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스D19] 사이코패스 신간 및 기타 장르 판매 알림
2015년 1월 11일 제5회 케이크스퀘어 D19 '노래의☆Free!PASS'에서 판매하는 PSYCHO-PASS 기노자 중심 소설 '(un)do'의 수량조사를 진행합니다. 코우기노 요소가 있으나 정확히 커플링 소설은 아니고 1기 이후 기노자가 집행관이 될 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은 샘플 확인 후 해당 폼에서 수량조사 부탁드려요!
기간은 1월 8일 목요일까지입니다! ☞ http://2url.kr/a4k4
또한 동일 부스에서 쿠로코의 농구 녹황 'Jigsaw Falling into Place'(12월 옐로우캡 신간)와 리제님의 청황 'A Start of the Romance'(위와 동일), 애니메이션 K 아키후시, 적청, 무나후시 소설본도 함께 판매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un)do/PSYCHO-PASS/A5/중철/32p/3000원
▽Sample
언어의 섬세한 용례와 다양한 범주는 빈도에 기인한다. 당신은 말없는 생활에 익숙했다. 아홉 살 이후로 발화의 대상이 지극히 한정되어 버린 당신의 어휘는 빈곤해진다. 타이핑되는 형식적인 보고서와 윗사람에 대한 예의바른 존댓말, 동료에게 건네는 사무적인 대화와 사냥개를 다루는 엄한 주인으로서의 지시. 그 외에는 별다른 관계 속에서 말해 본 적 없는 당신은 그래서 새로운 위치에서의 언어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연습했다.
잠긴 방 안에서 당신은 소리와 어둠을 삼킨다. 오랜만이라며 인사한다. 썩 오랜만은 아니었다. 밤은 매일 있었다.
불야성의 도시를 암막으로 덮고 밤이 평온했던 날에는 침대에 누워 당신은 잠드는 대신 귀를 기울였다. 먹어치웠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 냉장고가 웅웅대는 소리, 누군가 복도를 걸어간다. 문이 열렸다, 닫힌다. 친구에게 말을 건다. 전화를 한다. 그녀는 지금 애인과 싸우고 있다.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치우면 어둠이 낮게 낮게 내려온다.
당신의 색상은 지금 어떤가요?
언젠가 보았던 바다를 기억해보려 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파우더 블루. 그러나 기억나는 건 오로지 석양으로 물든 수평뿐이다.
오늘도 색상 유지에 힘씁시다.
어딘가 기계음이 남는 소리는 매일 아침 듣는 것의 잔상이다. 마침내 눈앞에 어른거리던 다크 오렌지도 사라진다. 어둠과 고요와 적막이 내려앉는다. 무의식중에 들이쉬는 숨마저 크고 당신의 심장이 미약하게 목 밑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난다.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이미 괴물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당신을 잡아먹는다. 당신은 직감했다. 당신의 심장마저 먹어치울 것이다.
점점 희미하게 멀어지는 심장소리에 당신은 목깃을 움켜쥐었다.
“싫어―!!!!!”
한여름, 그것은 열네 살의 당신이 열흘 만에 처음으로 내뱉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소리가 살아났다. 빵빵대는 차소리. 그녀는 애인과 화해했다. 팬이 맹렬하게 돌아간다. 냉장고 안의 물은 내일도 섭씨 삼도를 유지할 수 있다. 당신, 열넷, 무릎이 부서질 것 같은 성장통에 시달리는, 노부치카, 한 때는 마사오카라는 성을 가졌던, 이제는 아득히 먼 섬 같은 활자의 이름을 가진, 나.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나는 살 거야! 살 거야! 살아서, 어른이 돼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나, 당신. 너무 어렸던, 아직도 어린,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컹- 잠에서 깬 개가 한번 짖는다. 식은땀이 흐르는 축축한 손으로 만진 개의 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당신은 그것이 환상임을 안다. 당신에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을 써보는 건 어떻습니까.”
악화된 범죄계수에 당신은 이제 별 관심이 없다. 근육과 뼈째로 짓뭉갠 팔은 아무리 거창한 현대기술이라 해도 온전히 되살리기 힘들었다. 어정쩡한 것으로 빈 칸을 채우기가 구차하여 당신은 일부러 누가 봐도 티가 나는 의수를 골랐다. 다시 갖고 싶은 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었기에 헛된 희망을 갖지 않기 위함이었다.
“제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압니다, 선생님.”
의무적으로 할당되는 2주의 교정 면담을 당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해야 한다면, 조금 더 편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래요. 한 번 악화된 범죄계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도 힘듭니다. 이것도 다음 한 번이 마지막이고, 당신은 재활이 끝나면 곧바로 교정 시설에 입소하게 될 겁니다.”
“솔직하시네요.”
“기노자 씨는 원래 감시관이었으니 잠재범에 대해선 저희만큼 잘 아시겠죠. 다만, 아무리 잠재범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갖는 건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다면 글로라도 써보세요. 생각을 정리하면서 토해내는 겁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안 하시겠다는 말이군요.”
“무의미한 일에 낭비할 시간은…….”
거기까지 말하던 당신은 깨닫는다. 시간은, 이제 차고 넘쳤다.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대신하는 것처럼 당신에겐 당신 혼자 보내야 할 시간만이 즐비했다.
“아뇨. 시간만은 많네요.”
“예.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상담 시간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울린다. 짐을 싸고 나가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한 것을 마지막으로 당신에겐 또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결국 당신은 교정시설로 입소하고 다시 공안국에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도 펜을 잡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삼키는 법은 알아도 뱉는 법은 몰랐다. 어둠만이 안녕, 하고 윙윙 사이렌을 돌리며 인사했다.
(중략)
현대문명이 고도화 될수록 인간은 동물의 감각을 잃어갔다. 동물의 본성, 결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도 구체화 되지 않는 추상의 본질은 야만이라는 단어로 퇴색되었고 냉정한 이지만이 추앙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문명의 발전은 생물학적 종의 진화가 될 수 없었다. 문명으로부터 기인한 의학의 발달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동물적 감각만큼은 구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끊임없이 도태되어 갔다. 씹어야 할 것들이 부드러워져 가며 턱관절 뼈는 이전보다 훨씬 짧아졌고 근육은 약해졌다. 하이퍼오츠 단 한가지로 통일된 식생활은 소화기능의 저하를 불러일으켰고 관절의 연골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얇아졌다.
도태된 생체는 전부 기계가 대체했다.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은 기계가 인류를 압도하는 디스토피아를 끊임없이 상상했었다. 환경오염, 국가의 전복, 체제 붕괴 같은 거시적 관점은 차치하고, 미시적인 관점에서도 현대는 편의성이 극대화 된 고도 문명의 유토피아가 아닐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이성, 합리적인 판단과 사고는 철저하게 중립적인 ‘프로그램’으로 넘어갔다. 단순히 수식을 계산해주는 수준이 아니다. 처음엔 그저 ‘추천’이라는 미명 하에 에둘렀다. 그 날 입을 옷과 점심 메뉴, 그럴듯한 화제의 방향과 연애의 상대마저도 반쯤은 농담처럼, 반쯤은 진심으로 사람들은 컴퓨터에게 선택을 떠넘겼다. 합리성과 편리성을 빌미로 인간의 내면을 수치화하고 진로를 결정했다. 선택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행위의 주도권을 서서히 침탈해 간 기계들은 이제 온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완벽한 체제가 되었다.
시빌라 시스템. ‘신탁의 무녀’는 별칭에 맞게 진리를 결정하고 인간의 미래를 점지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부 잠재범이란 죄수의 레이블이 붙여져 시빌라가 구성한 낙원에서 추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선 최소한의 자기 의지를 남기고 모든 인간의 의지가 배제 되었다. 한 때, 세계가 ‘세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때, 어느 독재국가에선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있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 한다’. 정말로, 아득한 얘기다…….
“…라는 글을 읽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기노?”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읽은 거야.”
“아, 가끔 들어가는 격투기 동호회 커뮤니티.”
“헛소리면 제목 보고 읽지 마.”
“제목이 재밌어서 들어간 건데. ‘진화와 문명, 현대 일본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신고감이군.”
“내가 다 읽으니 벌써 삭제되어 있더라.”
그래도 재밌는 얘기 아냐? 코가미는 재차 기노자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기노자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고 빵을 씹었다. 코가미의 일장 연설 속에 딱딱해진 빵은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렀다. 뚝 떨어진 입맛에 동하지도 않아 기노자는 기어이 반도 먹지 못한 빵을 내려놓았다. 일찌감치 카레우동 한 그릇을 흡입한 코가미는 기노자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야 안 먹어?”
“차라리 새로 사줄 테니 그런 거 먹지 마.”
“아니, 버리긴 아깝잖아.”
그리고선 코가미는 냉큼 기노자의 빵을 뺏어간다. 이미 180cm라는 장신에 더 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코가미의 식욕은 정말 쇠도 씹어 먹는다는 성장기의 비유 그대로였다. 가끔 기노자가 감탄하며 혀를 내두르면 코가미는 능청스럽게 기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만큼은 커야지.
눈대중으론 비슷한데 지난 신체검사 때 기노자가 183cm를 찍은 걸 코가미는 묘하게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가미가 기노자의 점심을 먹어치우는 사이 할 일이 없어진 기노자는 쥬스팩의 스트로를 빨아대며 멍하니 코가미를 바라보았다. 우적우적 먹는 꼴을 보아하니 본인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얘기였나 보다. 저질러 둔 본인은 마냥 태평한데 심란해지는 건 외려 기노자 쪽이다.
코가미는 종종 그랬다. 기노자가 절대로 하지 못하는 행동을 대담하게 했고 차마 생각하지 않는 부분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폐기구획의 고서점에서 금지된 서적을 사고 과거의 사회학적 이론들을 읽는다. 알려지지 않은 딥웹에서 자료들을 찾는다. 딱히 어떤 의지와 방향을 갖고 저지르는 일은 아니었다. 코가미는 그저 모든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모든 것들의 해답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맹렬한 호기심의 탐구는 인간에겐 당연한 행위이기에 코가미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시빌라는 이를 묵인했으며, 그래서 코가미의 사이코 패스는 언제나 깨끗했다.
하지만 듣는 기노자 입장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조마조마한 얘기들뿐이었다. 신빙성 없는 자료들에 근거한 사회 비판론들은 흘려듣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만약 코가미가 저런 낭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면 제아무리 청명한 사이코패스를 유지하는 코가미라도 어떻게 될지…….
문득 심장이 누가 쥐어 잡는 것처럼 조여 안으로 꾹 말려 쪼그라든다. 저릿하게 말려왔다. 말단부터 싸해지는 감각이 아득하고 아찔하여 기노자는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시야의 구석부터 스물스물 기어온 어둠 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스쳐가는 빨간 빛이 보였다. 보이지 않아도 기노자는 그게 차량의 경광등임을 알았다.
“어이, 기노?”
기노자의 것보다 현저하게 뜨거운 코가미의 손이 기노자의 팔을 왈칵 붙잡는다. 잡은 손 모양새 그대로 피부가 맞닿은 부분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극명한 통증에 기노자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 새 쥬스팩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고 기노자가 앉아있던 의자는 아까보다 살짝 뒤로 밀려 있었다. 찰나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상체가 휘청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아니…….”
기노자는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아까보다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제가 먹은 게 기노자의 점심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한 코가미가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 기노자는 황급히 코가미의 손을 털어냈다. 언제 그랬었냐는 듯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욱신거리던 열감과는 달리 피부는 멀쩡했다. 다만 날카로운 고통이 아직도 기노자에게 메아리처럼 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보건실 가야 되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냐.”
“점심 안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다시 사줄까, 빵?”
Jigsaw Falling into Place/녹황/A5/중철/24p/2500원(수량조사 안하셔도 됩니다!)
▽Sample
1.
“하하, 서프라이즈!”
“왜 말이 없어요? 반갑지 않슴까?”
“조금 반겨주라고요, 미도리맛치.”
“와 미도리맛치가 녹아내려요. 신기하다. 만져봐도 됨까?”
“왜… 왜, 말을 안 해요? 저도 그런 거 하기 싫었어요. 누가 그딴 얘기 다신 꺼낼 줄 알고. 이길 수 있었는데……. 저도 3점슛 쏠 줄 알아요!”
“…얌전히 들어오라는 거다, 키세.”
2.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들어오자마자 코코아 내놓으라고 말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먹고 싶었어요.”
“사먹으라는 거다.”
“일주일 동안.”
“…….”
“집에 처박혀서 TV만 보는데, 코코아 선전이 나와서 그 때부터 갑자기 먹고 싶었어요. 일주일 동안! 난 집 밖에 일주일 동안 못 나갔다구요!”
빼애애애액-
그런 효과음이 있다면 미도리마는 기꺼이 그 단어를 키세의 옆에 오려 붙여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끄에에엥 코코아! 코코아! 이건 뭐, 다섯 살 짜리 애도 마트에서 이렇게 울진 않을 거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내쉬며 전기포트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훌쩍거리면서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는 키세는 아닌 게 아니라 안 본 사이에 꽤 수척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왔을 때가 3주 전이었나.
미도리마는 스케쥴러를 살펴보았다. 3주. 미도리마와 키세는 늘 그 정도의 간격으로 만났다. 일주일은 너무 짧고, 한 달은 너무 길어 그 중간인 보름인데 시간이 안 맞으면 어영부영 미뤄지고 하는 애매한 시간.
그 때는 종일 시간이 날 것 같다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겸사겸사 진찰도 좀 받고?
키세는 늘 자신의 문제를 가볍게 말하고 제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처음 농구부에서 봤을 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오만했던 키세 료타에게 이런 평을 내릴 줄은 15년 전의 미도리마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 지역 학생 모델에 불과했던 키세가 그럭저럭 지나갈 만한 사람들이 알아보는 연예인이 된 건 스무 살의 얘기였다. 패션모델로 활동하기엔 걸음걸이며 포즈를 배울 시기를 농구로 훌륭하게 날려먹고, 연예계로 진출할 생각은 없다던 키세를 미도리마는 대학교 1학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봤다. 청바지 광고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키세를 보게 되는 빈도가 점점 늘었다. 다음해 여름에는 TV에서 3점 슛을 쏘는 키세가 나왔다. 탄산음료 광고였다. 카피라이트가 뭐였더라.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촌스럽기 그지없는 대사였는데 키세 료타의 데뷔를 말할 땐 빠지지 않는 말이었다. 인지도를 높인 체육계 연예인 특집 예능에서도 그렇게 소개됐다.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과거 영상이 나왔다. 그 영상들 사이엔 테이코 농구부원들이 섞여 있었고, 덕분에 미도리마는 졸업할 때까지 별명이 ‘슈터’였다.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이 광고는 안 본 사람이 없지만 키세 군은 실력에 비해서 운이 안 따랐다고 하던데요.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던 거죠.
방금 전 영상이 농구부 마지막 경기였다고.
네. 그 뒤로는 못하게 됐슴다.
방청객들의 안타까운 탄식 뒤로 마지막 경기에서 분에 못 이겨 펑펑 울어버렸다는 키세의 부끄러운 고백과 그 뒤로 연예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사회자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그 날이었나. 키세가 술에 잔뜩 취해 처음으로 미도리마가 살던 집 문을 두드렸던 건.
그 다음 해에는 서점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포스터에서 키세를 볼 수 있었다. 연예인 키세 료타의 화보집. 심야 단막극에 출연하고 일일드라마에도 나왔다가 어쩌다보니 황금시간대 드라마도 맡고, 운이 좋았슴다.
키세는 낄낄대며 말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삼십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미도리마가 문을 두드리고, 키세의 등을 두드리고, 양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키세가 유명해 질수록 미도리마의 집에 들르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평소와는 다른 비척대는 발소리와 미도리마를 부르기 전 한 번 멈추는 박자를 미도리마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미도리마는 대학을 졸업했고 레지던트까지 거쳐 새끼 전공의 타이틀을 달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제 명함을 건넸다. 지금 떠올리면 당시의 미도리마는 어찌됐든 전공의가 된 걸 자랑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와, 미도리맛치 대단함다! 멋있슴다!” 손뼉을 짝짝 치면서 키세는 명함을 자세히 보다 물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감정이―
“미도리맛치는 뭔가 그런 거랑 안 어울리는데. 왜 그런 걸 담당으로 선택했슴까?”
펑.
키세의 의문은 어찌보면 타당했을 것이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미도리마는 외과에서 탐내는 인재였고 본인도 맘이 없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번드르르 해 보이지만 응급상황이라도 생기면 밤낮 없고, 수술이라도 들어갔다간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이 소요되는 이 직종에서 외과는 탑클래스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 필수인 마당에 책상 앞에 붙어 공부만 하던 애들이 버텨나기야 하겠는가. 그 와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도합 6년이나 꾸준히 농구를 한 데다 전국구 수준의 대회에서도 강호라 불리던 학교의 에이스였던 학생이라니. 자세히 뜯어보면 학점도 좋고 손놀림은 전에 없이 섬세해 모자란 게 없다. 저건 무조건 외과다! 안돼도 외과에서 끌고 간다! 라고 다짐했던 교수들은, 그러나 미도리마가 제출한 전공 선택지를 보고 좌절해야만 했다.
이후 수많은 회유와 협박을 감히 키세는 상상할 수 있을까.
키세가 멀쩡한 정신으로 미도리마의 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났을 땐 미도리마도 키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의 첫 매니저는 골초라 키세도 몇 대를 얻어 피웠고 술 마실 때는 그도 얇은 필터를 물게 되었다. 립스틱처럼 생긴 새빨간 열 개들이 담뱃갑을 미도리마는 매트리스 틈새에서 발견했다. 불면증은 스케쥴이 없을 때 더 심해졌다. 키세는 단순히 잠이 줄어들었을 뿐이라 주장했지만 하루 두 시간의 수면을 누구도 잠이 줄었다는 수준으로 말하진 않았다.
“새삼스럽게.”
인터하이 이후론 늘 그랬슴다. 학교 다니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지갑 안에 굴러다니는 알약은 수면유도제와 진통제였다. 수면제를 처방받으려면 정신과를 가야 되는데 그건 싫고, 비 올 것 같으면 무릎이 쑤시거든요. 이제는 굳은살이 박였던 흔적조차 없는 매끈한 손으로 키세는 알약을 두 개 털어 넣었다.
(중략)
“앞으로 잘 부탁함다, 미도리맛치.”
“무엇…을 말이냐.”
“잠잠해질 때까지 이 집에서 신세지기? 아침에 다녀와요,도 해주고 올 때는 잘 다녀왔어? 라고도 해줄게요.”
“뭣 때문에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미도리맛치도 알지 않슴까. 앞으로 2주치 스케쥴이 전부 캔슬됐슴다. 기자들은 밖에서 죽치고 있을거고. 난 집에서 코코아 먹고 싶어서 죽을 거고, 팬들은 팬들대로 난리지. 무섭다구요. 자고 일어났는데 슬쩍 문 열어 보면 포스트잇이 쫙 붙어있다니까요. 오빠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응원할게요, 같은 건 귀엽기라도 하지.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 그전에 난 연애를 안하는데!”
“…내가 거절하면?”
“거절할 거에요?”
선조들이 말하길,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고. 다 마신 코코아 잔을 자연스럽게 내미는 키세에게, 또 그걸 습관적으로 받아들고 설거지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미도리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얘기나 하는 거다, 키세.”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