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당신의 집에서 시시한 노이즈 낀 흑백 영상을 밤새 본 기억이 난다. 레코드라니. 어렸을 적 어머니가 예전부터 갖고 있던 오페라 앨범을 제외하면 본 적 조차 없는 매체. 몇 개나 되는 특집판들은 몇 캔의 맥주가 아니더라도 졸릴 정도로 겹치는 장면이 많았다. 종이 커버가 닳고 닳아 찢어진 것을 테이프로 두 세겹이나 붙여야 했을 정도로 당신의 손을 많이 탔을 텐데, 나레이션 하나하나 외울 정도로 많이 봤으면서도 당신은 아이처럼 설레했다.
이제는 내 어깨에 얹힌 무게를 알면서도 나는 영영 당신의 마음가짐은 따라잡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누군가 원치 않아도 나는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이봐, 바니."
"왜요, 코테츠 씨."
"이번에는 이렇게 됐지만, 나는 그래도 언젠가 히어로를 그만두게 될 거야."
잔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 뭘 그렇게 놀라."
당신이 내가 놀랐다고 말해서, 나는 내가 '놀랐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을 하려고 보니 이미 입은 반쯤 벌어져 있어 황급히 입술을 질근 물면 당신은 그저 웃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말을 하기 위해 떠올렸던 장면을 되감아 본다.
눈꺼풀이 깜박깜박, 낡아서 푹 꺼지는 소파에 앉아 졸면서도 오래도록 남았던 당신. 밤이 다 지나도록 점멸하는 흑백의 세계에 열중하고 있던 당신. 내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며 로프트에 올라가 자길 권했지만 차마 당신을 두고 올라갈 수 없었다. 그대가 오래도록 꾸는 꿈. 영원토록 지켜보던 이상.
-있잖아, 바나비. 나는 영원히 히어로를 하고 싶어.
당신은 아홉살 쯤 그를 만났다고 했던가. 20년이 넘게 낡은 활동영상 같은 걸 반복하면서도 당신은 아직도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원히, 히어로를 하고 싶어. 당신이 내게 손을 내민 것은 단순히 성격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당신이 나를 구원한 것인지.
"두 번."
"응?"
"두 번이나 번복했어요."
"아…아하하, 좀 민망한가?"
"데뷔 이후로 줄곧 하위권이었는데."
"알아, 나 인기도 없고 능력도 없는거. 이젠 정말 체력도 안되고 네 백업이나 겨우 할까."
"미스터 레전드라고 해도 두 번이나 은퇴했다가 다시 히어로로 올라오진 못할걸요."
"아니까 그만 좀 하면 안될까……. 넌 한창 잘 나갈 나이지만 난 아니라고."
민망한 듯 머리를 벅벅 긁던 당신은 이내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글라스를 흔들며 말을 고르는 듯 당신이 깊게 숨을 들이쉰다. 현실을 체감하고 있는 당신의 입에서 나올 수많은 부정적인 미래들을 알기에 나는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이었어요."
"응?"
"스카이하이도 아니고 블루로즈도 아니었어요. 파이어 엠블럼씨도 아니었고 드래곤키드나 오리가미 싸이클론도, 록바이슨 씨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당신을 원했고 저도… 코테츠 씨. 그러니까… 그……"
나는 처음엔 믿지 않았다. 어수룩하고 허황된 이상만 쫓고, 사무 일도 못하고 눈치도 없고 시간관념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다 참견만 많이 하는 아저씨 따위가 아직도 히어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은 정도 많고 그 오지랖 때문에 나에게 참견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의 딸을 구했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선의는 언제나 정직했다.
미스터 레전드가 당신을 구했던 것처럼 당신도 절 구했습니다. 누구도 아니라 당신이 제 히어로에요.
몇 번이나 이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도움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에게도 당신은 영웅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당신에게 나도 영웅이 되고 싶다고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때가 되니 쑥스러워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코테츠 씨가 안되면 제가 백업하면 됩니다. 우린……."
"콤비니까?"
망설이는 내 말을 코테츠 씨가 받아낸다. 고개를 들고 마주치고 있는 눈이 싱긋 웃었다. 네. 콤비니까. 마주보고 웃으면 코테츠 씨가 잔을 든다. 맞부딪히는 유리잔 소리가 경쾌했다.
- 그러니까 은퇴하겠단 얘기 좀 그만하세요. 이제 지겹지도 않습니까. 그쯤이면 민망해서라도 말하기 힘들텐데.
- 바니, 너 지금 쑥스러워서 다른 말 하는 거지? 귀가 빨개.
- 시끄러워요! 부족한 걸 알면 다음부터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역시 코테츠 씨는 믿을 게 못되네요.
- 방금 전까지 백업해준대며!
- 백업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시답잖은 얘기를 하면서 맘껏 웃어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언제나 슈테른빌트는 평화로울 것이다. 가끔 당신과 술을 마시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웃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겠지. 밤에는 깊은 잠을 자고 낮에는 활기차게 일하는. 약간의 트러블이 생긴다 해도 히어로가 있으니 문제 없다. 창 너머의 불빛들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