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루루] 관짝
를르슈 생일기념 키워드 5개 중 첫번째. 11월에 썼지만 원고 때문에 기어이 작년 안에 쓸 수 없었다
나머지 네 개는 순차적으로 언젠간 쓰는걸로ㅠ
밤새 비가 왔다. 공기 중에선 습한 흙냄새가 아련하게 났다. 가을 비가 연일 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엔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재로 폭격을 맞은 도시를 청소할 인력은 없었다. 며칠 동안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흐리게 여명의 조각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와는 별개로 스자크는 비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날씨가 주는 통속적인 감상 이전에 유독 쿠루루기 스자크의 인생에서 책갈피를 꽂아 놓을 만한 부분에는 전부 비가 왔기 때문이다. 쿠루루기 겐부가 죽은 날이라든가 나리타 작전 뒤의 유해 수습 때라든가. 샤리 페넷의 장례식 같은. 여름의 눅진한 습도와는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 생명의 무게를 더한다면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 해?"
를르슈는 우산도 갖지 않고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어깨가 축축했다. 어디 갔다 왔어? 옥상에. 거기서 뭘 봤는데? 글쎄. 보이는 건 하나밖에 없지.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르고 있던 것을 스자크의 어깨에 얹고는 침대에 엎어졌다.
"그거 따뜻하더라."
앗, 이거 내 망토잖아. 스자크가 불평하든 말든 침대에 엎어져 뒹굴면서 이불을 둘둘 마는 꼴이 영락없이 애벌레다.
"내 거 막 입고 돌아다니지 말란 말야!"
"왜. 그거 모자 뒤집어쓰면 안락해. 엄청 커서 푹신푹신하고. 좀 무겁긴 하더만."
"네 거 입고 가."
"내 건 모자 안 달렸어."
"네 모자 써!"
"그건 안 따뜻해. 목이 휑해."
"그럼 담요 두르고 가든가!"
"싫어. 네 게 좋아."
그렇게 말하고 를르슈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가 답답한지 도로 내리고는 불평했다.
"이렇게 답답한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를르슈의 맥락 없는 말을 옷에 묻은 빗물들을 툭툭 쳐내면서 스자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99대 황제는 기사가 하나 뿐인 데다 세계를 적으로 돌린 악질 중의 악질이다. 를르슈야 이러니저러니 말만 하면 되고 실질적으로 반란을 잠재우는 것은 그 하나 뿐인 기사의 몫이라 제복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기능성이었다.
예복이 정복이고 정복이 곧 파일럿 슈츠라 안은 화려하게 겉에 두르는 망토는 체온 유지를 위해 통상적인 제복의 망토보다 훨씬 두터운 재질로 되어있다. 뭐, 후드는 만든 사람 취향인가? 스자크는 뒹굴대며 창밖을 응시하는 를르슈를 힐끔 보고는 반듯하게 옷걸이에 걸어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자크는 그 후드가 맘에 들었다. 모자가 깊어 뒤집어 쓰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락하다. 언제 어디서라도 잠들 수 있는 만능 침낭을 몸에 두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젠 입을 일도 없지만 방에서라도 입고 뒹굴려고 소중히 모셔 놓은 건데 주인 허락도 없이 홀랑 입고 나가 화산재 잔뜩 섞인 비를 맞고 돌아오다니.
"스자크."
"……."
"스- 자- 크-."
"……."
"야, 스자크, 옷 좀 입고 나갔다고 삐졌냐!"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지! 왜 내 옷인데 네가 맘대로 입고 나가냔 말야!"
"어차피 이제 입을 일도 없잖아. 그리고 그 옷의 주인이 너면 네 주인은 나야!"
본디 말싸움에는 강한 편도 아닌 데다 스자크는 를르슈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덤빈 제가 멍청이인지, 할 말이 없어진 스자크에게 또 미안했는지 를르슈는 툭 덧붙인다.
"흰 색은 너무 눈에 띈단 말야. 그러라고 고른 거긴 하지만."
를르슈는 굳이 따진다면 흰색보단 검은색을 좋아했다. 때가 잘 안타니까 빨래 잘 안해도 돼, 라는 몹시 가정적인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속옷취향이라든가 하는 걸 봤을 땐 그냥 어두운 색을 좋아했다. 그런 를르슈가 새 옷으로 흰색을 고른 이유는 마찬가지로 기능성 때문이었는데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눈에 띄는 색이어서 였다.
"그리고 흰 색은 수의지 상복은 아니잖아."
네 번째는 저런 이유쯤 된다. 를르슈의 기호는 완벽하게 배제된 순백에 금사로 마감된 괴상한 옷은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만들어졌다. 누구라도 한 눈에 그의 죽음을 납득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오늘은 눈에 띄면 안되기도 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은 세계를 통일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99대 황제 폐하께서 정한 애도 기간이었다. 특히 이 곳, 도쿄에서는 지인 중에 누구 하나 죽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테니 모두가 새까만 상복을 입고 다닐 터였고 흰 옷을 입는 건 아마 망자 뿐일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이라도 구경하고 왔어?"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눈 앞에 있잖아. 거대한 관짝이."
그렇게 말하며 를르슈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를르슈가 마지막 거주지로 결정한 임시 도쿄 정청은 프레이야로 깊게 파인 이전 도쿄 정청 근처에 위치해 있다. 옥상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그 거대한 규모의 크레이터가 한 눈에 보인다. 수도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해도 이후의 피해를 생각하면 그다지 막대한 인명피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민간인은 모두 대피 상태였고 도심에서의 격전은 감히 세계를 절반으로 나누어 다툰 규모만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러운 첫 탄두가 발사된 곳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시작과 끝의 무덤이라고 할 만 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
흐름은 다시 스자크가 무시하고 를르슈가 한숨처럼 흘렸던 대화로 돌아왔다. 이번만은 외면할 수가 없어 스자크는 얌전히 대꾸해 줬다.
"그 왜, 흡혈귀는 보통 심장에 말뚝을 박고 관에 못을 박아버린다고 하잖아."
"응. 아마?"
"끔찍할 거 같아. 이불 속에만 있어도 답답하고 숨 막히는데."
"그러라고 하는 거잖아. 괴물이니까."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앉으면 그 거대한 무덤이 보인다. 적나라한 죄의 상징. 단절된 수도관에서 흐르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젖거나 마른 흙들을 스자크는 기억하고 있었다. 말하는 내용과는 반대로 아마 쿠루루기 스자크는 저 안에 괴물을 넣는 대신, 사람인 '쿠루루기 스자크'를 넣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신념을 같이 묻어버리고 남은 건 길을 잃은 괴물이었다.
그렇구나. 를르슈는 눈을 깜박거리며 몰랐다는 듯이 감탄했다.
- 그러면, 있잖아 스자크.
를르슈는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며 웃었고 스자크는 그렇다면 저도 부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사이에 해가 뜨고 찬기가 가셨다. 이 일주일 동안 내리 비가 내린다면 아마 다음주에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화산재가 쓸려 나가고 멀끔한 하늘이 보일 것이다. 애도기간의 일주일은 공식적으로 휴일이니 둘은 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늦잠을 자기로 했다.
그라운드 제로에는 늘 그럴싸한 기념비가 세워지기 마련이고, 그럴싸한 기념비는 그럴싸한 준공식도 갖기 마련이었다. 형식적인 리본 컷팅과 형식적인 연설이 끝나고 모두가 사라지는 와중에도 나나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나나리가 원해서는 아니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사람들에게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갖다 대는 제스쳐는 차마 거절하지 못할 열일곱 소녀다운 면모가 분명하여 모든 이가 제 갈 길을 갈 때까지 주변은 적막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로- 씨."
아직도 입에 붙지 않은 어색한 호칭에 나나리가 한 번 파안하고 손을 뒤로 올렸다. 장갑을 낀 마디가 굵은 손이 제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저…저희가 여기 오래 있었습니까?"
"네, 아주 오래요."
"결례를."
"괜찮아요. 분명 중요한 일이었겠죠?"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생각난 게 있어서."
뚜껑이 없던 거대한 무덤에 드디어 묘비가 세워진 기분이었다. 그 커다랗던 크레이터를 온전히 메우기 위해 몇 톤의 흙이 필요했다. 평평하게 다져진 땅 위로 높이 솟은 기념비에 쿠루루기 스자크는 겨우 안정감을 느꼈다.
"가시죠, 나나리 님."
- 있잖아, 스자크.
속살거리던 웃음을 생각한다. 그러면 있지, 내 관짝에도 못을 박아줘. 심장에 말뚝을 박고, 관짝에는 못을 박아줘. 괴물이 영영 빠져나올 수 없게.
- 그러면 있잖아, 를르슈.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오래도록 늦잠을 잤다. 아이처럼 웅크리고 우리는 이렇게 나란히 갇히는 꿈을 꿨다.
- 그 옆에 나도 같이 묻어줄래?
길을 잃은 괴물이 겨우 빠져나올 수 없게 매장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