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관생도, 코가미가 황태자인 그런 걸로 연애물이 보고 싶었으나 가이드를 잡다 보니 너무 어려워서 이건 도저히 안될 것 같다... 뭔가.... 그냥 이러고 있는데 유학생인 마키시마가 온다든가 절친자리 뺏기고 서먹한 기노자라든가 코가미가 안에 앉아 있는 동안 총알받이로 개처럼 구르는 기노자라든가, 정치감각은 제로라 암투에 휩싸이는 기노자라든가 보고 싶었지만...또르륵...ㅠ
밀덕이신 분들의 설명 바랍니다...제겐...너무 어려웠던ㅠㅠㅠㅠ
"뭐… 너무 그러지 마, 기노."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는 얼굴은 여전했으나 확실히,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매일 보는 얼굴과 닮았다. 몇 백년을 이어 온 왕가의 얼굴은 본관 1층 현관 옆에 걸려 있어 기노자도 수천 번은 봤을 텐데 왜 한 번도 깨닫지 못했을까. 그의 얼굴은 역대 가장 강경하고 공격적인 통치를 펼치고 있는 여왕과 똑 닮아 있었다.
"공개석상에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코가미의 말대로 나라에 하나 뿐인 왕태자는 한 번도 공개석상에 드러난 적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혼인한 적 없는 여왕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왕태자에 대한 얘기는 처음 그 존재가 드러난 이후로도 여전히 존재하기만 할 뿐, 정체는 밝혀지지 않아 여전히 언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기노자는 수도 가운데 있는 근엄한 궁을 상상한다. 대륙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 약소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가 모두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치열한 나라였다. 서쪽의 제국은 무역으로 언제나 부유한 나라를 차지하고 싶어했고 바다 건너 동쪽에선 제국을 치기 위한 교두보로 노렸다. 중세 어느 즈음에 종교 논란으로 이주한 과학자들을 모두 받아들여 주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진보한 기술과 셀 수 없는 전쟁의 경험으로 다져진 국방력과 전술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생각해보면 왕태자가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은 휴전 중이지만 전쟁은 언제 발발할 지 모른다. 그럴 바엔 단순히 방어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국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여론이 팽배했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왕위를 계승해 군 통수권자가 된다. 만 명의 군인이 있어도 필요한 건 유능한 지도자다. 그 근엄한 궁 한가운데에 앉은 코가미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기노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노자가 절대 나란히 올라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뜩이나 변변한 가문도 아닌, 심지어 이전 전쟁에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좌천 당한 자의 아들인 기노자라면 더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줄 거지?"
친구?
그 말에 열이 끝까지 뻗쳤다가도 기노자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치닫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까지도 따라잡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유연한 사고방식과 끊임없는 호기심, 철학적이기까지 한 고찰과 명민한 두뇌, 코가미가 한 번씩 입을 열 때마다 기노자는 때때로 그와의 아득한 거리를 실감하곤 했다. 단순히 내일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기노자에게 그가 그리는 것들은 너무 멀었다.
처음부터 그는 기노자에게 너무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희망을 가진 적은 없었으나 그 일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부인 당한 순간, 체념은 오히려 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래."
왕태자의 친구라니. 우연인 주제에, 그조차 과분한 타이틀이 아닌가.
"…ㅇ이, …노…, 어이, 기노자 중위!"
퍼뜩 정신을 차리면 옆에서 카가리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기노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잠이 와?"
카가리의 말대로, 잠이 와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면목 없어 그의 하극상 같은 말투를 지적할 새도 없이 얼굴이 홧홧해진다. 카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통신기를 매만진다. 지원요청을 넣은 지는 한참 됐지만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고립된 중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키는 것 뿐이었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는 삼일밤낮이 넘게 지속되었다. 이전에도 한 차례 큰 패배를 겪었던 지형이니 만큼 당연히 이 쪽으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예측은 완벽히 빗나갔다. 제국군의 주축은 전부 이 쪽에 몰려 있는 듯 했다.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전차는 자비가 없었고 포탄은 정확히 관사를 향했다. 지휘 체계를 수습하는 사이 대대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휘말렸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군분투 하다 보니 겨우 사십 여명 남짓 남은 중대에서 자동적으로 기노자가 지휘관이 되었다.
숨을 죽인 새벽 공기가 날카롭다. 모두가 예리한 살의를 지니고 상대를 노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전투는 시작될 것이다.
침착하자.
파리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불안한 팔십여 개의 눈동자는 오로지 기노자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마저 죽는다면 다음 부담은 카가리에게 넘어가지만 그는 고작 지난달에 임관한 소위였다. 실전 경험이 없는 건 기노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새파란 햇병아리에게 마지막 책임을 지우는 건 너무 가혹했다.
코가미.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오래된 얘기였다. 잠깐 조는 사이 학창시절의 꿈을 꿨다. 당시엔 룸메이트였던 그는 지금은 저 근엄한 궁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사관생도의 보급 제복 대신 목깃 하나까지 예단된 옷을 입고 옥좌에 앉아 전쟁 발발 보고를 듣고 있을까. 턱을 괴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도를 보는 얼굴이 훤했다. 생각이 막히면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게 코가미의 버릇이라 병과 과제를 할 때면 시끄럽게 책상을 두들기는 손가락을 경고조로 건드리는 게 기노자의 일상이기도 했다. 보고를 받으면서, 한번쯤 나를 생각해줄까.
궁지에 몰려서 정신이 맑아지는 건 그 때와도 비슷하다.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지만 여하튼 한 번 나락 끝까지 떨어졌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었다.
기노자 노부치카는 생각보다 애국심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켜야 할 가치는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었으나 하나 뿐인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의 정체를 우연찮게 알아버린 이후엔 어쩔 수 없이 나라 전체로 확대 되어 버렸다. 정체가 들통난 이후 코가미는 기노자에게 이런저런 소망을 털어놓았다. 좀 더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 모두가 행복한, 부조리 없는, 정의로운, 평화로운, 이상적인 나라. 그가 꿈꾸는 것을, 그가 지키고 싶은 것들은 곧 어쩔 수 없이 기노자가 지켜야 하는 것들이 되었다. 사랑이 다 그랬다.
여기서 진지를 지키는 것이 그 모든 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눈을 감으면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습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변덕스러운 해양성 기후는 늘 예측불허의 강수량을 자랑한다.
"카가리."
이름을 부르면 카가리가 입을 샐쭉 내밀며 왜요, 라고 묻는다. 묘하게 붙임성이 좋아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한 번 거하게 윗사람 심기 거스르고 영창 갈 말투였다. 하긴 그는 기노자처럼 위를 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워낙 말썽쟁이인 터라 부모님이 반 강제로 집어넣은 거라 했다. 그 부모님도 지금쯤 하나뿐인 아들이 사지를 헤맨다고 하면 전전긍긍할 것이다. 기노자와는 달랐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야만 했다.
"지금부터 이동한다."
"엑? 어디로?"
"낙엽이 썩을 때가 됐어."
기노자의 말에 눈을 깜박이던 카가리가 아하, 하고 작게 감탄한다.
울창한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나면 얼핏 보면 평지로 보일 정도의 낙엽이 쌓인다. 부엽토로 물렁한 땅은 비가 내리면 지반이 쉽게 무너졌다. 적어도 발을 묶을 정도의 타격은 줄 것이다.
"가자."
조용히 수신호를 보낸다. 살아남는 건 바라지 않았다.
나라에 모든 영광.
아마 지금쯤 코가미의 얼굴이 새로 추가되어 걸려 있을 그 1층 로비엔 저런 문구가 먼지 쌓인 채로 쓰여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문구가 떠올라 기노자는 속으로 한 단어만 바꿔보았다. 그것만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