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청] 쓸모 없는 것의 유용성
론님 생일축하 리퀘스트 적청. http://nitrogenal.tistory.com/51 해당 포스팅의 설정을 참조했습니다.
"바다……."
"와? 니 바다 보고 싶나?"
난데없는 쿠사나기의 말에 스오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상대를 바라본다. 니가 방금 바다라 캤다 안카나? 쿠사나기의 눈동자가 선글라스 밑에서 가늘게 접혔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님 말고. 말갛게 닦인 글라스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쿠사나기를 뒤로 하고 스오우는 창 밖을 바라본다. 밖에는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다. 말을 했다는 기억은 없지만 쿠사나기가 그랬다면 그럴 것이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뿌옇게 오르는 연기, 진눈깨비가 되지 못한 비.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스오우 미코토가 아는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바다가 내리는 걸 본다고.
에둘러 말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고 문학적 소양은 극히 없는 스오우에겐 무엇을 어떻게 비유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대로 무나카타는 쉬운 말도 빙빙 돌려서 하는 세치 혀를 갖고 있었으니 - 이를테면 섹스하러 가자는 말을 5분 간의 의미없는 트집 끝에 당신 때문에 기분 잡쳤으니 기분 전환 해야 겠다는 식이다 - 뭔가 숨겨진 뜻이야 있겠지만 스오우는 간단하게 미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긴. 아무래도 정상적인 세계는 아니지.
보이지 않는 검을 생각하며 스오우는 새 담배에 불을 댕기고 일어났다.
"니 으데 가노? 비도 오는데."
"네 술이 질려, 쿠사나기."
"하. 내가 은제 와 나가냐고 물어봤나. 섭한 소리 말고 썩 끄져라. 우산 들고 가고."
"필요 없어."
어지간히 섭섭한 말이었는지 뒤에서 이죽이는 쿠사나기를 뒤로 하고 스오우는 밖으로 나섰다. 우산이 필요없다는 말은 스오우의 허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검이 부여한 것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별 의문도 갖지 않았던 스오우에게 무나카타는 장황하게 그 원리에 대해 설명했지만 애초에 석판이 사람에게 초능력을 주는 것이 과학과 논리로 설명되는 일이던가. 어깨에 닿기도 전에 기화하여 사라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스오우는 어쩔 수 없이 무나카타를 생각한다.
심심함이 도를 지나쳐 이제 슬슬 안달이 날 정도로 몸이 찌뿌둥하다. 정기적인 교류를 하는 것도, 휴대전화에 각자의 전화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나카타는 어디서 알아냈는지 가끔 스오우에게 전화를 걸곤 했지만 스오우는 그 번호를 저장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다만 무슨 운명인지 심심할 즈음엔 얼굴을 마주쳤다. 슬슬 때가 되었을텐데, 스오우의 지루한 조바심이 열흘을 넘어도 무나카타의 얼굴은 어디서 보기도 힘들었다. 스오우는 장식처럼 들고 다니던 휴대전화의 액정을 무심히 바라보다 도로 주머니에 밀어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우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별 수 없는 거지.
스오우 미코토와 무나카타 레이시의 인연은 딱 그 정도가 아니던가.
그러나 스오우는 내리는 비를 보며 계속 생각했다. 잿더미의 도시와 뒤집힌 바다. 바다가 내리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열하루 전이다. 모처럼 스오우가 먼저 일어난 날이었다. 두 시간 정도 잤을까. 선잠에서 눈을 뜨면 어렴풋한 여명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짧아지는 시기라 예전만큼 빠른 시각은 아닐 터였으나 스오우에겐 충분히 이른 시각이었다. 당연히 비어있으리라 여겼던 옆자리는 웬일로 사람이 있었다.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은데 침대는 오죽하겠냐며 늘 바람처럼 사라지는 무나카타가 스오우의 옆에서 내내 자고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자는 상대를 바라보며 스오우는 손을 더듬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에서 담배를 빼어물었다. 평소와는 다른 맛에 위화감을 느끼면 무나카타의 것이었다. 하다못해 담배 취향도 안 맞는다니.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스오우는 불을 끄지 않았다.
"담배……."
남의 담뱃갑에서 낼름 두 대째의 담배를 꺼낼 즈음, 상대가 웅얼거리며 반짝 눈을 떴다. 정확하게 세 번 깜박여 잠기운을 날린 무나카타가 정직한 시선으로 스오우를 본 다음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안경을 벗은 무나카타와 멀쩡하게 눈을 마주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스오우는 멀뚱거리면서도 무나카타의 담배를 보란듯이 빨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무나카타는 이윽고 긴 팔을 내밀어 스오우의 담배를 낚아챘다.
"담배 냄새에 잠을 깨다니 하루 종일 재수가 없을 것 같군."
반쯤 남아있던 담배를 깊이 빨면서 무나카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피우지 말지 그러냐, 무나카타."
"내가 안 피운 담배로 옷에 냄새 배면 억울하지."
"별… 같잖은 논리 다 보겠군."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여전히 무나카타는 눈을 감은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세 모금, 혹은 네 모금. 짧지만 긴 시간 동안 감은 눈은 자는 것처럼 평온해 뜨이지 않았다. 스오우는 그 때 처음으로 무나카타 레이시는 담배를 피울 때 눈을 감고 있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 일이 없어 스오우는 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익숙함을 느끼면서도 그 새 상대의 것에 길들여졌는지 또 어딘가가 낯설다. 키스할 때는 이런 맛이 나던가? 문득 생각해 본다. 한덩어리의 열락으로만 뭉뚱그려져 남아 있는 속에서 맛 같은 건 무의미했다. 사소함과 섬세함은 그와는 거리가 멀어 침묵 속에서 스오우는 말없이 감은 눈을 본다. 담배는 언제나 지나침이 없다. 희뿌연 두 사람 몫의 연기가 하늘에 고여 있는 동안 마침내 온전하게 눈을 뜬 무나카타가 꺼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지졌다.
"분명 당신 걸 뺏었던 것 같은데, 내 거네요."
한참을 재떨이에 고개를 쳐박고 새처럼 관찰하던 무나카타가 불쑥 그렇게 내뱉었다. 잡힌 게 그거라. 스오우는 알량한 변명을 해보았다. 한숨을 내쉬고 무나카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연기와 함께 맴돌아 스오우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귀찮을 정도로 말이 많은 편이었다. 제 사유물에 아무렇게나 손댄 것을 알면 거하게 한바탕 쏟아낼 줄 알았더니 - 쿠사나기를 통해 학습한 것들이다 -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음. 음. 으음…….
"갑자기 화가 나는군요."
한참의 무언 끝에 무나카타가 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 것에 화가 났다는 건지 물론 스오우는 알 도리가 없었다. 스오우가 생각하기에 무나카타는 그냥 저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를 낼 법도 했고 반대로 고작 그런 이유로 화를 낸다면 진즉 냈어야 했다.
"머리 굴리지 마세요, 스오우. 당신과 있는 건 원래 좀 화나는 일이고 그 정도는 감수하고 있습니다."
…….
"별 쓸모도 없는 감각으로 확신을 가져야 했던 나에게 화가 나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자기 반성이 투철한 녀석인지는 미처 몰랐는데."
세상 너 잘난 맛에 사는 놈이잖냐. 물론 스오우는 말로는 하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사실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적 있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무나카타는 안경을 쓰지 않은 눈을 깜박이다 스오우를 쳐다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무나카타가 이런 표정을
"비밀 하나 얘기해 줄까요, 스오우."
"아니."
"그렇게 큰 비밀은 아닙니다."
그래서 비밀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스오우 미코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잔을 내려놓는 손놀림은 답지 않게 난폭했다. 늘 꼿꼿하던 허리는 제대로 세워져 있길 포기한 건지 소파에 미끄러져 있었고, 긴 다리를 모로 꼬고 담배를 피우는 얼굴에선 눈꺼풀이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감겨 파리하게 긴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우연일까.
스오우가 이 가게를 찾은 건 무나카타가 이 가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무라와는 달리 검은색 모조 대리석으로 마감된 인테리어는 무나카타와 어울렸지만 스오우의 취향은 아니었다. 무나카타가 아무래도 맘에 들어하는 건 테이블마다 놓인 운세점 뽑기 기계 같았지만 어찌됐든 무나카타는 높은 빈도로 이 가게를 찾았고 스오우가 별로 맘에도 들지 않는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 데에는 이유가 없었다. 생각 없이 왔다기엔 너무 노골적이고, 그렇다고 해서 기대했다고 인정하기도 애매했다. 우연이라는 교묘한 핑계를 제쳐두면, 남는 건 뭘까.
무나카타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적당히 근처 테이블에 앉은 스오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말이 맞다면 설령 이 쪽을 돌아본다 해도 약간의 거리가 있는데다 스오우를 알아볼 확률은 극히 낮았다.
시각적 정보는 언제나 올바른 게 아닙니다.
무나카타가 비밀이랍시고 원치않았던 스오우에게 듣기를 강요한 말은 평범하게 가끔 하는 미친 소리였다. 말없이 안경을 건네주는 스오우에게 코웃음 치며 무나카타는 쑤욱 얼굴을 내밀었다.
"당신이 유일하게 쓸모 있는 건 대화할 때 표정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언제 봐도 똑같이 기분 나쁜 얼굴이라서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거든요."
"칭찬으로 알아듣지."
"욕입니다. 그렇지만… 그래요. 목소리만은 괜찮군요."
모든 것이 상식을 벗어나 인식되는 세계를 스오우는 알지 못한다. 물론 동정하진 않는다. 무나카타도 그것을 원하진 않는다. 결코 제게 주어진 일 앞에선 투덜대는 일이 없는 남자는 그래도, 가끔은 짜증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쓸모없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그런 게 언젠가 제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말을 하면서 무나카타는 스오우의 가슴을 오른손으로 쿡 찔렀다. 그 손놀림은 그의 길고 날카로운 검과도 닮아있었다. 그대로 뚫고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무나카타는 꾸욱 손가락을 눌렀다. …그러니까, 듣기 싫다고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세계만으로도 벅찬 삶이었다.
얼굴을 보지 못하던 기간 동안 조금 살이 내렸을까. 눈썰미가 없는 스오우에겐 가늠 되지 않는다. 주문한 위스키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는 동안 스오우는 무나카타를 관찰했다. 두 대의 담배를 내리 피우고 나서야 가늘게 눈을 뜬 무나카타는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조명에 비쳐 맴도는 게, 어쩌면 그가 말하던 바다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영하는 인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결코 스오우가 무나카타의 세계를 볼 수는 없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쩐지 입맛이 써, 스오우는 내내 입을 대지 않고 있던 버번 위스키를 들었다. 그 때, 잠깐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다 그쳤다.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내니 저장된 번호가 아니라 이름이 뜨진 않는다. 다만 익숙하긴 해서 스오우는 다시 앞을 보았다. 무나카타는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고민하다 스오우 미코토는 발신 버튼을 누른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테이블 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다 손으로 휴대전화를 더듬는다. 진동을 느끼는 촉감은 멀쩡할 것이다.
「여보세요.」
"무나카타."
「듣기 싫은 목소리네요.」
"먼저 전화한 건 네 쪽일텐데."
「실수였습니다.」
"아니잖아."
「아뇨. 실수입니다.」
"그럼 그렇다 치고, 지금 어디냐."
「저는 당신같이 침대에서 뒹굴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라.」
"혼자 술 마시고 있잖아."
「…….」
"두리번 대지 말고."
「언제부터 제 스토커처럼 굴었습니까. 제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술 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 스오우는 제 잔을 들고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리번대던 시선이 어느 순간 스오우를 발견했는지 이 쪽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확신을 갖지 못하는 흔들리는 눈이다. 자연스럽게 무나카타의 맞은 편에 앉은 스오우는 전화를 끊었다. 무나카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스오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나, 무나카타."
"당신이 너무 못생겨서."
"그래?"
"아예 못 알아보는 건 아닙니다. 새까맣고, 번진데다, 사실 형체는 제일 흐려. 그렇게까지 못생기면 못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가까이서 봐라."
"가까이 봐도 못생겼겠지. 쓸데없는 일입니다. 당신이 당신이란 건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나카타. 일단 있는 기능은 확실하게 쓰고."
스오우는 반쯤 일어나 무나카타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무나카타의 시각이 그나마 제 기능을 하는 반경 30cm 안쪽.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지도 말고."
어느 날 아침에 피웠던 낯선 담배맛이 입에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