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온] 애견가의 기쁨
지난 1월 31일 동네온리페스타/DOMINATOR TARGET:ON 에 배포했던 기노시온(...) 공개합니다
저 야요시온도 좋아해여 진짜.... 이 근본 없는 배포지 가져가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버리셔도 됩니다ㅠ
남자는 이 사회의 정석적인 표본이며 이상적인 시민이다. 신탁의 무녀가 하는 예지를 모두 따르는 충직한 교인. 모든 삶의 기준은 시빌라이며 잠재범과의 구분을 누구보다 엄격히 한다. 22세기의 신인류 혹은 뉴타입. 카라노모리 시온은 봇이 긁어모은 서브컬쳐 잡지의 단어가 가진 적절함에 유레카를 외쳤다.
한편으로 그는 구시대의 유물을 온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안경. 예전엔 안경이 이지적이고 깐깐한 사람의 상징 같았다지. 틀린 말 하나 없다. 취미는 동전 수집. 화폐를 긁어모으는 취미는 정말 드물다. 구시대의 향수를 갖기엔 그는 너무 어리다. 마음만 먹으면 한 세기도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는 시대에서 서른은 새파랗지. 정원 디자이너 검정 1급. 검은 넥타이를 목 끝까지 졸라 맨 남자가 섬세하게 마른 천으로 푸르고 여린 잎의 표면을 닦고 있을 생각을 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실제로 그의 데스크엔 작고 귀여운 다육식물 하나는 늘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 개. 그는 개를 키운다. 무려 시빌라 공식 도그 테라피스트 1급 자격증을 가진 개의 주인이다. 비유든 진짜든 그는 ‘개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카라노모리 안에선 영원히 저 선 밖에 있을 거라 믿었던 남자였다.
“개…….”
어젯밤은 너무 더워서 실내온도를 조금 낮춰놨더니 아침엔 퍽 쌀쌀하다. 카라노모리는 실내온도를 올리며 협탁의 담뱃갑을 집어 들고 한 대 빼물었다. 잠에서 덜 깬 느슨한 머리에 시동을 걸기 위해선 적당량의 니코틴이 필요한 법. 불을 붙이기 위해 눈으로 주변을 훑지만 어쩐지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어라라……. 이게 어디 갔지.”
어제 자기 전에도 그렇게 핀잔을 들으며 한 대의 행복을 만끽했던 기억이 나는데, 담배도 재떨이도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라이터만 없어 카라노모리가 침대 주변을 살피는 사이 뒤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린다.
"늘 생각하지만 매너가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라노모리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불쑥 흰 손이 나타나 능숙하게 라이터의 점화스톤을 돌린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번에 올라오는 불꽃에 내심 감탄하며 카라노모리가 담배를 갖다 대면 곧 빨갛게 타들어간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알았는지 불이 옮겨 붙자 흰 손은 불을 끄고 협탁 위에 가지런히 라이터를 올려두었다.
“그러면서도 불은 붙여주다니 본인은 끝까지 매너 좋은 남자라는 거야?”
“여자는 매너 좋은 남자에게 넘어간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나였지.”
그랬다. 남자에게 여자의 A to Z를 가르친 건 다름 아닌 카라노모리였다. 여자를 대할 땐 다정하고 정중하게,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기만 한 건 재미가 없으니 필요할 땐 완급 조절도 하면서. 공안국 감시관 8년이라는 엘리트 이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닌 모양인지 남자의 학습 결과는 우수했다. 쓸데없이 능글맞아져 카라노모리의 짓궂은 소리를 받아칠 여유까지 갖춰 버렸으니 이 경우엔 청출어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라노모리와 남자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지도 어언 1년이다. 서로의 명예를 위해 정확히 언급해두자면 여기서 ‘그렇고 그런 관계’란 필요에 따른 파트너를 얘기하는 거지 불륜 상대를 애기하는 게 아니다. 남자는 동료의 애인을 뺏을 정도로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고 카라노모리는 애인을 배신하고 딴 사람에게 정을 줄 정도로 헤픈 여자가 아니다. 카라노모리의 연인이자 기노자의 동료인 쿠니즈카 야요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둘의 사이는 제법 떳떳하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그 ‘기노자 노부치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줄 알았을까. 아마 그의 죽은 아버지도, 10년 지기 친구도, 지금은 그의 주인인 감시관도 알면 뒤로 자빠질 얘기다. 물론 당사자인 카라노모리도 가끔 적응 안되는 건 마찬가지고 쿠니즈카도 종종 미묘한 눈길로 기노자를 쳐다보긴 한다.
카라노모리의 권유는 그저 기분이었다. 기분파니 이유는 많았을 것이다. 그 날의 네일이 잘 돼서, 새로 산 향수가 괜찮아서 좀 자랑하고 싶어서, 혹은 새로 짜던 코드가 맘에 들지 않아서, 모니터로 봤을 땐 괜찮다 싶던 옷이 막상 보니 싸구려 원단이라. 아무리 실내 온도를 높여도 어깨가 서늘했던 밤, 문득 아무 생각 없이 이제는 마른 눈물 대신 캄캄한 한숨을 쉬고 싶던, 다만 연상의 자존심으로 차마 귀엽고 어린 연인을 부르지 못했던 그런 밤, 그랬을 즈음에 제 머리보다 한 뼘은 큰 남자가 보였던 거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잘걸 그랬지. 그런 후회가 스쳐가기 전에.
있잖아, 기노자 군.
카라노모리가 남자를 따로 불러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눈들이 마주쳤을 때 카라노모리는 확신했다. 권유의 말조차 불필요하다. 남자는 긍정할 것이다. 카라노모리의 입에서 나오는 제안이 무엇이 됐든 간에.
그 뒤로는 종종 있었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그럴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서로가 귀신같이 눈치 챘다. 암묵의 룰 안에서 밤은 부드럽게 흘렀다. 어색하고 당황해하면서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벗겨놓은 어깨는 생각보다 탄탄하고 이질적일 거라 생각했던 왼팔도 의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촉감까진 어떻게든 재현할 수 있어도 체온만큼은 재현할 수 없어 조금 차가운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카라노모리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괜찮을까?
이젠 그런 귀여움은 없지만 처음 그 남자는 그렇게나 귀여웠다. 서툴지만 열심이고 성실한 게 그 남자의 장점이었다. 경험의 우위에 있는 건 카라노모리였으니 가르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하는 김에 여자를 대하는 법도. 지금까지 일대일로 여자를 대하는 법이 없었던 데다 쑥스럽거나 겸연쩍어 하는 게 강해 남자가 시도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어깨에 웃옷을 걸쳐주는 것, 물이나 모닝커피를 가져다주는 것, 앉기 전에 의자를 빼준다거나 우울할 땐 키스해 주고, 투덜거릴 땐 일단 맞장구치는 법 같은.
“자.”
“감사.”
카라노모리가 한 대의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면 따뜻한 모닝커피가 건네진다. 그토록 못하던 술은 어느 정도 마시게 되었으면서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아직도 좋아하지 않아 본인은 여전히 맹물이다. 양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면 물컵을 내려놓은 남자는 이번엔 시트를 끌어올려 어깨에 둘러준다.
개…. 카라노모리는 일어나서 아까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 그는 개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길이 잘 든 개 같기도 하다. 우울할 때면 같이 낑낑대며 얼굴을 들이밀고 체온을 건네주는 학습능력 좋은 애완견.
“당신이 개 키우는 이유를 알 거 같아.”
카라노모리의 말에 남자는 눈을 잠시 깜박거리다 이해한 모양인지 조소했다.
“내 개들은 내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말 잘 듣고 똑똑한 개를 키울 거야. 그리고 명령을 내려야지.”
앉아. 손. 기다려. 거기서, 기다려.
괜찮은 남자는 애인이 있거나 유부남이거나 사라지거나 죽는다. 카라노모리는 그 모든 과정을 모니터 너머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정보 분석의 여신. 낯간지러운 별명을 카라노모리는 좋아했지만 동시에 조소하는 날도 있었다. 신의 전능함은 그녀에겐 없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아마 죽을 때까지 카라노모리는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노이즈 섞인 비통한 절규와 단말마의 비명을 듣고, 명멸하다 사라지는 점 같은 걸 바라보면서 누군가의 빈 자리를 생각할 것이다. 카라노모리는 그게 싫었다. 여섯이었던 것이 하나씩 사라져 마지막엔 둘이 되어 돌아오는 걸 바라보는 그런 아침. 겨우 살아온 마지막 한 명의 시선은 종종 허공을 배회했다. 어딘가로 훌쩍 사라질 것 같은 텅 빈 아침이 그 안에 있었다.
“STAY.”
얕은 조명 아래서 허공을 배회하던 눈들이 마주친다. 남자는 웃었다.
“…분부대로, 아가씨.”
빈 말이겠지만 카라노모리는 만족했다. 마르고 얇은 입술이 맞닿는다. 남자는 학습능력이 좋았다. 이런 똑똑한 개를 키운다면 분명 기쁠 것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