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일이 바쁜 가운데 위화감을 느껴 무나카타가 시선을 돌리면 한 자리만이 공석이다. 점심시간이라 텅텅 비었던 사무실이 가득 찼는데도 점심시간에도 느긋하게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자판을 두들기던 뒷모습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다. 5분, 10분, 30분, 1시간. 외근표에 쓰여진 이름만 주인을 닮아 거칠게 뭉개지는 글씨체로 덩그러니 써져있고 텅 빈 자리의 주인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곰곰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도 잡히는 게 없다. 중앙으로 갔던 아와시마조차 무나카타의 예상보다 꽤 늦은 시간에 돌아오면 곧바로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실종된 마피아의 무기창고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수색 중이고 물류상자들 곳곳에 다량의 총기 및 폭발물이 숨겨져 있어 전부 회수하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아와시마 군의 유능함 덕분일까."
"아뇨. 이 부분은 후시미 사루히코가 발견, 먼저 수색하고 있던 호무라를 제압하고 확보한 뒤 연락이 왔습니다."
"후시미 군이?"
몇 남지 않은 퍼즐 조각을 끼워맞추던 무나카타의 손이 멈추고 한 쪽 눈이 의아하게 들려올라가지만 아와시마도 이유는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도 어차피 몇 단계를 건너 뛴 보고를 들었겠지. 아와시마라면 당연히 그 다음 어떻게 발견했는지 정보의 근원을 물을 것이고 후시미가 그것을 아주 곤혹스러워 할 거란 상상정도는 무나카타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정보 수집 능력과 일처리 부분은 분명 셉터4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테지만 그는 너무 비밀이 많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억지로 캐낸다면 대답하는 대신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 그 모든 정보들을 제 머릿 속에만 둘 것이다. 무나카타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정보들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비용과 노력 전부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니 건드리지 않을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후시미 군은?"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는 타입이라 후시미가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대부분은 명확하게 성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이 끝났으면 지금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왔으려나 싶어 블라인드가 내려진 바깥을 쳐다보면 아와시마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따로 연락을 할까요?"
"…아뇨. 결과가 있다면 정보의 출처는 의미가 없겠죠. 들어가세요."
"창고의 일이 전부 정리가 된다면 결과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짧게 목례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나카타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가 손에 들린 퍼즐조각을 다시 끼워맞췄다.
몇 천, 몇 만 피스의 퍼즐이라도 전부 그러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조각은 너무 많다. 애초에 전체의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몇 장의 그림을 겹쳐 이어지는 구석이라곤 없이 부자연스럽게 뒤섞어버리면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이 나올까.
무나카타는 생각해본다. 쳐지고 길게 찢어진 눈매, 항시 가볍게 찌푸려진 미간, 제멋대로 길어 거친 머리카락, 희고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 크지만 얇은 손, 갈비뼈가 드러나는 마른 상체 같은 것들. 머리카락을 쥐어 거칠게 뒤로 제끼고 잡아뜯어버릴 것처럼 피부를 깨물어도 고통섞인 신음 뒤에 익숙해지면 그저 희미하게 비웃기만 하는 얼굴을. 복종을 요구하는 무나카타의 폭력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후시미 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올려주는 손길에 후시미는 눈을 감은 채로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한 쪽은 너무 말이 없고 한 쪽은 너무 말이 많다. 불꽃의 색보다도 극렬한 대비. 불현듯 예전에 호무라 한 켠의 소파에 누워 있으면 후시미를 말없이 바라보던 스오우의 얼굴이 생각나 고개를 젓는다. 스오우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은 결코 열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시미가 떠날 사람인 걸 알았던 것처럼 그 눈동자엔 미동도 없었다. 오늘 후시미의 셔츠를 제껴 상처 난 인장을 보던 눈만이 조금 동요했을 뿐 스오우의 눈은 항시 무거웠다. 무나카타의 눈도 그것과 비슷하지만 이 남자는 정말로 말이 너무 많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얄미워 후시미조차 질릴 정도였다. 보나마나 웃고 있을 안경 너머의 뻔뻔한 낯짝을 한 대 거하게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후시미는 눈을 감고 무나카타에 손에 몸을 맡겼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성적 취향이 꽤나 독특하단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것은 후시미 사루히코 한정으로 질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애정이 깃든 폭력이라는 건 참 생소하다. 섹스는 애정이 넘쳐흐르는 연인들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호간의 암묵적인, 1g의 호감이라도 존재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의 일방향이라면 그것은 애정도 아닌 폭력의 다른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떨까. 거칠게 짓눌렸던 목이 헛기침을 할 때마다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벨트에 묶인 손목이 따갑고 답답하다. 머리 위로 들여올려져 이상하게 한계까지 뒤틀리는 바람에 어깨 근육은 뻐근하고 짓밟혔던 허벅지의 여린 살과 걷어차인 배는 어쩌면 내일 즈음엔 멍이 시퍼렇게 들지도 모른다. 무심코 몸을 뒤틀었다가 올라오는 묵직한 둔통에 인상을 찡그리면 무나카타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요. 닦고 약 발라줄테니까."
이런 걸 병주고 약주고라고 하던가. 모든 감각을 아까 전부 쏟아부었는지 몸에 닿는 물수건의 감각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아 입술을 씹으며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려 애쓰면 물에 젖은 차가운 손이 후시미의 입술을 살짝 밀어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른 곳들이 충분히 아플텐데요."
"…누구, 탓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제 탓이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비꼬면 무나카타는 태연하게 응수한다. 이 남자의 애정은 이상하다. 애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섹스는 합의고 거기에 덧붙여진 무차별적인 폭력도 마찬가지였다. 저항도 반항도 무의미하다. 애정이 깃든 폭력. 그것은 늘 정의내리기가 모호했다. 후시미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행위들의 의미도 모르고 어떻게 밀어내야 할 지 몰라 그저 감내할 뿐이었다.
"오늘 스오우 미코토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빠르기도 하시지.
무나카타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직접 얘기를 꺼낼 거라고 후시미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담배를 위문품으로 주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더군요. 후시미 군은 사실 피지도 못하잖아요."
"모르시는 게 없네요."
저 멀리 널부러져 있는 재킷 안주머니의 담뱃갑은 후시미도 왜 들고 다니는지 이유를 몰랐다. 충동적으로 샀고 버리긴 아까웠고 그렇지만 펴보면 맛은 없었다. 연기가 들어갔을 때의 그 매캐함과 역겨움을 억지로 참아내면 그럭저럭 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걸 달고 다니는 스오우나 쿠사나기가 이해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나카타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억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비꼬아도 그저 웃음소리만 들린다.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뭘 해도 귀찮아 눈을 뜨기가 싫었다.
"어떻던가요. 전 왕을 대면한 심경은."
"…딱히."
후시미는 결국 퇴근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늦게 스오우를 감시하던 대원에게서 후시미가 한 번 면회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와시마를 통해 한 번 들르라고 얘기하면 후시미는 알아서 무나카타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맞춘다. 한 번 배신한 전적이 있는 남자의 속을 알 리가 만무하다. 모든게 흐릿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나카타에겐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느슨한 태도 속에 겹겹이 높은 장벽을 쳐둔 소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굽히지는 않는다. 스오우 밑에 있었을 때라고 태도가 달랐을 것 같진 않지만 후시미의 목엔 여전히 반쯤 지워졌어도 스오우의 인장이 붙어있었고 무나카타는 어떤 형태라도 그것을 덮을 수 있는 흔적을 계속해서 남기는 것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본인이 얘길 꺼내질 않으니 그저 과거의 것이라 치부했는데 오늘 후시미가 제 발로 스오우를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나카타의 머릿 속에 스쳐지나간 것은 후시미가 재킷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작은 담뱃갑이었다.
몇 번째였더라, 그 때까진 무나카타의 행위도 그렇게 거칠진 않았다. 잔뜩 피곤에 절은 얼굴로 셔츠와 바지를 주워입고 마지막으로 후시미가 재킷을 들어올렸을 때 툭 떨어진 그 물건은 무나카타에겐 제법 의외의 것이었다.
"후시미 군, 담배도 폈었나요?"
무나카타가 담뱃갑을 주워들고 물으면 후시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던 것을 기억한다. 곧 지워지긴 했지만 약간의 침묵 후에 후시미는 대답했다.
"가끔, 입니다."
"미성년자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담뱃갑을 열면 이미 닳아빠진 모서리와는 다르게 두 세개만이 들어갈 공간이 있고 꽤나 빽빽하게 차있었다. 확인하기 무섭게 불편한듯 낚아채가는 후시미의 손놀림은 잽쌌다. 그 뒤로 한 두번 후시미가 몰래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콜록거리며 힘겹게 빨아들이다 연기를 내뿜는 폼이 영 익숙해보이진 않아 도대체 왜 그 쓸모없는 것을 들고 다니는지 의문이었지만 오늘 겨우 답을 알아낸 느낌이었다. 그것은 의외로 무나카타에겐 아주 불쾌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직도 과거를 맘에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오늘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혹시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가 모르는 후시미를 알고 있는건 아닐까. 그럴 리 없겠지만 후시미는 혹시 그에게만큼은 굴복했던 걸까.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도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더 선명해질 멍자국들을 닦아내며 무나카타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고 있는데요."
"스오우 미코토가 아니고요?"
"그건 또 참 뜬금없는 얘기네요."
"내 밑으로 들어왔다면 과거는 잊어버려요. 이전의 왕 따윈 필요 없습니다. 추억에 사로잡혀서 쓸데없는 짓도 하지 말아요. 지금 후시미 군의 주인은 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마음도 몸도 전부 복종하는 게 좋아요."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꼴을 당하고도 아무 불평도 안 하잖습니까. 나의 왕인 당신의 명이니까."
눈조차 뜨지 않고 후시미는 입을 놀린다. 이건 비꼬는 걸까? 지금까지 무나카타의 방식이 전부 틀렸다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굴복시킬 순 없을 거라고? 한 번도 뜨지 않았던 감은 눈이 앞으로도 영영 무나카타를 바라보지 않을 것 같아 무나카타는 미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문득, 무나카타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만 했다.
"후시미 군."
"……"
"좋습니다. 얘기를 바꾸죠."
침대 맡의 무게가 사라지나 싶었더니 발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후시미는 결국 눈을 떠야만 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한 시야에서도 그 형태만큼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잘 보여 후시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당신은 저에게 복종하고 저는 당신에게 굴복하겠습니다."
"……하?"
"불행히도 머리카락이 그리 길지 않아 발을 닦을 순 없겠지만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는 정도라면 언제든지 하죠."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고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던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그랬던걸까. 무나카타의 말은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담이기도 했다. 무나카타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나마 상처가 남지 않은 발 끝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대면 후시미의 얼굴이 경악과 당황이 뒤섞여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겨우 떠진 눈이 무나카타를 바라본다.굴복시킬 수 없다면 이 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매달리고 있는 쪽은 무나카타였고 후시미가 아니었다. 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관계다. 이를 명령이라 한다면 후시미는 지금까지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폭력에 익숙해졌듯이 후시미에 대한 무나카타의 이 굴종에 익숙해지면 이 쪽만을 보게 만들고 잉크가 종이를 타고 올라가듯이 발 끝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워 나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가장 총애받고 신뢰받던 여제자가 되었고 무나카타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가질 수 있게 될 터였다.
일부러 천천히 다시 한 번 발가락 끝부터 입을 맞추면 후시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어라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목소리를 뱉지 못하고 무나카타를 쳐다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좋았을걸.
눈을 감고 꿈적도 하지 않던 후시미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히 무나카타만을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스오우가 불을 붙이기 위해 마셨던 숨을 뱉으며 한 말에 잔을 닦던 쿠사나기가 힐긋 돌아보고는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바 호무라는 오늘 개점휴업이다. 슬프지만 원래부터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니 하루 정도 닫아도 매상엔 별 지장이 없고 대신 거나한 파티가 벌어졌다. 신입환영이라는 명목 하의 회식일 뿐이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이 실컷 즐기다 뻗어버렸으니 어느 정도의 보람은 있는 셈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야타 미사키의 술버릇은 아무래도 취하면 끊임없이 말을 하는 타입이었는지 스오우를 붙잡고 말 끝마다 '미코토 씨 굉장해요! 좋아해요!' 를 외쳐댔으니 스오우 입장에선 아무래도 귀찮을 법 했다. 간신히 골아떨어져 바닥에 널부러져 자는 야타에게 담요를 끌어와 덮어주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동안 말이 없던 스오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쪽이 아냐, 쿠사나기."
"어?"
"귀찮은 쪽."
"야타가 아니면 누구? 후시미?"
"그 쪽이 몇 배는 귀찮을 거야."
그 말에 쿠사나기는 제멋대로 엎어져 자는 미사키와는 달리 얌전히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다른 한 명의 신입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럽고 과격한 활동파인 야타와는 달리 또 다른 신입,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야타와는 달리 행동이 적다는 뜻일 뿐이었고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희미한 적대감을 감추며 아무 포장없이 내뱉어지는 날카로운 말은 모두를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서늘했다. 무표정으로 누워 자고 있는 후시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기면 후시미는 잠깐 뒤척이더니 다시 미동도 없었다.
"설마."
안경을 벗고 자는 모습은 뼛 속까지 독을 품은 것 같은 말들과는 달리 순해서 쿠사나기는 웃었지만 스오우는 여전히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한 얼굴로 후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얼굴은 젖살이 남아있었지만 그 사고방식은 결코 어린 녀석이 아니다. 길들여지지도 않고 길들여지고 싶은 마음도 없는 어린 맹수를 바라보며 스오우는 얼음이 달그락거리던 온더락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정말로, 귀찮은 게 붙었다.
날카로운 시선을 간파한다. 숨길 생각도 없이 시선을 돌리면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맞받아치는 녀석을 스오우는 한 번도 만만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피보다 더 진한 인연으로 묶인 클랜. 후시미의 페어인 야타는 늘 그렇게 외쳤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후시미는 아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굴리며 사람과의 거리를 계산한다. 그럴거면 좀 더 완벽하게 녹아들어 연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눈에 빤히 보이는 그 뾰족뾰족함은 어디에 있든 스오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전하구만."
"일어나 계실 줄 몰랐는데요. 계속 자고 있단 보고를 들어서."
"네 왕이 나를 깨우기 전엔 그랬지. 네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기 전까지도 그랬고."
같은 제복인데도 무나카타가 각잡힌 태도에 부드러운 낯인 대신 후시미는 느슨한 폼에서도 사나운 시선을 감출 줄 몰랐다. 쳐진 눈매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스오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후시미 사루히코가 여기 올 일은 없었다. 낮에 이미 무나카타가 한 번 왔다갔고 스오우는 계속 잠을 잤다. 쿠사나기가 있는 한 호무라가 따로 움직일 일도 없었고 스오우에 대한 별다른 보고가 들어갈 리도 만무했다. 세상만사 숨쉬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녀석이 여기까지 심심해서 걸음을 옮길 리는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무엇을 묻느냐는 듯 잠시 격자 너머의 얼굴이 한 쪽 눈을 치켜올라갔지만 이내 느슨하고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로. 그냥… 이 쪽도 골치거든요."
"그토록 너희들이 잡으려고 난리를 치던 나를 잡아서?"
모순적인 말에 웃음이 나오는 건 저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픽 웃고는 후시미는 문을 열었다. 투박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온 기억보다 소년은 좀 더 커져 있었다. 긴 검을 한 쪽에 차고 각잡힌 제복을 제멋대로 풀어헤친 것이 그답다고 생각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렇습니다. 우리 왕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지만 저는 궁금해 죽겠어요."
"헤에."
그건 순수한 감탄이었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잡담할 때도 후시미는 외따로 앉아 책을 읽거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쿠사나기처럼 순수하게 모두 통달하여 방관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끼기 싫다는 명백한 거부의 의지. 도대체 저 녀석은 왜 이 쪽에 들어온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으면 무심한 잿빛과 눈이 마주쳤다. 그 어느 것에도 흥미가 없다는 듯한 회색은 짙게 가라앉아 같이 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스오우를 향해 한 번 이죽이고는 아예 눈을 감았었다. 그런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궁금한 것도 있을 줄이야.
"옛 정을 생각해서 얘기해주시죠, 미코토 씨."
감방 구석에 있던 투박한 나무의자를 주욱 끌고 와 털썩 앉아 얼굴을 들이대는 후시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하늘빛으로 반짝인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기는. 쿠사나기가 옆에 있었으면 등짝을 한 대 갈기고도 남았으리라. 끝은 쉽게 찾아왔다. 오히려 그 때까지 후시미가 계속 호무라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쿠사나기가 바를 지키고 타타라가 그 앞에 앉아있고, 야타가 카마모토와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거나 안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면 후시미가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처럼 소파에 늘어져 따분한 표정으로 낮잠을 자는 풍경이 꽤나 익숙해질 즈음, 후시미는 사라졌다.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생각보다 썩 잘 어울리는 푸른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걸 보고 야타는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고 카마모토는 그걸 말리고 안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타타라는 허탈하게 웃고 그 쿠사나기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때도 스오우는 그저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만, 예상 밖이었던 것은 후시미가 그 셉터4에 들어갔다는 사실. 후시미는 정으로 움직이는 호무라에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규율과 기강이 딱 잡힌 셉터4에도 어울리진 않았다. 개성이 강한 호무라에서도 겉돌았던 후시미가 순탄한 조직생활에 아귀가 맞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리고, 문득 안나가 앉아 짧은 다리를 흔들고 있는 소파를 볼 때마다 드는 기묘한 이질감이 생각보다 오래 갔다는 것 정도일까.
"맘에도 없는 소리.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놀림당할 정도로 호무라는 만만하지 않다, 꼬마야."
나긋하게, 대신 뼈가 담긴 말로 충고하면 후시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전부 거짓말은 아닌데요."
"그걸 믿으라고?"
"믿든 말든 자유입니다. 거기, 소파는 좋았거든요. 여기선 낮잠을 못자서 피곤해요."
등받이에 늘어져 하품을 하는 꼴이 진담이긴 한 모양이었다. 조명 아래 드리워진 눈 밑의 거뭇한 그림자가 이상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상체는 전보다 좀 더 말랐을 지도 모른다. 나른하게 눈을 감고 한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 조명 아래 흰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우둘투둘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야타가 그걸 보면 진짜 죽어라 달려들겠군."
손을 뻗어 셔츠 깃을 제낀 것은 반은 충동에 가까웠다. 지워지지 않는 인장을 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스오우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지만 스오우 본인도 모르게 제법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뭘 어떻게 했는지 길게 찢어져 그을음까지 남긴 얼룩덜룩한 흉터가 호무라의 인장을 뒤덮어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자니 미묘한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포켓을 뒤적거려 보지만 담배와 라이터는 전부 압수당한 뒤. 텅 빈 주머니에서 갈색의 말라붙은 담뱃잎 몇 개만이 손 끝에 걸려나와 스오우는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 저야 더할 나위 없을텐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후시미는 여전히 셔츠깃을 잡고 있는 스오우의 손 끝을 툭 쳐내고는 대신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스오우에게 보였다.
"여전히 이거 피시나요? 우리 왕은 조금 엄격해서 전부 압수당했겠지만."
작은 상자곽을 열어 스오우의 입에 한 대 물리고 불까지 붙여주는 게 퍽이나 상냥하다. 후시미가 담배를 폈던가? 필터를 질근 씹으며 숨을 들이쉬면 몸이 나른해진다. 얼마나 됐다고 금단증상이라고 겪고 있었나 싶어 웃으면 후시미는 다시 익숙한 손놀림으로 라이터와 담뱃갑을 잘 갈무리하고는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언뜻 본 담뱃갑의 안 쪽은 빈 구석이 보였고 오랫동안 들고 다녔는지 모서리는 종이가 해져 부드럽게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특별 선물이에요, 미코토 씨. 여기 오래오래 계시라고."
"악담이군."
"얌전히만 계시면 가끔 찾아오죠."
"담배 안 피잖아."
"비행청소년이라서요. 가끔."
"혼자 피면 심심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피는 건 사양할래요. 걸리면 혼나거든요. 아직 근무 시간 중이라 이제 슬슬 가봐야 되고."
그렇게 말하며 후시미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의자를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내가 왜 순순히 잡혔는지는 안 듣는거냐."
"말해줄 것도 아니잖아요."
뱉어낸 희미한 연기 속에서 소년은 웃었다. 궁금한 건 핑계고 처음부터 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망설임없이 돌아서는 모습이 몇 시간 전에 왔던 무나카타와 겹쳐보여 스오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왜 온 거지?"
"…반은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고."
덜그덕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후시미가 다리를 옮겨 그 문을 넘어가면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은 옛 정이라고 해두죠."
잘 있어요, 미코토 씨. 뚜벅뚜벅 휑한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옅어진다. 누구와도 쉽게 말을 섞지 않는 주제에 제 지정석인 것 마냥 느슨하게 소파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소년을 생각해 본다. 붕 떠 있다고 생각했어도 결국은 그런 흔적을 남긴 소년. 가슴 왼편에 자리잡은 스오우의 흔적을 망가뜨리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제복이 키가 큰 지금은 그럭저럭 어울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착실하게 자기 일을 하러 가고, 무나카타를 '우리 왕'이라고 부르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귀찮은 게 붙었어."
야금야금 타들어가 끝을 보이는 담배가 아쉬워 필터 끝까지 깊숙하게 빨아들였다 내뱉는다. 희뿌연 연기가 고인 공기 중으로 스오우는 중얼거렸다. 무심하게 창 밖을 쳐다보다 스오우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던 소년은 이제 없다. 소파는 영원히 공석이고 일그러진 인장이 다시 제 모양을 되찾을 일도 없겠지. 이 남은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내지 못해 계속 안고가는 것도 썩 귀찮은 일이었다.
머루님 리퀘입니다만... 상당한 캐붕인듯한... 애초에 얘네 둘 왜 투샷 안나왘ㅋㅋㅋ 빨리 나와줘 제발ㅠㅠㅠㅠ 아직까지 호칭이 안나와서 일단은 제멋대로. 청왕님이 후시미를 후시미 군이라고 부르는 건 오피셜이지만 후시미는(...)
제가 보기에 후시미랑 청왕님은 되게 비슷해요. 얼굴이 아니라 사고방식도 왠지 비슷할 것 같고 고양잇과 맹수인데 후시미가 덜 자라서, 내지는 청왕님은 진짜 왕이라서 거기서 차이가 나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동족혐오와 열등감과 그런 것들을 믹스시키려고 했지만 머루님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
나이에 별로 연연하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땐 제법 신경쓰이지 않는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딱히 보호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쓸데없이 제약만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후시미 군은 안됩니다."
아아. 저 얄미운 얼굴 진짜 한 대 쳐주고 싶다. 이를 아득바득 갈며 노려보면 그는 빙긋 웃고 만다. 부실장은 늘 냉철하지만 제법 곤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어 의미없는 대화들은 그만두기로 한다. 비효율.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저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아무 성과도 없고 오히려 의식하기 싫은 미묘한 스크래치만을 남기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걸 아는데도 어린애처럼 달라붙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그래서 당신은 안되는 겁니다'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한 번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쉰다.
"네네, 알겠습니다. 착한 아이는 얌전히 가서 잠이나 자라는 거죠?"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그런 논리라면 부려먹는 것도 적당히 해주세요. 귀찮은 일은 죄다 이 쪽으로 돌아와버리고 마는데 업무량에 대해선 배려해주실 의향이 없으신 겁니까?"
"똑같이 월급 받고 일하는 판에 뭘 어쩌겠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무엇보다 미성년자 노동은 보호받지만 음주는 법에 저촉되는 일이거든요. 솔선수범해서 위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란걸, 후시미 군도 잘 알지 않습니까."
어련하시겠어요. 속으로 슬쩍 비꼬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깎아내리는 대화는 삼가하고 싶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후시미 군."
"명심하겠습니다, 아와시마 부실장. 부실장도 적당히 마시세요."
"내일 뵙죠."
일부러 그의 이름을 빼놓고 부실장에게만 인사하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다 뒤를 돈다. 또각거리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와 그것보단 무거운 구두소리가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거리에서 괜찮은 바를 몇 개 알고 있다. 퍽 소란스런 분위기의 펍이나 생각보다 한적하고 조용한, 안주가 맛있는 선술집. 유형별로 답하라면 리스트를 뽑아다 줄 수도 있다. 그네들이 갔을 법한 곳은 어디까지나 평온한 대화와 적당한 분위기, 도수가 높지 않고 뒤끝이 괜찮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겠지. 아와시마 부실장의 독특하고 드문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 번 이상 가 본 곳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재빨리 몇 개의 후보를 추스려 그 위치를 피해 일부러 소란스럽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바를 찾아 들어가면 이미 안면을 튼 바텐더가 반겼다. 예전 본거지였던 그 소란스런 클랜의 바 주인이 취향이 잘 맞는다며 몇 번 심부름을 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최근 들어서 인식하게 된 사람이었다. 복잡한 뒷사정들을 알면서도 수월하게 넘겨주는 그의 대담함을 나는 좋아했다.
"오랜만이네."
"온더락, 바카디."
"오늘은 처음부터 센 걸."
"내일은 주말이잖아요."
주말이니 한 잔 하러 가실래요, 아와시마 군? 부드럽게 웃으며 이름을 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배척. 부실장의 신경쓰는 시선은 어쩌다 있는 야근의 끄트머리에 존재한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평소같았으면 얌전히 자리를 피했을텐데 같이 가자고 말을 던져본 것은 미묘하게 달라붙는 시선과 그러면서도 견제하는 선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나온 말이 후시미 군은 미성년자라서 아쉽게도 불가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법적으로 미성년자라든가 하는 사실은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보호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일은 초과노동, 근로계약서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4대보험이랑 사망수당은 보장되어 있는건가? 애초에 셉터4는 법을 초월한 독자적인 기관인데 대체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귀하신 청의 왕, 무나카타 레이시는 그저 피하는 것 뿐이었다. 아마 1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도, 2년, 3년, 내가 그의 나이를 따라잡고도 한참 지나도 그 둘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을 터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쫓아갈 수 없는 것은 그 남자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부실장은 왜 되는거지? 왜 그렇게 쳐다봐놓고 다가가면 밀어내는 걸까?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데 나 혼자 흔적을 남기려 애쓸 뿐인걸까? 그렇다면 왜 하필 그 사람이지?
입에 닿는 컵은 서늘하게 축축한데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텅 빈 내장 속을 빙그르르 돌며 열기를 몰아다니고 이윽고 심장까지 들이차 쿵쿵 뛰는 맥박의 빠르기를 기억한다. 그가 처음으로 푸른 빛을 발했을 때, 계약의 말을 내뱉었을 때, 쇄골에 남은 붉은 불꽃의 흔적보다도 더 강하게 옥죄였던 빛에 인정하기 싫지만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안경 렌즈로 반사되는 푸른 빛 사이에서 아름답게 호선을 그리는 남색의 눈동자 밑에 깔린 진한 경멸을 보았을 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지금과 비슷하다.
"한 잔 더요."
"월급날이야?"
"취미가 없어서 돈 쓸 데가 없거든요. 월말이라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렇다고 해도 오버페이스야. 적당히 해. 너 데려갈 사람 아무도 없잖아. 죽이려고 달라들 놈들은 많아도."
예를 들어서 그 꼬맹이라든가? 물기 어린 잔을 마른 행주로 닦고 병을 기울이는 바텐더는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저 쪽으로 가버렸다. 아아. 그렇지. 그 놈도 있었다. 와.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적이 많았다. 저 쪽에선 배신자는 처단해야 된다며 정말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테고 상관이란 놈은 신입을 부려먹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면서도 쓸 수 있는 한도까지 실컷 부려먹는다. 인생 진짜 개같네. 한 번에 털어넣어 버리고 반쯤 녹은 얼음을 까득까득 씹어대면 조금은 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주로 내밀어준 프레첼을 아작거리면서 한 잔 더, 를 청하면 저 끝에서 다른 이의 말상대를 하던 남자가 쓴 얼굴로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그의 얼굴은 분명하게 나와 동질이다. 세상을 내려다보고 경멸하고 비꼬는 눈동자는 바라볼 때마다 짙은 혐오감을 담고 있지만 숨기는 것엔 능숙한 남자였다. 멍청하고, 어리고, 불쌍한 것. 입 밖으로 안 꺼낸 것이 왕의 자질이라면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는 빌어먹게도, 정말 왕이었다. 모든 것을 손 안에 두고 내려다보면서 복잡한 퍼즐을 맞추듯 사람을 바라본다. 그의 앞에서는 어떠한 벽도 무의미하고 치기어린 마음은 한 번에 까발려진다. 모든 조건을 동등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를 뛰어넘을 수 없고, 따라잡을 수도 없고 그 속을 들여다보지도, 옆에 서지도 못한다.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불쾌함, 네가 꿰뚫어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아냥만을 말없이 쏘아붙이고 깨끗하게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왜 부실장은 되는거지? 차라리 전원을 그렇게 취급한다면 그러려니 할텐데 그녀만은 언제나 특별이다. 유능, 성실, 냉정 모든 것을 갖춘 부관을 물론 인정은 하지만 내가 그녀보다 그렇게 떨어지는 것만도 아닌데. 오히려 동질이라면 더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데도 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놈의 직장 때려쳐 버릴까."
진짜 사표 쓰고 싶다.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면 옆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듣고 키득거리며 취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아직 어려보이는데 직장 생활 하나봐요?"
"어쩌다 보니."
"저도 요즘은 말이죠 죽을 맛이에요. 말단일 땐 그렇다 쳐도 적당히 직책도 달았는데 가면 갈수록 상사가 까대는 건 심해지고 뭐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면 되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등바등 다 해오면 당연한 줄 알고 또 요구해."
"그래놓고 능력없다고 그러지."
"어, 그 쪽 상사도 좀 미친놈인가보네요. 이 쪽도 그런데."
"그래요? 진짜 위에 놈들은 다 왜 그러는지 몰라."
"짜증나죠. 지금까지 해온 건 하나도 기억 못하고 실수한 것만 꼬투리 잡고."
"맞아! 와 진짜 그런 진상이 저만 있는 게 아니었나 보네요."
"세상에 그런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니."
낄낄거리면서 내뱉는 숨이 뜨겁다. 아, 취했나? 아직까지 주량을 넘은 것 같지는 않지만 저녁은 건너뛰었으니까 조금 안 받을지도. 근데 뭐 어때. 내일은 쉬는 날인데. 출근 안한다고. 한다고 해도 네 얼굴 보기 싫어서 그냥 결근할 거다.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면 남자가 다른 술을 권했다.
"킵해놓은 스카치가 있는데 마실래요? 맘 맞는 친구 만난 기념으로 나눠드리죠."
"당연히 마실 수 있죠. 거절은 예의가 아니잖아요?"
진짜 빌어먹을 놈. 왕이 뭐라고 내려다보기만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증스럽게 웃는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안경을 벗어버렸다. 뿌옇게 번진 시야엔 모든 것이 가물가물한데도 얼굴만이 생생해 짜증이 치민다. 개새끼. 미친놈. 집에 가다가 미코토 씨랑 신나게 치고박고 싸우기나 해라. 긴급증원이 걸려도 가지 않을테다.
"자, 건배!"
"건배!"
어느 새 내밀어진 스트레이트 잔을 목구멍에 들이부으면서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끈하게 달아올라 목덜미에서 맥이 쿵쿵 뛴다. 이렇게 죽으면 기억은 해주려나. 그 눈동자에 담아주기는 할까. 끝까지 그런 생각만 하는 나도 누굴 비난할 처지가 못되게 한심스러운 녀석이었다.
"…미 군, 후…미… 정…ㅅ…려요. 괜찮은 겁니까?"
툭툭 뺨에서 느껴지는 엷은 감촉과 익숙한 목소리에 뻑뻑하게 들러붙은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면 짙게 가라앉은 밤의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후시미 군? 취한 겁니까? 일어날 순 있겠어요?"
내밀어진 손은 크지만 늘씬하게 긴 손가락을 갖고 있었다. 검을 잡을 때의 굳은 살과 펜을 잡는 굳은 살이 약간은 뒤섞인 단단한 손바닥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본다. 늘 어느 정도의 예의와 존대, 우아한 행동으로 포장한 남자는 누가 봐도 매너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깜박거리며 주변을 관찰하면 시야가 낮았다. 무심코 짚은 손바닥에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는 모양이었다. 아, 취객이네. 평범하게. 제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서있는 그와 주저앉아 버린 나의 차이가 너무 확고해서 한 번 웃기 시작하면 킥킥대는 새어나오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던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덕꾸러기를 꾸지람하는 부모마냥 묻는다.
"얼마나 마신거에요?"
"기억 안 납니다."
"받아주긴 해요?"
"단골이거든요."
그 말에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이 기함하던 그가 내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겨 순식간에 바닥에서 쑥 딸려 올라간다. 휘청이는 다리는 땅을 딛고 있는지 모호하고 세상이 온통 빙글거리는데 그만이 내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왜 제 집 앞에 있는건지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후시미 군."
"아… 여기 실장님 집 앞입니까? 몰랐는데요."
그 말에 실장이 또 한 번 혀를 차지만 몰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기억은 아까 그 바에서 반쯤 남아있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네 잔째 부었을 때 끝났고 어렴풋이 입구가 넓은 마가리타잔 주변의 소금을 핥아먹고 얼음이 녹아 물기어린 바 위에 고개를 쳐박었던 것만이 꿈처럼 남아있었다. 드문드문한 기억 속에서도 그를 죽어라고 욕했던 것만은 확실해 나는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나는 그를 쫓아왔다. 경멸, 비난, 혐오, 어느 것이라도 좋았다. 그 눈동자에 내가 한 번이라도 담긴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제대로 보지도 않을 거면서 매일같이 달라붙는 시선을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건지 모른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머리와 목에서 울려댄다. 빠른 맥박, 기억한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그 빠르기. 처음 봤을 때부터 뛰어서 정신이 없었다. 나와 닮았는데도 높은 곳을 걷고 있는 당신이 싫었고 미웠고 아름다웠다. 내가 갈 수 없으면 붙잡아야지. 그것조차 안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뒤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야지. 나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목을 끌어안고 내뱉는 숨을 내 안으로 집어넣는다. 깨끗한 안경 렌즈와 그 차분하고 우아한 로열 블루 가득히 내 얼굴이 담기는 것을 바라본다. 당황으로 설핏 일그러진 눈동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혀로 핥고 날카롭게 이를 세워 물어뜯는다. 고통으로 찡그려진 미간을 인식하는 순간 몸이 바깥으로 떨쳐졌다. 생각보다 깊게 깨물린 모양인지 묽게 흘러내리는 붉은 궤적을 입 안에 짭짤하게 감도는 맛을 되새김질하며 바라보면 그가 손등으로 스윽 훑고는 나를 본다.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하게. 푸른 빛을 담은 눈동자가 어두워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직까지도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람 말을 들어줬으면 좀 좋겠습니다, 후시미 군은. 솔선수범해서 위법을 저지를 위치가 아니라고 얘기했잖아요."
"어차피 셉터4는 초법기관인데요.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이뤄진다구요, 킹."
그렇게 말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고… 후시미 군이 자초한 일이란 걸 알아뒀으면 좋겠네요."
최대한 지켜주려고 했거든요. 나즈막하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귀에 감겨들 새도 없이 입가에서 느껴지는 말캉하고 따끔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린다. 짭짤하게 배어드는 피의 맛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흥건하게 고이는 타액에 섞여들어 몇 번이나 목 뒤로 넘어가고 먹어치울 것처럼 감겨들고 점막을 훑고 빨아들이고 다시 뱉어낸다. 원래의 박자를 잃어버린 호흡을 어떻게든 이어가면 그는 그대로 웃었다. 저 목 끝에서 울려나오는 습한 공기가 입을 통해 들어와 폐를 적신다. 먹힌다면 그걸로도 좋았다. 사냥할 준비를 마친 날카로운 눈동자를 보며 나는 눈을 감는다.
Leonids ; 사자자리 유성우 입니다. 09년에 뉴스에서 떠들어대서 한 번 보려고 밤샜는데 엄청나게 추웠고 창문으론 보이지도 않아서 포기. 모처에서 리퀘 받은 겁니다. 진짜 비처럼 내리는 유성우는 3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98년이 최근이래요. 그럼 몇 년 남은거지?
"추워."
"그러니까 내가 껴입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추울 줄 몰랐지."
설령 알았다고 해도 후시미는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보이는 걸 대충 집어입고 나왔을 게 뻔했다. 11월의 새벽은 생각보다 몹시 바람이 찼다. 야타도 잔뜩 껴입었지만 옷과 피부 틈새로 스며드는 찬기에 몸이 서늘한데 후시미는 달랑 후드에 점퍼 하나다. 후드 사이로 드러난 목이 보기만 해도 서늘하고 차보여 야타는 후시미의 후드를 씌워줬다.
"왜."
"춥대며. 그거라도 뒤집어써라. 보는 내가 시리다."
"싫은데…."
중얼거리면서도 후드를 벗지 않는 걸 보니 춥긴 추운 모양이었다. 후드의 끈까지 잡아당겨 꽉 묶어주고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면 후시미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머니에 넣은 손은 끝까지 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새벽에 왜 여기까지 올라온건데?"
"좋은 거 보여주려고."
"나중에 보여주면 안되냐?"
"안돼."
새벽 야산을 올라올 때부터 후시미는 영 맘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잠에서 덜 깬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고 가늘게 뜬 눈은 야타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는 듯 했다.
"뭐 얼마나 좋은 걸 보여주려고. 10초 안에 안 보여주면 나 내려간다."
"좀 기다려야 돼."
"얼마나."
"나도 몰라."
솔직히 과연 야타의 생각대로 될 지도 미지수였다. 뉴스에서는 드디어 시기가 돌아왔다며 기대해도 좋다는 둥, 올해 마지막의 천문쇼라는 둥 실컷 떠들어댔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제대로 봤다는 사람도 드물었다. 추위 탓인지 원래도 참을성 없는 후시미는 할 일도 없이 새벽에 야산을 올라오는 너같은 멍청이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악담이야 야타도 질릴 정도로 들어봤지만 초조한 탓인지 그걸 모두 가뿐히 여유가 들지 않는다. 무시하자, 무시해. 속으로 치받는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이를 악물고 짙고 깨끗한 남색 위에 총총히 박힌 점같은 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면 후시미가 옆에서 다시 시비를 걸었다.
"너무 정곡이라 할 말도 잊었냐?"
"뭐가."
"네가 희대의 멍청이라는 데 대해서 말야."
"겉만 멀쩡하고 속은 어린애 같은 네 녀석보다 낫지."
"그리고 넌 겉도 속도 어린애고? 그러니까 매달리는 거잖아, 호무라에."
"야!"
턱- 하니 미사키의 머리 위에 얼굴을 얹으며 씨익 웃는 후시미의 얼굴은 정말로 미묘한 경멸을 담고 있어서 야타도 거기에 대해선 발끈할 수 밖에 없었다.
"왕이고 뭐고 일단 붙으려면 좀 그럴듯한 데 붙어야되지 않겠냐. 유대감 어쩌고 해도 실상은 그것 빼곤 아무것도 없잖아? 이건 뭐 먹고살기도 힘들고 난 내일도 아르바이트라고."
"미코토 씨를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미코토 씨가 너한테 해준 게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들러붙어? 차라리 둘만 있는 쪽이 벌이는 괜찮았을걸?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릴 게 분명해. 그리고 우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버리는 장기말이 될 걸."
"미코토 씨는 그럴 사람 아냐! 그리고 재밌다면서 계약하고 젤 신났던 게 누군데 그래!"
"너겠지, 이 머저리야. 신나서 사고만 뻥뻥치고 다니고."
"야!! 지난번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적당히 한 두대 패고 끝날 걸 아주 떡이 되도록 두들겼잖아. 덕분에 나도 쓸데없이 뛰었어야 되고 뭐냐 그건?"
"너도 안 말리고 옆에서 부추겼거든?"
"그거에 넘어가는 네가 병신이지. 너랑 다녀서 뭐 제대로 된 꼴을 내가 본 적이 없다. 키는 쪼끄매서 성질은 더럽고 툭하면 시끄럽고 말 많아, 사고뭉치에 머리도 안 좋고. 내가 너같은 거랑 왜 붙어다녀야 되는건데? 딱 질색이야."
"너만 그런 줄 아냐? 나도 그래! 넌 나보다 성격은 더 더럽고 기분 나쁘지, 세상에 너 좋아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거다! 지금도 친구 없어서 빌빌거리는 주제에 무슨. 네가 나한테 붙어다니는 거지 너 없어도 난 멀쩡히 잘 살 수 있거든?"
"아하, 그러세요?"
후시미의 눈이 밤하늘 밑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새벽공기만큼이나 차게 얼어붙은 얼굴이 비식거리며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무심한 잿빛이지만 가끔은 하늘의 색으로 빛났다. 오늘은 배경으로 삼은 하늘과 똑같은 깨끗하게 짙은 남색이다. 실컷 같이 떠들어놓고 예민한 척은 혼자 다하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야타는 참았다. 여기까지 말하면 후시미가 정말로 가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라질 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후시미는 자존심이 강하고 가뜩이나 집착도 없는데 살짝이라도 쥐고 있던 것도 한 번 놓아버리면 미련이 없다. 거리에서 마주쳐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잿빛으로 바라보겠지. 무심하게, 아주 무심하게 야타를 바라볼 터였다. 지금 화가 난 눈동자보다도 야타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여기선 붙잡아야 된다, 고 가속하던 비난에 브레이크가 걸리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먼저 사과하기는 죽도록 싫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되지? 후시미 말대로 자신은 진짜 멍청이인지도 모른다.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만 달싹이면 후시미는 한층 더 사납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간다. 잘 있어, 미사키."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발걸음에 그제서야 다급하게 야!! 하고 공기가 지잉- 하고 울릴 정도로 불러도 후시미는 멈추지 않았다.
"너 진짜 갈 거야?"
"추워. 그리고 지금 내려가서 짐 싸려면 빠듯하겠네."
"가, 갈 데도 없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든 되던데."
그야말로 후시미다운 대답이었다. 흔들림 없이 걷는 뒷모습이 어둠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때 밤하늘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아, 그렇지. 오늘 이 새벽에, 이 추위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저걸 보기 위해서였다.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요즘은 이미 영악해진 어린애들도 믿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같이 소원을 빌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여 주머니 속에 손을 밀어넣은채 가로등도 없는 우거진 산길을 잘도 내려가려는 후시미의 손목을 낚아채면 놀란 듯 잠깐 커진 눈동자가 야타를 향해 깜박였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거야?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싫냐?"
"……."
"뭐가 어찌됐든 이건 보고 가라."
질질 끌면 후시미의 다리가 잠깐 휘청거리다 맥없이 끌려온다. 하여튼 키 크면 싱겁다는 옛말이 틀린 건 없는 것 같다. 야, 이거 놔라. 하는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반해서 반항은 미약했다. 뿌리치려는 손목을 꽉 붙잡고 아까까지 서 있던 하늘까지 훤히 뚫린 공터로 와 다시 하늘을 바라보면 저 하늘 한 구석에서 다시 반짝, 하고 빛났다.
"봤어? 봤냐? 봤지?"
"유성?"
"오늘 사자자리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라더라. 예쁘지 않냐?"
"이거 보려고 이 밤중까지 왔냐. 매년 떨어지는거."
"어…?"
후시미의 말에 야타가 어라? 하고 눈을 깜박거리면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눈이 야타를 향하고 픽- 하고 웃었다.
"몰랐냐? 매년 유성우는 떨어져."
"거짓말!!"
"물론 비처럼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면 시기를 맞춰야겠지. 33년 주기로는 정말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더라. 최근엔 20년쯤 됐으니 앞으로 13년은 더 기다려야 되나."
"진짜?"
"그래. 이거 보여줄 거였냐. 그럼 난 봤으니까 내려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식이라면서 생전 처음 듣는 얘기들을 줄줄 읊는 후시미의 말에 야타는 억울함이 흘러넘쳤다. 세상에, 매년 떨어지는 걸 보겠다고, 심지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다는데 이 얼어죽을 것 같은 새벽에 나와 쓸데없이 불화까지 키웠다는게 야타는 억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타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후시미는 정말 내려가자마자 짐을 쌀 기세라 야타는 다시 후시미를 붙잡았다.
"야 자, 잠깐만! 진짜 갈 거야?"
"그것만 보고 가라며. 그래서 보고 가는데."
말만으로 그치지 않는 행동력은 가끔 무서울 정도다. 지난번에도 쿠사나기가 긴밀한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어느 쪽 팀에서 까불어댄다고 본거지로 가서 다 털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하면 돼죠, 후시미는 간단하게 말하고는 아주 죽사발을 내놓고 와서 야타까지 세트로 혼나야만 했다.
"정말 나 싫어?"
"…싫어."
"꼴보기 싫을 정도로?"
"……."
"진짜로 네가 바라는 게 그런 거야?"
키 큰 녀석들은 이래서 불편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아니꼬움을 느끼며 야타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잡고 내리눌렀다. 바람에 메말라 거스러미가 일어난 열린 아랫입술을 깨물고 혀에 닿는 차가운 피부에 한기를 느끼며 슬쩍 핥으면 후시미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엉거주춤하게 내려앉은 자세 그대로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싫은데."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에 후시미는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그 따뜻한 숨이 얼굴에 닿아 귓볼이 뜨거워지는 걸 야타는 하늘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 속에 들어간 후시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뭐하냐?"
한참 후에 후시미가 뱉은 말은 겨우 그거였다. 하늘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야타를 따라 시선을 돌리면서 물으면 야타는 계속 하늘을 주시하며 답했다.
"유성 찾아."
"뭐하게?"
"소원 빌어야지."
"무슨 소원?"
"말 안해."
그러니까 네가 어린애라는거지. 후시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야타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년 떨어진다고 해도 솔직히, 내년에도 이 고생을 해가며 기다릴 자신은 없고 후시미가 얌전히 따라올 리도 없으니 후시미와 보는 유성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였다. 그렇다면 어린애들도 안 믿는 속설이라고 해도 야타는 꼭 오늘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야, 미사키."
"왜. 그만 좀 불러. 매년 떨어진대도 난 오늘 다 보고 갈 거다. 소원 빌 거라고!"
"그냥 13년 기다려."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 때는 옷도 좀 제대로 입고 얌전하게 기다려 줄테니까 같이 소원 빌면 되잖아? 찾을 필요도 없이 유성은 비처럼 쏟아질거고."
응? 그렇지 미사키? 속삭이며 후시미는 씨익 웃는다. 매끄럽게 그리는 호선은 평소와는 다른 진짜 웃음이고 그대로 가까워지는 얼굴을 야타는 피할 수 없었다. 아까 야타가 했던 그대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를 내밀어 핥으면 따뜻하고 말캉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진다. 네가 비는 소원이래봤자 뻔하지.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간지럽다. 소원따위 빌지 않아도 네 옆에 있을테니까.
아. 후시미의 눈동자 뒤로 유성이 스쳐 지나간다. 빛무리보다 더 아름다운 눈동자를 야타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13년 후에도, 그것보다 더 오래오래 너와 있고 싶어. 그렇게 소원을 빌면 이뤄질까. 틀림없이 이뤄지겠지. 서로가 옆에 없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투닥거리면서도 사랑을 속삭이고 늘 옆에 있을 터였다. 늘. 아주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