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엔 가지각색의 컵이 있다. 귀여운 곰돌이가 양각으로 그려진, 금색 펄이 들어간 하늘색 컵은 아와시마의 것이다. 가슴이 빵빵한 선정적인 미소녀가 그려진 텀블러는 고토, 찻물 자국 하나 없이 새하얀 컵은 에노모토,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 반면 6oz 짜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은 벤자이의 것이다. 히다카는 컵 따윈 들고 다니지 않았고, 카모는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다녔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컵은 누구의 것일까.
물을 필요도 없이 후시미 사루히코의 것이지만, 후시미 사루히코가 그것이 제 컵이라고 알아볼지는 의문이다. 그는 제 컵을 탕비실에 들고온 적이 없다. 그는 제 사유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억이야 하겠지만 잃어버린다 해도 미련을 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남의 것을 쓰지 않기 위해 제가 쓰던 컵의 모양을 기억할는지는 몰라도 없으면 없는대로 일회용 종이컵을 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비실엔 그의 컵이 있다. 그가 사다 둔 적 없는, 그만이 쓰는 컵이.
2.
특무대의 사무실로 쓰는 창가엔 커다란 산세베리아가 있다. 아와시마가 사다둔 것이다. 건조한 공기는 피부에 독이다. 가습기도 가져다 두었다. 그래도 난방기가 돌아가는 사무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당겼고, 수위를 표시하는 정수기의 불빛은 긴 막대의 반만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이 없어도 커피를 마셨고, 일이 있어도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습관이다. 심심하면 커피라도 마셔야 했고, 일이 많으면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후시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뻗었다. 후시미가 타온 적 없는 커피는 그가 사온 적 없는 컵 안에 담겨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뭉툭한 손 끝이 매끈한 컵의 표면에 닿아 더듬거리다 멈췄다. 후시미는 낯선 감각에 고개를 든다. 뜨거운 물에 적당히 미적지근해진 자기컵이 아니었다. 미끈하고 목이 긴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후시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피곤한 눈을 가늘게 뜨고 새 컵을 보던 후시미는 이윽고 의심없이 손을 뻗는다.
제 앞에 놓이면 제 것이었다.
"…―!"
침음을 삼킨다. 전열되지 않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서늘함 탓에 미처 내용물의 온도를 가늠하지 못한 탓이었다. 뱉을 수는 없어 간신히 뜨거운 물을 넘기고 나면 혀 끝과 입술이 얼얼했다. 깜짝 놀라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불어본다. 흰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것은, 커피도 아니었다.
―.
습관적으로 혀를 차나 무엇에 대한 불만인지 알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뜨거웠던 온도에 대한 불만인지, 커피가 아닌 핫초코였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인지.
후시미는 얼얼한 혀로 입 안을 훑었다. 가지런한 치열 밑의 입술이 아팠다.
3.
후시미는 도통 제 것이 아닌, 그러나 제 것인 컵의 온도에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무심코 혀로 훑은 입안이 우둘투둘해 거울을 보면 아랫입술 안쪽이 하얗게 떠있었다. 가늘고 긴 실핏줄이 꿈틀대는 얇은 점막은 다 나을 때쯤이면 다시 뜨고, 뜨길 반복했다. 내용물은 매번 바뀌었다. 커피, 녹차, 홍차, 핫초코. 늘 예상을 빗나가는 온도와 맛에도 불구하고 후시미는 제 기호를 고집하진 않았다. 애초에 누가, 언제 타오는지도 몰랐다. 보나마나 아키야마나 벤자이나 카모일 수도 있고. 갈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맛이나 온도 따위야 어찌되든 좋았지만.
덕분에 후시미는 그래도 마시기 전에 내용물과 온도를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다. 잠깐의 망설임, 눈으로 내용물을 확인한다. 오늘은 녹차였다. 두 번씩 불어본다. 조심스럽게 기울인다. 다행히도 미적지근했다. 잠깐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간다. 그저께의 차는 너무 뜨거워서 후시미의 입술은 또 하얗게 부풀었었다. 혀 앞쪽의 돌기는 빨갛게 변해 미지근한 열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후시미를 보며 아키야마는 말했다.
"또 데셨어요?"
조금 바보같아 후시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방 안에서도 입 안 쪽은 모두 뜨거웠다. 서로의 셔츠를 벗기면서 후시미는 대답없이 다시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타인의 혀는 어째서 이렇게나 뜨거울까.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붙잡아 누르고 아키야마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후시미가 느끼는 아키야마의 입술은 매끈했다.
부푼 입술의 표면이 아키야마는 신경쓰이지 않는 걸까 생각해본다. 후시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후시미는 자꾸만 제 혀로 입술 안쪽을 훑어보았다. 어제 그 난리통에 부푼 것들은 어디론가 쓸려 사라져, 입술은 미끈하게 부드러웠다. 넘어가 버렸을까. 죽은 피부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호르륵, 적당한 온도의 찻물은 또 한꺼풀 벗겨진 아랫입술을 그리 자극하지도 않았다.
4.
벤자이는 탕비실에서 두 개의 스틱커피를 뜯어 넣었다. 작은 컵에 스틱커피 두 개는 적당히 진한 맛이 나온다. 정수기의 물을 따르고 있으면 아키야마가 들어와 두 개의 컵을 들었다.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의 것이지만 조금 작은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후시미 씨 컵?"
"응. 요즘 날이 추워서 물이 빨리 식더라고. 후시미 씨는 그런 데는 전혀 신경쓰시지 않으니까 하나 사왔어."
작은 쪽에 스푼으로 핫초코를 왕창 털어넣고 아키야마는 뜨거운 물을 넣은 다음 휘휘 젓는다.
"그거, 너무 뜨겁지 않을까?"
보온성이 좋은 스테인리스 컵은 뚜껑을 열어놔도 웬만해선 식지 않는다. 그러기 위한 보온 텀블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야마는 찬 물은 한 방울도 섞지 않았다.
"후시미 씨는 눈 앞에 갖다 놔도 일할 땐 잘 모르거든. 한참이나 지나서 마시게 되니까, 그 쯤이면 이 정도가 딱 좋아."
"그런가?"
벤자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 컵의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신다. 제 컵이야 입구가 넓지만, 저건 그런 것도 아니라 쉽게 식지도 않을텐데.
"잘못하면 입술 데겠다."
"응. 그런 거 같아."
두 개의 텀블러를 들고 아키야마는 탕비실을 나간다. 너무 농땡이 치지 마. 너 요즘 커피 마신단 핑계로 자꾸 탕비실에서 쉬고 있지? 아키야마의 희미한 웃음 섞인 말에 벤자이는 마시던 커피를 입 안에 머금은 채로 웃었다. 눈치도 빠르지. 빈 탕비실에서 혼자 마시는 커피 타임이 벤자이의 쉬는 시간이었다. 스테인레스 컵의 아쉬운 점은 보온성은 좋지만 따뜻한 차를 마실 때의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안은 뜨겁지만, 겉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벤자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키야마가 나간 문 쪽을 보았다.
K 2기가 화려한 석판 폭발로 마무리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예전에 펑크낸 책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2014년 우타케이 때 냈던 적청 'pseudo code' 내용의 약 반 세기 이후. 무나후시 역키잡, 후시미가 무나카타를 키우고 현 시점에선 고등학생x24살(?) 정도 됩니다.
아직 설정이나 스토리가 정리가 안됐지만 꼭 올해 안에는 제대로 써보고 싶어서...뒤를 잇게 된다면 카테고리를 옮겨갈 수 있겠죠.
일단은 아주 짤막한 프롤로그. 당연하지만 설정이 설정이라 말투 등 여러 면에서 캐릭터의 성격이 조금씩 다릅니다. 캐붕주의.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길었던 교복소매가 한 번 계절이 바뀌자마자 꼭 맞게 변했다. 긴 소매의 단추를 잠그면서 무나카타 레이시는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또래에 비하면 충분히 큰 키였다. 더 이상 크지는 않을 거라고, 언젠가 무나카타는 거울 너머로 눈을 맞추며 말했으나 그는 단호했다. 상대의 눈높이는 원근감을 감안해도 무나카타와 비슷했다.
조만간 못 입게 될 걸.
눈동자가 무나카타를 무감하게 한 번 훑고 가더니 점원에게 한 사이즈 더 큰 것을 요청했다. 무나카타는 부득불 지금의 사이즈를 고집해보려다 말았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살면서 무언가를 그토록 원하거나 갈망한 적 없었다. 간혹 불이 붙곤 하는 쓸데없는 오기는 전자레인지로 데운 우유보다도 빠르게 식었다.
무엇보다, 그는 무나카타의 취향과 성장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때로 무나카타는 저의 생장이 먼저인지 그의 말이 먼저인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말은 예언처럼 무나카타 레이시를 만들어갔고 그래서 무나카타는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예전엔 다른 아이들처럼 빨리 자라고 싶었다. 지금의 그는 무나카타가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었고 어떻게 보면 무관심과도 비슷했지만, 희미한 무나카타의 기억 속에서 한 때 그는 정말 무나카타가 무얼 하겠다고 말만 해도, 매순간마다 심장이 떨어질 듯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어린 무나카타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키도 크고, 손도 크고, 쉽게 넘어지지도 않고, 고작 강풍이 분다고 해서 날아가지도 않는 그런 어른.
무나카타가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그는 한시름 놓은 듯 했으나 때때로 그의 눈에선 여전히 무나카타가 감지할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쳤다. 무나카타와 관련된 확정적인 미래형의 문장들은 무나카타가 아니라 반대로 그를 옭아매고 있는 듯 했다. 그리하여 무나카타는 그의 이유없는 불안, 이유없는 확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고 싶었다.
열두살이 된 이후부턴 키가 1년에 10cm씩 컸다. 무나카타는 남들이 성적표를 받고 좌절하는 만큼, 성장기록부를 보며 좌절했다. 키 크지 않는 법을 검색했다. 나올 리가 없었다. 반대로 키 크는 법을 검색했다. 성장호르몬이 활발하게 분비되는 10시부터 2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우유는 마시지 않았다.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은 무나카타는 본디 밤잠이 없었기 때문이고, 우유는 그가 좋아하지 않아 냉장고에 있던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키는 이대로 멈출까.
꼭 맞게 떨어지는 소매를 보며 무나카타 레이시는 생각한다. 작아질 수는 없으니 더 커지면 되겠지만, 길이가 딱 맞게 된 교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은 크지도 않을 것 같다. 상념을 떨쳐내고 무나카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소매에 의식이 묶여 있던 시간은 의외로 길었는지 시간은 평소보다 5분쯤 늦어 있었다. 무나카타는 프라이팬에 버터를 바르고 빵을 굽는다. 어린애처럼 야채는 입에도 대지 않는 남자를 생각하며 샐러드는 조금만, 서니업사이드 하나와 제가 먹을 완숙프라이 하나, 우유 대신 오렌지주스를 각각의 잔에 따르고 무나카타는 방문 앞에 선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은 그런 관계일터인데, 죽어도 그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긴장하고, 망설이고, 문을 두드리고, 열고, 무나카타는 컴컴한 방의 커튼을 걷으며 말한다.
"후시미 씨."
그를 그렇게 칭할 때마다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무나카타는 다른 대체어를 찾지 못하고 매일 그렇게 부른다.
싫은 건 아니었다. 가족의 정이라기엔 뭔가 탐탁치 않지만 그는 무나카타를 키워주었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다. 살가운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지만 그가 무나카타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무나카타는.
"일어나세요, 후시미 씨."
청량한 가을의 아침햇살 밑에서 얇은 눈꺼풀이 들어올려진다. 엷은 회색의 홍채는 햇살 속에선 가끔 엷은 파랑으로 빛나곤 했다. 제 목소리에 응해 일어나, 잠에서 덜 깬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저를 응시하는 것이
제목은 거창하지만 유에사님 미카쿠델 리퀘스트. 미카즈키의 쓰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하는 쿠델리아.
도움이 되고 싶어.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욕망을 갖고 살지도 모른다. 성욕, 식욕, 수면욕이라는 육체적 생존 욕망 이외에 정신적으로 원초적인 것.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 안락한 잠자리, 따뜻한 식사를 먹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끊임없이 유용성을 입증하는 것. 본능이라는 속성이 모두 그렇듯 절박한 상황에선 절실하게 발휘되고 쿠델리아 아이나 번스타인은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명명백백 고용주의 입장인 쿠델리아가 그래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불행히도 그녀의 양심은 그렇게 뻔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평균연령 열셋, 생과 사의 교차가 언제나 눈 앞에 존재했던 소년들과는 태생부터 달랐던 그녀가 우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툰 칼질에 듬성듬성하게 썰린 감자들이 익는데 한참이나 걸려 아트라가 끙끙대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 빠르게 책을 읽는 것, 차의 온도를 맞추는 것, 격식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것 등 - 은 이 곳에서는 필요없었다. 전전긍긍 함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말고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쿠델리아는 겨우, 제 자리를 찾아냈다.
탄약을 장전하거나 지뢰의 도화선을 연결하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던 손은 굼뜨기 짝이 없다.
"너무 꽉 쥐진 말고요."
"응? 아."
펜을 부러뜨릴 듯 잡고 있던 미카즈키가 한 번 펜을 놓았다가 다시 쥔다.
"둘째랑 셋째 손가락 사이에 살짝 끼듯이 잡아봐요."
뭉툭하고 짧은 손가락이 더듬더듬 펜의 굴곡을 훑다가 제게 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밀듯이, 가볍게요. 응. 경직되었던 팔이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인다. 아직은 쓴다기보단 그림 같이 꾸물거리지만 전보단 훨씬 예쁜 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쿠델리아는 최근 이 작은 습자 교실을 여는 것이 몹시 좋았다. 아이들을 질려하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쿠델리아가 쓴 제 이름을 따라 그리면서 즐거워 했다. 알파벳을 외웠고 쉬는 시간이면 노래를 불렀다. 아이처럼, 실제로도 정말 아이들이었지만, 제가 아는 단어들을 전부 올바른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고 철자의 순서를 두고 싸우다가 쿠델리아를 불렀다.
쿠델리아! 이건 왜 이런 철자인거야?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었지만. 지구에 가고, 만약 일이 잘 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많이 만들어야지. 그런 꿈도 생겼다. 안일한 꿈이긴 해도 그것이 쿠델리아가 할 일이었다. 미카즈키는 제 이름을 쓴다. Mikazuki Augus. 올가의 이름도 쓴다. Orga Itsuka. 한 글자씩, 천천히. 조용히 입술이 움직이고 철자들을 음미하듯 미카즈키는 몇 번이고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외운다. 조명을 최소한으로 켠 조용한 식당 안에서도 미카즈키의 속삭임은 아주 작아서 작은 파동, 그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쿠델리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열중하는 미카즈키를 보다보니 쿠델리아도 어느새 머릿 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올가 이츠카. 미카즈키 오거스. 유진 세븐스타크. 비스킷 그리폰. 챠드 차단, 아키히로 앨트랜드……. 수많은 아이들이 이 배 안에 있다. 생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노라면 문득 쿠델리아는 전율이 일었다. 쿠델리아는 분명 그 이름을 들었다. 청각으로 남은 기억이 크게 요동쳤다. 첫 걀라르호른 공습에서 죽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쓰는 거, 맞아?"
몇 번이고 썼다 지운 이름을 들고 미카즈키는 쿠델리아를 빤히 쳐다본다. 쿠델리아는 천천히 읽었다.
"네. 맞아요."
"그 녀석은 이름 쓸 줄 알았을까."
"글…쎄요."
"같이 배웠으면 좋았겠지."
미카즈키가 쓰고 부르는 이름의 주인들은 언젠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 영원히 과거에 머물러 있을 죽은 자들을 기리는 건 산 자들의 몫이었다. 같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올바른 추도방식.
"괜찮아. 내가 쓸 줄 알면 되니까."
"네."
"글을 잘 읽게 되면 정비반의 일도 도와줄 수 있겠지."
"분명 그럴 거에요."
"단어를 읽는 건 아직 힘들어."
"이제부터 배워가면 돼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미카즈키는."
"응. 쿠델리아의 이름은 어떻게 써?"
"제, 제 이름요?"
동료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썼다 지운 빈 칸에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쓸 준비를 한다. 쿠델리아는 어쩐지 그게 기뻐서 조금 들뜬 마음으로 제 이름을 써내려간다. 익숙한 철자인데도 하나하나가 낯설게 보인다.
"…어렵네."
"조금 긴가요?"
"이름으로 부를 때도 길었지만……."
미카즈키는 보기 드물게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Ku.delia. Aina. Bern.stein. 또박또박 끊어쓰며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작게 읊조린다.
"어때?"
올려다보는 미카즈키의 또렷한 눈빛에 쿠델리아는 무심코 손을 올렸다. 아까와는 다른 미카즈키의 미묘한 표정에 쿠델리아는 그제야 제가 미카즈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그…!"
화들짝 놀라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다. 전에 없던 실수에 쿠델리아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으아아 어떡해. 난 몰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손에는 여전히 빳빳하고 긴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테이블에 박을 기세로 숙인 쿠델리아가 발을 동동 굴리는 사이 미카즈키는 뭔가 이해한 건지 응. 습관같은 소리를 냈다.
"잘 썼다는 거지?"
"ㅇ, 네, 네! 그럼요! 잘 썼어요, 미카즈키."
"쿠델리아가 써준 거랑 뭔가 좀, 다른 거 같은데."
"잘 썼어요! 괜찮아요!"
"그래."
그리고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한 번 더 천천히 읊조리다 쓱쓱 지웠다. 칭찬 고마워.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말하고 이번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쓴다.
벼, 별 말씀을.
뻐끔거리며 답한 쿠델리아는 자꾸만 양 손을 매만졌다. 뒤집혀진 Bernstein의 e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영영 못할 것 같았다.
쿠시나 안나는 가끔 꿈을 꾸었다. 온 사방이 화려하게 빛나는 꿈이었다. 안나는 이 꿈 얘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색 밖에 볼 수 없는 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색으로 가득 찬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불길한 얘기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부 새빨갛게 타오르는데 개중에서도 창공에 있는 거대한 것이 가장 화려했다. 안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모클레스의 검, 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안나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남자의 것이었다. …미코토. 조용히 읊조리면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주변을 두리번대면 저 먼 곳에 미코토가 있었다. 안나. 하고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는 입 안에서 도르륵 구르는 사탕 같았다. 쿠사나기가 안나를 위해 바 구석에 둔 커다란 유리병 안엔 새빨간 체리맛 사탕이 언제나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썩으니까 하루에 하나씩만.
안나는 쿠사나기의 그 말을 꼭꼭 지켰지만 가끔은 두 개가 먹고 싶은 날이 있었다. 달콤한 빨간색이 녹아 입 안에 흥건히 고이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상황이었다. 그렇다. 이 꿈은 안나에겐 사탕이 잔뜩 담긴 유리병이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달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되는 거지."
"안되는 겁니다."
하나는 토마토 쥬스. 하나는 차다. 새빨갛지만 안나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히비스커스 티 하나요.
메뉴판을 보며 무심코 다른 이름을 말하려던 남자는 문득 안나를 보고 다시 한 번 메뉴판을 보더니 똑똑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레드벨벳 케이크 하나.
이건 이 사람의 배려일까. 안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최근엔 이 남자를 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청의 왕, 무나카타 레이시라고 한다. 먼 발치에서, 미코토의 뒤에 숨어서만 봤던 남자와 나란히 앉아 애기를 하는 이 상황이 가끔 낯설어 안나는 빨간 구두가 신겨진 발을 이리저리 까딱이곤 했다. 편하기로 치자면 당연히 쿠사나기나 미사키나 다른 호무라의 일원이 훨씬 편했지만 때로는 전혀 친하지 않고, 그러나 안나의 상황을 알고, 동시에 안나에게 들은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당신은 똑똑합니다."
무나카타는 얼음이 담긴 새빨간 유리잔을 들어 마시며 말했다.
"스오우 미코토가 당신만큼 똑똑했으면 좋았을텐데요."
"……."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멍청한 사람이었습니다."
"……."
"무모하고, 저돌적이고, 생각이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다가, 그대로 멍청한 결말을 맞이했죠."
"…미코토는, 멍청하지 않아."
"그럼 바보인 걸로."
"바보 같지도 않아."
"바보입니다."
"바보 아냐."
"ㅂ…그래요. 그냥 그렇다 칩시다."
안나의 단호함에 무나카타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차를 마신다. 안나는 포크로 새빨간 케이크를 잘라 먹는다. 다리는 정처 없이 흔들리고, 치맛단의 빨간 프릴은 박자에 맞춰 나풀거린다. 침묵은 길었다. 토마토 쥬스와 케이크는 그렇게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시키지 말아야지. 안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머리 위가 가벼운 건 이상한 느낌이에요."
탄식처럼 흘러나온 감상에 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도 때때로 어깨가 너무 가벼워 확인하려는 것처럼 머리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눈 앞의 남자는 안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 검을 머리 위에 이고 있었고 그 무게를 평생 짊어져야 할 업처럼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미코토처럼.
"스오우는 이걸 모르겠죠."
"…응."
일직선으로 빳빳하게 서있던 어깨가 조금 느슨해진다. 무나카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유리창 밖을 바라본다. 반사된 오렌지빛 석양이 실내로 가득 들어와 남자의 실루엣도 옅은 빨강으로 물들어간다.
"나는, 미코토가 바보였어도 좋아."
"바보가 아니라면서요?"
"레이시도 좋아했지?"
무나카타의 시선이 안나에게로 돌아와 멈춘다. 긴 속눈썹이 투명한 안경 너머로 파르르 떨리며 깜박이는 것을 안나는 지켜보았다. 말없이 무나카타는 잔을 감싸쥐었다가 단번에 비운다. 새빨간 색이 사라졌다. 그것은 전부 무나카타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마침내 온 몸으로 퍼질 빨강을 안나는 상상해본다. 미코토가 남긴 색은 그의 몸 안에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당신이 꾸는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응."
"그 꿈은 그냥 스오우 미코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나의 말에 못마땅한듯 무나카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일어나보겠습니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후시미 군이 잔소리를 할 거 같군요."
"…미코토는."
무나카타의 곧은 등을 보며 안나는 입을 열었다.
"미코토는, 레이시도, 분명 받았을 거야, 선물."
"글쎄요. 저희는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아닌지라."
그 말을 끝으로 무나카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탁 트인 유리창 밖으로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무나카타의 뒷모습이 보인다. 능력을 잃었어도 쿠시나 안나는 여전히 남을 읽어내는데 탁월하다. 우기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미코토는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코토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마 그것 뿐이었겠지. 안나는 무나카타의 흰 오른손에 묻은 새빨간 핏자국을 본다.
화려한 꿈 속에서도 미코토는 저 먼 곳에 있었다. 안나의 이름을 부르지만, 결코 다리가 닿지 않는 먼 곳에. 한참을 달리고 달려도 닿지 않는다. 간신히 얼굴이라도 보이려는 순간이 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한다. 미코토의 옆에 있는 건, 언제나 흰 손을 가진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