넘는 장신에도 위압감 같은 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인상이고, 성적도 농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에 오히려 성실한 연습벌레다. 그럼에도 키세는 미도리마가 불편했다. 늘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일순 사람을 꿰뚫어버리는 것만 같고 그가 종종 키세를 빤히 바라볼 때면 키세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테이코의 멤버들이 모두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을 때 키세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조금 안도했다. 문득 눈이 마주치면 그 눈동자가 순식간에 자신을 칭칭 옭아매고 무장해제되어 까발리는 듯한 뱀 앞의 먹이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미도리맛치가 어쩐 일임까."
마주보고 싶었지만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을 키세였다. 미도리마에게 먼저 문자가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할 얘기가 있는 것이다. 나와. 간단명료한 문자에서 그 눈동자만큼이나 강한 의지를 느꼈다. 미도리마가 무슨 얘길 할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직감적으로 키세는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을 미도리마가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오미네의 집에서 나오던 참이었지만 이 상태에서 미도리마에게 잡혔다간 원치 않은 부분까지 모조리 까발려질 지도 모른다. 뭔데여, 미도리맛치. 문자로 하면 안됨까?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나와. 그리고 지금 이 상태. 북적거리는 저녁 시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먼저 불러낸 주제에 미도리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다 마신 컵의 얼음을 빨대로 뒤적거리며면서 키세는 어둠이 내린 창 밖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해 하는 듯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배려심 따윈 없이 사납고 전희도 후희도 없다. 키스도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섹스. 섹스파트너? 섹스프렌드? 프렌드까진 되려나? 아오미네에게 키세의 위치가 어디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잊고 있던 나른한 둔통이 다시금 상기되어 살풋 인상을 찡그리면 아무 말도 없이 키세를 보고만 있던 미도리마가 어느 새 그걸 캐치했는지 입을 열었다.
"어디 상태라도 안 좋은거냐."
"별로 그런 건 아님다. 어쩐지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아오미네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키세는 그러나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흠칫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에? 갑자기 거기서 아오미넷치 얘기가 왜 나옴까?"
설마, 하면서도 미도리마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 키세는 일단 발뺌했다. 다시 한 번 유리창으로 힐긋 자신의 얼굴을 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수습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얼굴이라면 미도리마에게 먹힐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키세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딱히 얘기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거다, 키세."
그 말에 휘적거리던 키세의 빨대가 움직임을 멈췄다. 미도리마의 눈동자는 사람을 꿰뚫는다. 어떤 포장도, 거짓말도 미도리마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은 떠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심한 미도리마의 성격 탓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라고 봐도 좋은걸까. 미도리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걸까. 아니 언제부터? 머릿 속으로 햇수를 헤아려본다. 중3, 고1, 고2 족히 3년이다.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던걸까. 미도리마는 알면서도 눈 감아 준걸까. 자신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머릿 속이 백지장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도 미도리마는 그저 키세를 보고만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시며 새하얗게 질려가는 키세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살풋 한 쪽 눈을 찡그리다가 얕은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는 않는 거다."
"…미도리맛치를…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진 않슴다."
미도리마가 말할 때까지 키세의 안에서 미도리마가 누군가에게 사실을 얘기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와중에도 그런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미도리마의 고지식함이 키세 안에도 자연스럽게 가정된 덕분일까. 미도리마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있다니 불현듯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알았슴까."
"졸업한 직후에."
"그렇게 빨리요? 티날 일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치가 빠른 거다."
졸업 직후라니 거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잖아.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아 키세는 지금까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등을 의자에 기댔다. 딱딱한 등받이가 차가워 옷 너머로도 한기가 올라온다.
"…이젠 적당히 해두는 거다."
"이 때까지 얘기한 적도 없잖슴까. 그런데 갑자기 왜…"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해도 흩어지는 말들을 붙잡을 수가 없다. 갈라진 목소리는 아오미네 때문일까, 미도리마 때문일까. 자꾸만 깜박깜박하는 정신을 붙잡고 있으면 머릿 속엔 왜? 라는 물음만이 남아있다. 갑자기 왜? 지금가지 참고 있었다면 앞으로도 말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딱히 미도리마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혐오감 때문이라면 진즉 얘기했을텐데 갑자기 이 시점에 왜?
"나는 남의 일에 끼는 건 성미에도 맞지 않고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도 이런 데에도 끼어들 이유는 없지만…"
그 다음, 처음으로 미도리마는 잠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가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거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미도리마는 그렇게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가뜩이나 혼미한 정신이 미도리마가 한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오히려 현실성을 뚝 떨어뜨려서 키세는 무심코 허벅지를 꽈악 꼬집었다. 아파! 본인이 꼬집고도 얼얼할 정도로 오래가는 통증에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으려면 미도리마의 다시 꿈같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오미네를 좋아하고 있으니 혐오할 리는 없겠지."
"…그…렇죠?"
"내가 이런 말 하니 이상한가?"
"너무 피곤해서 헛걸 들은 거 같슴다. 당장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네가 들은 게 진짜니 자기 자신을 의심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모르는 거다. 하지만 자각했던 건 작년인가."
"그것도 꽤 오래됐네요, 미도리맛치."
"알아들었으면 아오미네와의 관계, 그만 두는 게 좋은 거다."
"어째서요?"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미도리마의 말과 아오미네와 키세와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확실하게 존중할 줄 아는 미도리마가 아오미네와의 관계를 그만두라니, 설마 질투? 라고 하기엔 미도리마가 자신을 좋아한 것도 너무 오래됐다. 중학교 동창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는데 결국 중점을 두고 있는 건 아오미네라니, 키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섹스 말고는 남은 게 없는 빈털터리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아오미네를 뼈저리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서글펐다.
"좋아하는 사람이 가망없는 짝사랑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혹사하는 꼴은 더 이상 못봐주는 거다."
"아오미넷치가 강요하는 건 아님다. 제가 먼저 매달렸고 좋아서 하는 건데요."
"널 갉아먹으면서 말인가. 애초에 네 성격이면 아오미네에게 좋아한다고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겠지."
좋아한다더니 순 거짓말인가. 가감없는 미도리마의 말은 정말로 냉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있어서 키세는 반박할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가망없는 짝사랑이라고 하지 말아요. 미도리맛치가 절 좋아하는게 사실이라면 미도리맛치도 마찬가지잖슴까."
그러니까 이건 화풀이다. 짝사랑이란 게 얼마나 힘든지, 미도리마가 이 얘길 꺼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면서도 키세 료타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좋아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무참하게 짓밟고 상처입히는 것은 키세가 상처입은 걸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은 못된 심보였다. 키세의 날카롭게 올라간 목소리에 잠깐 헛숨을 들이킨 미도리마의 어깨가, 무너진다.
그제서야 이건 실수였다고, 키세는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도리마도 사람인데, 미도리마라면 자신과는 달리 이 정도쯤은 냉정하게 받아칠 수 있을 줄 알았다.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내가 주제 넘었던 거다. 그 정도는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어. 다만, 아무리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느껴지는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크군."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으며 인상을 찡그린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여 키세는 새삼 미도리마의 속눈썹이 무척 긴 편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이든 현실도피다. 세심하게 렌즈를 닦는 미도리마를 바라보며 키세는 이제는 녹아내린 얼음물을 빨대로 빨아먹었다. 곧 빈 컵의 공기가 빨대를 통과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것 말고는 키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도리마가 다시 반듯하게 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면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미도리마의 눈동자보단 속눈썹이 신경쓰였다. 깜박일 때마다 길게 눈 밑에 그림자를 지우는 속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렇다면 아오미네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종용하진 않겠어. 반대로 제안을 하지."
"제안 말임까?"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땐 반드시 아오미네보다 나에게 먼저. 필요하다고 느끼면 언제나 나에게 연락을 하는거다."
"제가 왜요?"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떠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키세."
그 말에 키세는 미도리마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황당함을 느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도리맛치가? 벙쪄서 하릴없이 미도리마를 바라보고 있으면 미도리마가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거다. 시간이 늦어서 먼저 일어나지."
으에? 아니, 잠깐, 저기요 미도리맛치?
의자 다리에 걸고 있던 다리가 꼬여 우당탕탕 큰 소리가 나는데도 미도리마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가게를 나갔다. 뻗은 손이 목적지를 잃어 키세는 다시 허탈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되는거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은 방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시도때도 없는 거냐, 키세! 나는 내일 시험이라고 말한 거다!"
"하지만 미도리맛치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달라면서요. 저는 미도리맛치의 말을 따른 것 뿐임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다 잘 들으면 착한 아이겠죠. 저는 착한 아이가 아님다."
"그거라도 시인하니 다행인 거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불만만 잔뜩 내뱉는 것과는 다르게 뛰어왔는지 미도리마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나갈 일도 없는 새벽 한 시인데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데다 가방까지 챙겨들고 온 것을 보니 오늘도 자고 갈 모양이었다.
"자고 갈검까, 미도리맛치?"
"네 응석 다 받아주고 다시 집에 갔다올 시간이 없는거다."
"헤헤, 그래도 받아줄 맘은 있는거네요."
"…시끄러워."
옷 갈아입는 것도 귀찮은지 씻고 나와 시트만 둘둘 감은 채 거실에서 헤실헤실 웃는 키세의 얼굴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위기감도 없는건가. 막 씻고 나왔는지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키세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주며 도대체 왜 이런 녀석이 좋은 거냐, 나는. 수도 없이 물었던 말을 미도리마는 자기 자신에게 또다시 반문해본다. 몇 번이고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을 좋아한다. 그 고백 이후로 벌써 1년이 넘었고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듯 미도리마를 연락하던 키세도 뻔뻔해져서는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해 미도리마를 불러냈다. 부른다고 냉큼 달려가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키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랍 한 켠을 뒤져 미도리마가 갈아입을 옷을 내주고 키세는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위로라든가 말은 그렇게 해도 키세가 미도리마를 불러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미도리마를 불러내는 날은 백퍼센트 키세가 아오미네랑 자고 온 날이란 걸 알지만 둘 다 암묵적으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키세 대신 키세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전문용어가 그득한 의학서적을 뒤지며 공부하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키세는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 안 잡니까?"
"내일이 시험이라고 아까도 얘기한 거다. 너도 시험기간이잖아?"
"원래대로라면 저도 내일 시험이지만 촬영이 있어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른 날 치기로 했슴다."
"스탠드가 눈 부시면 안대라도 하는 거다."
"답답해서 싫슴다. 그냥 얼른 자요, 미도리맛치. 저라면 모를까 미도리맛치는 벼락치기 하는 것도 아니잖슴까. 여기."
그렇게 말하며 매트리스를 팡팡 내리치면 미도리마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하면서도 결국 스탠드를 끄고 키세의 옆에 누웠다. 혼전순결을 지킨다더니 누구와는 다르게 미도리마는 키세와 같이 자면서도 한 번도 엄한 짓은 한 적이 없었다. 도발하듯이 미도리마의 품에 파고들면 몸을 뒤로 빼다가도 벽에 닿아 갈 곳이 없어지면 한숨을 내쉬고는 미도리마는 팔을 둘러 키세를 껴안았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이 체온이 맞닿을 때 드는 안정감이 키세는 좋았다. 전희도 후희도 없는 거칠기만 한 섹스를 끝내고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아오미네와 몸만이라도 연결된다면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한 번 이런 식으로 체온을 느끼니 제법 지치는 일이었다고 키세는 실감했다. 홀로 집에 돌아왔을때 문득 느낀 허무가 무섭도록 싫어 미도리마를 불렀다. 도와줘. 그렇게 말했었나.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 앞에 그저 쭈그리고 앉아있으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그 땐 고3이었고 미도리마는 의대를 진학한다고 바빴을 텐데 문을 열면 미도리마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서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 이유를 키세는 지금도 모른다. 그냥 울다가 등을 토닥거리는 그 리듬과 품이 좋았던 것 같다.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아서 키세는 미도리마를 놓지 못했다.
"미도리맛치 진짜 절 좋아해요?"
"인정하긴 싫지만 널 좋아하는 거다, 키세."
"그렇구나."
나도, 좋아한다고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까무룩히 잠에 빠져들었다. 별로, 대답을 바라진 않는 거다. 잠결에 얼핏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키세 군 여자친구 있어?"
다음 날 미도리마는 가볍게 아침밥을 챙겨두고 키세를 깨우고는 집을 나섰다. 아직은 어슴푸레한 시간이었는데도 도서관에 가서 한 번 더 책을 봐야된다고 했다.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희미한 온기만이 남아있는 옆자리가 추워서 결국 키세도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촬영장의 코디가 옷매무새를 점검해주다 말고 그렇게 물어 키세는 뜨끔하면서도 태평하게 물었다.
"여자친구 없슴다. 알면서 왜 그럼까."
"그치만 여기, 키스마크 아냐?"
그렇게 말하며 코디가 손 끝으로 짚은 곳은 목 뒤의 어깨 쪽이었다.
"옷으로는 가려지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키세 군 가끔 여기에 키스마크 달고 온 적 있어. 여기에만 딱 하나. 굉장한 여자친구네. 모델 일 하는 거 터치 안해? 알면서 남기는 거지? 벗기는 순간, 짜잔 하고 나타나서 소유권 주장하는 거잖아."
"어… 아… 음, 그럴…까요?"
"그런거지. 여자친구가 키세 군 많이 좋아하나보다."
식은땀이 줄줄 나는 대화를 하면서 키세는 후보를 꼽았다. 아오미네한테는 늘 자국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는데다 적어도 어제는 저기에 아오미네가 닿은 적은 없다. 그럼 미도리맛치? 그냥 얌전히 안고만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왠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어 키세는 뚱한 표정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어이, 키세. 표정 풀어, 표정."
"죄송함다."
감독에게 사과를 하고 애써 촬영에 몰입하면서도 목 뒤가 몹시 신경쓰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할 처지는 못되지만 아오미넷치도 남긴 적 없는데! 라고 생각하니 왠지 억울했다. 당장이라도 미도리마에게 전화해서 따지고 싶을 걸 참으면서 불현듯 자고 있는 자신의 목을 가만히 물었을 미도리마를 생각하니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키세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지금 표정 좋았어! 카메라에서 눈을 뗀 감독의 말에 그렇슴까? 하고 외치며 키세는 맘을 고쳐먹었다. 이번만은 봐주겠슴다, 미도리맛치.
목 뒷부분에서 간질간질하게 열이 피어 올랐다.
2.
아오미네 다이키에게, 키세 료타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가냐."
"내일도 스케쥴이 있어서요."
없어도 갈거잖아. 목 끝까지 그런 불평이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딱히 키세가 자고 가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키세는 도쿄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착실하게 집에 돌아갔다. 자취하는 주제에 통금도 아니고, 나른하고 달콤한 애프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엉망진창이 되어 울며 그만해달라고 빌고, 매달리고, 애원했던 주제에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냥 멀끔한 얼굴로 나온다.
"아오미넷치도 적당히 나 말고 슬슬 다른 사람 구해봐요."
게다가 최근의 키세는 저런 얘길 꽤 자주하고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 말투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키세는 늘 아오미네에게 둘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님을 상기시켰다.
"누구."
"요즘 스캔들 나고 있는 사람, 있지 않아요? 귀엽던데. 가슴도 아오미넷치 취향이고. 맨날 나보고 가슴없다고 불평하느니 그 쪽이 훨씬 낫잖아요?"
키세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지난 달쯤에 아오미네를 무섭도록 쫓아다녔던 여자였던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바로 프로로 입단해 희대의 루키로 떠오르고 있는 아오미네에게도 파파라치란 게 붙기 시작했다. 일부러 큰 가슴을 잔뜩 밀착시키며 팔을 끌어안는 여자가 그토록 천박해 보인단 걸 아오미네는 그 때 처음 깨달았다. 분명 취향은 큰 가슴이었는데 막상 그런 여자가 붙으니 혐오스러운 이유는 뭘까. 한 번만 같이 잠이라도 자자고 끈질기게 붙는 걸 쳐내는 와중에 사진이 찍혔고 다음 날 아침 스포츠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걸 키세가 못 봤을 리는 없었다.
"입 닥쳐."
"무섭슴다, 아오미넷치."
불편한 기억을 상기시킨 덕분에 부글부글 속에서 열이 끓어올라 세게 말했는데도 키세는 깔깔거리며 아오미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쭉쭉 폈다. 자자, 스마일. 웃기는 커녕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얼굴을 한 대 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훅 끼치는 비누냄새와 샴푸냄새가 달짝지근해 대신 아오미네는 키세를 바짝 끌어안고 키스했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희미하게 입 안에 치약맛이 남아있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아 전부 핥아먹을 듯이 강하게 빨아들이고 정신없이 넘쳐흐르는 타액을 삼키고 키세의 약한 부분을 훑어내린다. 가지 마. 우리가 이렇게 지낸 게 몇 년인데, 어디가 약한 지 어디를 좋아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자극하면 느끼는지, 아오미네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녹아내릴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만들면 분명―――
"오늘따라 이상함다, 아오미넷치. 엄청 거칠었던 데다, 키스도 자주 하고 뭔가 새로운 AV라도 본검까?"
밀어낸 것은 키세였다. 열이 올라 새빨개진 얼굴로도 키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토록 농염했던 키스가 키세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는 듯, 신발장 앞에 있는 거울을 보며 아오미네가 붙잡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해 제자리로 돌린다. 뒤돌아 선 셔츠의 목깃 안에 아직까지도 선명한 키스마크를 상기하면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키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럼, 나중에 봐요 아오미넷치."
쾅- 문이 닫히고 키세는 허망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젠장."
정작 키세는 아무렇지 않게 가버렸는데 방금 전까지 몇 번을 뺐는데도 자기 주장을 해대는 아랫도리에 아오미네는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이렇게 열을 낼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재미로, 심심풀이로, 혹은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고 생각해서 지속됐다. 테이코 시절의 애들이 알면 놀라 뒤집어질 테지만 아오미네와 키세의 관계는 제법 오래됐다. 중학교 졸업 전부터 고교시절에도 부활동과 키세의 스케쥴이 없어 시간만 맞는다면 만나서 뒹굴었다. 아오미네가 먼저 「올래?」라고 문자를 보내면 키세는 몇 시까지 간다고 간단한 답변을 보냈다. 만나는 장소는 늘 아오미네의 집이었다. 적당히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에 만나서 진이 빠질 때까지 뒹굴고 그럼 키세는 잽싸게 사라졌다. 체위를 포함한 모든 주도권은 아오미네에게 있었지만 딱 하나 안되는 건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 뿐이었다.
"넌 되고 나는 안돼?"
짧은 손톱에도 긁히면 따갑다. 화끈거리는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투덜대면 키세는 잔뜩 주눅 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절대 안됨다, 아오미넷치. 전 모델이잖아요. 피팅할 때는 다 보인다구요."
동성섹스도 경험은 있어요. 한 번 해볼래요, 아오미넷치?
중학 3학년 겨울 즈음 키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여자하고도, 남자하고도 뒹굴었단 소리고 아오미네가 아니더라도 곱상하게 생긴 키세 료타에겐 상대가 많았을 거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나체를 보고, 그 표정을 봤을 터였다. 처음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괜히 생각하면 화가 나서 지금까지 눌러 삼켰고 언제 어디서 갑자기 불러내고 키세의 몸은 늘 흔적이 없었으니 키세에게 다른 타인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잘 관리된 하얀 피부에 딱 하나, 선명하게 남아있는 붉은 흔적을 보는 순간 아오미네는 거의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맛봤다. 키세가 야한 표정으로 허덕거리고 있는데도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간질간질하고 들뜬 열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머리가 찬 물을 끼얹은 것 마냥 차게 식었다.
"야, 이거 뭐냐."
믿을 수가 없어 손으로 문지르다가 뭐가 잘못 묻었나 싶어 벅벅 지우려고 하면 거친 마찰에 목 뒤의 여린 살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앗, 아… 아파요, 아오미넷치!"
"이거, 뭐냐니까."
분노를 씹어누르며 물으면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된 건지 울상이다가 아오미네가 계속 다그치자 뭘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뭐긴 뭐야, 키스마크지."
그 말에 키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아,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희미하게 홍조를 띠고 있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표정없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눈동자를 굴렸다.
씨발, 어떤 새끼길래. 진짜 제대로 뒹굴었나? 키스 마크를 남기는 걸 키세가 막지 못할 정도로?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오미네는 단 한 번도 키세에게 키스마크를 남길 수 없었다. 무심코 물어버리면 키세는 눅진하게 녹아있다가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작은 자욱은 커녕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아무리 거칠게 해대도 키세는 씻고 나오면 항상 말끔한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 소리를 하도 질러서 '그럼 이만'이라고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가 반쯤 쉬었을 때야 겨우 만족해서 웃었던 것 같다. 그게 아오미네가 키세에게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영향이었다.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서 먹어치워버릴 것처럼 그 흰 피부를 물들여 버리고 싶었다. 누구도 아닌, 아오미네 다이키만이 키세 료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 흉폭한 독점욕에 아오미네 자신도 가끔 놀랐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키세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키세 료타? 훌륭하지. 지금은 농구도 그만뒀지만 처음으로 아오미네 본인을 카피했을 때의 그 오싹한 스릴은 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당연히 모델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만큼 잘생겼고 곱상하다. 긴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샐쭉하니 웃을 때는 누구나 심장이 두근거릴 테고 아오미네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여기에 그런, 낯간지러운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감정을 붙이긴 싫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키세에게 말할 수는 없겠지. 키세에게 아오미네는 어차피 많고 많은 파트너 중 하나일테니.
결국 키세는 대답을 회피했고 대답 대신 아오미네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그대로 휩쓸려 똑바로 묻지 못한 것이 계속 앙금으로 남아 아오미네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진짜 미치겠네."
들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넣고 아오미네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래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섹스하고도 수음하는 자신은 정말 병신이었다. 아니면 미친놈이거나.
"미도리맛치,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없슴까?"
키세가 음흉한 눈초리로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묻는 말에 미도리마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세를 본 것은 꼭 일주일 만이었다. 지긋지긋한 중간고사는 오늘에야 겨우 끝났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잘까 생각하고 있으면 키세에게서 예의 호출이 들어왔다. 시험 끝나자마자 놀러가냐는 어머니의 말을 애써 변명해 넘기고 키세의 집에 도착하면 새벽 한 시. 도착하자마자 피곤해 보인다며 미도리마를 냉큼 침대에 눕히고 옆에 누워 도망갈 수도 없게 몰아넣고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빤히 모르는 척 하는 키세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일단 얼굴 좀 치우는 거다."
반짝반짝하지만 피로감이 진득하게 묻은 얼굴에 무슨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키세가 생각하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마 애인을 사귀어도 손이나 잡을까 싶은 정도겠지만 불행히도 미도리마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앞에 두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키세는 늘 잠에 들기 위해 미도리마를 부르지만 미도리마에게 그 날은 그대로 잠을 설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꽉 끌어안은 팔의 무게와 가슴팍에 안긴 체온을 느끼면서 미도리마는 늘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적어도 4년간 얌전히 팔베개 내지는 라이너스의 담요 노릇을 해준 사람에게 그 정도는 용서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쪽도 사람인거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미도리마는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했다. 키세는 아마 아오미네에게도 그런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은 키세의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을 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잊을 수 있도록 만든 어떤 장치였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미도리마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한거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지금까지 계속 남겼다면서요?"
"계속은 아닌거다!"
"그럼 상습적으로 남겼단 사실은 진짜?"
"부…정하지는 않는 거다."
"도대체 몇 번이나 그랬어요? 코디 누나가 지적해줘서 혼났슴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거다."
"뭐, 미도리맛치니까 봐줄게요."
눈을 감고 키세에게서 어떤 단죄가 떨어질 지 기다리던 미도리마는 키세의 그 말에 다시 눈을 떴다. 키세는 예쁘게 한 번 웃어주고는 미도리마를 꽉 끌어안았다.
"미도리맛치는 상냥함다."
"이거 놔. 불편한 거다."
"싫어요. 미도리맛치는 나를 좋아하죠? 그럼 이것도 좋은 거 아님까?"
"상대가 잘못된 거다."
"뭐가요?"
"네가 이렇게 대할 상대는 아오미네겠지."
그렇게까지 말을 하고 미도리마는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둘만 있을 때는 한 번도 아오미네를 화두에 올리지 않았다. 어찌됐든 키세를 사랑하는 미도리마에게 있어 아오미네는 암묵적인 적이었고 키세에게는 눈물겨운 짝사랑의 상대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이름은 금기의 단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키세를 바라보면 키세의 얼굴이 희미하게 울 것처럼 일그러지다가 다시 웃고는 미도리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슴다, 미도리맛치.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됨다."
"……."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 같아요. 슬슬… 그만두려구요."
갑자기 떨어진 폭탄선언에 미도리마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반문했다.
"미안한 것이다, 키세. 잠깐 내가 졸았던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 아님다, 미도리맛치. 그만 둘 거에요. 아오미넷치가 날 봐줄 확률은 여전히 제로고, 아오미넷치에게도 좋은 여자가 생길 것 같거든요."
"그건, 지난 주 신문의 얘기인가."
"오늘 슬쩍 떠봤는데 부정하진 않았으니까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 여자 말고도 아오미넷치는 이제 정말 굉장한 사람이 될 거니까 여자팬들도 잔뜩 달라붙을 거고 그럼 취향에 맞는 여자도 분명 있을 거고 아오미넷치가 그만 두자고 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만 둘검다."
"…울어도 좋아, 키세."
"별로…. 이젠 눈물도 안 나와요. 언젠가는 와야 될 끝이 온 것 뿐이니까. 아오미넷치랑 만나고 온 다음이면 늘 상상했죠.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고 아오미넷치가 이제 놀이는 끝, 이라고 갑자기 말해버리지 않을까. 그럼 난 어떡해야 되나. 만날 때에도 혹시 다른 말이 나올까봐 무서워서 쓰러질 것 같이 피곤해도 도망쳐 나왔어요. 집까지 질질 끌고 오면 나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아오미넷치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내가 혼자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지니까 항상 일부러 아오미넷치네 집에서 씻고 나는 평생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은 받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키세."
"되게 이기적인데, 미도리맛치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완전 우쭐했슴다. 죽지 않았구나, 키세 료타! 역시 나!"
"너도 은근히 성격이 나쁜 거다."
"헤헤, 알고 있슴다. 그치만 미도리맛치는 다 알면서도 성실하게 날 사랑해줬잖아요?"
"이렇게 들으니 내 자신이 한심해 지는거다."
"만약에 아오미넷치랑 끝내고 대신 미도리맛치 옆에 달라붙어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것은 두 번째의 폭탄이었다. 사실 자신은 지금 자고 있는 거 아닐까. 어제까지 시험을 치고 와서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미도리마가 안경을 벗어 협탁 위에 올려두고 눈을 부비면 이번엔 키세가 냉큼 선수를 쳤다.
"미도리맛치 졸지 않았슴다! 사람이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면 좀 똑바로 들어요!"
"고백…?"
어안이 벙벙해 키세의 말을 되풀이하면 키세가 미도리마의 얼굴을 양 손으로 꽉 붙잡고 희미해진 시야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렇슴다! 미도리맛치에게 고백한 검다!"
"나한테? 네가? 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제로인 거다, 키세."
미도리마가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로 내뱉으면 키세가 풀이 확 죽은 얼굴로 미도리마에게서 멀어졌다.
"나 진짜 나쁜 놈이었네요, 미도리맛치. 거기서 이런 말까지 하면 미도리맛치에게 진짜 제일 나쁜 짓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그만 둘래요. 나 같은거 좋아하지 말아요,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한테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 생길 수 있잖슴까? 지금까지도…"
미도리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누워 얼굴은 커녕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우울하게 중얼대는 키세를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세게 끌어안았다. 놀랐는지 키세가 엑- 하고 입을 닫아버렸지만 키세는 명확하게 미도리마의 품에 있었다.
"내가 좋아서 붙어있었으니 괜찮은 거다, 키세."
"…저는 미도리맛치를 실컷 이용했는데요? 앞으로도 못된 마음으로 이용해 버릴텐데?"
"그래도 괜찮아. 너는 될 수 있는 것만 실행하지 불가능한 건 말조차 꺼내지 않으니까. 네가 그 말은 한 건 분명 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거겠지?"
"모름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숨쉬는 것 만큼 익숙해졌는데 미도리맛치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사랑인지는 모름다. 미도리맛치가 절 좋아해 주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자신 없슴다."
"그러지 않아도 좋아."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키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옷 너머로 느껴진다. 미도리마가 키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벅차오르는 숨을 애써 누르면 키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미도리맛치 시험도 끝났으니 어디 놀러 갈래요?"
"어디?"
"그냥 뭐 밥도 먹고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
"그래."
"그럼, 불 끌게요."
팔만 뻗어 켜져 있던 스탠드를 끈 키세가 다시 미도리마를 꽉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은 서로의 심장소리 뿐이었다.
3.
날은 화창했다. 외출하려는 것치고는 꽤나 느즈막한 아침을 맞이했다. 미도리마는 밤새 계속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나 겨우 잠이 들었었는데 거기에 시험기간의 여파가 겹친 모양이었다. 키세도 키세 나름대로 피곤했는지 둘이 일어난 시각은 거의 비슷했다. 씻고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빵에 계란프라이로 토스트를 점심으로 먹은 다음에도 집에서 밍기적대다 이 좋은 날 집 안에만 있는 것은 아깝다며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키세 너 오늘 약속 있냐?」
「없으면 잠깐 보자.」
「너 문자 씹냐?」
「전화한다.」
「촬영 아니지?」
몇 통의 문자 끝에 곧이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당연히 아오미넷치. 이걸 받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면 이미 신발까지 신은 미도리마가 문가에서 키세를 불렀다.
"안 가는 거냐, 키세."
"앗, 가요가요!"
뭔가 중요한 일이라면 문자로 얘기하겠지. 겨우 맘을 잡았는데 더 이상 미련을 두는 것은 싫었다. 웅웅 소리를 내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밀어넣고 키세는 미도리마를 쫓아 밖으로 나섰다.
문자는 열다섯 통, 전화는 열 통. 마지막 전화까지 벌써 다섯 시간이나 흘렀거늘 키세는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평소같으면 문자 한 통에 냉큼 답장이 왔을텐데도 상황이 이상했다. 촬영 중인가? 오늘 스케쥴이 있다고 어제 얘기하긴 했지만 모모이에게 물어보면 어디서 알아왔는지 오늘 키세의 스케쥴은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잘못된 정보가 아니냐고 다시 확인해도 모모이는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 아님 널 피하나 보지!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한 거? 아오미네는 곰곰히 머리를 굴렸지만 키세가 딱히 자신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잘못한 거라면 중학동창이랑 절대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못할 이렇고 저런 일을 했다는 것 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호동의를 토대로 이뤄진 정당한 일이었다. 다 마신 콜라의 얼음을 와드득와드득 씹으면서 아오미네는 유리벽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새 고민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까, 키세 료타를? 거기에 대한 답도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머릿 속에서 키세의 목덜미에 남은 희미한 흔적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걘 내거야. 네가 언제부터 걔랑 뒹굴었는지는 몰라도 걘 내 거라고. 치밀은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키세가 다른 사람이랑 뒹굴거라면 차라리 아오미네와 만나는 횟수를 늘리는 쪽이 훨씬 나았다. 처음 할 때부터 고통스러워 하고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겨우 쾌감을 느끼고 몇 마디 말에도 수치스러워 하며 얼굴을 가리던 키세가 아오미네랑 자면서도 다른 사람하고 섹스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중학교 때의 그 청순한 얼굴로도 동성이랑 경험이 있다고 말했으니―
"아, 그 새끼도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도대체 누구야? 그렇게 어린 녀석을 꼬드겨서 섹스하자고 그런 건.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파삭-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구겨진 컵에서 얼음이 튕겨나가는 소리에 스낵바의 모든 사람들이 아오미네를 쳐다보았지만 아오미네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리창 밖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한 순간 아오미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화기는 그 때부터 몇 번을 울리다가 겨우 그쳤다. 슬쩍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면 부재중 전화가 무려 열 통이나 있었지만 그 뒤로 문자는 없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님다, 미도리맛치. 저녁은 뭐 먹을까요?"
별로 급한 일은 아니었나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휴대전화를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영화관에서 먹은 팝콘 덕분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 시간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차라리 장을 봐서 집에서 요리를 해먹을까? 그 말에 의외로 미도리마는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어느 쪽이라도 요리는 자신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아무 생각없이 둘러보다 급하게 볶음밥으로 메뉴를 결정하고 몇 가지 재료를 사들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야!!!!"
불현듯 크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굳히면 키세가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미도리마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아 꼼짝없이 굳어있으려면 한 쪽 팔이 강하게 낚아채졌다.
"너 왜 연락 씹냐?"
"아, 아오미넷치."
"스케쥴 있대며."
"설마 스케쥴이 딴 남자랑 데이트냐? 누구야, 이 새끼는? 얘가 걔냐? 네 목덜미에 흔적 남긴?"
"목소리가 너무 큰 거다, 아오미네."
정신없이 키세를 몰아붙이는 아오미네의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까지 아오미네와 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모자는 확실하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자연스럽게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는 키세의 모자 위로 후드를 덧씌워주고는 조용히 아오미네를 제지했다.
"어라, 미도리마?"
"오랜만이다, 아오미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처음이든가. 근데 왜 네가 여깄어? 야, 너 미도리마랑 있었으면 내 연락 받아도 됐잖아."
키세에게만 신경을 쏟느라 옆에 있던 사람이 미처 미도리마라곤 인식 못했던 건지 미도리마를 확인하자마자 아오미네는 급격히 풀어진 인상으로 미도리마에게 인사했다. 쩌렁쩌렁한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좀 수그러들자 키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던 찰나 이번엔 미도리마가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목덜미 쪽을 얘기하는 거라면 네가 맞는 거다."
그 말에 키세도 아오미네도 쩍- 얼어붙었다.
"그래서."
키세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죄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명백하게 화가 난 것 같은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마도 꼬신거냐, 키세?"
"말이 천박해, 아오미네."
"어이, 넌 입 좀 닥쳐봐. 나는 얘한테 묻는 거야."
"나와 키세의 관계라면 전적으로 내 쪽의 문제야. 내가 먼저 고백한 거다."
"뭐?"
설마 미도리마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아오미네의 눈이 경악으로 커져 미도리마를 향했다. 담담하게 키세의 옆에 앉아 말을 잇는 미도리마의 태도엔 한 치의 거짓도 없어보였다.
"너와 키세의 관계도 들은 거다."
"그걸… 얘기해?"
"정확히는 내가 눈치챈 거지만."
씨발. 나즈막히 으르렁거리는 아오미네의 욕설에 미도리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미네의 행동이 험한 것쯤은 상관하지 않았지만 키세가 움츠러드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키세는 아오미네에게 이런, 바람 난 첩실같은 취급은 당할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왜 네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군."
"내가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냐? 나랑 만나면서도 너랑 만났단 게 말이 돼?"
"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닌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진짜 개같은 소리였다. 갑자기 키세는 내내 연락은 받지 않더니 옆에 있는 건 친구, 좀 안도했다 싶으면 키세를 좋아한다고 폭탄선언에 어울리지도 않게 쫓아다녔다니. 아오미네에게 미도리마 신타로는 명실상부 좀 괴짜긴 해도 흠잡을 데 없는 우등생이었다. 스토커 기질이라든가 하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었고 키세에게 키스마크를 찍는 것조차도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별로 문제는 없는 거다. 내 쪽의 짝사랑이라는 거니까."
"허."
"아오미네 다이키, 너야말로 키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는거다. 키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휘두르는 건 그만해줬으면 좋겠는데."
"좋아해? 휘둘러? 그래,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할래?"
"아오미넷치."
홧김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아오미네에겐 겨우 정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도리마가 키세를 좋아한다고 명확하게 인지한 순간부터 당장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이 때문이었다. 내가 키세 료타를 좋아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키세가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키세의 표정은 울 것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냐. 내가 너 좋아한다 그러면 어떡할래, 키세."
"맘에도 없는 소린 그만둬요."
"진짜인데. 쟨 되고 난 안되는 이유가 뭐야?"
"이제 겨우… 포기하려고 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래요?"
아오미네의 치기어린 거짓말이라고 해도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오랜 시간이었다. 5년. 처음엔 이런 말을 듣는 것도 키세는 상상했었다. 그렇지만 아오미네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젠 정말로 정리해야 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같은 꼴을 겪게 하고 있는 미도리마에게도 너무 미안했고 이런 자신이 불쌍했다. 차라리 미도리마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얘길 꺼낸 게 겨우 어제인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미련도 못 버리잖아요."
손으로 훔쳐도 눈물이 닦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흘러내려서 계속 눈을 비비면 미도리마가 옆에서 손을 붙잡았다.
"눈, 상하는 거다."
"놔요,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는 분하지도 않아요? 화도 안 나요? 겨우 어제라구요! 맘 잡은 게 겨우 어제인데! 5년을 그렇게 병신같이 굴다가 진짜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했더니 오늘에서야 저러는데, 그 말에도 흔들리는 나는 진짜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고 미도리맛치도 멍청이고! 진짜 사람 좋아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들어요? 차라리 나를 붙잡아요, 미도리맛치. 아오미넷치는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착잡한 얼굴도, 아오미네의 벙찐 얼굴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은 정말 못되처먹은 녀석이었다.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차라리 잡으라고 매달리는건 책임전가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은 속이 배배 꼬여 있었다.
"야, 키세. 너 왜 내가 붙잡는다는 선택지를 쏙 빼놓는데?"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하던 아오미네가 키세의 다른 한 손을 낚아챘다.
"이것 좀 놔요, 둘 다! 왜 내 맘대로 울지도 못해."
"네가 나 좋아하고 나도 너 좋아하고 그러면 끝이잖아? 울지 말고."
아오미네의 손가락이 키세의 눈가를 훔쳐내면 또렷하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보였다.
"나… 난 이제, 몰라요. 모름다. 아오미넷치는 너무, 힘들어요."
"이제부터 안 힘들게 하면 되잖아."
"미도리맛치는 계속 지켜줬어요. 내가, 막무가내로 굴어도… 다 아는데, 알면서도… 아오미넷치한테 내가 속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것 만큼, 미도리맛치는 나한테 얘기해 줬단 말이에요."
키세에게 자신이 짐이 되고 있는걸까? 미도리마는 다시 눈물로 흐려지는 키세의 눈가를 훑으며 생각했다. 만약 키세가 자신에게서 떠나간다면 미도리마는 놔줘야 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놓칠 수 없었다. 이제와서. 키세의 말이 맞다. 화가 안 날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오미네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걸 미도리마는 꾹 눌러참아야 했다. 키세가 우는 걸 몇 번이나 보고, 나중엔 메말라서 울지도 못하는 등을 토닥여줬다. 아이처럼 미도리마를 꽉 붙잡고 안겨드는 키세를 자신을 택한다면 분명히 지금의 고통을 몽땅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고통의 편린조차 보지 못한 주제에 이제서야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오미네가 우스워 미도리마는 키세의 얼굴을 돌렸다.
갑작스런 키스에 벌어진 입에 혀를 넣고 고른 치열의 안 쪽을 훑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눈이 제대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빨아들이듯이 키세의 혀를 잡아당기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어 물같은 타액을 삼키면 미처 정리되지 못한 호흡도 같이 들어왔다. 그 습윤한 공기에 미도리마가 조금 웃으면 키세가 억울하다는 눈동자로 헐떡였다.
"붙잡을 거다, 료타."
눈꼬리에 남은 눈물의 흔적을 핥으며 미도리마는 아오미네를 보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의 얼굴이 와작- 구겨지더니 키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겨 끌어안고는 귓바퀴를 핥았다. 발개진 얼굴로 키세가 아오미네를 올려다보는 젖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야해서 아오미네는 훅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꼼꼼하게 키세의 목 뒤를 핥고 미도리마가 남겼다던 키스마크의 위를 아오미네는 입술로 깨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미도리마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경직되어 있는 것을 보며 아오미네는 미묘한 승리감에 고취되어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저… 아오미넷치…?"
"물론인 거다."
"미, 미도리맛치?"
말을 할 새도 없이 키세의 입술은 다시 미도리마에게 먹혔다. 뒤에는 아오미네, 앞은 미도리마라니 둘 다 꽉 붙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아 도망갈 틈이 없었다. 키세는 아까와는 다른 울고 싶은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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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후시] Gravity
리퀘. 듣고 있던 노래가 마침 사카모토 마야의 gravity라...
"이 녀석은 왜 전화도 안 받아!"
마음 같아서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슬슬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눈보라였다. 점심 즈음부터 내리던 눈이 꽤나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저녁 무렵에는 창 밖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휘날릴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얼핏 보는 창 밖에는 하얗게 눈발이 날리고 안개가 두껍게 껴 희미하게 분산되는 가로등 빛만 겨우 가늠이 되었고 뉴스에서는 연이어 계속 꽉 막힌 도로상황이 앞으로의 폭설 예측 등을 주구장창 읊어댔다. 단조로운 발신음만 울리던 수화기 너머는 언젠가부터 '전화가 꺼져 있어……' 라는 상냥한 안내양의 목소리로 변하고 시계의 짧은 바늘이 수직에 가까워지자 불안감이 잔뜩 증폭되어 머릿 속에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도터운 스웨터에 모자, 목도리, 장갑까지 중무장 하고 나는 결국 밖으로 나섰다.
말도 없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가볍게 걸치고 나간 게 벌써 세 시간이나 전이다. 갑자기 야식이라도 먹고 싶어졌던건가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오산이었다. 추위나 더위는 오지게 타는 주제에 꽁꽁 싸매면 멋이 안난다나 뭐라나.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에도 가벼운 복장이라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가볍게 배웅한 것이 화근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생각보다 훨씬 추워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벌써부터 뺨이 얼어붙어 감각이 무뎌지는 가운데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던 길은 오로지 감에만 의존해서 걸어야했고 제설조차 포기한 도로는 발이 종아리까지 푹푹 빠졌다. 도대체 이런 날씨에 이 미친놈은 어디로 사라진거야?
"어~이~ 사루~."
휑휑한 바람소리만이 그득한 가운데 목청껏 이름을 불러도 그 단어 하나하나마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진짜 어디서 얼어죽어 있는 건 아닐지, 멀쩡한 집 놔두고 다음날 뉴스에 '폭설에 길을 잃고 얼어죽은 10대가 발견되어…'같은 게 나올 생각을 하면 이 겨울의 기온만큼이나 머릿속이 싸하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애써 도리질을 치며 하염없이 이름을 부른다.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문 밖의 세계가 갑자기 다른 세계로 변한 것도 아닐텐데 모든 것이 낯설었고 이질적이었다. 이대로 나는 어딘가로 떠밀려 가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녀석이 눈 앞에 나타나줬으면 싶었다. 붙잡아 줄 사람이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시미 사루히코!!!!"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목청껏 풀네임을 부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그 순간 무언가 발목을 콱 잡았다.
"으아아아악악악악악!"
"야, 아파!"
깜짝 놀라 마구 발길질을 해서 털어내면 발 밑으로 무언가 걸렸다. 둔탁한 감촉과 함께 날카롭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멈추면 세상에 맙소사, 거기 녀석은 온통 눈범벅이 되어 누워 있었다.
"야이 미친놈아, 이 한 겨울에 뭐해!!"
"아? 아아. 그냥…."
"그냥? 그으냐앙? 진짜 얼어죽으려고 작정했냐!!!!"
아무리 희미하게 번진 가로등 밑이라고 해도 나는 사루 녀석만큼 시력이 나쁘진 않았다. 새하얗게 백지장처럼 얼어붙은 얼굴에 흐리멍텅하고 가늘게 눈만 치켜 뜨고 후시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누워있었던 건지 몸 위에도 어느 정도 눈이 쌓여있고 하얗지 않은 것은 여전히 발목을 붙잡고 있는 손 뿐이었다. 부르터서 새빨개진 손은 곧 피라도 날 것 같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장갑을 낀 손으로 몸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있으려면 무미무취한 풍경에 슬쩍 씁쓰레하고 달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너, 그 꼴로 나가서 술 마셨냐?"
"조금."
"너 나간 지 세 시간인데 여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몰라."
"아, 진짜!!!"
얼굴은 멀쩡했거늘 말하는 건 영 맛이 갔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머릿속으로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봐도 나는 도대체 녀석이 이러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후시미는 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늘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하늘에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들어도 희뿌옇고 새까맣고 그런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지금은 눈보라가 치고 있으니까.
"너 그러다 진짜 얼어죽어. 일어나. 돌아가자."
"돌아가? 어디로?"
"당연히 집이지. 일단 가게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아, 그 호무라."
픽- 냉소적으로 내뱉고는 후시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술, 가게 안에 널린 게 술인데 왜 이 녀석은 밖에까지 나가서 술을 마셔야 했고 지금 왜 이러고 누워있으며 왜 여기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는걸까.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었다. '야타 씨, 후시미 씨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 말을 나는 앙? 하는 반문으로 넘겼다. 녀석이 멀쩡한 생김새에 비해 가끔 미친놈 같은 짓을 할 때가 있긴 했지만 한 번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녀석의 머리는 언제나 인과관계를 직시하고 있었고 이치나 논리는 언제나 명확했다. 오히려 냉정할 정도로 명백하게 보이는 객관적인 사고과정에 가끔 질린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알 수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미궁이었다. 정말로 문을 열었더니 바깥의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여기서 미아처럼 헤매고 있는걸까. 녀석도, 사실은 태평하게 어느 새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자고 있고 이건 환상 같은 걸까?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순간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앉아있던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어어어? 야! 갑작스런 불균형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면 녀석의 위였다. 가늘고 작은 그런데도 귓가에 틀어박히는 긴 여운을 가진 녀석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천하 따윈 관심없어."
잽싸게 일어나려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난건지 양 손으로 후시미는 나를 꽉 붙들고 있었다. 엎어져 일어날 지지대를 잃고 버둥거리다 포기했다. 벌써 감기라도 걸린 건지 매끄럽지 못한 바람소리가 나는 그 소리를 나는 가만히 들었다.
"왕 녀석들은 다 똑같아. 누구라도 위에 있지. 그 사람들은 전부 내려올 수 없는 사람들이야. 알아, 미사키?"
"스오우 씨를 말하는 거라면 달라."
"나는 너같은 멍청이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아니라니까! 스오우 씨라면 분명…!"
"근데 호무라에는 죄다 그런 멍청이들 밖에 없어. 어디에 있어도 물과 기름이야. 불편해. 섞일 수 없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이질이야, 미사키."
후시미 씨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언젠가 무심히 넘겼던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였다. 팀 호무라는 어디까지나 맹목적으로 스오우 씨를 믿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를 믿기에 전부 바칠 수 있다. 이 길에 올바른 답이, 확실한 정답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기에 당연히 너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러면 너 왜 여기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릴 줄은 몰랐어."
갑자기 깨달은 어색한 사실에 비적비적 고개를 들어 후시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녀석은 무지막지하게 다시 내 머리를 눌러내렸다. 후시미의 가슴팍 위에 쌓인 눈이 혀에 닿아 물이 됐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런 눈보라는 처음 봤는데 밖에 나오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캄캄하고 사람도 없고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지. 술도 마셨으니 춥진 않은데 감각이 둔하니까 걸어도 걷는 기분이 안들어. 땅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전부 제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 나 혼자만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아. 우주, 우주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하염없이, 하릴없이 부유하게 되는걸까.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져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게 되는걸까. 이게 전부 꿈인 거 아닐까. 나는 사실 어딘가 저 멀리에서 그저 부유하면서 바라보고 있고 너희는 땅에 붙어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언젠가는 떠올라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후시미는 감상적인 단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자꾸만 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제서야 아까부터 느꼈던 녀석에게의 이상한 괴리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웃었다. 녀석도 나랑 같은 걸 느낀 게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는 우리를 외톨이로, 미아로 만들었다. 나는 녀석을 찾아 겨우 현실로 돌아왔지만 후시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무겁네."
"뭐?"
"하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아."
술 마신 주정뱅이의 넋두리는 갑자기 영문 모를 곳으로 튀어버린다. 겨우 이해했다 싶으면 후시미는 또 딴 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느슨해져 팔로 딛고 상반신을 일으키면 녀석은 손을 뻗어,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내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 손가락이 차가웠는지 뜨거웠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찬 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전신에 소름이 돋고 바짝 예민해져 다만 그 손의 움직임과 궤적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가로등 밑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아득하게 웃었다.
"호무라는 네가 돌아갈 곳이지?"
"…당연하지."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바짝 말라붙어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얽어붙은 손이 얼굴을 감싸쥐고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에 내 얼굴이 가득 담기는 걸 나조차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끌어당기고, 그래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직시하는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 우주 대신 나를 보고 있었다.
"날 눌러줘.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내가 혼자 부유하지 않게 눌러. 끌어당겨. 중력? 인력? 뭐, 어느 거라도 좋아. 그냥 붙잡아. 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견고하게 땅에 붙어있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네가 돌아갈 곳이라면, 나도 돌아갈게."
나는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고 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편이었다. 호무라의 행동대장이라는 타이틀은 멋으로 달린 게 아니었다. 그래서 움직였을 뿐이다. 중력이나 인력이나 그런 개념은 모른다. 붙잡으라고 했으니까 붙잡았다. 주변은 온통 희뿌옇고 눈이 내리고 새까맣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누군가 우리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녀석에게 키스했을 거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새파란 입술은 차갑고 거칠었지만 안은 뜨거웠다. 미아가 된 녀석을 다시 집으로 데려 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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