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황] 목소리의 맛
목소리를 먹는다는 집착은 장르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것이다...
카사마츠+키세 조합은 카니발리즘처럼 격한 느낌은 아니고(이 쪽은 오히려 당연히 청황!) 립황이든 황립이든 카사마츠가 키세를 포용하는 위치인데 어쨌든 저는 청<-황<-립의 구도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카사마츠 센빠이 사랑해여ㅠㅠㅠ 언젠가는 키세를 쟁취할 수 있을거야ㅠㅠㅠㅠ 그나저나 녹황청은 언제 쓴담...
초콜릿은 달고, 샤벳은 시고, 눈물은 짜고, 약은 쓰고, 네가 웃는 소리는 달고, 기분이 나쁠 땐 시고, 울 때는 짜고, 그 애를 생각하고 있을 때의 목소리는 쓰다. 너무 써서 죽을 것 같다.
"선배, 뭐하고 있슴까? 곧 쉬는 시간 끝나는데 연습 안감까?"
인터하이가 끝나고 첫 연습이다. 다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맞이해 들떠있는데도 카사마츠는 왠지 우울했다. 학교에 나와도 기운이 쭉 빠져 체육관 뒤 벤치에 가만 앉아있으면 건방진 후배가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이 새끼, 한 대 패줄까? 평소같았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발부터 나갔겠지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짭짤한 맛에 카사마츠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는 시간 곧 끝난다더니 키세는 묻지도 않고 카사마츠의 옆에 털썩 앉았다. 특별히 아끼는 브랜드의 미네랄 워터를 입에 콸콸 부어넣다가 카사마츠에게도 권한다. 남아있는 희미한 맛을 지우기 위해 물을 들이키면 키세가 입을 열었다.
"방학은 어떻게 지내셨음까?"
"그냥 뭐."
인터하이가 끝난 여름의 막바지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집에서 나갈 생각조차 들지 않아 오랜만에 카사마츠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여유롭고 느긋한 생활을 즐기려고 했지만 패배의 뒤끝은 확실히 씁쓸했고 가라앉은 여운은 오래갔다. 집 안의 공기는 언제나 그렇듯 화목했고 따뜻하고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는 훈김이 올라오는 밥의 맛이 나는데도 방에만 들어가면 그 쓴 맛이 계속 입 안에 남아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카사마츠는 목소리를 들으면 '맛'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꽤나 불편했는데 좋든싫든 늘 입 안에 다른 맛이 맴돈다는 건 언제나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었고 사람에 따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괴상하고 기이한 맛이 나기도 했다. 이미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기분이 좋으면 대체적으로 그건 좋은 맛이었고 나쁘면 아주 쓰거나 텁텁하거나 진득하게 입 안에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단순히 이미지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그 맛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목소리의 맛은 제각기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밍밍한 맛이었다. 쥬스에 물을 풀어놓은 듯한 희미하고 멀건. 괜찮은 녀석이라면 괜찮은 맛이 났고 별로인 사람이라면 그 맛도 별로였다. 아니, 애초에 맛이 좋지 않는 사람들하곤 대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카사마츠가 멀어졌고 나중에 다른 얘길 들었을 때 그러려니 하는 걸까. 잘 모른다. 이 쓸모없고 무어라 이름 붙이기도 뭣한 능력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람을 상대할 때 뿐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믿는 거다.
기적의 세대의 끄트머리라곤 하지만 키세 료타는 굉장한 녀석이었다. 테이코 시절의 경기를 본 적도 있었고 학생 모델이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얼굴만은 키세가 카이조에 입학하기 전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게 인간성하고는 다른 거지.'
그래서 올해 첫 부활동에서 키세를 볼 때까지 카사마츠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좋지 않은 맛이 날 경우 피해야 되지만 주장을 맡고 있는 이상 졸업할 때까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제발 평균만 되어라, 하고 빌고 빌다가 신입생 인사 직전까지 느지막히 들어갔다. 눈꼬리가 예쁘장하게 올라가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한 쪽 귀에는 피어싱까지 한 후배는 찾아볼 필요도 없이 눈에 띄었다.
"첨 뵙겠슴다. 1학년 키세 료타임다!"
구경 온 여학생들이 꺄꺄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사마츠는 생경한 감각에 혀를 씹어야만 했다. 상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거늘 눈가를 찡그리는 카사마츠가 이상했던지 키세는 아주 친절하게 - 재수없다 -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어봤더랬다.
"선배, 무슨 문제라도…?"
"아니. 3학년이고 주장인 카사마츠 유키오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키세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달았다. 차갑고 시원한 레몬소다나 풍선껌 같은 맛일까. 아니 그것보다 훨씬 쌉싸래하고 아득한 단 맛이었다. 물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 뒷끝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좋은 녀석일 거라고, 카사마츠는 한결 마음을 놓고 3학년, 마지막 고등학교 부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키세는 그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이라 그다지 다양한 맛이 나진 않았다. 우는 소리를 해도 기본적으로 맛은 변하지 않았고 기분이 좋으면 그것보다 살짝 새콤하고 나쁘면 셨다. 세이린과의 연습경기에서 패했을 땐 조금 짠 맛이 났지만 그것조차 달달했다.
그렇지만, 그건.
"쓰네."
"네?"
"아니."
아직도 썼다. 하게 해주세요, 카피.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는 몹시도 썼다. 경기가 끝난 뒤엔 더 썼다. 너무 짜서 쓴, 바짝 타 버린 쿠키 부스러기 같은, 말을 하면 할수록 배어나오는 목소리는 너무 써서 혀가 저릿할 지경이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 경기가 끝난 뒤의 회식에서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것을 동료들과 감독, 키세는 패배로 인한 풀죽음이라고 생각했던듯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키세는 오히려 다음엔 열심히 하겠슴다, 같은 제법 기특한 소리도 했지만 그 때마다 느껴지는 아릿한 쓴 맛에 오히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여운을 떨쳐내는데 방학을 몽땅 할애했는데 다시 만난 키세의 입에서는 여전히 짜고, 쓰디 쓴 맛이 배어나왔다.
"아오미넷치는."
불현듯 키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눅진하게 엉겨붙는 오래된 단 맛이 희미하게 여운만을 남기고 대신 쓰고 짭짜름한 맛이 엉켜있었다.
"저는 아오미넷치를, 어쩌면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름다."
키세가 테이코의 동창들을 얘기할 때는 평소와는 늘 다른 맛이 나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오미네 다이키는 특별했다. 키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면 항상 진득한 초콜릿 같은 엉겨붙는 단 맛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때론 짜기도 해서 카사마츠는 일찌감치 키세 료타에게 아오미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위치임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오미넷치는 굉장함다. 아마 그것도 전력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함다. 제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아오미넷치도 더 성장했겠죠. 앞으로 윈터컵도 있고 졸업할 때까지 시합도 꽤 많이 남았으니 몇 번 더 마주칠 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오미넷치를 평생 이길 수 없을 지도 몰라요."
맛은 둘째치고서라도 키세답지 않은 말이었다.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키세의 물만 들이키고 있으면 키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겨야만 함다. 1on1은 안될 지 몰라도 선배가 절 믿어주니까 다음에 붙으면 꼭 이기고 싶슴다. 카사마츠 선배랑 함께면 왠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듬다."
"그거 위로냐?"
"엇, 그게 그렇게 되는검까?"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한 척 바라보고 있는 키세의 얼굴에 괜시리 부아가 치밀어 카사마츠는 들고 있던 생수병을 던져버렸다.
"이거나 갖고 가라, 임마."
"으에 다 먹었잖슴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물 한 병 갖고 무슨 생색이야. 애초에 그딴 거나 골라마시는 네가 이상한 거지. 그냥 다 똑같은 물이잖아."
"아님다! 미묘하지만 맛에 차이가 있다구요!"
키세가 또 징징대기 시작했지만 카사마츠는 일어나 바지 뒤를 툭툭 털었다. 제 마음도 정리가 안된 새파란 후배한테 위로를 받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카사마츠는 키세의 정강이를 발로 콱 차버렸다.
"일어나. 쉬는 시간 끝났다. 언제까지 퍼질러 앉아있을 거야?"
"선배가 먼저 앉아있었던 거잖슴까!"
"그래서 뭐?"
"…아님다. 일어나겠슴다."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투덜대며 일어나는 키세의 목소리는 어느덧 평소처럼 활기찼고 맛은 그래도 약간 달작지근하게 돌아온 것 같았다. 아프다며 종아리를 문질거리는 키세를 내버려두고 걷고 있으려면 뒤에서 키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 선배, 같이 가요!"
문득 키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더 달아졌음을 카사마츠는 깨달았다. 아오미네를 부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달달한, 이상한 맛 같은 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짙은 농도의 단 맛을 입 안에서 천천히 되새김질하고 있으면 총총총 달려온 후배가 옆에 바짝 붙어 보폭을 맞춘다.
"선배, 방금 거 진짜 아팠슴다."
"더 세게 때려줄까?"
"조절 좀 해달란 뜻이었는데요!"
카사마츠는 손을 들어 자신보다 한 뼘은 큰 키세의 머리를 콱 잡고 부비적거렸다. 아아아, 선배 머리 망가짐다! 키세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입 안에 남아있던 질척거림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래. 차라리 내 이름을 불러라. 네가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써서 죽을 것만 같다. 그냥 나를 불러. 만약 내가 그 애라면, 나는 너에게 죽어도 이런 맛을 내게 하진 않을텐데.
그, 오래되어서 원래의 단 맛을 잃어버린, 눈물 범벅이 된 쓰디 쓴 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