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빨아 섬유유연제 냄새가 배인 얇고 적당히 젖어 부드러운 새하얀 시트, 몇 개의 옷가지를 들고 옥상으로 향한다. 가을 하늘은 천고마비랬던가. 드높게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처럼 흩어져 있는 화창한 오후. 햇살이 눈부셔 그 하늘을 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운데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흩날려 말라붙는 낙엽들이 거리를 스쳐지나가고 학교가 일찍 파한 저학년 아이들이 무어라 외치며 떠들고 가볍기만한 타닥거리는 발걸음이 해맑은 웃음과 긴 여운을 남기며 달려간다. 말랑하고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젖냄새가 나는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어리디 어린 아이들. 그 아이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메마른 가을의 낙엽과 얼어붙은 겨울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아이. 가리는 것도 많고, 가리는 사람도 많고, 머리는 좋지만 그 머리를 사람을 대하는 데는 영 쓸 줄 모르고 솔직하지도 못해서 뒤쫓아오지도 못했던, 머리는 이만큼 컸는데 그토록 어리던 아이는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고풍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의 사무실 한 켠에서 습관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서류를 보고 있을까. 밥은 잘 먹을까. 입이 짧아 불퉁한 표정으로 볶음밥을 해줘도 깨작거리면서 야채를 골라 옆에 산처럼 쌓아두고서야 식사를 시작했어도 남들과 비슷하게 끝났던 이유는 위도 작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키가 크고 기아처럼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먹는 것은 작았다. 대신 밥 먹기 귀찮다는 이유로 달달한 초콜릿 과자를 잔뜩 쌓아두고 햄스터처럼 야금야금 까먹어댔다. 사람이 없을 때 억지로 불러내 책이라도 읽으라고 던져주면, 오후의 고양이마냥 나른하게 누워 있던 소파 옆 테이블엔 늘 과자봉지가 뒹굴었다. 간식을 많이 먹으니까 밥을 그렇게 안 먹게 되는 거라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선 늘 작은 초콜릿이 몇 개씩 나오고 안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색하게 건네던 동그란 사탕들.
너는 지금도 그러고 있을까. 그 때보단 좀 낫겠지. 너에게 억지로 주어지는 일들, 상사와 부하같은 제대로 이름 붙여진 확실한 관계. 오히려 그것들이 이 곳에 있을 때보다 훨씬 너의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지탱해주겠지. 너는 그렇게라도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아이니까. 하릴없이 바닥만을 보고 걷던 그 왜소한 등을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그 등을 보고만 있었다. 부를 용기도 그 다음엔 어떻게 대해야 될 지도 몰라서. 너를 억지로 끌어들여도 너는 어떻게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버릴 테니까.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의 벽을 끌어안아 부수고, 어느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멋지게 공주를 구해올 수는 없을 테니까.
"마, 그타고 니가 공주님이란 것도 아니지만."
머릿 속에서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너를 생각하니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소매 끝과 밑자락으로 드러나고 가슴 부분은 헐렁하겠지. 그리고 너는 아주 죽일 지경으로 쳐다보고 나는 배가 찢어지도록 웃다가 어쩌면 담배불에 머리카락을 그슬리거나 그러면 너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이죽이며 비웃겠지. 아 그 얄미운 조동아리.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에 보습제라도 발라야 찢어지지 않을텐데. 억지로 찢어진 입을 벌려 피가 꽃처럼 피어나던 그 얇은 입술. 겨울이 되면 손도 입술도 전부 터버릴 텐데 크림같은 건 잘 챙겨바르려나.
무엇을 해도 너의 걱정 뿐이지만 지금은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네가 네 자리를 찾아 겨우 발을 붙이고 정을 주기 시작해도 너는 내 안에선 영원히 그런 어린 아이겠지. 만약, 네가 자리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렴. 가을의 끝자락, 겨울, 봄, 여름, 다시 가을 또 새로운 겨울. 따스한 봄, 여리고 부드러운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여름 더위에 모든 것이 녹아버려도, 가을이 바스라져 흩날려도, 겨울에 얼어붙었다가 녹아도, 이듬해, 그 이듬해가 되어도. 수많은 계절이 그렇게 반복되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점심엔 뭘 먹을까. 야채 따윈 골라낼 수도 없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따뜻한 스프, 매콤한 토마토 스파게티에 달달한 쇼트케이크. 커피를 내리고 거기에 시럽 세 스푼. 이 정도면 넌 맘에 들어할까. 어떤 것이라도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 많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렴. 돌아올 자리는 내 옆으로 만들어둘 테니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러면 내가 너무 서글퍼지니 가끔 생각나서 들른다면 좋겠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맞을거란다. 그리고 얘기해줘야지.
어서와.
사랑해.
그 때는 없었던 너의 자리를 너무 늦게 만든 나를 원망해도 좋지만 지금이라도 만들어놨으니 때리는 건 좀 살살했으면 좋겠다. 너도 그 때쯤이면 훌쩍 커버렸을 테고 더 이상 어리지도 않을테지만 오랜 헤매임 끝에 돌아올 곳이 부디 내가 만든 네 자리였으면 좋겠다.
올려다 본 하늘이 눈부셔 쿠사나기는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가 빈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바람결에 흰 시트가 파란 하늘 아래서 구름처럼 넘실거린다.
헤드폰을 쓰고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고요하다. 플레이어에 전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저 기계너머의 소리. 테이프가 돌아가고 시작되는 노래에 곧 묻혀버리고 잊혀지는 정적.
후시미는 그 정적을 좋아했다.
"뭘 듣고 있어, 사루?"
"아무것도."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가 빈 교실에서도 후시미는 느긋하게 홀로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흘긋 야타를 보고도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는 후시미의 태도에 야타가 냉큼 한 쪽 귀의 이어폰을 뺏어 귀에 갖다 대었다.
"…고장났어?"
"아냐."
"신종 허세?"
야타의 말에 기분이 나쁜듯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한 쪽을 낚아챈 후시미는 워크맨에서 이어폰을 분리하고 대충 말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후시미가 늘 들고 다니는 워크맨을 열어 보면 그 안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듣고 있다고 얘기했잖아."
"그럼 이어폰은 왜 끼고 있어? 아무것도 안 들리잖아?"
"아무것도 안 들리는게 좋은거야."
무슨 개소리야? 야타가 인상을 찡그리면 후시미가 푸- 하고 바람빠지는 소릴 내며 설핏 웃었다. 긴 앞머리가 한 번 들썩이고 후시미는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뭘."
"소리가 들리기를."
"무슨 소리."
"글쎄."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알아듣게 얘기해라!"
"네가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 거겠지."
바- 보-
소리없이 움직이는 입술에 무슨 말인가 싶어 쳐다보다 뒤늦게 이해한 야타가 야!!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 후시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야타의 머리를 꽉 눌렀다.
"하지마!!"
"너랑 나랑 키 차이가 몇 이었더라?"
"야!!!"
"10cm?"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 새 쑥 커버린 후시미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퍽 거슬려 야타는 후시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내리쳤다.
"야- 잠깐, 이건…."
생각보다 좀 세게 들어갔는지 어지간해선 반응도 없는 녀석이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반쯤 주저앉는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와서 사과하기도 뭣하니 야타는 대신 후시미의 손을 잡고 냉큼 일으켰다.
"그러니까 누가 남의 머리 함부로 잡으랬냐. 됐어. 매점이나 가자."
"싫어."
"샌드위치에서 야채는 다 내가 먹어줄 테니까."
"아 그건 좀 괜찮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퉁명스럽게 야타를 바라보다 뒷말에 사르르 녹는다. 하여튼, 녀석도 단순하지. 중학생이나 돼서 야채 편식이 뭐람. 골라먹기 싫어서 어쩔 땐 급식을 아예 먹지 않는 후시미는 그렇다고 본인이 따로 뭘 먹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야타는 매일 식단표를 확인하고 빈 교실에 남아있는 후시미를 챙겨야만 했다. 귀찮아 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뒤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그가 귀여워 야타는 후시미가 좋아할만한 빵이 매점에 아직 남았을까 헤아렸다.
기다리고 있는 거야.
소리가 들리기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의 바다에 잠긴다. 치이이이익- 하는 희미한 기계 너머의 소리. 호무라에 있을 때면 후시미는 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하루종일 끼고 있는 이어폰에 가끔 타타라나 쿠사나기가 뭐라 해도 후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후시미는 어떤 소리를 듣고있었을까. 락? 힙합? 클래식? 음악은 가리지 않았으니 아마 날마다 바꿔서 들었겠지. 혹은, 기다리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어떤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고는 말한 적이 없었기에 야타는 여전히 후시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덜컥- 하고 앨범이 다 돌아갔다는 신호와 함께 마침내 그 희미한 잡음도 사라진 세계에서 야타는 기다리고 있다. 책상에 누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헤드폰 속에서 무언가가 들리기를. 아. 혹시 너도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을까.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창 밖을 보던, 아니면 바 구석의 스툴에 앉아 숙이고 있던 등을 떠올려 본다. 이름을 부르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던 얼굴.
미사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고집스럽게 불러대던 이름을, 야타는 기다리고 있었다. 헤드폰 너머의 정적은 아직 깨지지 않는다.
모처에서 잠깐 리퀘받고 조각글 느낌으로 썼던 거. 이상하게 후시미는 목이 추워보이고 겨울을 닮은 거 같아요.
야타 미사키가 후시미 사루히코를 첨 봤을 때 떠오른 것은 기린이었다. 목이 긴 기린. 아니면 사슴? 아니, 사슴은 너무 귀엽잖아. 기린도 귀엽긴 귀여운데 음… 기린, 기린은 기린인데 움직이지 않는 기린. 상을 반사하고 가만히만 있는 기린. 키가 유달리 크거나 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목이나 팔다리가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그래서 곧 부서질 것 같았다.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하고 가늘게 드러난 목이 허전해 자신의 목이 추운 것만 같았다. 겨울의 서늘함을 고스란히 담아넣은 듯한 사람을 야타는 그래서 멋대로 상상했다. 감정의 기복도 없고 그저 고요하기만 하지 않을까, 하고. 그 생각은 상대의 입이 열리는 순간 와장창 부서졌지만.
"뭐야. 꼬맹이네?"
너 이새끼 죽어라!!! 발끈해서 얼굴을 한 대 치면 그 서늘한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팍 켜졌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죽고싶을 정도로 부끄럽게 왜곡된 이미지지만 후시미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후시미 사루히코란 녀석은 절대 성격이 좋지 못하며, 좋기는 커녕 인간사 세상만사를 한 320바퀴쯤 꼬아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감정의 기복? 그래 없기는 없었다. 대신 자기 몫까지 남의 기분을 왕창 뒤집어 놓는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어서 눈, 코, 입, 얼굴에 있다는 몇 백가지의 근육이 전부 상대를 비웃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재수 없을 수 있는지 야타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은 정말 입만 다물고 있으면 괜찮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문을 열고 나온 호무라의 앞에서 후시미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워 얼어죽을 것 같아도 목까지 올라오는 건 답답하다며 절대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들보다 더 긴 목은 추위에 늘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서늘한 목을 쭉 뻗고 후시미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으려면 문득문득,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야타의 머릿 속엔 처음의 후시미가 늘 생각났다.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얼어서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그런 후시미는 늘 비현실적으로 생소하고 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지금 만약 이름을 부르고 손을 뻗으면 순간 부서져버리지 않을까. 긴 속눈썹을 드리우는 후시미의 눈꺼풀이 몇 번이나 느릿하게 깜박이는 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야타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공으로 내뱉은 숨이 하얗게 피어오르며 사라진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얇은 코트 밑으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다. 그러다 문득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겨울 하늘을 닮은 회색의 연한 하늘빛의 눈동자가 야타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켜지고, 천천히,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그 모든 것이 야타의 눈엔 순간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소리도 감각도 모든 것이 차단되고 오로지 그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꼬리와 살짝 그늘을 남기는 속눈썹과 얼어붙어 핏기없는 입술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움직였다. 이렇게, 평소에도 제대로 웃을 줄 알면, 훨씬 아름다울텐데―――
"여, 미사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면서 후시미는 얄밉게도 냉큼 야타의 이름부터 불렀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매서운 바람과 따스한 햇빛과 거리의 소음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확 느껴지는 추위에 야타는 몸을 떨면서 소리 질렀다.
"너, 이름 부르지 말랬지!"
"이름 부르면 친해진대. 그렇지, 미사키?"
"닥쳐, 사루."
아주아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까지 쓰다듬는 후시미의 손을 아주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야타는 대신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 후시미의 목에 걸쳤다. 손을 눈높이만큼 올려야 하는 것이 짜증나 정강이를 퍽- 차면 갑작스런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후시미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굽혔다.
"그래그래. 그래야지, 사루."
"너임마."
확 낮아진 높이에 만족스러워하며 야타는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후시미에게 빨간 목도리는 유독 튀었지만 끝부분까지 꽉꽉 졸라매어 마무리하면 겨우 따뜻해 보였다.
"뭔데, 이거."
"한겨울에 그렇게 다니면 얼어죽어요."
발걸음을 떼며 야타는 입을 열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 그제서야 겨우 현실감이 든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부서지지 않는다. 꽁꽁 묶어놨으니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얄미운 말만 해대면서도 야타의 옆에 있을 거라고, 야타 미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그 빨간 목도리의 잔상이 눈에 남아있는데, 여전히 후시미의 목은 희고 길고 가느다랗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 싫어하든가?"
미- 사- 키-?
재수없는 목소리도 표정도 여전한데 주인을 잃은 목도리와 감싸줄 것 없이 드러난 그 목이 참을 수 없이 허전해서 야타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바다가, 바다가 거기에 있어서, 떠내려가서, 가라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 무나카타는 꿈을 꾼다. 그 새파란 바다에 잠겨 아아.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파멸의 끝을 보노라고. 둔중한 굉음, 무거운 물 속에서도 속도를 잃지 않고 중력보다 더한 힘에 끌려 낙하하는 날 선 은색의 검. 머리 위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잡아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그 검이 자신을 찢는 꿈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속에서 결국은 한심하게 몸부림치는 자신이 무나카타는 싫었다. 자꾸만 엇나가는 생각을 억지로 끼워맞춰 차라리 끝이 빨리 왔으면 하는 그 조급하고 하찮고 한심한 소망 속에서 숨을 토해낸다. 멍한 귓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잡을 수 없고 눈이 아파 제대로 뜰 수 없는 시야의 끝엔 공기방울만이 모든 것에 역행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는 와중에 어디선가 아득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이, 무나카타―――
왕이란 자리가 무겁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니면 그 무게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이 생기고, 선택받고, '왕'이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 되었을 때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언젠가 와야 할 자신의 것이 온 것처럼 받아들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빛깔. 한없이 산뜻하면서도 차갑게, 깊게 깊게 가라앉는 그 색이 무나카타는 맘에 들었다. 그렇지만, 글쎄. 색을 원판에 풀어놓으면 빨간색의 보색은 초록색이라던데 왜 사람들의 상식에선 빨간색과 파란색이 대비되는 것일까?
상식과 편견을 뛰어넘어 어디까지나 논리에만 기초하여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나카타 레이시가 그 붉은 왕, 스오우 미코토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배겨진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었을까.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본능적으로 스오우 미코토를 꺼렸다. 깔끔하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죠.'라는 말 한 마디로 나눌 수 없는 그런 진득거리는 무언가가 분명히 스오우에겐 있었다. '호무라'의 난폭함, 예의 없음, 무질서, 불규칙,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애매한 감정에 기반한 그 클랜의 구성. 전부 다 무나카타의 맘에 들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는 건 치워버려야 할텐데, 스오우 미코토와 그의 클랜은 무나카타에게는 참으로 전례없는 무언가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적으로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사적으로도 좋은 기회라는 걸 무나카타는 부정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후득거리는 굉음과 뒤틀림이 사방을 뒤흔든다. 공기마저 달아올라 제멋대로 휘몰아쳐 옥죄인다. 태양이 녹아내리면 이런 기분일까. 거대한 검이 그 힘을 잃고 바스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차가운 손이 따뜻하다. 온 몸의 감각이 제멋대로 날뒨다. 뜨겁고 예민하고 동시에 둔하다. 불쾌하게 들러붙는 열기가 주는 감각이 모두 낯설고 짜증나는데 스오우 미코토만큼은 제 세계에 있는 듯, 몇 번이라도 봤던 풍경인 것 마냥 익숙한 표정이다.
한 번에 끝낸다.
아무리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어도 감이란 게 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이 무나카타."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고 바짝 긴장해 호흡을 가다듬던 무나카타의 귀에 여전히 나른한 스오우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꽂혔다.
"…뭡니까 스오우. 최후의 유언이라도 하실 계획입니까?"
겨우 적응했던 아찔한 열기가 깨져 삐끗해버린 무나카타가 있는 힘껏 평상심을 유지하며 입을 열면 스오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메마른 대지를 밟는 소리가 천축을 뒤흔드는 것 같이 크게 들렸다. 아지랑이에 일그러져 울렁거릴 정도인데 스오우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검을 다시 고쳐쥐며 자세를 바로 잡으면 가볍게 현기증이 인다. 끈적이고 진득하고 훅훅거리는 게 눈 앞의 징그러울 정도로 익숙한 남자와 똑같았다. 이 남자를 죽이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련의 동작들을 끝내면 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그러들 터였다. 그러니까.
"유언?"
그의 클랜에서 스오우 미코토의 오른팔 같은 남자는 그를 사바나의 사자라고 칭한 바 있었다. 퍽 잘 어울리는 얘기였다. 마르고 건조하고 뜨거운 대지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모든 것을 그저 내려다보기만 하는 남자. 가끔 오수를 즐기며 하품을 하고 늘어져 움직이다가 제 적이 나타나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딱 그 짝이었다. 언제나 느긋하던 남자에게서 그르렁대는 목울림 소리와 함께 경멸어리고 적대심 가득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안 죽어. 여기서. 네 손에는 더더욱."
"그런 승산없는 얘기는 마지막 남은 허세인가요."
"허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조금 남은 기력조차 힘에 지배당하는 당신을 제가 꺾지 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평소보다 더 시시하군요."
"내가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선연한 비웃음이 붉은 불꽃과 함께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백 번, 천 번, 네 그 겉만 번드르르한 검으로 찔러봐라 무나카타.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착각하고 있는 건, 네 쪽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에 숨이 막힌다. 상황은 분명히 다른데, 밑도 끝도 없는 무겁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대신 분명히 땅을 디디고 뜨거울 정도의 열기를 버티고 있는데도 무나카타는 익숙한 꿈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들고 있는 검신의 길이를 가늠한다. 당장, 당장이라도 힘있게 손목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의 몸에 분명히 상처를 낼 수 있는데, 그 전에, 숨이 막혔다.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조각조각 찢어져 엇나가는 생각들. 붕괴하는 다모클레스의 검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기 전에, 그 전에, 죽여야 하는데.
"날 네가 꺾지 못할 리가 없다고?"
부글부글, 내쉬는 숨이 모두 공기방울 되어 위로, 위로 올라가는데 음습한 공포가 무나카타를 감싸,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파멸만을 기다리고 있으려면 늘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고통스런 감각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하지 않는 그 꿈에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어느 순간 훅- 가까워진 얼굴이 맹수의 눈으로 비웃는다. 자신의 것보다 약간 큰 손이 제 손등을 움켜쥐었을 때야 무나카타는 자신이 검을 떨어뜨리기 직전이었단 걸 깨달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하려 해도 언젠가 찢겨졌는지 모를 사고와 함께 모든 감각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끓어오르는 대기 속에서 무나카타는 숨을 내뱉었다. 쥐어짜인다. 짓눌린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일까. 파멸을 맞이하는 건 이 쪽이었나?
- 어이, 무나카타.
그 목소리는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의 소리였을까. 모른다. 무나카타는 모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그러쥐어 억지로 검 끝을 바로 세운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무방비한 표정, 이글거리는 태양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검의 표면이 반짝거린다. 소리도 없이 공기를 가로지르는 화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무나카타의 눈에 잡힌다. 속도를 결코 떨어뜨리는 일 없이 떨어지는 은색의 검.
"스오우."
어둡고 푸른 바다가 가득 차올라 모두가 가라앉는 가운데 내뱉는 숨만이 위로, 위로 올라간다.
적청은 어려웠습니다. 선님에게 좋은 리퀘를 받고 제가 망쳤습니다. 분량이 안되는 것 같아서 이 쪽 카테고리.
적청은 좀 더 캐릭터가 잡히면 쓸게요. 두 왕님들은 일단 출연부터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적왕님은 탈옥부터 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