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시도하는 최애캐에게 빨간 구두 신기기. 1기 이후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감금되었다는 설정.
아직까진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기에......
무결함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엔 그것이 선천적인 줄 알았다. 타고나기를 그런 사람만이 순수로 남는 것이라고. 전장 10km의 섬에서 난처럼 키워진 아이들의 무지를 맥길리스는 비웃었으나 속으로는 부러워 마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로 다감하게 웃어주는 미소를 보며 맥길리스도 그렇게 웃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적잖이 바랐다. 그러나 어정쩡한 미소만이 그가 지을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들도 평생을 알력 다툼 밑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답게 영악했다. '세븐스타즈'라는 타이틀을 단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는데 가엘리오는 그 운명에 아주 딱 맞춰진 남자였다.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나 웃는 낯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 쾌활함이 가장된 것 같지 않았다. 그를 싫어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가엘리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의 가벼움이 타고난 경박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맥길리스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 붙어있지 않았다면 그도 몰랐을 것이다.
가엘리오는 때때로 무거운 돌처럼 침잠했다. 그 무게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워졌다. 맥길리스는 그래서 가엘리오가 우울해 할 때가 좋았다. 가엘리오는 제 감정의 기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아주 질색했으나 맥길리스만은 예외였다. 맥길리스는 그의 우울을 공유할 자격을 갖고 있었다. 가엘리오는 위로를 바라진 않았지만 설마 옆에 있는 맥길리스가 그의 우울을 마음껏 즐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엘리오."
그 우울의 순간이 자연적으로 찾아오길 바랐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방 안의 구조는 완벽했다. 보드윈 가에 남아있는 가엘리오의 방과 똑같았다. 둘이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던 테이블, 고풍스러운 책상,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청결한 이불과 시트, 원래의 등은 너무 눈부셔 아늑한 것으로 바꿨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한 쪽엔 식물을 가져다 놨다. 햇볕을 받지 않아도 청량한 녹빛을 유지할 수 있게끔 개조된 품종이었다. 가엘리오가 손 닿는 곳에 있는 건 모두 집어던지는 바람에 가구는 모두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고 잡다한 것들은 하나도 없어 살풍경해보이는 게 아쉬웠으나 맥길리스는 그 상태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름을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가엘리오의 옆에 앉아 맥길리스는 눈을 감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각별히 신경썼지만 요즘은 자잘한 일이 많아 때를 놓친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건 이거대로 나름의 맛이 있다. 머리를 기르게 해서 묶어볼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맥길리스는 조심스럽게 가엘리오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주었다
"―손대지 마!"
자는 척 하더니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손을 쳐낸다. 찰싹 소리는 매서웠으나 예전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진 충격량이었다. 행동반경이 방 하나로 한정된 데다 부상의 후유증도 있어서였다. 오일과 부동액이 넘쳐흐른 콕핏에서 정신을 잃는 바람에 그대로 독성에 노출되었다. 캡슐 속에서 꽤 오래 있었으나 한 번 망가진 면역체계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약간만 무리해도 고열을 내며 앓아누웠고, 파충류처럼 체온조절이 되지 않아 그토록 좋아하던 목욕도 오래 할 수 없었다. 근육이 도드라지던 선이 굵었던 신체는 이젠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얄쌍해졌다. 조심성 없어 늘 자잘하게 생기던 상처들도 찾아볼 수 없었고,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렸던 피부는 창백하고 투명하게 반짝인다.
그는 이제 경박을 연기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울하고 그래서 우아했으며 아름다웠다. 이제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는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다.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얼굴 윤곽 속에서 엷은 청자색의 눈동자가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맥길리스는 그 때마다 사랑스러움을 참기가 힘들었다. 뱃 속이 뜨거워진다. 당장 명치를 후려치고 언제나처럼 허덕이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맥길리스가 언제나 참고 있던 욕망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듬어지고 무결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선물을 가져왔어, 가엘리오."
"뭐가 됐든지 필요 없어!!"
뜨겁게 달아올라 벌써부터 바짝 마르는 목을 애써 축이는 맥길리스의 이성을 붙잡은 건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가벼운 쇼핑백의 손잡이였다. 별다른 장식도 없이 브랜드명과 로고만 박힌 종이백이지만 거기 적힌 이름은 현재 최고로 잘 나가는 디자이너의 이름이었다. 무도회에서 신기엔 너무 높았고 군인이 신기엔 너무 화려해 걀라르호른 내에선 지양되고 있었으나 그의 구두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순식간에 매진된다고 했다.
이번 시즌 신작으로 나온 11cm의 날카로운 스틸레토 힐은 누구의 시선이라도 사로잡을 검붉은 색이었다. 덩굴처럼 은으로 장식된 뒤축엔 아주 작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7개 들어가고, 매끈하게 가공된 어린 소가죽에 맨발로도 가볍게 피부에 밀착한다 - 고 했다. 여전히 숙녀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알미리아가 맥길리스에게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설명해준 얘기였다. 알미리아는 최근 들어서 더욱 더 높은 굽의 신발과 허리 다트가 꽉 잡힌 드레스 같은 것에 눈길을 주곤 했다. 그녀 개인의 열망과는 달리 보드윈의 후계자 자리를 메워야 된다는 수군거림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신발이 누구라도 사로잡을 매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맥길리스도 첫 눈에 시선을 사로잡혀, 반나절을 고민하다 부랴부랴 주문을 넣었으니까. 그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이런 식으로도 유용했다.
원래 가격에 세 배를 얹어 맞춘 것으로도 모자라 원래 들어가는 다이아몬드 대신 미리 적절하게 가공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건넸다. 그리하여 완성까지 다시 세 달, 상단으로 수신해 다시 맥길리스의 손으로 들어오기까지가 2주나 걸렸고, 받아놓고도 시간이 없어 갖고 있던 게 한 달이었다.
정말 가상한 노력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으나 구구절절하게 설명해봤자 가엘리오가 이해할 리는 없었으므로 맥길리스는 그냥 말없이 박스를 열었다. 얇은 종이에 쌓여져 있는 물건이 너무 뜻밖이라 가엘리오는 순간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잠깐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쳐다보던 가엘리오는 이내 "미친……." 이라고 말을 흐리다가 본격적으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너 돌았지! 어디까지…, 어디까지 사람을…! 발버둥치는 기세에 손과 발에 걸린 사슬이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살갗이 닿는 수갑 안 쪽에는 두툼한 가죽을 덧대놓았으나 이러다간 사슬에 걸려 다른 부분의 피부가 찢어질 것 같았다. 가벼운 찰과상이라도 낫는 데는 예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세균 감염의 위험성도 있었으므로 맥길리스는 재빨리 그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네가 안 신으면 이건 알미리아에게 갈 텐데."
알미리아. 그녀는 여전히 가엘리오의 약점이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다 클 때까지 원한다면 맥길리스는 그녀에게도 똑같은 구두를 사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제 오빠의 사이즈로 맞춰진 커다랗고 높은 구두를 받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맥길리스도 몰랐다. 가엘리오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발버둥은 순식간에 그쳤다.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질근질근 마른 입술을 씹는 가엘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맥길리스는 흠 하나 없는 아름다운 구두를 꺼내 가엘리오의 양 발에 신겼다.
"미친 놈…. 너는 진짜 미친 놈이야, 맥길리스."
메이는 목으로 가엘리오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언제부터 미쳐 있었을까. 언제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인 달튼의 존재와 예상치 못하게 생겨난 그들의 유대감을 이용하자고 생각했을 때도 그를 사랑한다는 자각은 없었다. 찢어진 콕핏 안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꺼내온 것도 반은 충동이었다. 의료팀을 붙이고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받는 보고는 의무적이었고 충동에 대한 후회도 가끔 들었다. 골칫덩이를 떠안아 버렸다고 생각했고 가엘리오가 눈을 뜰 때까지 지겹다고도 생각했다. 이대로 캡슐의 전원장치를 내려버리면 죽을까? 그러면 사체는 또 어떡한담. 이걸 담당한 의사들은?
그러나 모든 것은 가엘리오가 눈을 뜨고 악에 받친 시선으로 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순간 해결되었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가엘리오 보드윈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우울에 잠겨 있을 때 때때로 손을 뻗고 싶었던 것도, 누군가에게 웃을 때마다 그게 거짓임을 알면서도 거친 풍랑에 휩싸였던 것도, 아인 달튼에 대해 이유없이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 것도, 전부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제가 집요한 남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잊어버릴 법도 한 과거의 기억들을 지금까지 끌어안고 갈 리가 없었다. 그 집착이 가엘리오에게 닿아버렸으니, 가엘리오도 참 큰일이었다. 남 얘기 하듯 생각하며 맥길리스는 불거진 발등에 키스했다.
"사랑해."
"제발, 헛소리 좀 그만 해."
"사랑하고 있어, 가엘리오."
"…알미리아를, 행복하게 해준댔잖아."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가 불행해지는 건 아냐."
뻔뻔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가엘리오는 울 것 같았다. 분노 속에서도 때때로 그는 이런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안타까워 하는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건 만들어진 무결함 속에서 유일한 흠이었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오로지 예리한 감정만을 내비치길 바랐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만이 맥길리스에게 와닿는 유일한 길이었다.
"눈 감아."
가엘리오는 당연히, 맥길리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알면서 한 말이다. 가엘리오는 키스할 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니까 억지로 뜨고 있게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가까이에서 보는 청자색의 눈동자는 언제나 빨려들어갈 듯 아름다웠다. 그가 신고 있는 신발 뒤축의 푸른 다이아몬드다도 훨씬.
는 개뿔이. 27화 이후에 넘 뽕 차서 쓰다 말았는데 오늘 진짜 ㅎ ㅏ....도련님 뽕 가득 참. 주의요망.
라스탈 에리온은 남들보다 2년 늦게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타입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엔 그것보다 더했다. 그는 고작 전장 10km의 인공섬을 견딜 수 없었다. 라스탈은 어느 쪽으로 가든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그 좁은 섬은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이 표현은 그가 정확하게 열세 살이 되던 해 일기장에 쓴 표현이다. 스물이 된 이후 다시 읽어본 뒤 창고에 처박아버렸지만 - .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구보를 뛰고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을 받아먹는 유년사관학교도 그의 거부감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세븐스타즈의 권력이라도 생도 전원의 식비를 현재보다 두 배로 올릴 수는 없었고 그는 매일을 얇은 냉동고기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라스탈은 간신히 예비생도 기간을 마쳤고, 그리고 간단하게 짐을 싸 2년 간의 외출을 시작했다. 나가자마자 그는 새로운 태블릿을 샀고 지도를 펴 메모했다. 어린 나이에도 모빌워커를 몰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므로, 돈이 떨어지면 공장이나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돕는 것으로 생활비는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1:40,000,000 축척으로 본 지도가 빽빽하게 들어차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주 예전에는 지구만이 세계의 전부였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 시대는 지구에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항성에도 이름이 있는 시대였다. 비록 그럴듯한 신화적 유래 대신 알파벳과 숫자의 무자비한 나열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열여섯의 라스탈 에리온은 신화에 관한 얘기를 알프스 자락 꼭대기에서 들었다. 오세아니안 연방의 고등교육 시설 산악 동아리 멤버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흔쾌히 일행이 없는 라스탈에게 같이 밤을 보내자고 얘기했고, 그 중 한 명은 상당히 입심 좋은 사람이었다.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기 전, 지구가 둥글다고 알기도 전, 세계의 전부가 하나의 대륙으로만 인지되던 시절의 헛소리를 꽤나 재밌게 해주었다. 사실 거기에 있을 땐 너무 추워서 대충 듣는 바람에 기억나는 게 없었지만――
서론이 길었다.
정 떨어지는 기계의 쇳소리 섞인 희미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의 '목소리'를 라스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들어도 봄처럼 생생했고 진공의 우주에서도 들어도 바람이 부는 듯 쾌청했다. 그는 우주와 지상, 바다에도 익숙했다. 의례적으로 참관하러 간 풋내기들의 여름맞이 수상레포츠 대회에서 그가 매끄럽고 날렵하게 요트를 운용하던 것도 라스탈은 기억했다.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바다의 파도와 바람도 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책에 삽화로 들어가도 좋을 법한 장면이었다. 인생에 단 한번의 시련도 없었던, 소설처럼 빛나는 젊음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시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에리온 공?」
"미안. 다른 생각을 했군. 계속 하게."
라스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잔에 따라둔 버번을 들이켰다. 상대가 없으니 영 술이 줄지를 않는다. 물론 테이블 위엔 상대의 잔도 놓여있지만 아직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투명한 새 것이다. 남자는 남이 있을 때는 그의 괴팍하고, 기이한 철가면을 결코 벗지 않는다.
순풍에 돛 단 듯, 구름 한 점 없던 그의 인생에도 이제는 절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발할라로 가기엔 아직 미숙한 전사였으므로 라스탈이 거두었다.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가장 먼저 밟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의 순진무구한 의식 위에 절망이 드리울 때 어떤 모양일지 궁금해 하는 건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였다. 그 말끔했던 얼굴 위에 첨단 의료기구로도 지울 수 없는 흉이 드리웠듯이 그의 정신에 남은 상처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잠자는 공주가 눈 뜨기를 기다리는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키스는 할 수 없었고 그는 공주가 아니다. 강인한 정신과 긍지를 가진 기사였다. 그는 자력으로 깨어났고, 라스탈은 기대했던 대로 잊지 못 할 광경을 보았으나 그것은 동시에 라스탈이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었다.
"우리의 미래 세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네."
전략 지도를 검토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라스탈을 쳐다보았다. 에리온은 아직 직계 후손이 없다. 이슈의 외동딸은 전사했고, 파리드는 '정통성'에 흠이 있는 -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라스탈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 사생아가 당주다. 게다가 이 당주가 추문에 휩싸인 채로 '사망'한 보드윈의 후계자 대신 실질적인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컸다. 걀라르호른의 권위는 지상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갈등은 전염병처럼 번져 인류가 도달한 우주의 끝만큼 커져 가고 있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나 불가피한 혼란이 목도해 있음은 세 살 짜리 어린애의 눈에도 보였다.
"맥길리스는"
남자는 침묵을 유지한다.
"그 애송이도 안정을 위해 혼란을 바라는 거겠지."
흔히 본인이 똑똑하다고 믿는 어린애들이 그렇듯, 자신은 상대방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고. 라스탈에게 20년지기 친우는 없었으나 아마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은 열길 물 속보다 어둡다고,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지 못한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의 실책이었다. 만약 일부러 살려두었다고 해도 맥길리스는 이 남자를 너무 얕보았다.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애송이라고 비웃었겠지. 라스탈도 한 때 그랬으니까. 그러나 분노보다 슬픔이, 애도가 앞서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저보다 남을 위하는 사람도,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도.
그의 매력이 오로지 솔직함과 순수에 있었다고 생각한 저도 아직까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 상처 입은 창백한 얼굴에, 혼란에 젖었던 푸른 홍채는 기민하게 현재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리고 깊이 탄식했다. 그저 슬픔이었다. 분노도 아니고, 그저, 떠나보낸 이들과 상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자신, 정신적이고 절대적인 선의 가치는 도저히 닿지 않았던 그의 친우에 대한. 그 도량을 감히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있는가?
"하지만 너는 혼란 없이도 바른 길로 모든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할 얘기가 아니군.」
"카르타 이슈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너는 언젠가 걀라르호른의 일석에 앉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래 그대는 그것을 바라지 않지. 그러나 그건 자네의 천성이야. 얼마나 잘 감추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에리온 공.」
단호하게 끊어내는 목소리에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에 대한 칭찬을 이만큼이나 하면 내심 우쭐해 할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그의 장점이었다. 걀라르호른 사병 사이에서 그는 그저 '보드윈의 후계자'였다. 일반 사병들에게 무심하고 특별히 다정하지도 않았다. 존경과 신뢰를 받는 상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모두 계획된 위치임을 라스탈은 이제 안다. 그에겐 그런 권력이 필요 없었다. 그런 선망이 모두 그의 친우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드윈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그는 제 위치를 고정했고 그렇게 되게끔 만들었다. 자만하지 않는 것, 저를 뽐내지 않는 것, 권력을 탐내지 않는 것, 더 높은 경지가 있음을 알면서도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무욕이나 소심함, 도량이 작은 게 아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가진 자의 자세였다.
"잊고 있었어. 너는 '원래' 칭찬도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지."
「무게 없는 말을 굳이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으니까.」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과 무너지지 않는 자아가 그대의 장점이야, 비다르. 하지만 원래 갖고 있던 솔직함, 관대함, 순수함도 잃지 않았다. 맥길리스 파리드가 만약, 그대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면 걀라르호른의 운명은 반드시 그대에게 향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라스탈 에리온은 기꺼이 그 운명의 배에 가장 먼저 올라탈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라스탈이 얼음이 반쯤 녹은 잔을 비우면 비다르는 가면 속에서 얕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략에 대해서 더 할 얘기가 없다면 먼저 일어나겠어, 에리온 공.」
"아아. 그래. 이 쪽도 상대 없는 술자리는 재미가 없어서 일찍 파해야겠어."
라스탈은 빈 잔의 일그러진 상 너머로 멀어지는 비다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는 세븐스타즈의 일그러진 별이었다. 이름, 이름은 무엇일까. 비다르? 가엘리오 보드윈? 어느 것이라도 좋다. 별에 붙여진 이름, 그에 따른 신화의 시대는 애저녁에 끝났다. 신을 바라기엔 인간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불순했다. 새로운 별, 새로운 신화, 모두 인간이 만들면 된다. 그는 분명 액제전 이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확신했다. 라스탈 에리온의 이름을 걸고.
마지못해 내민 손의 온기를 기억한다. 언젠가의 무더운 여름, 맞잡은 손바닥의 틈에 축축한 땀이 고여 가엘리오는 부끄러웠다. 당장이라도 손바닥을 닦고 싶었으나 한 번 손을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가엘리오.
메마른 목소리가 내뱉은 제 이름은 철자 하나하나가 이질적이었다. 앞으로 익숙해져야지. 속으로 그 음절들, 목소리, 분절되지 않는 파동의 덩어리를 꼭꼭 짓씹어 또 되새기며 가엘리오는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더 많이 제 이름을 부르길 원했다. 더 오래 손을 잡고 싶었다.
첫 친구였다. 당장 함장이 되어 우주로 나가고 싶어하는, 고작 세 살 어린 가엘리오 앞에서 어른인 체하는 카르타가 아니라, 정말로 똑같은 나이의. 손을 잡고 드넓은 잔디언덕을 굴러떨어질 것처럼 내달리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가엘리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쁨이 색색깔의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펑- 입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하하-, 달음박질친 언덕의 끝머리에서 속력이 잦아들 무렵엔 할딱이는 숨소리엔 기어이 웃음이 섞이고 말았다. 그렇게 저도 못이기고 가엘리오는 소리를 내고 말았는데, 문득 반짝거리는 금발의 뒷통수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여름의 무성한 녹음과 같은 눈동자가 여름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가엘리오를 응시했다.
뱀과 눈이 마주친 쥐새끼마냥 가엘리오는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방금 전까지의 행복감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입 안에서는 공허한 마른 소리만 났다. 방금 전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불쾌한 단내가 혀 밑에서 느껴졌다.
"아…어, 그, 손… 놓을까?"
마른 입술을 핥으면서 가엘리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심 그의 대답이 긍정일까 두려웠다. 내쳐지기 전에 미리 슬금슬금 빼는 손가락을 맥길리스는 꽉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 말야-…….
그 다음 나올 단어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가엘리오는 꼴깍, 침을 삼켰다.
*
비린내엔 익숙했다. 망망대해도. 어느 연합에도 속하는 일 없이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걀라르호른의 일곱 가문은 반드시 내륙에서 떨어진 곳에 거주해야 했다. 따라서 일곱 가문 모두가 폐함선을 가라앉혀 만든 인공섬 위에 가택을 갖고 있었고, 편의를 위한 일부 지역만이 완전 중립구역으로 지정되어 안정감 있는 대지 위에 존재했다.
그러나 여기는 어딜까.
별의 위치와 해가 뜨고 지는 방향, 시간을 가늠해 봤을 때 남반구의 어디쯤이란 사실까진 알 수 있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위도와 경도는 수치상의 얘기일 뿐이었다. 비행선과 우주여객선의 항로를 모두 비켜나가는 바다 한 가운데, 열여덟에 머리가 터져나가라 외운 1:75000 축척의 세계지도에도 없을 곳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걸 가엘리오가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창을 열어둘 리가 없었다.
그 어떤 고문이라도 달게 받으리라 다짐했으나 그런 일은커녕, 지나칠 정도로 안락한 생활이었다. 방은 널찍하고, 음식은 신선했다. 가엘리오는 특별히 묶여있지도 않았다. 커다란 2층 저택의 어느 방이든 들어갈 수 있었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현관을 나가 주변을 산책할 수도 있었다. 유일한 하녀인 슬라브 계 아가씨는 귀가 멀고 혀가 잘렸어도 독순술을 할 줄 알았으나 굳이 가엘리오가 반듯하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커다랗고 예쁜 눈을 깜박이며 귀신같이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곤 했다. 문자를 쓸 줄도 알아 간단한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가엘리오는 시시한 잡담에 은근슬쩍 유도 신문을 넣어봤으나 그녀도 여기가 어디인지, 누구의 집인지,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모르는 듯 했다.
하루는 너무 길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열두살부터 시험공부를 하느라 철야한 다음 날 빼고는 일곱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빈 시간에 공식적으로 정해진 일과는 오로지 식사시간 뿐이었다.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운동하고―
"―과자집에 갇힌 헨젤이잖아."
"그 동화 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들려 가엘리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청력이 떨어졌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제로 무뎌졌음도 사실이겠지. 일상을 잃은 신체는 하루가 다르게 퇴보했다. 근력은 떨어졌고 손바닥의 굳은살은 허벅지 안 쪽만큼이나 부드러워졌다. 그 지루한 날들 속에서 가엘리오는 꼬박꼬박 하루 네 시간씩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언어를 모두 까먹고 백치가 되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맥, 길리스."
말하면서도 제가 부르는 것이 누구인지, 이 이름이 맞는지, 이렇게 발음하는 거였는지, 철자는 무엇이었는지 가엘리오는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숨은 어떻게 쉬는 거지? 하고 물어보면 숨 쉬는 법을 까먹는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하루 열 두번도 넘게 부르던 이름의 낯섦이 가엘리오를 과거와 그를 명백하게 유리한다.
"잘 지내고 있단 얘긴 들었어."
"…안 그러면 억울할 거 같아서."
어금니가 맞물려 뿌득뿌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맥길리스는 평소와 같았다. 행거에 걸리는 재킷과 잘 차려입은 쓰리피스의 정장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포켓에 들어있는 푸른 실크 행커치프는 익숙했다. 가엘리오가 그의 스무살 생일에 선물한 것이었다. 자주 착용하지는 않는 손목시계는 다이얼판이 컷팅된 운석이었고, 구두는 맥길리스가 애용하는 브랜드의 스테디셀러 라인이었다. 가엘리오 보드윈이 맥길리스 파리드에 대해 아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넌 과자는 별로 안 좋아해서, 그 남매가 이해가 안간다고 했잖아."
사실 난 이해했는데. 과자를 좋아해서는 아니고, 물론 너보단 좋아하지만, 딱 그만큼 굶어봤거든. 약간의 냉소 섞인 우아한 미소도 가엘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언제나 가엘리오를 보면서 그렇게 웃었다.
아인이 그렇게, 되고 난 이후에 - 가엘리오는 이 때를 회상할 때마다 제 머리에 20구경짜리 구멍을 내고 싶었다 -, 여동생의 약혼식 파티에서 - 이걸 생각하면 벽을 내리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러다 손가락이 세 개 부러졌다 -, 화성에서 지구로 오는 함선에서, 또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는 함선에서, 처음으로 제복을 입었을 때, 네가 사관학교 입학선서를 읊으러 가기 전, 우리가 같은 방을 쓰던 학창시절, 가을 축제에서 마창술 시범전을 끝마치고 말에서 내려오다가, 숙제를 까먹고 선생님한테 혼나면서, 같은 침대를 쓰던 별장에서의 여름방학, 그 때마다 너는 한결같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역겨움에 속이 뒤집힌다. 가엘리오가 입을 틀어막으면 맥길리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 구석의 빈 통을 내밀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쏟아내는 바람에 아예 그런 용도의 체면도 뭣도 없이 시큼한 위산이 식도를 역류해 쏟아졌다.
오늘 밥 조금 먹어서 다행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찡하고 매운 코 끝에 가엘리오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처음 눈을 뜨고 바라본 천장이 가엘리오에게 좀 더 익숙한 것이었다면 가엘리오는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무른 눈꼬리의 쓰라림과 온 몸을 압도하는 근육통, 카르타의 창백한 얼굴과 패널 위로 빛나던 그레이즈 아인의 콕핏 내부같은 것들을 모두 꿈으로 치부하고 맥길리스에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아. 맥길리스. 나, 지금 살면서 가장 끔찍한 꿈을 꿨어.
어렸을 때라면 분명 자다가 오줌 쌌을 거 같아. 대기권에서 맨몸으로 낙하하고, 심장이 열 두번 바닥으로 처박혀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그런,
"가엘리오."
이 곳에서 눈을 뜬 첫 날, 가엘리오가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하면 맥길리스는 그 옛날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엘리오를 불렀다.
달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커질 때까지 가엘리오는 기억을 반추하기도 버거웠다.
인류가 평균 한 세기를 살아내는 세상에서 가엘리오는 그 1/3도 채 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짧은 생일 수도 있었으나 가엘리오에겐 인생의 전부였다. 그래, 전부까진 아니더라도 90% 정도는 됐다.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차에서 내린 금발의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날 이후로, 모든 기억의 페이지엔 그가 있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던 순간들과 약간 흐린 날들, 무난하게 밝았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억나지도 않는 시절들조차 그가 옆에 있었을 거라고 가엘리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한 페이지의 어느 한 점에서도 맥길리스의 본심을 몰랐다는 사실이 가엘리오는 괴로웠다.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그 약간의 이상함을, 삐걱거림을 눈치챌 수 있었다면 괜찮지 않았을까. 자만임을 알면서도 할 수 있다면 가엘리오는 뭐든지 하고 싶었다. 처음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다정히, 너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좀 더 사랑하고, 아끼고, 속삭이고, 물어보고, 들었더라면――.
돌이키고 돌이키고 돌이켜보다 열이 올라 열흘을 앓아 누웠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릴 적에도 이렇게 많이 울어본 것 같진 않아.
그 얘길 했었을까. 너에게, 네가 없던 시절의 내 얘기를. 사실은 어두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우주가 무서웠다고. 그 시절엔 오롯이 혼자였다. 블랙홀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광막한 허무를 견딜 수 없어 겁에 질려 베갯잇을 적시고 잠드는 바람에 다음날엔 눈이 떠지지 않았다. 지금은 잊어버린 까마득한 옛날이라, 그러고보니 네가 그 얘길 듣고 코웃음쳤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기어이 네가 없던 시간들마저도 전부 너에게 나눠주었을까. 그래서 내 기억은 영원히 너와 함께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믿었을까.
내게 남은 것 한 줌 없이 나누어주어도 너는 전부 버렸을텐데.
어울리지 않는 지혜열이 내리고 난 뒤 가엘리오는 꽤나 명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온 몸이 진흙에 개어져 덩어리로 빚어진 것 같은 각성이었으나 곧 흙이 굳어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벼워졌다. 가끔씩 따라오는 후유증 같은 두통과 반사적인 구역질을 제외하면 컨디션은 좋았다. 가엘리오가 그럭저럭 맥길리스와 대화 비스무레한 걸 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공식상으로 죽은 남자를 왜 이 빈 집에 가둬 살찌우는지 궁금했으나 가엘리오는 묻지 않았다. 원래 세상엔 이토록 부조리한 일도 있는 법이었다. 남은 평생을 곱씹으며 살아야 할 지독한 배신의 순간이.
그래서 여전히, 일평생이 그러했듯 맥길리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가엘리오 보드윈은 귀가 멀고 혀가 잘린 벙어리 아가씨와 둘이 산다. 맥길리스는 한 달에 두어번 정도 왔다 갔다. 저녁은 함께해야 했고 핏물이 진득하게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면서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에게 선심쓰듯 가족의 얘길 해주었다. 멍청하게 속아넘어간 제 탓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가문의 이름과 칩거하신 아버지와 앓아누운 어머니, 풀 죽은 여동생의 이야기를. 약속한다는 말처럼, - 아직까진 - 성실하게 맥길리스는 알미리아에게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으로 돌아간 뒤엔 손에 잡히는 걸 전부 집어던진다 해도, 일단 이야기를 들을 땐 인내심을 갖고 있어야 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서로에게 빤히 보이는 패였으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너를 죽여야지. 열흘 동안의 머리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너를 죽여야지.
그건 복수심이나 배신감이라기 보단…, 그가 처한 고난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명확한 적. 공격해야 할 대상만 명확하다면 가엘리오는 모든 게임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눈 앞의 남자는 적이고, 그 외의 정보는 필요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는 미련도, 슬픔도, 분노도 없는 상태가 이상했다.
나는 어쩌면 너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가엘리오는 식어 엉긴 기름과 고깃덩이를 포크로 헤집으며 실소했다. 맥길리스가 간혹 이 곳에 올 때마다 의식처럼 치뤄지는 저녁 식사는 가엘리오에겐 늘 고역이었다.
맥길리스가 저를 살찌우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줄 때 받아먹어야 했다. 계획이 어떻게 되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전투를 앞둔 군인의 의무였다. 그런 의무감으로 가엘리오는 하루 세 끼의 식사를 마다하지 않고 꼬박꼬박 받아먹었으나 이 상태가 된 이후 기름진 음식은 통 소화시키지 못하는 위장 탓이었다.
음식은 뭐가 되어도 남기지 않는 게 자랑이었는데.
가엘리오는 더 억울해졌다. 제가 맥길리스 덕에 잃어버린 게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였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
맞은편에 앉은 맥길리스는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술을 훔치며 묻는다. 아-니. 너어무우 잘 맞는데. 이죽이며 대꾸했으나 도무지 식욕이 생기질 않는다. 그 뒤로 결국 한 조각도 먹지 못한 채 깨작대던 상을 무르고 가엘리오는 볼이 불퉁하게 부어있었다. 그 꼴을 보고 맥길리스는 뭐가 웃긴지 키득댔다.
"왜 웃어."
괜히 의자를 한 번 걷어차 보았으나 제 발만 아팠다. 아오, 이런 젠장. 낑낑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 맥길리스는 더 크게 웃는다. 분하게도, 이 남자는 이제 친구도 뭣도 아니지만 여전히 얼굴만은 잘생겼다. 저 얼굴이 저를 보며 미소 짓기를 희망한 적도 있었다. 희망이 현실이 된 뒤에는 조금 기뻤던 기억도 난다. 사실, 많이 기뻤다.
가엘리오는 불현듯 까마득한 과거를 상기했다. 처음으로 맥길리스와 대화다운 대화를 했던 날이었다. 손을 잡고 언덕배기를 달음박질쳐 내려갔다. 숨이 벅차도록 달렸고, 그보다 더 크게 감정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날, 맥길리스가 제게 뭐라고 했더라. 바보처럼 긴장해서 손바닥이 축축해졌고, 그게 부끄러웠고, 맥길리스가 돌아보면서.
"이상하지, 가엘리오."
"…뭐가."
"너는 지금 웃고 있는 날 보고 있지만, 예전엔 완전 반대였거든. 내가 너를 보았어. 네가 소리 내서 웃는 걸 그 날 처음 봤거든."
아. 젠장.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한껏 찡그린 가엘리오의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맥길리스는 말을 이었다.
"웃는 게 예쁘구나."
언젠가의 맥길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맥길리스도 무언가 생각하고 말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얼빠진 헛소리였는데, 그걸 갑자기 듣고 나서 가엘리오는 뭔가, 부끄러웠다. 칭찬? 칭찬인가, 그거? 어른들이야 그런 소리는 많이 했다. 가엘리오도 그 즈음엔 똑부러지게 감사합니다, 라고 답하는 법을 배웠으나 동갑내기 친구에게 듣기는 또 처음이라 무어라 답해야 될지 몰랐다. 어, 응. 어…….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답을 생각하던 사이 맥길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놀고, 사용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도련님들을 찾으러 올 때까지 내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웃는 게 잘 어울린다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웃지를 않는군."
"이런 환경에서 잘도 웃겠다."
"그게 이상한 거야."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가엘리오를 붙들고 살짝 눈꼬리를 휘면, 문득 가엘리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고 만다. 어딘지도 모르고, 단조로운 일상만 반복되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우리 둘이 있던 내 방, 응접실, 감사국의 사무실, 그런 장소에서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고 있다고.
"네가 웃는 게 싫었거든. 엄청 싫었어."
"……."
"그런데 가끔, 아쉬워서."
그렇게 말하는 맥길리스의 목소리는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가엘리오는 그냥 눈을 감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맥길리스는, 맥길리스는 어땠을지 몰라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버렸다. 그의 소중한 친우는 가엘리오와 같이 죽어,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 속는 건 바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엘리오의 닫힌 눈꺼풀 밑에서는 아름답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맥길리스는 그 닫힌 눈꺼풀을 보고만 있었다.
짐승은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하지만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겠지. 언어를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만의 특성, 우월성의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동물에 속하는 다른 것들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빈도가 인간보다 훨씬 낮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대신 시선으로 말한다.
욕망으로 광휘로운 눈동자.
1.
가엘리오는 고개를 들어 맥길리스를 보았다. 응? 층층이 쌓인 밀푀유는 아무리 좋게 먹으려고 해도 도무지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사실 밀푀유는, 가엘리오는 썩 좋아하지 않는 간식이었다. 혀가 녹아버리게 단 것 같은 디저트들은 도무지 가엘리오의 취향이 아니었다. 너무 단 걸 먹으면 속이 메슥거려서 그가 티타임 때 먹는 것은 세 개의 쿠키 뿐. 선호하는 디저트는 신선한 과일이다. 날 것이어야 한다. 익은 것도 싫었다. 물컹한 애플파이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라면 가엘리오는 케이크를 선택했다. 물론 채 한 조각도 먹지 못하지만.
그래서 가엘리오가 매번 한 두입 먹어보고, 매번 후회하는 디저트들은 맥길리스를 위한 것이었다.
도련님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하시다니 별 일이네요.
가엘리오가 바닥을 기어다닐 무렵부터 있었다는 주방장은 허리께까지 오는 작은 도련님의 부탁을 의아해했지만, 이내 그의 요청이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만이란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엔 묻지도 않고 알아서 화려한 티푸드를 준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전공은, 도무지 입맛 담백한 보드윈 가에선 선보일 일이 없었으나, 화려한 프랑스 식 디저트였다.
그리고 가엘리오는 손님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꼭꼭 한 입을 먼저 먹었다. 주방장이 잔뜩 멋을 부린 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디저트를 성심성의껏 포크로 으스러뜨렸다.
아 정말 밀푀유는 너무 먹기 힘들어.
투덜대면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핥아내는 혀는 말간 붉은 색이었다. 어린 맥길리스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광택의 혀에 순간 눈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무슨 말을 하려고 가엘리오를 불렀는지 순간 잊어버리고 맥길리스는 이상스러운 기분에 다시 책에 고개를 처박는다. 그 때 손에 들고 있던 동물도감 책엔 섬세한 터치와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동물들의 그림이 면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표범. 광택이 나는 검고 부드러운 털은 당장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유리구슬 같이 매끄러운 샛노란 눈동자는 얼핏 보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종이 안 쪽에서 살아 숨쉬는 동물들에게 맥길리스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뺏겼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눈으로 발화하는 욕망들.
사람의 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음 페이지의 풀을 뜯어먹는 가젤에게선 그런 날카로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까맣고 커다란 동공은 그저 무뎠다. 맥길리스는 조심스럽게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는 가엘리오를 훔쳐보았다. 가엘리오의 눈은 가젤과 닮아있었다.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하지만 저는. 만약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2.
"미안."
"괜찮아. 시간의 전후로 따진다면 이 쪽이 후자겠지."
"아니. 잊어버린 건 내 탓이니. 나중에 보상하지."
보상? 그래봤자 밥이라든가, 술이라든가 산다는 얘기겠지. 어느 쪽이든 맥길리스에겐 딱히 아쉬운 얘기는 아니다. 아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다음 휴일도 책임져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굳이 '보상'이 아니더라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휴일을 함께했다. '보상'은 좀 더 적당한 구실이 될 뿐이었다.
이즈나리오는 맥길리스가 집에 오든 오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엘리오는 혹여나 무슨 뒷말이 나올까 싶어 늘 이유를 만들어두었다. 제가 실수한 게 있어서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훈련을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 가끔은 맥길리스도 기함했다. 파티나 정치나 머리 복잡한 건 질색이라면서 뼛속부터 '세븐스타즈'라는 건지. 맥길리스는 가볍게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엘리오를 보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엘리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나이 지긋한 남자는 맥길리스도 몇 번 본 적 있는 솜씨 좋은 재단사다. 요즘 시대에는 드물게 원단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며 본을 뜨는 것부터 가봉까지 전부 직접한다는 장인이었다. 보드윈 가에선 행사가 있으면 늘 그에게 옷을 부탁했다. 가엘리오의 생일, 겸 결혼 시장이 코 앞이니 아마 그 때문이겠지.
맥길리스는 테이블에 앉아 기호에 맞지 않는 홍차와 여전히 다디 단 밀푀유를 포크로 잘라내며 맥길리스는 읽던 책을 엎어두고 가엘리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전신 거울 너머의 그는 골똘히 제게 맞은 원단을 고르기 시작한다.
인형이 된 것 같아서 난 싫은데 말야.
가엘리오는 재단사가 이것저것 원단을 대보고 수많은 샘플들을 입혀보고 거울 앞에서 품평 당하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 그 모든 과정을 질색했지만 그의 사교술은 그것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건 맥길리스 뿐이란 사실이 그의 은밀한 독점욕을 만족시켰다.
햇빛이 들이치는 방 안에서 희고 얇은 셔츠 밑 근육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탄탄하고 견고한 육체다. 넓은 어깨, 도드라진 견갑골, 팽팽하게 당겨진 광배근 사이의 움푹 패인 꼿꼿한 척추, 군살 하나 없이 들어간 허리, 오밀조밀하게 꽉 들어찬 실루엣은 튀어나온 곳 없이 매끈한 선을 그린다. 그 중 곡선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승모근의 목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랜스를 주로 쓰는 보드윈의 특성상 누구보다 발달된 - 아마 맥길리스보다도 - 승모근은 퍽 아름답다. 실루엣으로 본다면 그 단단한 근육에 비해선 한 장의 얇은 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선이 가엘리오 보드윈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지탱하는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맥길리스의 시선은 그의 어깨와 목에서, 이윽고 앞으로 돌아간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잘 조형된 삼각의 흉쇄유돌근, 튀어나온 목젖, 깊게 들어간 턱을 따라가면 또렷한 옆선이 얼굴에 입체감을 선사한다. 커다란 눈동자가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얇게 층진 쌍커풀이 말려 올라가는 게 신기했다.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재단사는 익숙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손때 묻은 줄자를 가엘리오의 목에 두른다.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에 당황한 가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 저 목에는 초커 같은 것도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가엘리오는 목이 졸리는 걸 싫어해서 목 위로 높이 올라오는 셔츠나 터틀넥은 절대 입지 않는다. 규격이 정해져 있는 군복조차 부러 몰래 몇 밀리쯤 낮은 목깃의 셔츠를 만들어 입는 가엘리오다. 어색하게 그 목을 조를 검은 선과, 기분 나빠하면서도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차마 벗지는 못하고 머뭇거릴 가엘리오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랫배가 뻐근해진다.
그의 무른 성정은 아무리 싫은 것이라도 제가 호의를 보내는 사람의 것이면 거절하지 못한다.
농담인 척하면서 정말로 선물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맥길리스는 포크로 밀푀유를 찍어 입에 넣는다. 밀푀유의 얇은 층들이 입 안에서 바스라지고 녹아내린다. 밀푀유의 부스러기를 핥아먹던 그 말간 혀가 제게 준 충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들의 시발점인 모양이다. 그 날의 생경함을 맥길리스는 지금은 늙은, 그러나 손맛은 여전히 견고한 보드윈 가 주방장의 밀푀유를 먹을 때마다 떠올렸다.
재단사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 하나만큼 상체가 넓은 그를 애처럼 다룬다. 겨드랑이 사이로 훅 손을 넣고 가슴 둘레를 잰다. 딱 달라붙은 셔츠 밑에서 긴장한 대흉근이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가엘리오는 저런 것들이 싫은 거겠지. 뭔가 보살핌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그 느낌이.
내내 안온한 온실 속에서 자란 주제에 돌봄 당하는 걸 싫어하다니 이상한 모순이다.
그러다 문득 거울 너머의 가엘리오와 시선이 마주친다. 사뭇 비즈니스적이었던 얼굴이 맥길리스의 녹색 눈과 마주치자마자 하늘하게 풀어진다. 비록 멋쩍고 쑥스러워하는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데에 필요한 대략 50개의 근육들이 맥길리스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얘기였다.
그러나 시선을 주고 받을 시간도 없이 가엘리오에겐 다시 새 원단이 들이대진다. 미처 무언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가엘리오는 허둥지둥 시선을 돌린다. 맥길리스는 거울 속에서 홀로 남은 제 시선과 눈이 마주쳐 버리고 만다.
가엘리오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 톰슨 가젤은 일견 갸냘퍼 보이지만 여전히 대초원에서 그 개체를 유지하며 살아남는 동물이다. 순간 시속은 약 100km/h에 달할 정도로 역시 날렵하고 단단한 앞다리 근육을 갖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동물 도감의 삽화와 내용들을 떠올려본다. 맥길리스는 그런 초식동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흉폭한 육식동물이 되고 싶었다. 날카롭게 좁아지는 샛노란 눈동자. 맥길리스의 시선을 한 때 잡았던 움직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은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아마, 욕망이겠지.
도망치는 가젤의 뒤꽁무니를 쫓아, 따라잡아, 그 목덜미를 낚아채고 앞발로 누르고 짓이기고 얽힌 팽팽한 근육들 사이에 이를 박아넣는 생존본능의 욕망. 맥길리스는 그러한 욕망들을 제 눈에서 읽어낸다. 언어는 인간의 특징이라 다행이었다. 갈무리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제 눈에서 흘러넘치는 데도 가엘리오는 그것들을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본능에 가까운 흉폭한 욕망들은 그에게선 거리가 멀었다.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말로 하지 않는 이상 가엘리오는 그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길고 긴 인형놀이에 지친 듯한 가엘리오가 털썩 맥길리스의 앞에 주저 앉는다. 언제 겪어도 피곤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 식은 홍차를 들이켜는 가엘리오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맛없어. 맥길리스는 여전한 그의 투덜거림에 가볍게 웃으면서 제 욕망을 갈무리한다.
" 그래서 보상은 뭘로 해줄 거지, 가엘리오."
"뭘 원해, 맥길리스?"
한 쪽 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가엘리오는 눈을 마주친다. 뭘 원하냐고? 물론, 너를 원해 가엘리오. 너를 우악스럽게 짓누르고 깔아뭉개고 목덜미를 물어뜯고 겁에 질린 눈동자를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