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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6 [녹황흑] 네가 보는 세계
- 2012.09.26 [녹황] 하교길
글
[녹황] 꿈의 대화
모처 리퀘. 쌍방향 짝사랑은 진리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란 마치 키세에게 아오미네 같은 것일까....
사이클을 못 돌리고 밤새고 추석맞이 하는데 진짜 미치는 줄... 겨우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생활로 돌아간 것 같긴한데 오늘도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자다가 4시에 일어났으니 잘 모름... 짝사랑 헉헉 짝사랑 이러고 있는 와중에 지금 쓰는 것도 짝사랑이란 게 유멐ㅋㅋㅋㅋ키세 짝사랑 그만해....ㅠ
꿈을 꾼다.
매일매일매일매일. 질릴 정도로.
눈 앞에 없어도 손으로 그 얼굴의 윤곽을 만들어 내고, 머리카락 끝까지 손으로 쓸어내렸을 때 어느 지점에서 어떤 느낌으로 끝나는지, 어떤 감촉인지 알고 있다. 목울대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쇄골이 얼마만큼 튀어 나왔는지, 어깨의 선은 어떠한지, 셔츠를 벗기 위해 들어올린 견갑골과 근육의 움직이는 모양, 주먹을 쥐었을 때의 뼈의 굴곡, 살짝 튀어나온 갈비뼈, 손목과 발목의 피부로 비치는 파란 핏줄의 엷은 색감까지 모두 알고 있다.
우스운 건 미도리마는 맨손으로 키세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져본 것은 겨우 경기중에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닿아본 손바닥 뿐일까. 매끈하게만 보이는 손은 - 사실 처음엔 정말로 그랬지만 - 마디마디 굳은살이 잡혀있었다. 그 감촉에 처음엔 조금 놀랐었던 것도 미도리마는 기억한다. 단지 그 뿐. 현실에서의 키세 료타, 그와 보냈던 2년여의 시간은 단지 그것뿐인데도 현실에서는 꿈처럼 무심하게 넘겼던 모든 일상의 그가 꿈에서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미도리맛치. 그렇게 부를 때의 목소리와 입술, 얼굴 근육, 목의 움직임, 살짝 웃을 때의 눈꼬리, 치켜올라간 속눈썹. 현실에서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꿈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인것 마냥 미도리마를 잠식하고 달라붙어 내뱉는 숨소리와 저 안 쪽에서 울리는 둔중한 심장소리를 온 몸으로 듣게 해놓고 키세는 귓가에 속삭인다.
꿈이다.
눈이 번쩍 떠져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천장을 확인한다. 삐삐삐삐- 거리며 작은 소리를 내는 알람을 끄고 오른손으로 침대 옆의 탁상을 더듬거려 안경을 쓴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의 쌀쌀한 공기는 조용했다. 미도리마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걸음을 옮겨 양치질을 하고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한다. 물에 젖은 왼손을 잘 닦아 말린 다음 테이핑을 다시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방에서 나와 오하아사를 챙겨보며 아침을 먹고 가방과 럭키아이템을 챙긴다.
미도리마는 모든 일에 있어 정해진 순서를 지키는 편이었다. 자의식이라곤 요만큼도 작용하지 않는 꿈조차 그러하다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미도리마는 늘 현실보다도 생생하고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꿈을 언제나 꿈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처음은 다를지언정 늘 키세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은 똑같았으니까.
"그런 말, 꿈인게 당연한 거다."
- 좋아해.
평생을 가도 현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니까.
「미도리맛치 심심함다(?ω?).」
「미도리맛치 뭐해요오´ㅅ`」
「미」
「도」
「리」
「맛」
「치」
「♥」
휴대전화의 진동이 연속으로 여섯번쯤 울리자 미도리마도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죽어.」
짤막하게 보낸 문자는 늘상 보내던 말이었지만 5분, 10분, 20분이 지나도록 답신이 없으니 뭔가 이상하다. 몇 번이나 폴더를 달각거리다가 잠깐 고민했다가, 미도리마는 신중하게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진짜 죽은 ㄱ」
거기까지 썼을 때쯤 지이이잉- 하고 울린 진동에 얼른 수신메시지함을 확인하면 다행히도 키세의 문자였다. 조금은 안도한 마음으로 무어라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고 있으려면 지금까지 답신을 못한 게 한이었던 것마냥 미도리마의 휴대전화가 쉴 새없이 웅웅대기 시작했다
「(?Д`)???」
「저 진짜 울 거에요!」
「오늘은 우울해서 미도리맛치랑 놀고 싶었는데」
「저 진짜 우울하단 말이에요」
「울 거야. 내 맘도 모르는 나쁜 미도리맛치(` A ´)」
「너무함다 오늘 놀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전 왕따임까? 아무도 안 놀아줘(?Д`)???」
「미도리맛치를 믿었던 제 잘못이었슴다. 이제 문자 안할래요」
어이, 잠깐. 여기서 진짜 끝인거냐?
늘 키세에게 일방적으로 오던 문자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울어? 누가? 키세 료타가? 우울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상황에 미도리마의 머릿 속이 핑핑 돌아간다. 키세 료타를 아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의 얘기였다. 우울하다고? 키세가? 그 키세 료타가? 적어도 미도리마가 아는 키세는 늘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한 사람들에겐 아낌없이 호의를 표현하며 달라붙어도 내려다보는 기색이 강한, 제멋대로인 공주나 왕자 타입이랄지. 키세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우울할 수는 있어도 그걸 결코 남한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미도리마의 키세에 대한 인식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걸까?
키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머릿 속이 전부 키세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카나가와까진 얼마나 걸리더라? 교통편은? 카이조까진 어떻게? 키세네 집은 어디었지? 하나하나 꼽아봐도 전부 모른다는 사실이 미도리마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로 키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키세는 그 정도로 심각하게 말하진 않았다. 그냥 조금 사소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소한 일인거지?
부정적인 생각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온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하고 초조한 감각이 안에서부터 마구 들끓어 폭주한다. 결국 미도리마는 주소록을 뒤져 타카오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방과 후 청소를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바쁜 북적거리는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미안. 오늘 연습은 못 가는거다.」
문자를 확인한 타카오가 무슨 일이냐며 문자에 전화까지 해댔지만 그런 건 확인할 새가 없었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교실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려면 미도리마를 이토록 끝까지 밀어붙인 원흉은 놀랍도록 평탄한 얼굴로 저 쪽에서부터 천천히 교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미도리맛치?"
저 쪽에서부터 손을 흔들고 미도리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키세, 키세였다. 방금 전까지 미도리마에게 부정적인 사고를 잔뜩 불어넣은 주제에 본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의 얼굴로 서있었다. 여기에 있을 수 없는 키세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잠깐 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키세는 지극히 평소같은 얼굴이니 이것은 현실이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무슨 일 있슴까."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순간 맥이 탁- 풀리고야 말았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그거야 네가 우울하다고 그러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지금까지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멀쩡한 키세의 얼굴에 초조 대신 분노가 비등점가지 끓어올랐지만 미도리마의 이런 행동은 키세에게도, 그리고 본인에게도 분명히 비정상적인 대응이었다. 소리치려던 말을 억지로 안으로 우겨넣고 미도리마는 애써 평안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별로.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거다. 어쩐 일인거냐, 키세."
아까까지 긴장했던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몇 번을 속으로 가다듬고서야 겨우 괜찮은 목소리가 나왔다. 키세는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주변을 흘긋거리더니 머리 위로 느긋하게 손을 올리고는 미도리마에게 다시 물었다.
"미도리맛치 연습은요?"
"오늘은… 없는 거다."
그러고보니 타카오에게 오늘 연습은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키세가 멀쩡하다면 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곧 키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 미도리맛치, 오늘 저랑 놀아요!"
미도리마의 팔 소매를 잡아끄는 키세에게 끌려가면서 미도리마는 계속 울리고 있는, 아마도 타카오에게서 오고 있을 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놀자고 했던 것 치곤 키세가 간 곳은 소소하기 짝이 없었다. 근처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레이싱이나 슈팅게임 정도. 오락실과는 거리가 먼 미도리마가 할 수 있는 건 농구게임뿐이었지만 키세는 '엑, 여기까지 와서 농구하긴 싫슴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덥다며 길거리를 지나다 묻지도 않은 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다 미도리마의 손에 쥐어주고 키세는 아이처럼 잔뜩 들떠서 뛰어다녔다. 마지막 종착지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어울려줘서 고맙다며 키세는 미도리마의 몫까지 계산하고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배가 고팠는지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우악스럽게 한 입 베어무는 키세와는 달리 미도리마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머릿 속에서 뱅뱅 돌아다니는 의문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맥락없이 나온 말에 키세가 햄버거를 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임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만 아직까지 입 안에 있는 것이 있어서 키세는 우물우물 씹기만 하며 눈짓으로 물을 뿐이었다.
"우울하다고 한거다, 키세."
미도리마가 진지하게 물어보면 키세는 놀랐는지 켁켁거리며 콜라를 집어들고 쭉 빨았다. 목울대가 세 번쯤 움직이고 키세가 겨우 살았다는 듯 숨을 내뱉다가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 기억력 좋네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네 시간도 안됐는데 잊어버리는 게 바보인 거다."
"그냥 별 일 아니었슴다."
그렇게 가뿐히 말하며 키세는 다시 햄버거를 베어물었다. 미도리맛치는 안 먹슴까?
"거짓말."
아무 생각 없이 미도리마의 입에서 단어가 튀어나갔다. 키세는 깜짝 놀랐는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도리마를 쳐다보았지만 별로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짓말도 적당히 하는 거다, 키세."
"거짓말 아님다."
"무슨 일 있는거지? 고민이냐?"
키세의 얼굴은, 최근 들어선 직접 만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웃는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치의 물러남도 없는 미도리마의 태도에 키세가 콜라의 빨대를 질근질근 씹더니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설마 연애때문에 고민인 건 아니겠지, 키세."
키세가 생각보다 쉽게 가라앉아서 당황한 미도리마가 분위기를 애써 띄워보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쪽이 미도리마의 당황을 가중시켰다. 키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미도리맛치, 의외로 감이 빠르네요."
그렇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감각이라 미도리마는 여기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지뢰를 터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그냥 키세의 문자따위 무시해버리고 말걸. 괜히 오지랖을 떨어서 미도리마 스스로 함정을 파고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키세의 진심인 연애상담 따위 미도리마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들어줄검까?"
"…안 들어주면?"
"그냥 가겠죠?"
그렇지만 알면서도 함정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미도리마가 여기서 나간다면 키세는 그대로 그 고민을 안고 가겠지. 누구한테도 털어놓는 일 없는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빙빙 돌리고 돌려 그냥 놀아달라는 정도로만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문전박대 당할 것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가시밭길로 뛰어드는 고행의 고통을 눌러참으며 미도리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해 봐."
미도리마의 그 말에 놀란 쪽은 키세였나보다. 진짜임까? 묻는 말에 미도리마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가 머리를 긁적이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다시 빨대를 질근질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거창한 건 아님다. 짝사랑이거든요."
"짝사랑? 네가?"
"그렇슴다. 비웃는 거 아니죠, 미도리맛치?"
멋쩍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키세가 연애상담도 모자라 짝사랑이라니. 머리가 핑 돌아버릴 것 같은 걸 묵묵히 참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는 절대로 짝사랑 하지 말아요. 이거 진짜 힘듦다. 게다가 호의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같은 학교?"
"아뇨.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임다. 그 때는 맨날 붙어있어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떨어지니까 좋아한다고 깨닫더라구요. 되게 웃긴데, 그 사람하고는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데 꿈에 자꾸 나와요. 전부 기억해서 외워버릴 정도로. 그래서 기억해요. 목소리라든가, 손의 모양이라든가, 앞에 서면 어떤 눈높이에 있구나 하고. 꿈에서는 자꾸 이름을 불러줘서 진짜인 게 아닌 건 알지만. 그 사람 한 번도 이름은 불러준 적 없거든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고. 아닌가? 어울려주는 정도면 친한건가?"
"…말은 해본거냐. 고백은?"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뒤집어지는 걸 꾹꾹 눌러참고 말하면 키세는 다시 웃었다.
"그 사람은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절대 안 믿을걸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정색할 지도 모름다. 그렇게 깨지는 것보단 지금처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게 훨씬 낫잖아요. 오늘은 그냥… 조금 센치했을 뿐임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없고 겨우 답장이 오나 싶어서 확인했더니… 평소같은 말이긴 했는데 좀 맘에 걸리더라구요. 어쩌면 진짜 내가 그 사람한테 그 정도밖에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뛰어내려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거기까지가 미도리마의 한계였다. 죽어? 누가? 네가? 상상만으로도 눈 앞이 새카매지는 암전이었다.
- 좋아해.
미도리마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을 넘치도록 해줄텐데 그걸 가뿐히 무시하는 상대가, 눈 앞에 있으면 죽어라 패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웃어."
무엇보다 저딴 식으로 웃게 하는 상대가 미도리마는 싫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키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라 구역질이 올라온다. 차라리 키세를 패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족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미도리마가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말에 키세가 놀랐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그럼까, 미도리맛치. 무섭게시리. 못난 얘기해서 화났슴까?"
"그만, 웃으라고 한 거다."
"안돼요. 전 웃는 걸로 먹고 사는데요? 게다가 여기서 웃는 것도 안 하면 울검다."
"그럼 울어."
"네?"
"너는, 확실히 속에 있는 말은 잘 하지 않지. 그래서 나는 네가 운다거나 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거다. 매일 웃으니까. 하지만 그딴 식으로 웃을 거면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거다. 화났냐고? 그래. 화 났지. 설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도 못하고 속으로만 질질 짜는 타입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그런 식으로 질질 짜댈 널 생각하면 화가 나는게 당연한 거다."
"질질 안 짜요. 안 울게요, 미도리맛치. 남고생이 남고생 앞에서 울면 당연히 짜증나잖아요."
"그딴게 아냐!"
분에 못 이겨 테이블을 탕- 내려치면 키세 뿐만 아니라 점내에 사람들이 모두 미도리마를 한 번씩 쳐다봤지만 올라간 언성은 내려갈 줄 몰랐다.
"꿈? 매일 꾸지. 나도 외울 수 있을 거 같아. 정작 한 번도 만져본 적도 없는데 전부 손에 잡히는 것처럼 생생하고 1초 전의 일처럼 전부 기억 나. 보이고, 만지고, 들리고, 그리고 웃고는 얘기해. 좋아한다고. 그러면 꿈에서 깨는 거다. 그런 건 현실이 아닐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매일 꿈에서 깨는데 화가 안나?"
"미도리맛…치?"
"차라리 나에게 고백해라, 료타. 매일 불러줄게, 이름. 답장도 꼬박고박 해주고 매일 옆에 있어주고 좋아한다고 말할테니까.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정말 미칠 것 같은데… 너한테서 정말로…"
좋아해.
그 목소리로 들리는 단어가 오롯이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간절히 바랬다. 꿈인걸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들리면 꿈에서 깨버리는 걸 알면서도 미도리마는 원했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늘 생각한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꿈을 꾸면 그 순간은 천국이지만 나머지는 지옥이다.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미도리마는 오늘도 꿈을 꿀 수 있길 간절히 원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면서도 희망고문을 하는 것처럼 괴롭히는 그 꿈을 싫어하면서도 사랑했다. 키세에게 오는 무의미한 문자들에도 들뜨는 자신이 우스워서 밀어넣고 밀어넣고 또 외면하려고 했다. 차라리 완전히 지워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도 싶었지만 할 수도 없었다. 그 문자들을 하나하나 저장해놓는 자신이 그토록 바보스러웠던 순간이 있을까.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끝이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끝이었다. 키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면 키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놀랐을까. 당황해할까. 농담이라고 말할까?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도리마는 빌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부 털어놨는데도 가벼운 농 취급을 받는다면 미도리마는 정말 죽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빌고 또 비는 미도리마의 귀에 들린 단어는 단 하나였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빗나가지 않는 예상대로의 대답에 미도리마는 눈을 꽈악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키세가 가버린다면 좋을텐데.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매일 꿈에서 미도리맛치에게 얘기함다. 백마디, 천마디, 그것보다 더 많이 밤새도록 매일같이. 목이 쉬도록 얘기하면 미도리맛치는 이름을 불러요. 그러면 꿈에서 깨죠.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건 꿈인가요 아니면 진짜인가요? 빨리 대답해줘요, 미도리맛치. 이게 꿈이면 나는 좀 있으면 현실로 돌아가야 되니까. 네?"
귀에 들리는 단어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도리마는 자신이 순간 그대로 까무룩히 잠에 든 줄 알았다. 눈을 뜨면 순간 조명이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익숙한 아침의 천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키세가 있었다. 말하고 있었다. 꿈처럼. 아니, 꿈이 아닌 현실.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거기엔 키세 료타가 있었다.
미도리마가 기억하는 그대로. 그 얼굴, 목, 셔츠 아래의 목울대,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밑에서 맥동하는 푸른 핏줄과 그 목소리를 가지고 꿈보다 더 달콤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좋아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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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 오늘의 운세
데이트... 그게 뭐야.... 진짜 쓰다가 너무 맘에 안들어서 울 뻔했다ㅠㅠㅠㅠ
모처에서 리퀘받았는데 솔직한 심정으론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다 저기요 저 그런거 진짜 못쓰는데 엉엉엉엉ㅠㅠㅠ 님의 기대치가 무한대라면 나는 0에 수렴한단 말야!!!! 녹황 좋은데 이런 알콩달콩하기만 한 건 쓸 수가 없는 더러운 시리어스앵슷취향. 근데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쓰려면 애초에 리퀘를 받지 말았어야 되는거고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썼지만 실패한 거고......
리퀘주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씀.....
이제 K만 기다리자 K 시름시름...... 진짜 녹황 좋은데 미도리마 말투 때려주고 싶음.
기온 25℃, 습도 10%, 바람은 약함, 하늘은 맑음, 구름 없음, 오늘 게자리의 운세는 최고에 럭키아이템인 파란색 가방도 챙겼다. 나름대로의 대사도 준비해놨고 순서도 경우의 수에 따라 클리어. 이런 날을 고른 자신에게 퍽 흡족해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미도리마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미도리맛치 오늘 저 안나가면 안될까여ㅠ」
「무슨 일 있는건가? 없으면 그냥 나오는 거다.」
「미도리맛치는 괜찮은 거에요? 저 만나는거?ㅠ」
무슨 소릴 하는거지? 키세의 문자는 어쩐지 영문 모를 말이라서 미도리마는 잠시 고민을 하다 간결하게 문자를 보냈다.
「지각이라면 죽는거다.」
기온 25℃, 습도 10%, 바람은 약함, 하늘은 맑음, 구름 없음, 오늘 게자리의 운세는 최고에 럭키아이템인 파란색 가방도 챙겼다. 거울을 보면 모든 게 완벽한 데도 키세의 문자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미도리맛치. 여김다~"
약속장소인 역 앞으로 나가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키세가 청바지에 흰 프린팅 티셔츠, 모자를 뒤집어 쓰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심플한 복장이지만 역시 현직 모델이라는 건지 주변에서 누구라도 한 번쯤 뒤돌아 볼 정도로 스타일은 좋았다. 오늘의 목적은 일단은 쇼핑. 쇼핑도 겸사겸사 데이트… 라는 생각이지만 글쎄. 키세는 별로 그런 데까진 생각하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미도리맛치? 뭐 사려구요?"
"아아, 농구화랑 티셔츠 정도…."
"그럼 나도 살래요!"
"충동구매는 안 좋은 거다."
"뭐 어떻슴까. 저도 마침 옷 사려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저 쪽에 쇼핑몰 갈까요?"
그렇게 말하며 키세는 성큼성큼 앞장 서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상하군. 어딘가 묘하게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느끼며 미도리마는 키세의 뒤를 따라갔다.
"미도리맛치, 이거 예쁘지 않아요?"
이건 어때요? 이건? 이것도 예쁨다. 우와 이번에 새로 나온 거래요!
기분 탓이었나. 쇼핑몰에 들어가자마자 키세는 잔뜩 들떠서 미도리마에게 이것저것 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서 가격대만 맞으면 대충 고를 모양이었지만 키세는 전혀 아니었다. 이것저것 골라서 미도리마에게 한 번씩 신으라고 부추기고는 이것저것 어울린다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도리맛치는 어떤 게 제일 맘에 들어요? 역시 하얀색?"
"그것도 괜찮지만…."
"그럼 이거?"
"나쁘지 않군."
"뭡니까, 미도리맛치. 좀 더 의견 피력을 확실히 해줬음 좋겠슴다. 어렵잖아요."
"너는?"
"제 걸 사는 게 아니니까요."
"네가 골라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심코 그렇게 말하면 약간의 공백 끝에 키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됨까?"
"뭐가?"
"아니… 역시 미도리맛치가 신을 거니까 미도리맛치가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별로 상관없는 거다."
그렇게 말하면 키세는 조금 주저하다 이게, 괜찮은 것 같슴다 하고 한 켤레를 골랐다. 미도리마의 눈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주저없이 결제했다.
아니, 오늘의 키세는 역시 이상하다.
아침의 감은 틀리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반 발자국 앞서가는 키세를 쳐다보았다. 운동화부터 시작해서 옷을 고르는 것도 평소라면 분명 이것저것 잔뜩 권하며 골라주거나 부추겼을 텐데 어쩐지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이 거리.
키세의 등 말고는 모자를 눌러 써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키세는 늘 다른 사람과 보폭을 맞춰 옆에서 걸었다. 바짝 옆에 달라붙고는 무슨 일이 있다면 손이나 팔을 잡아끄는 것 같은 행동도 서슴치 않았을 텐데.
- 그러고보니 오늘은 닿은 적도 없었나?
무심코 미도리마는 왼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키세는 체온이 높은건지 손 끝만 닿아도 테이핑 너머로 그 온도가 느껴졌었다. 처음으로 키세가 손을 잡았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였으니까. 손 잡아도 됨까? 울면서 고백한 끝에 키세는 눈물을 훔치고는 그렇게 말했다. 눈물 범벅으로 축축한 손은 생각보다 기분 나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따뜻해서 좋―
아니아니아니. 아닌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순간 이상한 쪽으로 빠져든 생각에 미도리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맛치, 뭔 일 있슴까?"
뒤에서 따라오지 않는 미도리마가 의아했는지 고개를 돌아본 키세가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거다."
"그렇슴까. 이제 살 건 다 산검까?"
"그런 거 같군."
미도리마의 손에 들린 건 오늘 산 운동화와 티셔츠. 일단 소정의 목표는 달성했는데 그 다음, 다음이 문제다. 머릿 속에서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키세가 좋아하는 디저트류가 맛있는 카페가 근처에 두 곳,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영화는 한 시간 후에 시간이 있고 저녁은…
"그럼 돌아갈까요?"
어젯 밤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숙지한 계획을 키세는 완벽하게 깨뜨려 놓는 말을 꺼냈다.
"왜, 왜인거다?"
당황한 미도리마가 소리치면 키세도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쇼핑 다 한 거 아님까?"
"넌 오늘 진짜 쇼핑만 하려고 했던건가."
"그게 아니면 뭠까?"
여전히 모르는 듯한 키세의 눈초리에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여긴 길 한복판에 그런 말을 미도리마의 입으로는 꺼내기가 민망했다. 일단 키세를 끌고 큰 길에서 인적 드문 골목으로 빠지면 키세는 의아해하면서도 얌전히 따라왔다. 뭐에요, 미도리맛치? 빤히 쳐다보는 얼굴은 알면서 그러는건지 모르면서 그러는 건지. 할 말은 많은데 뭣부터 얘길 꺼내야 할지. 말을 하려면 할수록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라 미도리마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지난주에 분명 나한테 고백을 한거다, 키세."
"그…랬죠."
"그리고 나는 괜…찮다, 고 대답을 한 거다."
고르고 고른 단어인데도 어쩐지 얼굴로 열이 잔뜩 쏠리는 것 같다. 가을이라고 해도 아직은 따가운 태양에 체온이 잔뜩 올라 얼굴이 홧홧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했다.
"그…그런 것치고는 네 태도가 문제인 거다 키세."
"네?"
"연애 같은 거 잘 안해봐서 모르지만, 서로 그… 어쨌든 그런 사이가 됐는데 둘이 만나는 건 데이트가 아닌건가?"
"…."
"무슨 일이 있는건가? 아침엔 만나지 말자고 문자를 보내질 않나, 평소에는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 텐데 말도 잘 안하고 보폭도 전혀 맞추지 않고 앞서 나가는 거다. 문제가 있다면 똑바로 얘기해."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나간 말에 키세의 고개가 점점 숙여지고 챙을 푹 눌러쓴다. 그 태도에 아차 싶어 미도리마도 입을 다물었지만 키세는 바닥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공백이 내려앉은 이후 키세가 발로 괜히 맨 땅을 두어번 툭툭 치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도리맛치."
"왜?"
"오늘 오하아사 봤죠?"
"당연한 거다."
"저 무슨 자리게요?"
"쌍둥이 자리."
"알고는 있네요."
"당연한 거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요. 오늘 게자리랑 쌍둥이 자리 궁합은 최악임다."
뜬금없이 오하아사 얘기로 흘러가더니 키세는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도리맛치, 엄청 신경 쓰잖아요. 예전에는 아예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고. 나름대로 미도리맛치한테 고백하고 나서 처음으로 둘이 나가는 거니까 데…이트…가 아닐까 해서 어젯밤 내내 맛집이나 이런 거 검색해놨는데 아침부터 그렇게 나오니까 쇼크였슴다. 그래서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도리맛치는 안 나오면 죽는다고 문자 보내고 나오긴 했지만 저만 들떠있고 미도리맛치는 쇼핑만 하면 진짜 헤어질 것 같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키세는 민망한 건지 계속 모자챙만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 꼭꼭 눌러썼다. 그러고보니 오늘 오하아사에 그런 내용이 있긴 있더랬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던 부분이라 오히려 키세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생각보다 별 일 아니라서 미도리마는 조금 긴장하고 있던 맘을 풀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키세."
"네?"
"나는 원래 운이 좋은데다 오늘 게자리의 운세는 최고인거다. 럭키 아이템도 챙겼고."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임까."
"네 불행이나 최악의 궁합같은 건 간단히 물리칠 수 있다는 거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다. 모든 일은 진인사대천명, 노력은 할 만큼 했고 그에 상응해 하늘의 뜻이 더해져 성공하는 것.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네까짓 걸로 천명이 흔들릴 리가 없는거다, 키세. 게다가."
그렇게 말하며 아직까지도 꽉 누르고 있는 키세의 모자를 벗기면 겨우 오늘 처음으로 키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이 쪽이 훨씬 낫군. 모자에 눌린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어 있는 게 우스워 보이긴 했지만 키세는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내가 누군가랑 사귀게 된다면 당연히 거기엔 하늘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거다."
"…미도리맛치, 자만심이 하늘을 찌름다."
당연한 말인 거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오늘 하루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아 불퉁하게 대답하면 키세는 실실 웃으면서 다시 되물었다.
"그래도 저 방금 굉장한 고백 받은 거 맞죠? 미도리맛치한테 그런 말 들을 줄 꿈에도 상상 못해서 엄청 기쁨다."
뺨이 발갛게 상기된 키세가 환하게 웃으면서 미도리마가 앞서 한 말을 그대로 읊어주면 미도리마는 잊고 있던 열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면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키세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그럼 저 오늘 미도리맛치 옆에 붙어 있어도 되는검까, 우리 영화 봐요! 아님 카페? 밥이라도 먹을까요? 어때요, 미도리맛치? 신이 나서 날아다닐 것처럼 붕붕대는 게 정신 없을 지경이었다. 뭐, 소심하게 있는 것보단 이 쪽이 훨씬 키세다운 얼굴이었지만.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거다, 적당히."
"뭐가 말임까?"
"너무 들떴다는 거다."
"그치만 미도리맛치랑 첫 데이트인 검다. 들뜨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요? 어디로 갈까요. 카페?"
"맘대로 하는거다… 아, 그러고보니 저 쪽 골목에 케이크가 괜찮은 카페가 있다던데."
"그럼 거기서 좀 있다가 저녁?"
'첫 데이트'란 말에 미도리마의 머리도 겨우 다시 제기능을 하게 되었다. 어제 쭉 뽑아놨던 일정과 리스트를 상기하며 미도리마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미도리맛치."
"또 무슨 일인거냐, 키세."
"손 잡아도 됨까?"
겨우 나란히 선 키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미도리마에게 묻는다. 닿지 않아도 키세의 들뜬 체온이 느껴진다. 희고 긴 손가락이 얽어들어오는 감촉과 고동을 미도리마는 알고 있었다.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당연한 거다."
맨 손으로 잡는 기분도 분명 좋겠지. 조금 있다 시간이 나면 한 번 테이핑을 풀어보자. 오늘 게자리의 운세는 최고고 사람이 서로가 맘이 맞아 사귀게 될 확률은 극히 적은 확률이라고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이렇게 사귀게 되었다면 거기엔 매일의 운세보다 더 강력한 하늘의 뜻이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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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황립] 현재진행형
청황이 딱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PO짝사랑WER, PO후회WER 취향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키세는 전투력측정기라 안되고 쿠로코는 되나여... 키세가 불쌍했다.... 바르작거리는 키세랑 그걸 바라보고만 있는 아오미네가.... 내 심장에 불을 질렀어.... 그리고 키카사인 이유는 카사마츠 센빠이는 착하잖아여! 분명히 동갑이면 카사맛치 라고 불렀을 거야. 틀림없어. 뭐 그리하여 이런저런 게 쉐킷쉐킷 되었습니다. 진짜 쓰고 싶은 걸 썼더니 다 쓰니까 왜케 뿌듯하지... 한시부터 썼는데 6시쯤 다 했나. 메모장으로 24kb, 한글로 문단 그대로 붙이니 20쪽이라 아 이거면 카피본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먹. 지금까지 원고하는 거 엄청 힘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좀 생각을 바꿔야 될듯. 장하다 강메레! 일상이 걍 무너졌네!!!!!
녹황이나 청황도 원고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존못이지만. 안될거야, 아마.
1.
이제, 동경은 그만 둘 거에요.
그것은 카사마츠가 들은 아오미네에 대한 키세의 마지막 얘기였다.
아침. 눈을 뜨면 몸이 무거웠다. 뭐지? 어제 연습을 조금 빡빡하게 했더니 근육통이라도 온건가? 카사마츠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면 문득 시야에 샛노란 머리카락이 잡혔다. 아아, 이 녀석인건가. 몇 번인가 반복된 패턴에 한숨을 푹 쉬고 카사마츠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키세 료타!!!!!!!"
그 바람에 침대에서 고스란히 바닥으로 추락한 키세가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엎드려 눈을 깜박거린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닥을 한 번, 천장을 한 번, 침대 위에 앉아있는 카사마츠를 한 번 쳐다보고, 다음으로 나올 말은.
"너무해요, 선배!"
그럼 그렇지.
"뭐가 너무해! 함부로 남의 침대에 기어오지 말랬지!"
"하지만 어젯밤은 너무 추웠다구요!"
"누가 그렇게 술 마시고 남의 집에 쳐들어오래! 그냥 내쫓아버릴 걸!"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쓸쓸한 지 선배는 모름다!"
"나도 혼자 살거든!"
"아, 그렇네…"
멍청한 녀석. 부스스하게 뜬 머리를 긁적이는 키세를 다시 한 번 발로 뻥 차내고 카사마츠는 투덜대면서도 부엌으로 향했다. 해장국, 할 게 있을까? 냉장고를 열면 다행히 콩나물 한 봉지 정도는 있었다. 콩나물국 정도면 되겠지. 키세가 집에 쳐들어 올 때의 패턴은 늘 똑같았다. 어디선가 술을 잔뜩 마시고 집 앞에서 전화를 건다. 선배에~, 저 선배네 집 앞인데 들어가도 돼요? 재워주면 안돼요?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게 예의가 바른건지 아닌건지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는 풋풋한 맛이라도 있었거늘 대학생이 되자마자 술이 떡이 돼서 돌아다니는 후배는 전혀 귀엽지 않았지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는 건 도대체 무슨 심정인지 모르겠다.
"잘 먹었슴다!"
"대답은 우렁차지, 대답은."
궁시렁거리면서 괜시리 한 번 키세의 등짝을 차면 키세는 또 힝, 하는 어울리지 않는 우는 소리를 낸다. 임마, 먹었으면 설거지라도 해. 난 1교시다. 뒷처리는 몽땅 키세에게 맡기고 욕실로 들어간다. 씻고 나오면 키세는 가방을 메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냐."
"그렇슴다. 오늘도 챙겨주셔서 감사함다. 민폐 끼쳐서 죄송함다. 나중에 학교에서 밥 한 끼 먹어요."
"알면 제발 오지 좀 말아라. 지겹지도 않냐. 고등학교 때부터 이 무슨…"
무심코 내뱉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면 키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선배는 다정함다."
가보겠슴다. 혹시 학교에서 보게 되면 밥 같이 먹어요.
키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조차 익숙하고 민폐니 뭐니 해도 또 잔뜩 술을 마시면 집 앞에서 전화할 것을 알았지만 카사마츠는 어쩐지 입이 썼다.
"그 개자식."
이 상황에서 욕할 수 있는 건 딱 한 명 뿐이었다.
키세는 늘 말했다. '기적의 세대라는 이름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나머지 네 명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물론 쿠로콧치도 굉장해요!'. 입만 열면 쿠로콧치, 쿠로콧치를 외쳤지만 키세가 동경하는 것은 아오미네 뿐이었다. 압도적인 스피드, 스킬, 야생동물과도 같은 민첩성, 독보적인 센스에서 비롯된 프리스타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키세의 능력은 카피뿐이라고 누군가는 그랬지만 감독은 키세도 천재인 것은 확실하다고 얘기했다. 카이조의 에이스는 곧 죽어도 키세였다. 따라갈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물론 부러운 적은 있었지만 키세는 그 천부적인 센스를 갖고도 노력도 하는 타입이었다. 어차피 따라갈 수 없다면 자신이 지탱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1학년이었고, 자신은 3학년이었다는 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겠지.
졸업식 때는 가지 말라고 펑펑 울었다. 자신보다 몇 센치는 큰 후배를 다독거리면서도 카사마츠는 기분이 묘했다.
- 괜찮아, 2년만 있으면 너도 대학에 오면 되니까.
인터하이 토오전에서의 뼈아픈 패배 뒤에 키세는 근력, 지구력 등 기초체력부터 죽어라고 노력해서 길렀다. 온갖 스타일을 카피하고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잔뜩 뒤섞여 엉켜나올 때도 있었다. 키세의 기술은 점점 화려해졌고 그럴 때마다 카사마츠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 녀석이 졸업하고, 만약에 대학에 와서도 같이 뛴다면 정말 굉장하겠구나. 어쩐지 그럴 수 있단 강렬한 예감이 들었었다.
그 말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힘내겠슴다!'라고 외치던 키세의 모습이 생생했다.
카사마츠가 대학에 들어가고 자취를 시작한 이후 키세는 종종 카사마츠의 집에 오곤 했다. 가끔 경기를 보러가면 그 때의 키세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저 녀석이 제법 철이 들었구나, 란 부모같은 감상을 내뱉곤 했지만 카사마츠의 집에 올 때의 키세는 변함없이 철이 없었다. 그래서 변화를 눈치채는 게 늦었다.
"선배. 저, 이제 농구 못함다.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영하 15도를 밑도는 강추위였다. 동계훈련을 마치고 일단 도착하면 씻고 자야지, 하는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가고 있는데 집 앞에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고개를 무릎사이에 푹 파묻은 채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긴 코트자락 밑으로 나온 교복은 익숙한 것이었다.
"키세…?"
설마, 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부른 이름에 상대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빨개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 말이 그거였다. 이제 저, 농구 못해요.
다리가 한계였다. 기초체력부터 꾸준히 키워둔다고는 했지만 그 많은 스타일을 한꺼번에 익히고 처리하는 건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짐을 내팽개치고 얼어붙은 키세의 몸을 억지로 들어 질질 끌고 침대에 겨우 앉혀놨다. 집도 며칠을 비워둔 터라 급하게 난방을 해도 따뜻해질 때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매일 이 세상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살던 후배가 갑자기 새파랗게 죽은 얼굴로 집에 온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키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 카사마츠는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딱딱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이를 억지로 누르며 키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동경은, 포기했어요. 다 그만 뒀어요.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 적어도 누구보다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고 가능성도 있었어. 하지만 안됐었죠. 나는, 아무것도 바꿔놓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이왕 이렇게 된거 그렇다면 대신 이기겠다고, 선배의 팀으로 이겨보려고 생각했어요. 선배가 절 믿어준 만큼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안돼요. 죽어도 안되더라구요. 죄송해요. 죄송함다, 선배. 심지어 이제 같이 농구도 못해요. 전 아무것도 안되고, 못해요.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돼? 그만, 그만 두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아무것도 안돼서…
바들바들 손을 떨며 붙잡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긴 한건지 키세는 몽땅 토해내고 울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피부에 따뜻한 눈물방울이 궤적을 그리며 서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간간히 생략된 말들은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2년 전, 인터하이 결승전에서 키세는 문득 그렇게 얘기했다.
- 이제, 동경은 그만 둘 거에요.
그 말이 키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오래걸릴 줄이야. 자신은 눈치는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만이었다. 키세 료타는 애초에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철없음과 솔직함으로 누구에게나 호감가는 외형을 만들어두고 안에서는 선을 그어둔다. 어른스러운 건 키세가 그렇게 꾸며놓은 외형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다른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란 걸 카사마츠는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다.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납득하고 누구도 모를 진심이 어째서 자신에게 뱉어지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카사마츠는 일단 키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두드렸다.
"임마, 울지 마. 그만 울어. 나한테 올 때는 팬들한테 받은 간식 자랑하러 올 때 밖에 없던 놈이 왜 울어."
"죄송함다. 죄송해요, 선배. 몰라요. 내가 왜 여길 왔지?"
쿨쩍거리면서 키세는 그런 바보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민폐네요. 가볼게요. 옷자락을 꽉 붙잡고 놓지 않던 키세의 손을 아쉽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뭘까.
"그러고 나가서 어디서 얼어죽으려고. 넌 처음부터 민폐였어. 그냥 온 김에 몸이나 녹이고 가."
"처, 처음부터 민폐였다니! 선배 나빠!"
"이제 알았냐. 그러니까 일단, 일단 앉아 있어."
그 날, 아직 날짜까지도 기억난다. 윈터컵에서 카이조가 다시 토오에게 패한 날이었다. 키세의 다리가 끝장을 본 날이었고 처음으로 키세의 안을 들여다 본 날이었다.
그 날, 그 팔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카사마츠가 지금까지 이렇게 복잡한 맘을 가지고 키세를 바라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키세가 술을 마시고 담배 냄새에 쩔어서 카사마츠의 집에 오는 일도 없을 것이고, 한여름에도 춥다며 들러붙는 녀석 때문에 땀에 쩔어서 일어나는 일도 없었겠지.
학교 가는 길, 아직은 오픈되지 않은 가게의 전면 유리에 커다랗게 붙은 흑백의 포스터가 보인다. 운동을 그만뒀어도 여전히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키세가 셔츠를 풀고 반쯤 내리 깐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 포스터는 남성복 브랜드 런칭 광고였다. 풋풋함과 반짝거림 대신 무언가 아슬아슬하고 농밀한,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극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덕분에 이런 컨셉으로 화보집이 하나 더 나온다고, 키세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런 거,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은데… 저는 상쾌함의 대명사, 영원히 10대로 있고 싶다구요!
상쾌함은 개뿔. 가슴 큰 누나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얼굴이구만.
사진 속의 키세는 오히려 솔직했다. 누가 봐도 실연당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직까지도.
2.
농구를 못하게 되었단 소리를 들었을 때 딱히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아, 드디어 이렇게 끝이 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 두겠다고 해놓고, 우유부단하게 질질 끄니까 신이 옛다, 하고 결정타를 날린 게 분명했다. 어차피 그만 둘 거였고, 솔직한 심정으론 1학년 때 그만두고 싶었지만 카사마츠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 두지 않았다. 그 사람도 못지 않게 농구를 좋아하고, 팀을 아껴서 그 팀으로 그 때 내가 못한 것을,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해내서 한번쯤 우승컵을 안겨주자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결국 못 했지만.
구원이라든가 그런 거창한 단어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냥 그 시절이 즐거웠다. 아오미네를 따라잡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고 아오미네가 농구를 할 때의 얼굴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그 시절로 되돌려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주겠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줄 꿈에도 몰랐고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으며 아오미네를 다시 되돌린 게 쿠로코와 카가미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마음만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데 어째서?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요?
넌 날 절대 못 이겨. 그 말이 맞았다. 아오미네는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은 멈춰서버렸으니까. 아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따라잡질 못했다. 나중엔 그냥 그 사실이 분했고 안되는 건, 결국 안되는 거라고 체념했다.
술은 성인이 됐으니 뒷풀이 정도엔 마셔줘야지, 라고 해서 마셨고 담배는 스탭이 피는 걸 한 번 얻어핀 게 의외로 괜찮았다. 모델이 담배라니, 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뭐 어때, 요즘은 오히려 그런 분위기도 괜찮잖아 키세는? 그렇게 말한 코디도 있었다. 대신 피부 상하니까 적당히 해, 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충고도 했었다. 무언가 망가져가는 느낌이 들어도 나쁘진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컨셉의 포스터를 찍었을 때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밖에서는 대호평. 그렇구나. 이게 나인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 땐 멍청했어, 하고 추스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다만 그 때마다 의지하는 게 카사마츠라는 건 키세에게도 좀 마음에 걸리는 노릇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고교 후배일 뿐이고 대학도 멋대로 쫓아간 셈이었지만 행동은 험하고 취급이 나빠도 카사마츠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선배한텐 더 좋았을텐데. 하지만 카사마츠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키세는 알고 있었다. 키세 료타는 진저리 날 정도로 약아빠진 사람이었다. 거기에 기대서 응석을 부리고 멋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화풀이 할 사람은 거울 속의 자기 자신, 딱 한사람 뿐인데도.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면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라, 쿠로콧치?"
「잘 지냈어요, 키세 군?」
"당연하죠.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요? 쿠로콧치는 어때요? 요즘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일이 좀 바빠서."
거짓말이다. 아오미네를 떠올리기 싫어서 중학교 때 알고 있던 사람한테는 일절 연락한 적이 없었다.
「키세 군이 이번에 찍은 광고는 잘 봤어요. 굉장하더라구요. 주변에서도 난리에요.」
"헤헤, 쿠로콧치가 칭찬이라니 기분이 이상함다."
「키세 군이 더 떠버리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은데 어때요? 우리 다 같이. 미도리마 군도, 아오미네 군도 OK 했어요. 무라사키바라랑 아카시에겐 아직 안했지만.」
아오미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 몸의 피가 싸하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오미네는 대학에 가서도 유명인사였다. 스포츠 잡지엔 심심찮게 이름이 올라오는, 바로 프로팀으로 가도 좋았겠지만 이상하게 대학은 가고 싶다고 해서 대학팀에 있을 뿐이었다. 잡지 표지를 장식한 아오미네를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나 보다.
"미안함다, 쿠로콧치. 아마… 그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모처럼 다같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엔 꼭 시간 낼게요. 미안함다."
「키세 군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죠. 바쁘니까.」
그 뒤에도 쿠로코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 속이 새하얗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아오미네, 란 이름만이 둥둥 떠돌고 있어서 키세는 정말 죽고 싶었다. 도대체 이걸 모두 웃어넘길 수 있는 그 날은 언제쯤 오는 걸까?
대학에 들어오면 빠지지 않는 행사 1순위는 단연 축제고 2순위는 체육대회다. 게다가 그게 대학 대항전이라면 오죽할까. 서로의 응원가가 경기장이 떠나가라 울리고 박수소리와 함성 소리가 뒤섞여 웅웅대는 인파를 헤치고 키세는 경기장 구석으로 파고 들어갔다. 키세 료타가 이 대학이란 건 당연히 다 아는 사실이고 대학 내에서도 쉬쉬하면서도 다가오는 사람이 많은 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 오픈된 공간이면 오죽할까. 농구 경기 정도는 맘 편하게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카사마츠가 레귤러고.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전에 카사마츠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아 키세는 손을 붕붕 흔들며, 선배 여기에요!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난리가 날테니 키세는 근질근질한 입을 꽉 다물고 손도 등 뒤에 딱 붙여 넣어뒀다.
오랜만에 보는 경기는 재밌었다. 한 때는 저기에 있었단 사실이 꿈만 같았다. 코트를 뛸 때마다 나는 마찰음, 공이 튕기는 소리, 우둘투둘하면서도 탄력있는 감촉, 손 끝에 묵직하게 감겨드는 패스, 백보드에 맞아 텅- 하고 울리는 그 진동, 네트를 통과하는 공기소리. 카사마츠와 하는 농구도 분명 즐거웠다. 그 사람의 기합 소리, 과열되어 있으면 진정시키고 풀 죽어 있으면 다시 일으킨다. 페이스를 제자리로 돌려주는 침착함을 키세는 분명히 좋아했다.
- 괜찮아, 2년만 있으면 너도 대학에 오면 되니까.
그 말에 이 사람이랑은 어쩌면 대학에 가서 농구를 계속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짜릿한 3점슛과 함께 경기종료를 알리는 4쿼터의 빨간 불이 켜졌다. 팀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카사마츠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키세는 외부인이었다. 뒤에는 여자 농구 경기도 남아 경기장 밖의 복도로 빠져 나오면 복도는 한산했다. 키세는 카사마츠가 락커룸으로 들어가고 회포를 풀고 문자를 확인할 때까지 몇 분이나 걸릴까 계산해 보았다. 당연히 회식도 하겠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들떴을 게 분명한 그 사람의 열기를 자신도 좀 나눠갖고 싶었다. 패배의식에 찌들어 있는 자신이라도 분명 같이 들뜰 테니까 그럼 조금쯤은 행복한 기분이 되겠지.
「선배 오늘 저랑 저녁 같이 먹어요! 제가 사드리겠슴다!>///<」
「회식.」
「저 앞으로는 빡빡해서 시간 없단 말임다ㅠ△ㅠ 꽃등심! 꽃등심!」
「안 넘어가.」
「저 벌써 탈의실 앞으로 가고 있어요! 선배 오늘 완전 멋있었슴다! 최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문자를 보내다 휴대전화에 시선을 두고 있던 탓인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으앗, 죄송함다."
키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 어깨를 세게 부딪혀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상대도 키가 꽤 큰 사람인가 보다. 부딪힌 왼쪽 어깨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면 선글라스의 까만 렌즈 너머로 어쩐지 익숙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아… 아오미넷치?"
"…키세 료타."
반 년만에 듣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아오미네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이 좀 커져 있었다.
"어, 어쩐 일임까? 학교 대항전인데, 아오미넷치네 학교는 다른 데잖아요?"
"너 내가 간 데가 어딘지 알고는 있었냐?"
빈정대는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지금 대화의 어디가 그렇게 비꼴 만한 포인트였는지 감을 잡지 못해 어버버버 거리고 있으면 아오미네는 칫, 하더니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연락 안 해?"
"네?"
그 말도 참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테이코 농구부는 전부 먼저 연락한 적이 없는 야박한 사람들이었다. 늘 먼저 연락하는 쪽은 키세로 그 문자도 씹히지나 않으면 다행. 아오미네가 먼저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문자를 보내지 않게 된 건 벌써 2년쯤은 됐을텐데 시기를 벗어난 말이 뜬금없어 키세는 뭐라 대답해야 될 지 감을 잡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그…그게 바빠서…?"
"테츠가 오랜만에 보자고 연락줬는데 넌 못 온다고 했다며."
"그, 그것도 좀 시간이…"
"만난 김에 밥이나 사라. 배고프다."
"아니 저기 아오미넷치 그게 말임다…"
키세의 대답은 듣지않고 덥썩 팔을 잡고 아오미네는 여전히 마이페이스로 키세를 질질 끌고 갔다.
"뭐야, 싫어?"
"저 선약이…"
"취소해."
깔끔하기도 하지. 선약이 있단 말에도 아랑곳 없이 키세를 끌고 가는데 눈 앞의 문이 벌컥 열렸다.
"키세 이 자식!"
"카사마츠 선배!"
투덜대며 탈의실 문을 열고 나온 얼굴은 키세에게 구원이었다. 기쁜 마음에 소리치면 카사마츠도 고개를 돌리다가 아오미네를 발견하곤 잠시 인상을 굳혔다.
"밥 사준대며 약속 있냐? 그럼 나는 회식 가고."
"아, 아님다! 선배 꼭 사드릴게요! 지금 아니면 절대 안돼요!!"
"안 오면 그냥 간다."
"가, 가겠슴다! 미안하지만 아오미넷치, 그러니까 나중에 봐요."
키세는 아오미네의 팔을 뿌리치고 홀로 걸어가는 카사마츠의 뒤를 쫓아갔다. 등 뒤가 오싹했지만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아오미네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빨리 떨쳐내고 싶은데도 붙잡혔던 팔에 억눌린 감각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키세는 자꾸만 팔을 털어냈다.
3.
"이번에 저 모델, 진짜 멋있지?"
"나 고등학교 때부터 팬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델이었어?"
"중학교 때! 작년까지 농구도 했었어."
"굉장하네."
여자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아오미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밖에 나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키세가 나온 광고가 어디에나 있었다. 정작 그 얼굴은 본 지가 한참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심심찮게 오던 문자는 끊기고 키세는 곧 잡지나 TV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아오미네가 기억하는 키세는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고 표정은 1분에 31가지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어색해하고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뿐이었다. 경기장에서 가끔 키세를 만나면 키세는 종종 끔찍하도록 무표정인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토오와 카이조가 붙어 마크를 하고 있을 때면 키세는 늘 그런 표정이었다. 말도 걸지 않고 농을 던져도 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 어떻게든 표정을 꺼내고 싶어 악착같이 들러붙고 떼어내고 짓눌렀다. 마지막 윈터컵도 그랬다.
"넌 안돼."
4쿼터가 1분 남았던 시점, 그렇게 얘기하면 키세는 울 것 같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러다가 웃었다. 허망한듯이 미소짓는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얼굴이어서 아오미네는 당황스러웠다.
"알고 있어요."
흘리듯이 한 말은 곧 삐걱대는 마찰음과 관중의 외침에 사라졌지만 아오미네의 기억 속에는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를 외치는 키세의 얼굴은 잠시 동요가 일긴 했지만 곧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인사도 하지 않고 수건을 뒤집어 쓴 채 약간 절뚝거리며 락커룸으로 나가는 키세를 보고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연락을 한 번 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를 차일피일 미루다 키세의 소식이 먼저 들어왔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어서 농구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모모이가 보여 준 잡지의 특집 인터뷰에 쓰여 있었다. 어차피 대학에 가게 되면 그만두고 모델에 전념하려고 생각했으니까요. 클로즈업 된 웃는 사진 위에 쓰여진 텍스트에 화가 치밀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따라잡겠다더니? 붙잡겠다더니 왜?
당장 전화해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곧 덜떨어진 짓이란 걸 알고 포기했다. 왜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갑자기 자신이 우스워졌다. 하루에도 열번씩 휴대전화를 붙잡고 몇 번이나 텍스트를 쓰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하면서도 결국 보내지 못했다. 키세가 먼저 연락하겠지.
그러나 졸업을 하고 입학식이 시작될 때까지도 키세에게 연락은 없었다. 그나마 자주 만나던 쿠로코에게 연락을 하면 쿠로코도 그러고보니… 라고 얘길 꺼냈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게 연락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지? 홧김에 던진 휴대전화가 박살 나 모모이한테 잔소리를 들으며 다시 사야만 했다. 한 번 신경쓰기 시작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키세와 연관되었다. 대학을 택한 것은 순전히 키세 때문이었다. 적어도 키세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면 연락의 끈이 닿아있을 것 같았다. 아무데나 화풀이를 해대면서도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답답한 지도 알 수 없었다.
심난한 상태 그대로 4월을 맞이하고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 거리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키세였다. 전에는 잡지모델로나 종종 나오던 키세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나온 것을 아오미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녀석은!"
아오미네가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던 키세와 가장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쿠로코가 만나자는 데도 키세가 거절했다는 사실은 아오미네의 불안감과 화를 증폭시키기엔 충분했다. 이대로 만약 키세가 영영 멀어져 버린다면? 1on1을 하자고 쓸데없이 들러붙지도 않고, 그 괴상한 별칭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오늘은 날이 좋아요 아오미넷치는 뭐함까?^▽^」 같은 쓸데없는 문자가 아침부터 날아와 그 소리에 잠에서 깨는 일도 없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다른 얘기를 하며 달라붙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붙임성 좋은 키세니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럼에도 역시 먼저 연락을 할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그 경기를 보러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차피 그 팀은 나중에 한 번 붙게 될 거라며 전력탐색이라도 하러 가자고 누가 제안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선발에 '카사마츠 유키오'란 이름이 눈에 띄었을 뿐. 카이조의 포인트 가드. 곧 죽어도 에이스는 키세라고 그랬었다. 키세는 자기 자신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믿고 있었다. 꽤나 의지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보러간 것 뿐이었는데.
예전처럼 반갑게 웃을 줄 알았는데 선글라스 너머에서 보인 얼굴은 당혹 그 자체였다. 눈을 굴리면서 변명을 하고 떼어내고 억지로 붙들면 곤혹스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굴이 그 녀석을 보자마자 웃었다. 예전에 아오미네에게 하던 그대로. 선배!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예전에 아오미네를 부르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키세는 갔다. 그대로.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녀석이 최우선순위로 삼는 건 내가 아니었었나?
당혹과 동시에 배신감과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었다. 발로 키세네 집 문을 뻥뻥 차대면 밤에 뭐하는 짓이냐며 이웃집이 항의했지만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면 상대도 험악한 기세에 눌렸는지 조용히 들어간다. 몇 번을 차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자식이랑 뭘하느라 아직까지 안 들어와?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모이에게 연락해 키세의 새 주소를 알아 여기에 온 지 네 시간쯤 지난 셈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머릿 속에서 카사마츠와 나란히 걸어가며 별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해대고 있을 키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전부. 그 목소리도, 얼굴도, 자리도. 그런데 왜?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렇게 변한 거지?
"선배 진짜 너무 멋졌슴다."
"알아."
"우에, 선배 그걸 인정해요?"
"술주정뱅이 새끼는 그냥 입 닥쳐. 차라리 이럴 거면 우리 집에 가는 게 낫지."
"그러고 싶지만 내일은 아침부터 촬영임다. 헤헤, 저도 선배네 집에 가서 자고 싶슴다!"
"시끄러워!"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와 징징대며 늘어지는 목소리는 아오미네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카사마츠에게 꼭 달라붙어 헤실헤실 웃는 키세의 얼굴을 보니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아오미네는 얼굴을 굳히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놔."
손바닥을 내밀면 카사마츠가 얼굴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구만."
"그럼 내놓으시죠, 선배."
"뭘?"
턱으로 가리키면 카사마츠도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키세를 흔들어 깨웠다. 어이, 키세. 이 새끼야 당장 안 일어나? 상황파악 못하고 발로 차대면 그제서야 인상을 찡그리더니 키세가 눈을 비비며 제 발로 섰다.
"선배, 진짜 아프다니까요? 사랑의 매가 너무 쎄요."
"됐고."
곁눈질로 아오미네를 흘깃거리면 키세가 멍청한 표정으로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서야 조금 제대로 뜨여진 눈이 아오미네를 향해 아오미네는 조금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선배, 다음은 내가 할 테니 이제 집에 들어가시죠."
"너…."
"무슨 할 말이라도?"
"키세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우린 중학교 동창이라구요? 설마 내가 얠 패기라도 할까."
"할 말은 많지만 내가 널 보면 하고 싶은 말 딱 하나만 하고 간다."
"…?"
"개자식."
난데없는 욕설에 아오미네가 당황한 사이 카사마츠는 키세에게 시선을 돌리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때리면 당장 전화하라든가, 도망치라든가, 112에 신고라도 하라든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잠정적 범죄자 취급을 해대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고 키세는 이 쪽 저 쪽 눈치를 살피면서 네네, 잘도 대답하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겠슴다, 선배! 가면서도 걱정되는지 힐끔힐끔 뒤를 쳐다보는 카사마츠가 몹시도 거슬렸지만 아오미네는 참고 봤다. 일단은 키세가 먼저였다.
"어쩐 일임까, 아오미넷치."
우물쭈물하면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키세였다.
"너, 일부러 나 피하냐?"
"별로 그런 건 아님다. 그냥 어쩌다보니…."
"농구는 대학 가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고? 인터뷰 잘 봤다."
"그거 꽤 오래 전 인터뷰네요."
"날 동경해서 농구를 시작했다며? 근데 왜 그만 둬?"
두서없이 나간 말은 유치하지만 아오미네가 묻고 싶은 것들이었다. 왜? 어째서? 그러나 그 말에 키세의 표정이 순간 훅 가라앉았다. 낮은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그만 뒀어요, 동경하는 거."
"따라잡겠다더니?"
"그것도 그만 뒀어요."
"그렇게 근성 없는 녀석이었냐."
"안될 놈은 안된다잖아요. 그냥 안되는 것이었나 보죠. 이 쪽이 더 적성에 잘 맞는거 같고."
"이 쪽?"
"모델 일 말임다. 아오미넷치도 봤잖아요? 최근에 저는 바쁘거든요. 할 말 없으면 가주세요."
아오미네를 밀치고 앞으로 가려는 키세를 붙잡으면 키세가 또 왜요, 라고 여전히 뒤돌아 본 채 힘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진짜 그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냐? 너랑 그렇게 안 어울리는 표정만 짓는데?"
"사람들은 다 칭찬하던 걸요. 그럼 된 거 아님까?"
"때려쳐."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키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더니 아오미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오미넷치."
그렇게 부르는 시선과 목소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아오미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키세가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다시 아오미네를 바라본다.
"아오미넷치는 저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죠."
"뭐?"
"저는 매일 생각했었어요. 아오미넷치는 농구할 때 웃는 얼굴이 제일 좋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렇게 되돌릴 수 있을까. 모못치도, 쿠로콧치도 걱정했죠.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슴다. 근데 아오미넷치 말이 맞았어요."
뜬금없는 말에 아오미네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키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넌 안돼."
심호흡을 하며 키세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었다.
"아오미넷치는 절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귀찮게 따라붙기나 하고 그래봤자 계속 졌으면서. 속으로는 시시껄렁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 그런 적은 한 번도… 그렇지만 아오미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깊게 가라앉은 키세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빛났다. 또, 그 표정이었다. 끔찍한 무표정.
"그래서 그냥 그만둔 것 뿐이에요. 근성 없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죠, 뭐. 아, 저 진짜 이제 집에 가서 자야돼요. 내일 새벽부터 이동해야 됨다. 아오미넷치도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붙잡은 팔을 빼내고 키세는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시 붙잡을 기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정말로 저게 자신이 알던 키세 료타가 맞을까? 키세 료타가 자신에게 농구를 하자며 조르던 시절이 있긴 했던걸까? 모든 건 꿈 같은거 아니었을까? 낯선 풍경을 보듯이 키세를 바라보던 아오미네는 퍼뜩 키세가 부른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오미넷치."
"…?"
"좋아했었어요. 그것도 그만뒀지만."
고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평이한 말투로 말한 키세가 문을 열고, 문이 닫히고, 사라졌다. 몇 번을 멍청하니 서서 그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고서야 겨우 키세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좋아해? 키세 료타가 나를? 아니. 아니었다. 명백한 과거형의 문장. 키세는 그만뒀다고 얘기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일순 밀려 온 공허에 아오미네는 어떻게 해야 될 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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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흑] 네가 보는 세계
사실 쿠로코까진 나올 생각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쿠로바스 처음 볼 때 쓰고 싶은 게 이거였습니다. 미도리마는 감각이라고 해도 어쨌든 3점슛은 노력으로 이뤄진 감이고
키세는 일단 센스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농구에 대해서 시각도 다르고 세계도 다르겠죠. 아오미네를 동경이라고 한다면 미도리마는 존경? 같은 느낌으로. 아니 뭐 이건 나중에 한 번 쓰게 될 지도 모르는데 녹황 얘기일 거 같고.
하여튼 미도리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미도리마의 세계를 보는 키세가 보고 싶었습니다. 겨우 쓰고 싶은 걸 쓰게 돼서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금 선선해진 부드러운 미풍, 낡은 체육관의 페인트가 갈라진 우둘투둘한 벽, 융이 결을 만드는 부드러운 시트, 가죽가방 손잡이의 미세한 균열, 맞닿은 손의 체온, 희미하게 들뜬 열기. 코트 위에서 공을 잡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테이핑 되어 있는 너의 손가락은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걸까.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너의 그 손가락이라도 맞닿아 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미도리마의 손가락은 늘 테이핑 되어 있다. 손톱은 언제나 짧게 가다듬어져 있고 농구공을 잡을 때의 그 손가락은 한치의 결점도 없이 매끄럽다. 그 정도로 정밀한 감각을 유지하려면 당연하지만 키세는 늘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테이핑, 입니까?"
쿠로코가 기가 막힌 듯 밀크쉐이크를 빨대로 빨아들이며 물었다.
"그렇슴다. 미도리맛치는 코트 위의 감각 대신에 평소에 감각을 전부 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미도리맛치가 보는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늘 그렇듯이 키세가 교복을 입고 불쑥 나타났다 싶더니 자랑스럽게 짜잔, 하고 보여준 열손가락은 확실히 꽁꽁 감겨져 있었다.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키세답게 테이프는 조금 엉망진창으로 감겨져 있었지만.
"그래서 어때요?"
"불편함다."
딱 잘라 말한 대답에 쿠로코는 먹고 있던 밀크쉐이크를 조금, 뱉을뻔했다. 그런 걸 도대체 왜? 라고 묻고 싶지만 키세의 의중도 대충 짐작이 가니 할 말이 없었다. 중학교 때의 키세도 그런 말을 했었다. 미도리맛치 안 불편합니까? 미도리마는 전혀,라고 대답했지만 그 때부터 키세는 어딘가 눈을 반짝이며 미도리마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겨우 실행에 옮겨진 거겠지. 남의 연애사정에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자격도 없지만 쿠로코는 헤어지기 전 키세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키세 군."
"네? 왜요, 쿠로콧치?"
"그렇게 한다고 미도리마의 맘을 알 수 있는건 아니에요."
좀 더 돌려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복잡한 건 쿠로코는 할 수 없다. 해가 길어져 이제야 겨우 노을이 지는 길목에서 쿠로코는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키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이 얼마나 불쌍한 짝사랑인지.
키세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모든 사람은 아니고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한다. 숨길 줄도 모른다. 문자도, 전화도 끊이지 않고 만나면 늘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달라붙는다. 조금 불편한가, 생각도 해보지만 누군가 전력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그걸 전력으로 표현할 일도 없으니 의외로 이건 기적이 아닐까 쿠로코는 가끔 생각해본다. 키세에게 쿠로코는 독특한 팀메이트, 아오미네는 동경의 사람, 무라사키바라는 신기하고 - 아마 여러가지 의미로? - 아카시는 존경하는 캡틴, 최근엔 카가미도 그 대열에 올랐다. 아마 키세 안에서는 농구 잘하는, 괜찮은 쿠로코의 친구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도리마는?
-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키세의 문제점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아요 한 마디면 몽땅 해결되니 미도리마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이를 키세 본인도 모른다는 점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쿠로코는 양치질을 하다 문득 어제 키세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키세는 미도리마를 생각할 때면 늘 그렇게 웃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언제나 하이텐션인 키세라도 불쌍해져서 쿠로코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To. 미도리마 신타로.
키세군은 역시 모르겠지. 석양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미소는 피는 순간 져버릴 것 같은,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처연하다는 걸.
쿠로코가 키세를 동정하고 있거나 말거나 전해지는 일도 없는 마음을 끌어안고 짝사랑 2년 째, 키세 료타, 카이조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10월 어느 날의 아침은 특별한 전조도 없이 평범하게 밝았다.
솔직히 테이핑은 불편하다. 처음의 답답함은 곧 익숙해졌고 풀고 나서 공을 잡을 때의 감각이 조금 민감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손가락이 보호가 되는걸까? 정말로 보호하고 싶으면 벙어리 장갑이라도 끼고 다녀야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문득 한여름에도 벙어리 장갑을 끼고 다니는 미도리마를 상상하곤 웃어버렸다. 아아, 확실히 미도리마라면 한여름에 럭키아이템으로 벙어리장갑이 나온다고 해도 끼고 다닐 것 같지만 음. 보기엔 좋지 않지. 그리고 그랬으면 키세는 정말 미도리마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테고 그러면 이런 짓, 애초에 하지 않았을까.
"그럼 좋았을텐데."
부활동이 끝나고 연습한답시고 늦게까지 남아있느라 이미 텅 빈 탈의실에 쓸쓸한 목소리만 울린다. 미도리마를 감싸는 공기는 늘 이렇게 정적이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 너무 진지해서 탈이지만 - 먼저 입을 열지 않고서야 말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남자에게 왜 반했을까. 키세는 늘 그게 의문이었다. 이왕이면 아오미넷치나 쿠로콧치 쪽이 훨씬 나았어요! 아오미넷치는 그 땐 1on1 정도는 해줬고 쿠로콧치는 귀여우니까! 혼자 속으로 툴툴대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샌가, 어디가 좋아서인지도 모르게 좋아해버렸다. 신경쓰이고,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골대를 응시하다 이윽고 공을 던지는 가벼운 손목의 스냅,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처음엔 그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미도리마는 집에서도 저러고 있는걸까? 농구공을 잡을 때 빼고는 늘상 테이핑을 하고 있는걸까? 그러면 모르는 걸까. 조금 선선해진 부드러운 미풍, 낡은 체육관의 페인트가 갈라진 우둘투둘한 벽, 융이 결을 만드는 부드러운 시트, 늘 들고 다니는 학교 가죽가방 손잡이의 미세한 균열, 너에게 슬쩍 뻗은 손가락 끝으로 내가 느끼는 손의 체온,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들떠버리는 나의 희미한 열기. 그런 건 전부 모르니까, 아마 닿지 않으니까 너는 모르는 거겠지.
그러니까 키세도 손가락을 감아두는 것 뿐이었다. 중학 시절은 꿈이었던 것처럼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예전의 팀원들을 그리워 하지도 않고 서로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팀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오히려 그 쪽에 가서 마음에 맞는, 무려 리어카로 모셔다주는 친구를 만났으니 키세 따윈 맘에도 없겠지. 손가락 끝으로 그런 공기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쿠로코에게는 말했지만 사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미도리마가 둔해지면 키세 본인도 무뎌지면 그만이었다. 예민한 손가락 끝의 감각을 온통 묶어버려서 그런 건 잊어버리고 싶었다.
"겨우 다 됐네."
미도리마처럼 예쁘게 감기진 않았지만 테이프로 꽁꽁 묶인 열 손가락을 바라본다. 피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묶어버려 옥죄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손 끝으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싫었다. 기분전환으로 볼을 두어번 치고 키세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이제 집에 가서 숙제도 하고 다음주 스케쥴 확인도 좀 하고 그리고 또―
해야할 일을 하나씩 손으로 꼽으며 락커룸을 나서 걸어가던 키세는 그러나 시야에 잡힌 인영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미, 미도리맛치?"
아무리 눈을 부비고 깜박여봐도 눈 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미도리마였다. 어느 새 해도 져 캄캄한데 미도리마는 언제부터 있었는데 남의 학교에서 버젓이 다른 교복을 입고 락커룸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게 사실이었군."
"에?"
"'카이조의 키세가 슈토쿠의 미도리마를 따라잡으려고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라는 소문."
"그런거 아님다. 그 전에 이게 '이상한 짓'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에요?"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그런다고 3점슛 확률이 올라갈 일은 없는 거다."
"너무해요, 미도리맛치! 아무리 미도리맛치보다 못해도 저는 올라운더라구요! 슈팅도 자신있거든요?"
"그래봤자 넌 안되는 거다."
물론 3점슛을 쏘기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지만 딱 잘라서 단호하게 말하는 미도리마의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 뭐가요? 뭐가 안되는 건데요? 내가 미도리맛치를 잊는 거? 포기하는 거? 다시 원래대로의 키세 료타로 돌아가는 거?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안돼요?
무언가 울컥-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눌러참고 간신히 키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미도리맛치가 신경 쓸 바 아님다. 그나저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미도리맛치 집에 안 갑니까? 왜 남의 학교에?"
"네가 늦게 나온 탓이다. 이렇게 늦을 줄은 나도 몰랐어. 매일 이 시간까지 연습하는 건가?"
"매일은 아닌데, 거의? '저 쪽'의 스케쥴도 있어서 못하는 만큼 해야되니까요."
"성실하네."
"전 아오미넷치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미도리맛치 다른 용건 있어서 온 거 아닙니까?"
대화를 하며 학교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미도리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걷던 키세는 학교 밖으로 빠져나오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미도리마가 용건도 없이 남의 학교를 올 사람이 아닌데?
"너 때문이라고 얘기한 거다."
"왜요? 손 때문이라면 그냥 문자만 보내는 게 낫잖아요? 보내도 답신도 안하는 미도리맛치지만."
아니면 '죽어' 라든가.
오지 않는 답신을 기다리기 싫어 미도리마에게 안부문자를 보내지 않은 지도 꽤 된 것 같다. 답신을 받아봤자 기껏해야 '죽어'라든가 냉정한 대답뿐인데 거기에 목매 열심히 저장함에 옮겨둔 적도 있더랬지. 그래, 집에 가면 숙제 하고 스케쥴 체크하고 그것부터 지워버리자. 그런 생각을 하며 키세가 터벅터벅 걷고 있으려면 옆에서 미도리마도 말 없이 따라오다가 갑자기 또 툭 내뱉었다.
"쓸데없는 짓인 거다."
"뭐가요?"
"그 테이핑. 네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니 나까지 소문에 휩쓸리게 된다. 그런 건 싫어."
"별로 미도리맛치한테 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특허낸 것도 아니고."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다. 당장 풀어."
"저도 싫슴다. 계속 하고 다닐 거에요."
"풀라고."
"싫슴다."
"그런 걸 카피한다고 농구실력이 늘진 않는 거다. 그러니까 하지 마."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다니까요!!!!"
억지로 키세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 끝의 테이프를 뜯어내려는 미도리마의 팔을 키세는 쳐내면서 소리쳤다. 키세의 격렬한 반응에 미도리마도 놀랐는지 잠깐 멍하니 키세를 응시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까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걸 카피한다고…"
"카피라고 하지 마!!!! 쓸데없다고도 하지 마!!!!!"
소리 친 키세 본인도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악을 지르듯이 내뱉는 키세를 미도리마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끔벅끔벅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미도리맛치는 아무것도 몰라요! 카피가 아냐! 머리만 좋지 둔하고, 맨날 그렇게 손을 다 묶어두니까 아무것도 안 닿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이제 그만 할 거에요! 미도리맛치한테 문자도 안 보낼거고, 연락도 안 할 거고, 구경도 안 가고, 그럼 되잖아요! 이런 것 정도는 하게 해줘요!! 어차피 안될건데 나도 좀 잊어보게!!! 둔해서, 눈치라곤 꽝이니까!!! 나도 그것 좀 닮아보자구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한적한 공원 근처라고 해도 밤중에 남고생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 누구든지 흘끔흘끔 쳐다보기 마련이다. 미도리마는 그게 몹시 신경 쓰였는지 주변 눈치를 보는 듯 했지만 키세는 그것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데도 손가락으로 훔치면 테이핑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 눈물은 차가울까 따뜻할까, 젖어가고 있는 걸까, 얼굴은 뜨거울까. 멍청한 미도리맛치. 바보같은 미도리맛치.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잖아요, 이거.
"저… 키세?"
미도리마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주저앉은 키세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키세는 맹렬하게 뿌리쳤다. 늘 그렇듯 테이핑 된 미도리마의 손에 닿는 감각을 키세는 이제도 안다. 아무리 닿으려고 해도 닿지 않는다. 닿지도 않을 진심은 필요 없었다.
"가요. 늦었고, 내일부턴 안 할테니까, 가요, 미도리맛치."
"어이…"
"소리질러서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탓은 아니에요. 다 내 잘못이죠.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진짜였어요. 전 진 거에요. 미도리맛치를 못 이겨요. 안되는 게 당연하죠. 미도리맛치가 늘 말하는 것처럼 이런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에요. 이제 그만둘래요, 진짜 전부 다."
"키세."
"미안해요.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다시는 이런 짓 안할게요. 그냥, 궁금했었어요. 매일같이 좋다고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미도리맛치 옆에 있으면 들떠서 못살겠는데, 쿠로콧치는 티 좀 그만 내라고 불쌍한 듯이 쳐다보는데 정말 미도리맛치는 눈치를 못챈걸까, 모르는 척 하는걸까 그래서 해봤어요. 진짜로 이거 하고 있으면 뭔가 감각이 둔하네요. 왠지 쉽게 접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키세 료타."
"지금 그렇게 부르지 마요. 좀만 시간을 줘요. 나 그러면 완벽하게 그냥 중학 동창쯤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면, 그 정도도 안됨까?"
"사람 말하는데 중간에 말 자르지 마!"
고개를 땅바닥에 쳐박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키세는 갑작스런 미도리마의 일갈에 고개를 들었다. 미도리마의 화가 났 듯 찡그린 얼굴에 키세는 그제서야 자기가 할 말 못 할 말 몽땅 털어내버렸단 걸 깨닫고는 눈물을 훔치며 사과했다.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화났슴까?"
"화 안 났어."
"미안해요. 그냥, 그냥,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
"말 끝까지 들어. 화 안 났다고 얘기하는거다, 나는."
"그, 그래도 미도리맛치 화 난 얼굴이잖아요?"
멍청하니 그렇게 되물으면 미도리마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멋대로 시작하고 멋대로 끝내니까 안되는 거다, 너는."
"네?"
"확실히, 네가 말할 때까진 하나도 몰랐어."
"뭐가요?"
"그러니까 그… 먼저 반했다… 든가, 들떴다든…가…"
차마 낯 부끄러워 말할 수가 없는지 더듬더듬 얘기를 꺼내는 목소리에 키세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쳤지. 미쳤구나, 키세 료타!! 그냥 혼자 시간 죽이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잊혀질 걸 왜 말을 꺼내서! 입을 열어서!!! 이 가벼운 주둥아리를 찰싹찰싹 치고 싶은 것을 느끼며 키세는 입을 꽉 다물었다. 키세가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면 미도리마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테이프는 풀어."
"왜 얘기가 또 그 쪽으로 갑니까. 그냥 내버려 달라구요."
"정말로 테이핑을 두 명이나 해버리면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단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네?"
헛걸 들었나 싶어 키세가 다시 고개를 올려다보면 미도리마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 결국 키세의 손을 잡고 같이 쭈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테이프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야 어디까지나 신중한 슛을 위해서라지만 너는 필요도 없고… 거슬리는 거다."
"…?"
"테이프 말야. 손, 잡아도 느낌도 안나고 무엇보다 너는 안 어울려. 얼굴도 아니고 손가락도 너는 예쁘니까…."
"미도리맛치, 뭐 잘못 먹었슴까? 열 나나? 괜찮아요?"
호들갑을 떨며 이마에 손을 대보는 키세의 행동에 미도리마가 다시 한 번 푹 한숨을 쉬더니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네가 좋다고 말하는 거다."
그 말에 키세는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다가 미도리마의 이마로 가 있던 손을 자기 머리에 대보고는 중얼 거렸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왜 환청이…."
"환청 아냐.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꿈도 아니다. 똑바로 들었으면 한 번에 알아들어야 되는 거다. 어디까지 모자른 짓만 할건가, 키세."
그제서야 간신히 키세는 미도리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뚝뚝 쏟아져 내린다. 당황해 허둥지둥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는 미도리마의 손을 붙잡고 키세는 물었다.
"정말로 꿈 아닙니까?"
"진짜다."
"미도리맛치가 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냐."
"내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아냐. 아니니까 그만 울어."
키세에게 붙잡힌 한 쪽 손 대신 다른 쪽 손으로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꺼낸 미도리마가 눈물범벅인 키세의 얼굴을 닦아주는데도 이상하게 아까보다 눈물이 더 펑펑 쏟아져내렸다. 테이프를 푼 손가락으로 떨어진 눈물은 따뜻했고 테이핑 된 미도리마의 손가락도 어쩐지 따뜻한 것 같았다.
"키세 군, 그래서 이제 테이핑은 안하는 거에요?"
"그렇슴다! 역시 체질에 안 맞아요!"
"미도리마 군의 세계는 어떻던가요?"
"조금 불편하지만 나름대로 재밌었슴다. 다시는 안 할 거지만."
어느 날과 같이 또 짜잔, 하고 나타난 키세의 열 손가락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고 흰 손가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쿠로코는 안도하고 밀크쉐이크를 들이켰다.
"저도 이해는 해요."
"뭘 말입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기분요."
"어라, 쿠로콧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겁니까?"
"있어요."
너무 단숨에 나온 말에 키세가 잠시 이해를 못했는지 버벅거리다가 으에에에에에?! 하는 괴성을 내뱉었다. 시끄러워요, 키세 군. 주변에 민폐에요. 죄송함다, 쿠로콧치. 그렇지만 누구요? 몰랐는데! 쿠로콧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나한테 얘기도 안하고 너무해요!
쭈욱 빨아먹던 밀크쉐이크가 어느 새 사라졌는지 빈 컵의 공기만이 요란하게 빨리는 소리에 쿠로코는 물고 있던 빨대를 뺐다.
"그 사람의 세계를 저는 너무 잘 이해했어요."
"엣, 그럼 사귀게 된 거?"
키세의 말에 쿠로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뇨.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했거든요. 그 사람의 시야는 온통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것 뿐이었으니까."
"그럼? 쿠로콧치는 그냥 포기한 겁니까?"
"별 수 있겠어요. 그걸 알고나면 할 수 있는 건 그냥 행복하도록 밀어주는 수밖에 없죠."
"쿠로콧치, 굉장한 로맨티스트네요."
"키세 군이 행복해졌으니까 됐어요. 여기서 헤어질게요. 잘 가요, 키세 군."
쿠로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나보다. 팔을 붕붕 흔드는 키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쿠로코는 발걸음을 옮겼다.
키세의 세계는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보였다. 키세를 보고 있으면 키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 지도 보였고 버릇처럼 말하는 '좋아한다'는 단어가 한 사람에게만 특별하단 것도 깨달았다. 쿠로코가 파고들 틈도 없이 키세의 세계는 온통 미도리마를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키세가 행복해졌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그 날의 문자는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쿠로코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미도리마에게 그 날 자신이 문자를 보내지 않았으면, 키세가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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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 하교길
첫 쿠로바스 연성? 말투 때문에 감이 잡히질 않아서 아직도 어색한듯...
아직까지 이미지가 확실치 않아서 모처에서 리퀘를 받았었는데 미도리마 말꼬리 진짜 으아아아아아아!!!
키세는 귀엽고 미도리마는 안경인데 왜 안 흥하는 거죠, 녹황? 이해할 수 없어ㅠ 미도리마 이 고자야ㅠㅠㅠ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 미 도 리 맛 치 ?
슬쩍 눈동자를 위로 돌려 바라본 키세의 입술이 조그맣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미도리마를 불러댔지만 미도리마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귀찮은 거다, 이 녀석은. 속으로 중얼거려봤자 타인의 태도에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기분대로 휘둘러야 만족하는 녀석이기에 포기하진 않겠지만 소중한 독서시간을 방해받는 것은 질색이다. 몇 번을 불러도 미동이 없는 미도리마의 태도에 키세는 심심한 지 눈 앞의 잡지를 몇 장 슬슬 넘겨보다가 이번에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노트와 펜을 꺼낸다.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몹시도 신경쓰여 미도리마는 전혀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도서실에서 자꾸 꿈지럭거리면 민폐인 것이다!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다시 한 번 키세를 슬쩍 바라보면 키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면서 노트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든 키세와 눈이 마주쳐 황급히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도 키세에겐 딱 걸린 모양인지 키세가 환하게 웃고는 노트를 쭉 찢어 접더니 미도리마에게 접어 던진다.
「미도리맛치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요>///<」
쪽지와 키세의 싱글생글한 얼굴을 번갈아 보다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책으로 내리면 키세는 또 꼬리내린 강아지 표정. 시무룩한 얼굴에 마음이 흔들리긴 하지만 이젠 오기가 생겨 나갈 수가 없다. 어떻게든 다 읽고 도서실을 나가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책에 열중하고 있으려면 키세는 잡지를 책장에 꽂아놓고 다른 책을 들고 온다. 이번에는 소설. 제법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키세가 볼 리는 만무하고 그냥 제목이 끌리는 대로 가져왔을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표지 넘기고 목차 넘기고 열 장 읽더니 키세는 책상에 푹 퍼져버린다. 온 몸으로 심심해요, 미도리맛치! 라고 외치는 것 같지만 애초에 심심하면 오질 말았어야지!
톡톡, 톡톡, 긴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을 그리며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긴 다리가 책상 밑에서 버둥대며 자꾸 미도리마의 무릎에 닿는다.
"가만히 있어, 키세."
한 번도 열리지 않던 미도리마의 입이 열리자 키세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퍽 기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책상에 엎어져 있던 상체를 들고 키세는 소리없이 왁왁거리며 함박웃음을 짓고 또 소리없이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 하고 외쳐댄다. 외면하기에는 키세가 너무 하이텐션이라 미도리마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혹시 몰라 책장 사이에 작은 책갈피를 껴두었다.
도서관에 와서 인사할 때를 빼고 키세가 맞은 편에 앉아 온갖 짓을 할 때까지 제대로 고개 한 번 들지 않던 미도리마가 고개를 들고 똑바로 눈을 마주치는 게 기뻤는지 키세가 상체를 앞으로 쭉 빼고는 헤헤, 하고 시덥잖은 웃음을 흘리며 묻는다.
"미도리맛치 무슨 책 읽슴까?"
"미스테리."
"누구?"
"미야베 미유키."
"재밌슴까?"
"재밌어."
"나랑 노는 것보다 더?"
키세의 당돌한 질문에 미도리마는 순간 허, 헛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녀석이랑 말을 섞느니 차라리 신경 쓰이더라도 계속 무시하고 책이나 읽을 것을.
"당연한 것이다."
딱 잘라내는 말에 키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미도리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책 읽을거니까 너도 조용히 있든가 할 일 없으면 집에 가든가."
그렇게 단칼에 잘라내고 미도리마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세가 다시 의자에 털썩 앉는 소리를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기면 스토리는 제법 중요한 국면으로 다다르고 있어 미도리마는 곧 키세는 잊어버리고 겨우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책에 집중했다는 건 착각이었던 것 같다.
한 부분 고비를 넘기고 주인공이 약간 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였을까 문득 시선 끝에 키세의 자리가 공석이라 정말로 집에 갔나? 생각하고 있으려면 저 끝에서 여자애들의 꺅꺅대는 소리와 함께 키세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소곤대는 소리였지만 조용한 도서관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헤에, 그래서 키세 군은 농구도 하고 모델일도 하는 거에요?"
"굉장하다. 힘들지 않아요?"
"별로? 농구는 처음 해보는데 재밌슴다."
"키세 군 손 한 번만 봐도 돼요? 손이 되게 큰 거 같아서요."
"상관없슴다. 이케요?"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있으면 저 쪽 책장 끝에서 키세가 몇몇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농구부니까 당연하지만, 키도 크면 손도 크기 마련이다. 게다가 상대가 여학생이라면 당연히 맞대 볼 필요도 없고 단지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는 구실임을 뻔히 아는지 모르는지 키세는 거리낌없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주변 여학생들이 순간 조그맣게 꺅꺅거렸지만 불행히도 이를 제지할 새학기에 우중충하게 도서실에 쳐박혀 있는 사람은 미도리마 뿐이었다. 까짓거 그냥 무시하자 싶었지만 여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키세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미도리마의 귓가를 울렸고 아무리 책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활자가 키세의 목소리와 함께 들떠 춤추고 있었다. 어쩐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다 안경을 밀어올리고 키세를 보면 키세는 놀랍게도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도리마와 눈이 마주치자 키세가 조그맣게 혀를 쏙 내밀었다 넣고는 천연덕스럽게 여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무슨 얘길 하는지 여학생들과 고개를 맞대곤 소곤대다, 웃고, 다시 한 번 미도리마를 보면서 혀를 내밀어 메롱.
저, 녀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자가 드륵 밀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키세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오는 미도리마의 얼굴에 눈만 껌벅거린다.
"키세 료타."
"왜, 왜요… 미도리맛…치…?"
지은 죄가 있으니 키세도 반쯤 겁먹고 혀를 길게 빼고 귀여운 척 뒷머리를 긁으며 웃지만 여학생들이라면 몰라도 미도리마에게 당연히 그런 게 통할 리가 없다. 주변에서 떠들던 여학생들도 갑작스런 미도리마의 등장에 입을 꾹 다물고 심상찮은 기운을 눈치챘는지 뒤로 스물스물 물러나더니 어느 새 쏙 빠지곤 도서실 밖으로 후다닥 달아난다. 사서를 빼고는 드디어 조용해진 도서관이었지만 어차피 키세가 있으면 미도리마가 더 이상 책에 집중하지 못할 것은 뻔했다. 이제 책은 100페이지도 안 남았지만 미도리마는 키세만 없었다면 적어도 지금쯤 다 읽고 깔끔한 마음으로 집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미도리맛치…?"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을 꾹꾹 누르며 빤히 바라보는 키세에게 미도리마는 최후의 추방령을 내렸다.
"당장, 도서실에서 짐 싸서 나가."
"엣? 자, 잠깐만요? 너무함다, 미도리맛치!"
"시끄러. 네가 있으면 정신산만해서 도저히 집중이 안되는 거다. 할 일 없으면 그냥 집에 가, 노닥거리지 말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미도리마가 친절하게 책상 위에 놓여있던 키세의 노트와 필통도 전부 가방에 쓸어넣고 건네주면 키세는 울멍울멍한 눈으로 너무해요, 너무해요, 미도리맛치! 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런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도리마에겐 통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고개를 든 사서에게 눈인사를 하고 미도리마는 문을 열고 키세를 밖으로 쫓아낸 다음 문을 도서실의 미닫이문을 닫아버렸다.
도서실의 들뜬 공기가 겨우 고요하게 가라앉았지만 미도리마의 마음은 영 가라앉질 않았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고 주인공이 범인을 쫓아 긴박한 순간임에도 전혀 그 페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결국 오늘 안에 다 읽고 가려던 책을 대여하고 문을 열고 밖에 나오면 순간 미도리마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앗, 아파요, 미도리맛치!"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키세가 예기치 못하게 미도리마의 발에 차인 허리를 짚으며 울상이다.
"아직 안 가고 있었나?"
"안가요!"
"왜?"
"그야 오늘은 미도리맛치랑 같이 가고 싶었으니까요!"
"왜?"
"그야…!"
"그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 키세의 말문이 갑자기 닫힌다. 그야… 그거야, 그… 그러니까….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키세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키세가 입을 뻐끔거리다 눈을 꾹 감고 소리쳤다.
"어, 어쨌든 오늘은 미도리맛치랑 같이 집에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슴다! 그러니까 같이 가요!"
양 손으로 미도리마의 팔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가는 키세의 겁 먹은 얼굴에 미도리마는 갑자기 풋-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손 놔."
"싫어요!"
"불편해."
"놓으면 그냥 갈거 잖아요!"
"안 가. 어차피 가는 방향은 같으니까 같이 가도록 하지."
괜시리 큼큼거리며 미도리마가 입을 열면 땅바닥만 보고 가던 키세가 팟- 하고 얼굴을 든다. 그 갑작스런 반응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미도리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이스크림 사줄게."
거기까지 말하자 이제는 정말 키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조금 풀 죽어 있던 얼굴이 다시 완벽하게 살아나자 아까부터 미묘하게 술렁이던 가슴이 겨우 좀 가라앉았다. 미도리마는 무의식적으로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들떠서 왕왕거리는 키세를 보고 생각했다. 우울하거나 시무룩한 얼굴은 키세 료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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