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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18 [미사후시] Raindrop
- 2012.11.06 [무나후시] Love is Psychedelic
- 2012.10.30 [무나후시] 어떤 회개에 대하여
- 2012.10.30 [미코후시] 어떤 기억
- 2012.10.24 [무나후시] Paranoid
글
[무나후시] Love is Psychedelic
제목은 의미없음. 약간의 노멀요소 캐붕주의.
손에 가득한 하얀 수국과 국화, 연보랏빛 장미와 겹겹이 쌓인 꽃잎이 풍성한 리시안서스, 그 희고 보랏빛을 띄는, 부드럽게 피어난 색채의 사이에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연두색의 자그마한 소국.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후시미는 어떻게 처리해야될 지 난처했다. 냉정과 이성으로 빚어만든 것 같은,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던 그녀에겐 그 매끄러운 새틴과 얇고 하늘거리는 풍성한 웨딩드레스도, 이 단아하지만 화려한 부케도 빛이 바랐지만 후시미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들어와도 괜찮은데."
"…신부 대기실에 남자가 들어가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선배?"
"어머. 후시미 군이 그런 예의를 지키는 남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시비거는 신랑을 두들겨 패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요."
결점 하나 없이 언제나 완벽한 얼굴이 웃는다면 분명 예쁠 거라고 생각했었다.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다가 움츠리고, 망설이고, 다른 사람에게 웃는 얼굴을 보며 그저 어쩔 수 없다고 되새김질해야 했다. 부드럽고 아름답게 웃는 그녀는 실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봤던 게 마지막이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아니 어쩌면 그 때보다 더. 미소짓는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워 이미 희미하게 변색된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후시미를 설레게 만들었다.
"여전하네. 후시미는."
"사람 어디 가는 건 아니죠."
"그래도 전보다 더 둥글어 진 것 같아. 전에는 조금… 비죽하니 날 서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 아와시마 세리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아. 둥글어 진 건 오히려 선배 쪽이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을텐데. 장난기는 제로.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냉정해서 동기들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는 이유로 괜히 트집을 잡던 것을 기억했다. 과 행사나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있어 차질을 빚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학생회를 착실하게 독촉했고 처음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들어왔던 생각없는 신입생들이 하나둘씩 질려하며 떠나는 동안 후시미는 오래동안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선배, 동기, 후배, 과 행사 따위 관심도 없이 강의 시간마다 불리는 '후시미 사루히코'라는 출석에 다른 사람 역시 눈길도 주지 않는 그런 죽은 듯한 생활을 보냈어야 했는데.
"결혼… 축하해요 선배."
누굴 한심하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후시미 역시 그녀를 사랑했고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그네들과 같은 꼴은 되기 싫어 발버둥치고 대신 오래오래 숨을 죽이고 곁에 남아있는 것을 택했다. 단 한 번도, '세리'라고 그 발음조차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굴리고 생각을 말로 토해낼 수 없어 허공에 숨만을 뱉어내야 했던 그 날들은 이제는 추억이었다.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후시미는 몇 번을 고민해야만 했다. 하얗고 도타운, 부드러운 종이에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을 손 끝으로 훑으면서 그 표정을 보고 누군가도 그랬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해요, 후시미 군?"
우편함에서 가져와 한 번 훑고 탁상 위에 던져놓은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후시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글쎄요. 무어라 답해야 될 지 몰라 머뭇거리면 대신 생각보다 다정한 키스가 돌아왔다. 당신도, 그녀를 사랑했잖아요? 아니었을까? 그 말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키스 뒤에 이어진 손길에 또 이끌려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 같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답을 듣기가 두려웠던 것도 같다. 늘 세상에 다시 없을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그는 또한 난폭했다. 그 정중한 얼굴에 숨겨진 날카로운 말은 매끄럽게 후시미의 빈틈을 발견하고 찔러넣어져 관통당한다. 시작은 후시미였을텐데 어째서 꼬챙이에 꿰여진 숨만 붙어있는 먹이가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상하고 지리하게 이어진 관계는 처음부터 변할 바가 없고 두려울 정도로 익숙해져 사실 지금 이 자리에 후시미 혼자 서 있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었다.
"축하받게 될 줄 몰랐는데, 고마워."
"제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축하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닌데요."
"음… 아니, 후시미는 여기에 오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와시마가 그렇게 추측할 근거가 하나도 없어 후시미가 한 쪽 눈을 치켜뜨고 물어보면 아와시마는 조금 곤란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독점욕 강한 애인이 있잖아. 매일같이 자국 남기던, 볼 때마다 자랑하는 건가 싶어서 낯 뜨거울 정도였는데. 아직도 사귀지 않아?"
그런 애인, 있을 리가 없는데. 하려던 말이 무언가에 턱 막힌듯 목에 걸려 나오지가 않는다. 혼란한 머리에서 사고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얼버무리면 아와시마 세리는 후시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너 되게 사랑하나봐."
그 뒤로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뭐라고 마무리를 짓고 대기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아 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뿌려지는 꽃잎들, 신랑신부의 입장, 어지러울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조명, 엄숙한 주례사, 축가, 신랑은 신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신부는 신랑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영원한 사랑,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애초에 사랑이 있는 지도 모르겠는데. 사랑. 그 단어만을 후시미는 계속 곱씹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날 사랑할 리가 없잖아. 마음보다 몸이 먼저였고 그 몸이 닿은 의도조차 불순했다. 그녀의 옆에 당연하게 자리잡은 그 여유로운 얼굴이 짜증나서, 도발했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고 생각보다 지독했다. 순간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끔찍한 격통, 몸이 꿰뚫리는, 산 채로 잡아먹히는 그 공포, 보이지도 않고 감각조차 없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공황. 핀으로 팔다리가 모두 고정되어 산 채로 해부당하고 있는 개구리처럼 공포에 짓눌려서도 그녀에게서 그를 떼어냈다는 안도감, 내가 갖지 못한 그녀를 가진 남자에 대한 그 치졸하기 짝이 없는 열등감을 만족시켰다. 아마 알고 있었겠지. 후시미의 속셈, 애써 익숙한 척 하던 허세, 여유, 거짓말. 전부 간파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응했다.
아와시마 세리는 무나카타 레이시와 1년을 사귀다 결국 헤어졌다. 그 둘의 관계는 사귀기 전에도, 후에 헤어져서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후시미 사루히코와 무나카타 레이시의 관계는 달랐다. 학생회 멤버와 학생회장의 관계에서 몸을 섞고 거짓을 속삭이는 관계. 아와시마 세리가 원인이었다면 후시미와 무나카타의 관계도 진즉 끝나야 했지만 모두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몇 년이 흘러 심지어 아와시마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도 후시미와 무나카타는 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줄곧 이어갔다.
이 관계에 도대체 사랑이 어딨다고?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니 후시미는 부케를 들고 서 있었다.
『선물이야.』
색조차 잃은 군데군데 구멍난 흑백의 필름이 드르르르륵 굴러간다. 불안정하게 지직거리며 텅 빈 화면에 아득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피로연은 참석하지 못하고 가겠다는 말을, 최대한 태연한 척 하며 했던 것 같다. 말, 더듬었던가? 모르겠다. 온전한 소리로 냈는지 아니면 뭉쳐지지 않아 허망하게 흩어지는 형태로 간신히 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던져봤자 받을 사람도 없고, 후시미는 사랑한다고 얘기해주지 않았을 게 뻔하니까 이거라도 가져다 주면서 고백해 보는 게 어때?
『좋아할거야.』
후시미와는 다른 차분하고 조금은 들뜬 목소리가 아득하게 저 멀리서 웅웅 울린다.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떠넘겨진 어울리지 않는 부케를 받아서, 손에 쥐고, 버스를 타고, 집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게 부유하고 날아가고 사라지고 순간순간 뭘하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눈을 깜박이면 여전히 싱그럽고 소복한 한무더기의 꽃이 후시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폐부가 차오른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형체없는 무언가가 가슴 안에 가득 차올라서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다. 숨 쉬기가 힘들다. 뻐끔거리면서 숨을 갈구한다. 입술이 메말라간다. 얼굴에 닿는 시트의 감촉. 그저께 새로 갈았다. 왜냐면, 그 전날 밤엔 늘 그렇듯 당신과 있었으니까. 온갖 체액으로 눅눅해진 시트의 감촉이 싫어 아무리 피곤해도 시트를 갈고 잤다. 피곤한 성격이라고 당신이 질책했다. 흔적을 남기는 게 두려웠다. 그게 두려우면 다음 날 시트를 갈면 됐을텐데. 푹 패인 흔적, 미지근하게 식은 온기를 손으로 훑었다. 애초에 다른 곳을 가면 되잖아? 모텔이라든가 러브호텔이라든가 돈만 낸다면 주어진 장소는 많은데. 처음이, 집이었으니까. 희미하게 허덕이는 소리로 변명해 본다. 누구에게 변명하는지는 모른다. 그만 둘 기회는 언제나 있었잖아. 아냐. 그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상하좌우, 시작과 끝도 보이지 않는 형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곳에 서 있으면 그는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어감으로 후시미의 이름을 불렀다. 사루히코 군. 괜찮은 겁니까? 처음이죠? 거짓말은 안해도 되는데.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모른다. 그 공황으로 밀어넣는 것도 건져내는 것도 모두 그였다. 열등감, 우월함, 허세, 거짓말 모든 장막을 찢어내고 손을 내민다. 손을 내민 것은 당신 뿐이었다. 사랑하는 걸까? 사, 라-, ㅅ ㅏ ㄹ ㅏ ㅇ, 사―랑. 어깨가 움찔 떨리는 따끔한 통증과 함께 입 안에서 짭짤한 타액이 고였다. 혀를 씹었다.
그제서야 겨우 후시미는 정신을 차렸다.
그 어색한 낱말, 발음조차 입에 붙지 않아 혀를 씹어버릴 정도의 단어. 그 낯설음 자체가 그와 후시미의 거리였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와시마 세리를 사랑했다. 닿는 것조차 아깝고 닳아버릴 것 같이 소중하고 보기만 해도 아련해서 울어버릴 정도로. 손 안에 넣으면 부서져 흩어질까, 그것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바라만 봤다. 그 아득한 기억. 빛바랜 감정. 무나카타에게선 그 정도의 애절함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냥, 그냥 어느 샌가 익숙해졌고 끝낼 방법을 몰랐고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다시 혼란해져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정신이 다급한듯 반복적으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꿰뚫려 낚아채진다. 대롱대롱 그 소리 끄트머리에 걸려 문을 열면 거기엔, 그래 당신이 있었다.
"아와시마 군에게 혼났습니다."
아까부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온통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떻게 될 지 감도 오지 않는다. 후시미가 들고 온 것보다 몇 배는 풍성한, 향도 색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촌스러운 장미꽃 다발을 들고 무나카타 레이시는 서 있었다. 여유가 넘치던 표정, 숨소리도 모두 조금식 흐트러지고 무너져서 당신은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하니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무나카타는 잠시 침묵을 이었다. 그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긴 했다. 곤란한 표정이라니,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처음 봤던 순간부터 무나카타 레이시는 결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얼굴이었다. 말은 늘 잘 쓰여진 책의 한 구절을 읽는 것처럼 불필요한 조사도, 앞뒤 맞지 않는 부분도 없었고 생각과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들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뜸들이고, 당황하고, 헛기침을 내뱉거나 의미없이 시선을 돌리는 게 신기해서 후시미는 그저 쳐다보다만 보다 입을 열었다.
"결혼식, 안 왔잖아요?"
그것은 후시미 본인도 놀랄 정도로 현실적인 말이었고 말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 말에 다시 무나카타는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다 입을 연다.
"후시미 군이, 흔들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서 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
"아와시마 군 때문에 접근한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반쯤 노린 것도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아와시마 군에게서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었고."
"사귄다거나, 상대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말을 '제의'라고 표현하는 게 이제야 겨우 당신답네요, 무나카타 씨."
"네. 덕분에 그 때도 혼났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과시용으로 이용당하는 건 질색이라든가. 식은, 다 끝난 뒤에 갔는데 아와시마 군은 보자마자 분명 진심을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혼냈습니다. 여자의 눈은 생각보다 날카롭더군요."
아. 그 말은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었다. 여전히 침대 한 켠에 놓여있는 소담한 부케와 같이 묻어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더군요. 후시미 군에게 부케를 안겨줬더니 퍽 잘 어울리더라고. 후시미 군은 차라리 꽃을 주며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뼈 아픈 충고도 해줬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이네요. 결국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장미만 한 다발이지만 확실히 잘 어울려요."
억지로 떠넘겨진 제 품보다 커다란 장미다발에서 달큰한 꽃내음이 훅 풍겼다. 그렇지만 이 꽃 역시 후시미 본인과 어울리는 지는 알 수 없다. 무나카타는 꽤 흡족한 얼굴로 후시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그의 사고방식은 후시미가 가늠하긴 조금 힘든 먼 곳까지 바라보곤 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이건 또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한다. 애초에 왜 이 꽃이 후시미 본인에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무나카타의 말은 하나같이 연결고리 없이 듬성듬성 빠진 것들이었다.
"저는 후시미 군을 좋아합니다.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물론 앞으로도."
"……."
"물론 이제 와서 믿지 않으리란 것도 압니다. 확실히 처음부터 잘못 꿰여져 있었죠. 그래도 그 점은 후시미 군이 감안해줘야 합니다. 저는 의외로 독점욕이 강한 남자였고 후시미 군은 늘 아와시마 군만 바라봤으니까요. 이용은, 제 쪽에서 한 겁니다.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죠. 화를 내도 좋고, 때려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끝을 맺더라도 저는 확실하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오래 끌었어요. 솔직하게 처음부터 얘기하면 좋았을텐데 그 때라면 후시미 군은 아주 가차없이 절 차버렸을 테니까요. 그건 아무리 저라도 겁나더군요."
사, 라-, ㅅ ㅏ ㄹ ㅏ ㅇ, 사―랑. 아무리 읊조려도 뭉쳐지지 못하고 흩어지는 단어들을 후시미는 생각한다. 좋아한다. 사랑. 좋아합니다. 사랑. 좋아해. 사랑. 혀를 씹을 정도로 생경한 단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그 머나먼 거리.
"좋아해요, 후시미 군."
숨이 차오른다. 머리가 어지럽다. 꽃향기가 너무 독해서 기절해 버릴 것 같다. 사랑. 나는, 당신을, 무나카타. 그저 익숙해서, 어떻게 밀어내야 될 지 몰라서, 이름을 불러줘서, 손을 내밀어줘서 그래서―――
"저는……."
목이 메인다. 이 기분, 감정을 마땅히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입술을 열었다 닫고 마른 목을 축인다. 내밀어진 손은, 잡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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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후시] 어떤 회개에 대하여
http://nitrogenal.tistory.com/19 와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안 읽으셔도 무방....하긴 합니다 아마.
신성모독으로 걸리진 않겠지... 역시 모처 리퀘.
저마다 일이 바쁜 가운데 위화감을 느껴 무나카타가 시선을 돌리면 한 자리만이 공석이다. 점심시간이라 텅텅 비었던 사무실이 가득 찼는데도 점심시간에도 느긋하게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자판을 두들기던 뒷모습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다. 5분, 10분, 30분, 1시간. 외근표에 쓰여진 이름만 주인을 닮아 거칠게 뭉개지는 글씨체로 덩그러니 써져있고 텅 빈 자리의 주인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곰곰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도 잡히는 게 없다. 중앙으로 갔던 아와시마조차 무나카타의 예상보다 꽤 늦은 시간에 돌아오면 곧바로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실종된 마피아의 무기창고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수색 중이고 물류상자들 곳곳에 다량의 총기 및 폭발물이 숨겨져 있어 전부 회수하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아와시마 군의 유능함 덕분일까."
"아뇨. 이 부분은 후시미 사루히코가 발견, 먼저 수색하고 있던 호무라를 제압하고 확보한 뒤 연락이 왔습니다."
"후시미 군이?"
몇 남지 않은 퍼즐 조각을 끼워맞추던 무나카타의 손이 멈추고 한 쪽 눈이 의아하게 들려올라가지만 아와시마도 이유는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도 어차피 몇 단계를 건너 뛴 보고를 들었겠지. 아와시마라면 당연히 그 다음 어떻게 발견했는지 정보의 근원을 물을 것이고 후시미가 그것을 아주 곤혹스러워 할 거란 상상정도는 무나카타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정보 수집 능력과 일처리 부분은 분명 셉터4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테지만 그는 너무 비밀이 많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억지로 캐낸다면 대답하는 대신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 그 모든 정보들을 제 머릿 속에만 둘 것이다. 무나카타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정보들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비용과 노력 전부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니 건드리지 않을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후시미 군은?"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는 타입이라 후시미가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대부분은 명확하게 성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이 끝났으면 지금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왔으려나 싶어 블라인드가 내려진 바깥을 쳐다보면 아와시마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따로 연락을 할까요?"
"…아뇨. 결과가 있다면 정보의 출처는 의미가 없겠죠. 들어가세요."
"창고의 일이 전부 정리가 된다면 결과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짧게 목례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나카타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가 손에 들린 퍼즐조각을 다시 끼워맞췄다.
몇 천, 몇 만 피스의 퍼즐이라도 전부 그러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조각은 너무 많다. 애초에 전체의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몇 장의 그림을 겹쳐 이어지는 구석이라곤 없이 부자연스럽게 뒤섞어버리면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이 나올까.
무나카타는 생각해본다. 쳐지고 길게 찢어진 눈매, 항시 가볍게 찌푸려진 미간, 제멋대로 길어 거친 머리카락, 희고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 크지만 얇은 손, 갈비뼈가 드러나는 마른 상체 같은 것들. 머리카락을 쥐어 거칠게 뒤로 제끼고 잡아뜯어버릴 것처럼 피부를 깨물어도 고통섞인 신음 뒤에 익숙해지면 그저 희미하게 비웃기만 하는 얼굴을. 복종을 요구하는 무나카타의 폭력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후시미 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올려주는 손길에 후시미는 눈을 감은 채로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한 쪽은 너무 말이 없고 한 쪽은 너무 말이 많다. 불꽃의 색보다도 극렬한 대비. 불현듯 예전에 호무라 한 켠의 소파에 누워 있으면 후시미를 말없이 바라보던 스오우의 얼굴이 생각나 고개를 젓는다. 스오우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은 결코 열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시미가 떠날 사람인 걸 알았던 것처럼 그 눈동자엔 미동도 없었다. 오늘 후시미의 셔츠를 제껴 상처 난 인장을 보던 눈만이 조금 동요했을 뿐 스오우의 눈은 항시 무거웠다. 무나카타의 눈도 그것과 비슷하지만 이 남자는 정말로 말이 너무 많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얄미워 후시미조차 질릴 정도였다. 보나마나 웃고 있을 안경 너머의 뻔뻔한 낯짝을 한 대 거하게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후시미는 눈을 감고 무나카타에 손에 몸을 맡겼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성적 취향이 꽤나 독특하단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것은 후시미 사루히코 한정으로 질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애정이 깃든 폭력이라는 건 참 생소하다. 섹스는 애정이 넘쳐흐르는 연인들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호간의 암묵적인, 1g의 호감이라도 존재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의 일방향이라면 그것은 애정도 아닌 폭력의 다른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떨까. 거칠게 짓눌렸던 목이 헛기침을 할 때마다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벨트에 묶인 손목이 따갑고 답답하다. 머리 위로 들여올려져 이상하게 한계까지 뒤틀리는 바람에 어깨 근육은 뻐근하고 짓밟혔던 허벅지의 여린 살과 걷어차인 배는 어쩌면 내일 즈음엔 멍이 시퍼렇게 들지도 모른다. 무심코 몸을 뒤틀었다가 올라오는 묵직한 둔통에 인상을 찡그리면 무나카타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요. 닦고 약 발라줄테니까."
이런 걸 병주고 약주고라고 하던가. 모든 감각을 아까 전부 쏟아부었는지 몸에 닿는 물수건의 감각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아 입술을 씹으며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려 애쓰면 물에 젖은 차가운 손이 후시미의 입술을 살짝 밀어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른 곳들이 충분히 아플텐데요."
"…누구, 탓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제 탓이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비꼬면 무나카타는 태연하게 응수한다. 이 남자의 애정은 이상하다. 애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섹스는 합의고 거기에 덧붙여진 무차별적인 폭력도 마찬가지였다. 저항도 반항도 무의미하다. 애정이 깃든 폭력. 그것은 늘 정의내리기가 모호했다. 후시미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행위들의 의미도 모르고 어떻게 밀어내야 할 지 몰라 그저 감내할 뿐이었다.
"오늘 스오우 미코토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빠르기도 하시지.
무나카타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직접 얘기를 꺼낼 거라고 후시미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담배를 위문품으로 주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더군요. 후시미 군은 사실 피지도 못하잖아요."
"모르시는 게 없네요."
저 멀리 널부러져 있는 재킷 안주머니의 담뱃갑은 후시미도 왜 들고 다니는지 이유를 몰랐다. 충동적으로 샀고 버리긴 아까웠고 그렇지만 펴보면 맛은 없었다. 연기가 들어갔을 때의 그 매캐함과 역겨움을 억지로 참아내면 그럭저럭 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걸 달고 다니는 스오우나 쿠사나기가 이해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나카타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억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비꼬아도 그저 웃음소리만 들린다.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뭘 해도 귀찮아 눈을 뜨기가 싫었다.
"어떻던가요. 전 왕을 대면한 심경은."
"…딱히."
후시미는 결국 퇴근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늦게 스오우를 감시하던 대원에게서 후시미가 한 번 면회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와시마를 통해 한 번 들르라고 얘기하면 후시미는 알아서 무나카타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맞춘다. 한 번 배신한 전적이 있는 남자의 속을 알 리가 만무하다. 모든게 흐릿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나카타에겐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느슨한 태도 속에 겹겹이 높은 장벽을 쳐둔 소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굽히지는 않는다. 스오우 밑에 있었을 때라고 태도가 달랐을 것 같진 않지만 후시미의 목엔 여전히 반쯤 지워졌어도 스오우의 인장이 붙어있었고 무나카타는 어떤 형태라도 그것을 덮을 수 있는 흔적을 계속해서 남기는 것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본인이 얘길 꺼내질 않으니 그저 과거의 것이라 치부했는데 오늘 후시미가 제 발로 스오우를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나카타의 머릿 속에 스쳐지나간 것은 후시미가 재킷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작은 담뱃갑이었다.
몇 번째였더라, 그 때까진 무나카타의 행위도 그렇게 거칠진 않았다. 잔뜩 피곤에 절은 얼굴로 셔츠와 바지를 주워입고 마지막으로 후시미가 재킷을 들어올렸을 때 툭 떨어진 그 물건은 무나카타에겐 제법 의외의 것이었다.
"후시미 군, 담배도 폈었나요?"
무나카타가 담뱃갑을 주워들고 물으면 후시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던 것을 기억한다. 곧 지워지긴 했지만 약간의 침묵 후에 후시미는 대답했다.
"가끔, 입니다."
"미성년자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담뱃갑을 열면 이미 닳아빠진 모서리와는 다르게 두 세개만이 들어갈 공간이 있고 꽤나 빽빽하게 차있었다. 확인하기 무섭게 불편한듯 낚아채가는 후시미의 손놀림은 잽쌌다. 그 뒤로 한 두번 후시미가 몰래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콜록거리며 힘겹게 빨아들이다 연기를 내뿜는 폼이 영 익숙해보이진 않아 도대체 왜 그 쓸모없는 것을 들고 다니는지 의문이었지만 오늘 겨우 답을 알아낸 느낌이었다. 그것은 의외로 무나카타에겐 아주 불쾌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직도 과거를 맘에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오늘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혹시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가 모르는 후시미를 알고 있는건 아닐까. 그럴 리 없겠지만 후시미는 혹시 그에게만큼은 굴복했던 걸까.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도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더 선명해질 멍자국들을 닦아내며 무나카타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고 있는데요."
"스오우 미코토가 아니고요?"
"그건 또 참 뜬금없는 얘기네요."
"내 밑으로 들어왔다면 과거는 잊어버려요. 이전의 왕 따윈 필요 없습니다. 추억에 사로잡혀서 쓸데없는 짓도 하지 말아요. 지금 후시미 군의 주인은 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마음도 몸도 전부 복종하는 게 좋아요."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꼴을 당하고도 아무 불평도 안 하잖습니까. 나의 왕인 당신의 명이니까."
눈조차 뜨지 않고 후시미는 입을 놀린다. 이건 비꼬는 걸까? 지금까지 무나카타의 방식이 전부 틀렸다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굴복시킬 순 없을 거라고? 한 번도 뜨지 않았던 감은 눈이 앞으로도 영영 무나카타를 바라보지 않을 것 같아 무나카타는 미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문득, 무나카타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만 했다.
"후시미 군."
"……"
"좋습니다. 얘기를 바꾸죠."
침대 맡의 무게가 사라지나 싶었더니 발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후시미는 결국 눈을 떠야만 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한 시야에서도 그 형태만큼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잘 보여 후시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당신은 저에게 복종하고 저는 당신에게 굴복하겠습니다."
"……하?"
"불행히도 머리카락이 그리 길지 않아 발을 닦을 순 없겠지만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는 정도라면 언제든지 하죠."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고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던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그랬던걸까. 무나카타의 말은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담이기도 했다. 무나카타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나마 상처가 남지 않은 발 끝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대면 후시미의 얼굴이 경악과 당황이 뒤섞여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겨우 떠진 눈이 무나카타를 바라본다. 굴복시킬 수 없다면 이 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매달리고 있는 쪽은 무나카타였고 후시미가 아니었다. 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관계다. 이를 명령이라 한다면 후시미는 지금까지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폭력에 익숙해졌듯이 후시미에 대한 무나카타의 이 굴종에 익숙해지면 이 쪽만을 보게 만들고 잉크가 종이를 타고 올라가듯이 발 끝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워 나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가장 총애받고 신뢰받던 여제자가 되었고 무나카타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가질 수 있게 될 터였다.
일부러 천천히 다시 한 번 발가락 끝부터 입을 맞추면 후시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어라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목소리를 뱉지 못하고 무나카타를 쳐다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좋았을걸.
눈을 감고 꿈적도 하지 않던 후시미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히 무나카타만을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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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후시] Paranoid
머루님 리퀘입니다만... 상당한 캐붕인듯한... 애초에 얘네 둘 왜 투샷 안나왘ㅋㅋㅋ 빨리 나와줘 제발ㅠㅠㅠㅠ 아직까지 호칭이 안나와서 일단은 제멋대로. 청왕님이 후시미를 후시미 군이라고 부르는 건 오피셜이지만 후시미는(...)
제가 보기에 후시미랑 청왕님은 되게 비슷해요. 얼굴이 아니라 사고방식도 왠지 비슷할 것 같고 고양잇과 맹수인데 후시미가 덜 자라서, 내지는 청왕님은 진짜 왕이라서 거기서 차이가 나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동족혐오와 열등감과 그런 것들을 믹스시키려고 했지만 머루님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
나이에 별로 연연하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땐 제법 신경쓰이지 않는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딱히 보호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쓸데없이 제약만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후시미 군은 안됩니다."
아아. 저 얄미운 얼굴 진짜 한 대 쳐주고 싶다. 이를 아득바득 갈며 노려보면 그는 빙긋 웃고 만다. 부실장은 늘 냉철하지만 제법 곤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어 의미없는 대화들은 그만두기로 한다. 비효율.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저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아무 성과도 없고 오히려 의식하기 싫은 미묘한 스크래치만을 남기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걸 아는데도 어린애처럼 달라붙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그래서 당신은 안되는 겁니다'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한 번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쉰다.
"네네, 알겠습니다. 착한 아이는 얌전히 가서 잠이나 자라는 거죠?"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그런 논리라면 부려먹는 것도 적당히 해주세요. 귀찮은 일은 죄다 이 쪽으로 돌아와버리고 마는데 업무량에 대해선 배려해주실 의향이 없으신 겁니까?"
"똑같이 월급 받고 일하는 판에 뭘 어쩌겠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무엇보다 미성년자 노동은 보호받지만 음주는 법에 저촉되는 일이거든요. 솔선수범해서 위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란걸, 후시미 군도 잘 알지 않습니까."
어련하시겠어요. 속으로 슬쩍 비꼬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깎아내리는 대화는 삼가하고 싶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후시미 군."
"명심하겠습니다, 아와시마 부실장. 부실장도 적당히 마시세요."
"내일 뵙죠."
일부러 그의 이름을 빼놓고 부실장에게만 인사하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다 뒤를 돈다. 또각거리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와 그것보단 무거운 구두소리가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거리에서 괜찮은 바를 몇 개 알고 있다. 퍽 소란스런 분위기의 펍이나 생각보다 한적하고 조용한, 안주가 맛있는 선술집. 유형별로 답하라면 리스트를 뽑아다 줄 수도 있다. 그네들이 갔을 법한 곳은 어디까지나 평온한 대화와 적당한 분위기, 도수가 높지 않고 뒤끝이 괜찮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겠지. 아와시마 부실장의 독특하고 드문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 번 이상 가 본 곳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재빨리 몇 개의 후보를 추스려 그 위치를 피해 일부러 소란스럽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바를 찾아 들어가면 이미 안면을 튼 바텐더가 반겼다. 예전 본거지였던 그 소란스런 클랜의 바 주인이 취향이 잘 맞는다며 몇 번 심부름을 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최근 들어서 인식하게 된 사람이었다. 복잡한 뒷사정들을 알면서도 수월하게 넘겨주는 그의 대담함을 나는 좋아했다.
"오랜만이네."
"온더락, 바카디."
"오늘은 처음부터 센 걸."
"내일은 주말이잖아요."
주말이니 한 잔 하러 가실래요, 아와시마 군? 부드럽게 웃으며 이름을 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배척. 부실장의 신경쓰는 시선은 어쩌다 있는 야근의 끄트머리에 존재한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평소같았으면 얌전히 자리를 피했을텐데 같이 가자고 말을 던져본 것은 미묘하게 달라붙는 시선과 그러면서도 견제하는 선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나온 말이 후시미 군은 미성년자라서 아쉽게도 불가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법적으로 미성년자라든가 하는 사실은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보호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일은 초과노동, 근로계약서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4대보험이랑 사망수당은 보장되어 있는건가? 애초에 셉터4는 법을 초월한 독자적인 기관인데 대체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귀하신 청의 왕, 무나카타 레이시는 그저 피하는 것 뿐이었다. 아마 1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도, 2년, 3년, 내가 그의 나이를 따라잡고도 한참 지나도 그 둘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을 터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쫓아갈 수 없는 것은 그 남자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부실장은 왜 되는거지? 왜 그렇게 쳐다봐놓고 다가가면 밀어내는 걸까?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데 나 혼자 흔적을 남기려 애쓸 뿐인걸까? 그렇다면 왜 하필 그 사람이지?
입에 닿는 컵은 서늘하게 축축한데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텅 빈 내장 속을 빙그르르 돌며 열기를 몰아다니고 이윽고 심장까지 들이차 쿵쿵 뛰는 맥박의 빠르기를 기억한다. 그가 처음으로 푸른 빛을 발했을 때, 계약의 말을 내뱉었을 때, 쇄골에 남은 붉은 불꽃의 흔적보다도 더 강하게 옥죄였던 빛에 인정하기 싫지만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안경 렌즈로 반사되는 푸른 빛 사이에서 아름답게 호선을 그리는 남색의 눈동자 밑에 깔린 진한 경멸을 보았을 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지금과 비슷하다.
"한 잔 더요."
"월급날이야?"
"취미가 없어서 돈 쓸 데가 없거든요. 월말이라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렇다고 해도 오버페이스야. 적당히 해. 너 데려갈 사람 아무도 없잖아. 죽이려고 달라들 놈들은 많아도."
예를 들어서 그 꼬맹이라든가? 물기 어린 잔을 마른 행주로 닦고 병을 기울이는 바텐더는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저 쪽으로 가버렸다. 아아. 그렇지. 그 놈도 있었다. 와.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적이 많았다. 저 쪽에선 배신자는 처단해야 된다며 정말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테고 상관이란 놈은 신입을 부려먹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면서도 쓸 수 있는 한도까지 실컷 부려먹는다. 인생 진짜 개같네. 한 번에 털어넣어 버리고 반쯤 녹은 얼음을 까득까득 씹어대면 조금은 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주로 내밀어준 프레첼을 아작거리면서 한 잔 더, 를 청하면 저 끝에서 다른 이의 말상대를 하던 남자가 쓴 얼굴로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그의 얼굴은 분명하게 나와 동질이다. 세상을 내려다보고 경멸하고 비꼬는 눈동자는 바라볼 때마다 짙은 혐오감을 담고 있지만 숨기는 것엔 능숙한 남자였다. 멍청하고, 어리고, 불쌍한 것. 입 밖으로 안 꺼낸 것이 왕의 자질이라면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는 빌어먹게도, 정말 왕이었다. 모든 것을 손 안에 두고 내려다보면서 복잡한 퍼즐을 맞추듯 사람을 바라본다. 그의 앞에서는 어떠한 벽도 무의미하고 치기어린 마음은 한 번에 까발려진다. 모든 조건을 동등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를 뛰어넘을 수 없고, 따라잡을 수도 없고 그 속을 들여다보지도, 옆에 서지도 못한다.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불쾌함, 네가 꿰뚫어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아냥만을 말없이 쏘아붙이고 깨끗하게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왜 부실장은 되는거지? 차라리 전원을 그렇게 취급한다면 그러려니 할텐데 그녀만은 언제나 특별이다. 유능, 성실, 냉정 모든 것을 갖춘 부관을 물론 인정은 하지만 내가 그녀보다 그렇게 떨어지는 것만도 아닌데. 오히려 동질이라면 더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데도 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놈의 직장 때려쳐 버릴까."
진짜 사표 쓰고 싶다.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면 옆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듣고 키득거리며 취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아직 어려보이는데 직장 생활 하나봐요?"
"어쩌다 보니."
"저도 요즘은 말이죠 죽을 맛이에요. 말단일 땐 그렇다 쳐도 적당히 직책도 달았는데 가면 갈수록 상사가 까대는 건 심해지고 뭐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면 되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등바등 다 해오면 당연한 줄 알고 또 요구해."
"그래놓고 능력없다고 그러지."
"어, 그 쪽 상사도 좀 미친놈인가보네요. 이 쪽도 그런데."
"그래요? 진짜 위에 놈들은 다 왜 그러는지 몰라."
"짜증나죠. 지금까지 해온 건 하나도 기억 못하고 실수한 것만 꼬투리 잡고."
"맞아! 와 진짜 그런 진상이 저만 있는 게 아니었나 보네요."
"세상에 그런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니."
낄낄거리면서 내뱉는 숨이 뜨겁다. 아, 취했나? 아직까지 주량을 넘은 것 같지는 않지만 저녁은 건너뛰었으니까 조금 안 받을지도. 근데 뭐 어때. 내일은 쉬는 날인데. 출근 안한다고. 한다고 해도 네 얼굴 보기 싫어서 그냥 결근할 거다.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면 남자가 다른 술을 권했다.
"킵해놓은 스카치가 있는데 마실래요? 맘 맞는 친구 만난 기념으로 나눠드리죠."
"당연히 마실 수 있죠. 거절은 예의가 아니잖아요?"
진짜 빌어먹을 놈. 왕이 뭐라고 내려다보기만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증스럽게 웃는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안경을 벗어버렸다. 뿌옇게 번진 시야엔 모든 것이 가물가물한데도 얼굴만이 생생해 짜증이 치민다. 개새끼. 미친놈. 집에 가다가 미코토 씨랑 신나게 치고박고 싸우기나 해라. 긴급증원이 걸려도 가지 않을테다.
"자, 건배!"
"건배!"
어느 새 내밀어진 스트레이트 잔을 목구멍에 들이부으면서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끈하게 달아올라 목덜미에서 맥이 쿵쿵 뛴다. 이렇게 죽으면 기억은 해주려나. 그 눈동자에 담아주기는 할까. 끝까지 그런 생각만 하는 나도 누굴 비난할 처지가 못되게 한심스러운 녀석이었다.
"…미 군, 후…미… 정…ㅅ…려요. 괜찮은 겁니까?"
툭툭 뺨에서 느껴지는 엷은 감촉과 익숙한 목소리에 뻑뻑하게 들러붙은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면 짙게 가라앉은 밤의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후시미 군? 취한 겁니까? 일어날 순 있겠어요?"
내밀어진 손은 크지만 늘씬하게 긴 손가락을 갖고 있었다. 검을 잡을 때의 굳은 살과 펜을 잡는 굳은 살이 약간은 뒤섞인 단단한 손바닥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본다. 늘 어느 정도의 예의와 존대, 우아한 행동으로 포장한 남자는 누가 봐도 매너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깜박거리며 주변을 관찰하면 시야가 낮았다. 무심코 짚은 손바닥에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는 모양이었다. 아, 취객이네. 평범하게. 제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서있는 그와 주저앉아 버린 나의 차이가 너무 확고해서 한 번 웃기 시작하면 킥킥대는 새어나오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던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덕꾸러기를 꾸지람하는 부모마냥 묻는다.
"얼마나 마신거에요?"
"기억 안 납니다."
"받아주긴 해요?"
"단골이거든요."
그 말에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이 기함하던 그가 내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겨 순식간에 바닥에서 쑥 딸려 올라간다. 휘청이는 다리는 땅을 딛고 있는지 모호하고 세상이 온통 빙글거리는데 그만이 내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왜 제 집 앞에 있는건지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후시미 군."
"아… 여기 실장님 집 앞입니까? 몰랐는데요."
그 말에 실장이 또 한 번 혀를 차지만 몰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기억은 아까 그 바에서 반쯤 남아있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네 잔째 부었을 때 끝났고 어렴풋이 입구가 넓은 마가리타잔 주변의 소금을 핥아먹고 얼음이 녹아 물기어린 바 위에 고개를 쳐박었던 것만이 꿈처럼 남아있었다. 드문드문한 기억 속에서도 그를 죽어라고 욕했던 것만은 확실해 나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나는 그를 쫓아왔다. 경멸, 비난, 혐오, 어느 것이라도 좋았다. 그 눈동자에 내가 한 번이라도 담긴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제대로 보지도 않을 거면서 매일같이 달라붙는 시선을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건지 모른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머리와 목에서 울려댄다. 빠른 맥박, 기억한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그 빠르기. 처음 봤을 때부터 뛰어서 정신이 없었다. 나와 닮았는데도 높은 곳을 걷고 있는 당신이 싫었고 미웠고 아름다웠다. 내가 갈 수 없으면 붙잡아야지. 그것조차 안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뒤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야지. 나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목을 끌어안고 내뱉는 숨을 내 안으로 집어넣는다. 깨끗한 안경 렌즈와 그 차분하고 우아한 로열 블루 가득히 내 얼굴이 담기는 것을 바라본다. 당황으로 설핏 일그러진 눈동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혀로 핥고 날카롭게 이를 세워 물어뜯는다. 고통으로 찡그려진 미간을 인식하는 순간 몸이 바깥으로 떨쳐졌다. 생각보다 깊게 깨물린 모양인지 묽게 흘러내리는 붉은 궤적을 입 안에 짭짤하게 감도는 맛을 되새김질하며 바라보면 그가 손등으로 스윽 훑고는 나를 본다.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하게. 푸른 빛을 담은 눈동자가 어두워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직까지도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람 말을 들어줬으면 좀 좋겠습니다, 후시미 군은. 솔선수범해서 위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라고 얘기했잖아요."
"어차피 셉터4는 초법기관인데요.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이뤄진다구요, 킹."
그렇게 말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고… 후시미 군이 자초한 일이란 걸 알아뒀으면 좋겠네요."
최대한 지켜주려고 했거든요. 나즈막하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귀에 감겨들 새도 없이 입가에서 느껴지는 말캉하고 따끔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린다. 짭짤하게 배어드는 피의 맛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흥건하게 고이는 타액에 섞여들어 몇 번이나 목 뒤로 넘어가고 먹어치울 것처럼 감겨들고 점막을 훑고 빨아들이고 다시 뱉어낸다. 원래의 박자를 잃어버린 호흡을 어떻게든 이어가면 그는 그대로 웃었다. 저 목 끝에서 울려나오는 습한 공기가 입을 통해 들어와 폐를 적신다. 먹힌다면 그걸로도 좋았다. 사냥할 준비를 마친 날카로운 눈동자를 보며 나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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