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황] 꿈의 대화
모처 리퀘. 쌍방향 짝사랑은 진리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란 마치 키세에게 아오미네 같은 것일까....
사이클을 못 돌리고 밤새고 추석맞이 하는데 진짜 미치는 줄... 겨우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생활로 돌아간 것 같긴한데 오늘도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자다가 4시에 일어났으니 잘 모름... 짝사랑 헉헉 짝사랑 이러고 있는 와중에 지금 쓰는 것도 짝사랑이란 게 유멐ㅋㅋㅋㅋ키세 짝사랑 그만해....ㅠ
꿈을 꾼다.
매일매일매일매일. 질릴 정도로.
눈 앞에 없어도 손으로 그 얼굴의 윤곽을 만들어 내고, 머리카락 끝까지 손으로 쓸어내렸을 때 어느 지점에서 어떤 느낌으로 끝나는지, 어떤 감촉인지 알고 있다. 목울대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쇄골이 얼마만큼 튀어 나왔는지, 어깨의 선은 어떠한지, 셔츠를 벗기 위해 들어올린 견갑골과 근육의 움직이는 모양, 주먹을 쥐었을 때의 뼈의 굴곡, 살짝 튀어나온 갈비뼈, 손목과 발목의 피부로 비치는 파란 핏줄의 엷은 색감까지 모두 알고 있다.
우스운 건 미도리마는 맨손으로 키세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져본 것은 겨우 경기중에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닿아본 손바닥 뿐일까. 매끈하게만 보이는 손은 - 사실 처음엔 정말로 그랬지만 - 마디마디 굳은살이 잡혀있었다. 그 감촉에 처음엔 조금 놀랐었던 것도 미도리마는 기억한다. 단지 그 뿐. 현실에서의 키세 료타, 그와 보냈던 2년여의 시간은 단지 그것뿐인데도 현실에서는 꿈처럼 무심하게 넘겼던 모든 일상의 그가 꿈에서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미도리맛치. 그렇게 부를 때의 목소리와 입술, 얼굴 근육, 목의 움직임, 살짝 웃을 때의 눈꼬리, 치켜올라간 속눈썹. 현실에서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꿈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인것 마냥 미도리마를 잠식하고 달라붙어 내뱉는 숨소리와 저 안 쪽에서 울리는 둔중한 심장소리를 온 몸으로 듣게 해놓고 키세는 귓가에 속삭인다.
꿈이다.
눈이 번쩍 떠져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천장을 확인한다. 삐삐삐삐- 거리며 작은 소리를 내는 알람을 끄고 오른손으로 침대 옆의 탁상을 더듬거려 안경을 쓴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의 쌀쌀한 공기는 조용했다. 미도리마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걸음을 옮겨 양치질을 하고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한다. 물에 젖은 왼손을 잘 닦아 말린 다음 테이핑을 다시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방에서 나와 오하아사를 챙겨보며 아침을 먹고 가방과 럭키아이템을 챙긴다.
미도리마는 모든 일에 있어 정해진 순서를 지키는 편이었다. 자의식이라곤 요만큼도 작용하지 않는 꿈조차 그러하다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미도리마는 늘 현실보다도 생생하고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꿈을 언제나 꿈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처음은 다를지언정 늘 키세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은 똑같았으니까.
"그런 말, 꿈인게 당연한 거다."
- 좋아해.
평생을 가도 현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니까.
「미도리맛치 심심함다(?ω?).」
「미도리맛치 뭐해요오´ㅅ`」
「미」
「도」
「리」
「맛」
「치」
「♥」
휴대전화의 진동이 연속으로 여섯번쯤 울리자 미도리마도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죽어.」
짤막하게 보낸 문자는 늘상 보내던 말이었지만 5분, 10분, 20분이 지나도록 답신이 없으니 뭔가 이상하다. 몇 번이나 폴더를 달각거리다가 잠깐 고민했다가, 미도리마는 신중하게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진짜 죽은 ㄱ」
거기까지 썼을 때쯤 지이이잉- 하고 울린 진동에 얼른 수신메시지함을 확인하면 다행히도 키세의 문자였다. 조금은 안도한 마음으로 무어라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고 있으려면 지금까지 답신을 못한 게 한이었던 것마냥 미도리마의 휴대전화가 쉴 새없이 웅웅대기 시작했다
「(?Д`)???」
「저 진짜 울 거에요!」
「오늘은 우울해서 미도리맛치랑 놀고 싶었는데」
「저 진짜 우울하단 말이에요」
「울 거야. 내 맘도 모르는 나쁜 미도리맛치(` A ´)」
「너무함다 오늘 놀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전 왕따임까? 아무도 안 놀아줘(?Д`)???」
「미도리맛치를 믿었던 제 잘못이었슴다. 이제 문자 안할래요」
어이, 잠깐. 여기서 진짜 끝인거냐?
늘 키세에게 일방적으로 오던 문자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울어? 누가? 키세 료타가? 우울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상황에 미도리마의 머릿 속이 핑핑 돌아간다. 키세 료타를 아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의 얘기였다. 우울하다고? 키세가? 그 키세 료타가? 적어도 미도리마가 아는 키세는 늘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한 사람들에겐 아낌없이 호의를 표현하며 달라붙어도 내려다보는 기색이 강한, 제멋대로인 공주나 왕자 타입이랄지. 키세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우울할 수는 있어도 그걸 결코 남한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미도리마의 키세에 대한 인식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걸까?
키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머릿 속이 전부 키세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카나가와까진 얼마나 걸리더라? 교통편은? 카이조까진 어떻게? 키세네 집은 어디었지? 하나하나 꼽아봐도 전부 모른다는 사실이 미도리마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로 키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키세는 그 정도로 심각하게 말하진 않았다. 그냥 조금 사소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소한 일인거지?
부정적인 생각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온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하고 초조한 감각이 안에서부터 마구 들끓어 폭주한다. 결국 미도리마는 주소록을 뒤져 타카오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방과 후 청소를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바쁜 북적거리는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미안. 오늘 연습은 못 가는거다.」
문자를 확인한 타카오가 무슨 일이냐며 문자에 전화까지 해댔지만 그런 건 확인할 새가 없었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교실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려면 미도리마를 이토록 끝까지 밀어붙인 원흉은 놀랍도록 평탄한 얼굴로 저 쪽에서부터 천천히 교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미도리맛치?"
저 쪽에서부터 손을 흔들고 미도리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키세, 키세였다. 방금 전까지 미도리마에게 부정적인 사고를 잔뜩 불어넣은 주제에 본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의 얼굴로 서있었다. 여기에 있을 수 없는 키세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잠깐 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키세는 지극히 평소같은 얼굴이니 이것은 현실이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무슨 일 있슴까."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순간 맥이 탁- 풀리고야 말았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그거야 네가 우울하다고 그러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지금까지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멀쩡한 키세의 얼굴에 초조 대신 분노가 비등점가지 끓어올랐지만 미도리마의 이런 행동은 키세에게도, 그리고 본인에게도 분명히 비정상적인 대응이었다. 소리치려던 말을 억지로 안으로 우겨넣고 미도리마는 애써 평안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별로.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거다. 어쩐 일인거냐, 키세."
아까까지 긴장했던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몇 번을 속으로 가다듬고서야 겨우 괜찮은 목소리가 나왔다. 키세는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주변을 흘긋거리더니 머리 위로 느긋하게 손을 올리고는 미도리마에게 다시 물었다.
"미도리맛치 연습은요?"
"오늘은… 없는 거다."
그러고보니 타카오에게 오늘 연습은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키세가 멀쩡하다면 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곧 키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 미도리맛치, 오늘 저랑 놀아요!"
미도리마의 팔 소매를 잡아끄는 키세에게 끌려가면서 미도리마는 계속 울리고 있는, 아마도 타카오에게서 오고 있을 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놀자고 했던 것 치곤 키세가 간 곳은 소소하기 짝이 없었다. 근처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레이싱이나 슈팅게임 정도. 오락실과는 거리가 먼 미도리마가 할 수 있는 건 농구게임뿐이었지만 키세는 '엑, 여기까지 와서 농구하긴 싫슴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덥다며 길거리를 지나다 묻지도 않은 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다 미도리마의 손에 쥐어주고 키세는 아이처럼 잔뜩 들떠서 뛰어다녔다. 마지막 종착지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어울려줘서 고맙다며 키세는 미도리마의 몫까지 계산하고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배가 고팠는지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우악스럽게 한 입 베어무는 키세와는 달리 미도리마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머릿 속에서 뱅뱅 돌아다니는 의문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맥락없이 나온 말에 키세가 햄버거를 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임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만 아직까지 입 안에 있는 것이 있어서 키세는 우물우물 씹기만 하며 눈짓으로 물을 뿐이었다.
"우울하다고 한거다, 키세."
미도리마가 진지하게 물어보면 키세는 놀랐는지 켁켁거리며 콜라를 집어들고 쭉 빨았다. 목울대가 세 번쯤 움직이고 키세가 겨우 살았다는 듯 숨을 내뱉다가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 기억력 좋네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네 시간도 안됐는데 잊어버리는 게 바보인 거다."
"그냥 별 일 아니었슴다."
그렇게 가뿐히 말하며 키세는 다시 햄버거를 베어물었다. 미도리맛치는 안 먹슴까?
"거짓말."
아무 생각 없이 미도리마의 입에서 단어가 튀어나갔다. 키세는 깜짝 놀랐는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도리마를 쳐다보았지만 별로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짓말도 적당히 하는 거다, 키세."
"거짓말 아님다."
"무슨 일 있는거지? 고민이냐?"
키세의 얼굴은, 최근 들어선 직접 만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웃는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치의 물러남도 없는 미도리마의 태도에 키세가 콜라의 빨대를 질근질근 씹더니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설마 연애때문에 고민인 건 아니겠지, 키세."
키세가 생각보다 쉽게 가라앉아서 당황한 미도리마가 분위기를 애써 띄워보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쪽이 미도리마의 당황을 가중시켰다. 키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미도리맛치, 의외로 감이 빠르네요."
그렇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감각이라 미도리마는 여기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지뢰를 터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그냥 키세의 문자따위 무시해버리고 말걸. 괜히 오지랖을 떨어서 미도리마 스스로 함정을 파고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키세의 진심인 연애상담 따위 미도리마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들어줄검까?"
"…안 들어주면?"
"그냥 가겠죠?"
그렇지만 알면서도 함정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미도리마가 여기서 나간다면 키세는 그대로 그 고민을 안고 가겠지. 누구한테도 털어놓는 일 없는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빙빙 돌리고 돌려 그냥 놀아달라는 정도로만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문전박대 당할 것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가시밭길로 뛰어드는 고행의 고통을 눌러참으며 미도리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해 봐."
미도리마의 그 말에 놀란 쪽은 키세였나보다. 진짜임까? 묻는 말에 미도리마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가 머리를 긁적이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다시 빨대를 질근질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거창한 건 아님다. 짝사랑이거든요."
"짝사랑? 네가?"
"그렇슴다. 비웃는 거 아니죠, 미도리맛치?"
멋쩍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키세가 연애상담도 모자라 짝사랑이라니. 머리가 핑 돌아버릴 것 같은 걸 묵묵히 참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는 절대로 짝사랑 하지 말아요. 이거 진짜 힘듦다. 게다가 호의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같은 학교?"
"아뇨.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임다. 그 때는 맨날 붙어있어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떨어지니까 좋아한다고 깨닫더라구요. 되게 웃긴데, 그 사람하고는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데 꿈에 자꾸 나와요. 전부 기억해서 외워버릴 정도로. 그래서 기억해요. 목소리라든가, 손의 모양이라든가, 앞에 서면 어떤 눈높이에 있구나 하고. 꿈에서는 자꾸 이름을 불러줘서 진짜인 게 아닌 건 알지만. 그 사람 한 번도 이름은 불러준 적 없거든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고. 아닌가? 어울려주는 정도면 친한건가?"
"…말은 해본거냐. 고백은?"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뒤집어지는 걸 꾹꾹 눌러참고 말하면 키세는 다시 웃었다.
"그 사람은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절대 안 믿을걸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정색할 지도 모름다. 그렇게 깨지는 것보단 지금처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게 훨씬 낫잖아요. 오늘은 그냥… 조금 센치했을 뿐임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없고 겨우 답장이 오나 싶어서 확인했더니… 평소같은 말이긴 했는데 좀 맘에 걸리더라구요. 어쩌면 진짜 내가 그 사람한테 그 정도밖에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뛰어내려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거기까지가 미도리마의 한계였다. 죽어? 누가? 네가? 상상만으로도 눈 앞이 새카매지는 암전이었다.
- 좋아해.
미도리마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을 넘치도록 해줄텐데 그걸 가뿐히 무시하는 상대가, 눈 앞에 있으면 죽어라 패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웃어."
무엇보다 저딴 식으로 웃게 하는 상대가 미도리마는 싫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키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라 구역질이 올라온다. 차라리 키세를 패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족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미도리마가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말에 키세가 놀랐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그럼까, 미도리맛치. 무섭게시리. 못난 얘기해서 화났슴까?"
"그만, 웃으라고 한 거다."
"안돼요. 전 웃는 걸로 먹고 사는데요? 게다가 여기서 웃는 것도 안 하면 울검다."
"그럼 울어."
"네?"
"너는, 확실히 속에 있는 말은 잘 하지 않지. 그래서 나는 네가 운다거나 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거다. 매일 웃으니까. 하지만 그딴 식으로 웃을 거면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거다. 화났냐고? 그래. 화 났지. 설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도 못하고 속으로만 질질 짜는 타입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그런 식으로 질질 짜댈 널 생각하면 화가 나는게 당연한 거다."
"질질 안 짜요. 안 울게요, 미도리맛치. 남고생이 남고생 앞에서 울면 당연히 짜증나잖아요."
"그딴게 아냐!"
분에 못 이겨 테이블을 탕- 내려치면 키세 뿐만 아니라 점내에 사람들이 모두 미도리마를 한 번씩 쳐다봤지만 올라간 언성은 내려갈 줄 몰랐다.
"꿈? 매일 꾸지. 나도 외울 수 있을 거 같아. 정작 한 번도 만져본 적도 없는데 전부 손에 잡히는 것처럼 생생하고 1초 전의 일처럼 전부 기억 나. 보이고, 만지고, 들리고, 그리고 웃고는 얘기해. 좋아한다고. 그러면 꿈에서 깨는 거다. 그런 건 현실이 아닐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매일 꿈에서 깨는데 화가 안나?"
"미도리맛…치?"
"차라리 나에게 고백해라, 료타. 매일 불러줄게, 이름. 답장도 꼬박고박 해주고 매일 옆에 있어주고 좋아한다고 말할테니까.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정말 미칠 것 같은데… 너한테서 정말로…"
좋아해.
그 목소리로 들리는 단어가 오롯이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간절히 바랬다. 꿈인걸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들리면 꿈에서 깨버리는 걸 알면서도 미도리마는 원했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늘 생각한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꿈을 꾸면 그 순간은 천국이지만 나머지는 지옥이다.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미도리마는 오늘도 꿈을 꿀 수 있길 간절히 원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면서도 희망고문을 하는 것처럼 괴롭히는 그 꿈을 싫어하면서도 사랑했다. 키세에게 오는 무의미한 문자들에도 들뜨는 자신이 우스워서 밀어넣고 밀어넣고 또 외면하려고 했다. 차라리 완전히 지워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도 싶었지만 할 수도 없었다. 그 문자들을 하나하나 저장해놓는 자신이 그토록 바보스러웠던 순간이 있을까.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끝이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끝이었다. 키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면 키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놀랐을까. 당황해할까. 농담이라고 말할까?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도리마는 빌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부 털어놨는데도 가벼운 농 취급을 받는다면 미도리마는 정말 죽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빌고 또 비는 미도리마의 귀에 들린 단어는 단 하나였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빗나가지 않는 예상대로의 대답에 미도리마는 눈을 꽈악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키세가 가버린다면 좋을텐데.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매일 꿈에서 미도리맛치에게 얘기함다. 백마디, 천마디, 그것보다 더 많이 밤새도록 매일같이. 목이 쉬도록 얘기하면 미도리맛치는 이름을 불러요. 그러면 꿈에서 깨죠.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건 꿈인가요 아니면 진짜인가요? 빨리 대답해줘요, 미도리맛치. 이게 꿈이면 나는 좀 있으면 현실로 돌아가야 되니까. 네?"
귀에 들리는 단어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도리마는 자신이 순간 그대로 까무룩히 잠에 든 줄 알았다. 눈을 뜨면 순간 조명이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익숙한 아침의 천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키세가 있었다. 말하고 있었다. 꿈처럼. 아니, 꿈이 아닌 현실.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거기엔 키세 료타가 있었다.
미도리마가 기억하는 그대로. 그 얼굴, 목, 셔츠 아래의 목울대,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밑에서 맥동하는 푸른 핏줄과 그 목소리를 가지고 꿈보다 더 달콤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좋아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