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코후시] 낯가림
히스의 리퀘. 컬러파레트 19번
19. 낯가림
핫초코와 아메리카노
" 전 어른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
쌩양아치 집단 - 후시미가 보기에 호무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의 간부치고 쿠사나기는 제법 고급스런 취향의 소유자였다. 해외에서 공수해 온 바의 테이블이나 인테리어부터 어디 장인이 만들었다는 글라스, 몇 년산 와인, 어느 바를 가도 보기 드물다는 제법 비싼 술들까지. 그 중에서도 후시미에게 가장 쓸모 있는 건 원두였다. 술도 커피도 담배랑 잘 어울리니 그만이라며 쿠사나기는 가게에 커피메이커와 괜찮은 수준으로 로스팅 된 원두를 항시 구비해뒀다. 호무라의 멤버들 중 커피나 차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사람은 토츠카 말고는 없었으니 그 원두의 1/3은 후시미의 차지였다. 부모는 후시미에겐 관심도 없었고 후시미도 그들을 가족이라 칭할 때 애틋한 마음이라곤 1g도 없는 콩가루 집안이었으나 돈만은 썩어나게 많았다. 덕분에 어영부영 제법 고급스런 안목과 입맛을 갖추게 된 후시미는 오늘도 쿠사나기의 원두를 알뜰하게 소비하는 중이었다.
먹을만큼의 원두를 핸드밀로 갈고 필터를 깐 뒤에 커피메이커로 내리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한 시간 동안 바 호무라는 완전히 후시미의 차지였다. 타타라와 안나는 놀러갔고 쿠사나기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또 누군가와 싸우러 우르르 몰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이게 뭐냐 싶으면서도 후시미는 나름 이 고독이 만족스러웠다. 꺼림칙한 장소인 것 치고 바 호무라 자체는 아늑했으니 겉으로 보기엔 별 특색도 없는 가게에 단골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간다.
머그컵 하나에 막 커피를 붓고있는 찰나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쁜 짓 하다 걸린 애처럼 후시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후시미가 아는 한 이 바의 2층에서 내려올 사람은 안나 아니면 스오우 미코토 뿐이었다. 안나가 아까 토츠카와 나가는 걸 확인했으니 남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 설마――.
고장난 인형처럼 삐걱대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곳엔, 당연하지만 스오우 미코토가 있었다.
"쿠사나기는?"
"ㄴ, 나갔는데요…."
호무라 멤버들 전원이 어색했지만 그 중에서도 스오우 미코토는 다른 이와 비교할 바가 못됐다. 스오우와 단 둘이 있는 상황 따위 후시미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여전히 커피의 고소한 냄새가 감도는 평화로운 가게였으나 스오우가 내려온 것만으로 후시미는 갑자기 북극의 빙하 한가운데 던져진 것만 같았다. 관짝 안에 누워 흙더미 밑에 파묻혀 있어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터였다.
"미코토 씨도… 드릴까요."
"커피?"
"네."
마주친 시선을 회피하기 위하여 후시미는 재빨리 커피포트를 들었으나 후시미는 뭐든지 혼자인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여분의 커피 따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포트를 둔 후시미의 손으로 가만히 스오우의 시선이 닿는다. 막 잠에서 깬 스오우의 얼굴은 평소보다 백 배는 더 험악했다. 뒤 쪽의 풍경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포트를 후시미는 그제야 깨달았다.
"새로 할게요."
"어린 녀석이 커피 마셔봤자 좋을 게 없을텐데."
"안 어린데요."
"어려."
"안 어립니다."
"키 안큰다."
"그런 말은 미사키한테 해주시죠."
어리다는 말에 괜시리 날 선 후시미가 발끈하며 일어서는 것을 스오우는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대로 바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주전자에 물을 받고 가스렌지에 올리는 걸 보니 알아서 뭐라도 마실 생각인 모양이었다. 낯선 침묵이 감돈다. 후시미는 괜시리 커피를 홀짝이면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의 기사, 시덥잖은 커뮤니티, 미사키와 자주 보는 만화의 오늘자 업데이트 분량……. 미국의 컨퍼런스에서 뜬 새로운 개발자 툴은 관심 가질만한 대상이었다. 체크. 오늘자 만화도 미사키가 오면 보여줘야 되니 체크. 새로 살 만화책이랑 다른 책도 체크. 스크롤을 죽죽 내리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후시미는 손을 뻗었다. 여전히 따뜻한 머그잔의 손잡이를 들고 호르륵 입 안에 넣으면 커피와는 명백히 다른 단 맛이 입 안을 가득채웠다.
삼키지도 못한 채 잔의 내용물을 바라보면 부드러운 크림갈색이 김을 뿜고 있었다.
"뭐…에요…?"
고개를 들고 스오우를 바라보면 스오우는 말없이 통을 들어 보인다. COCOA 100%. 핫초코다. 스오우는 후시미가 마시던 커피를 마신다.
"이리 주세요."
"어린애는 핫초코나 마셔라."
"어린애 아니라구요. 이리 주시라니까요."
"어른이 되고 싶어?"
"전 어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럼 마셔."
"개인의 기호와는 아무 상관 없는데요."
"다 마셨다."
제법 식긴 했어도 한 번에 마시긴 뜨거웠을텐데 스오우는 용케 꿀꺽꿀꺽 마시더니 빈 컵을 뒤집어보였다. 아. 저렇게 마실 바엔 커피가 아깝다. 정말 맘에 안드네. 후시미가 암만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봐봤자 껄끄러운 건 후시미 쪽이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나른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스오우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후시미는 쯧, 혀를 차고는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후시미."
"왜요."
"피터팬이라도 되고 싶은거냐."
"아뇨."
"어린애도 싫고 어른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그냥…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겁니다."
"책임?"
"책임도 못지면서 어른이라고 버팅기는 사람들 따윈 질색이에요."
"재밌는 얘길 하는군."
후시미 딴에는 대단한 결심이었으나 스오우는 한껏 얕잡아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순간의 이성이 후시미를 붙잡았으나 질풍노도의 시기란 그런 거다. 갈무리되지 않은 날것이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나오는 시기.
"미코토 씨도 그렇잖아요."
스오우의 얼굴이 호오? 이것봐라? 같은 표정으로 변했을 때는 이미 말은 밖으로 나간 뒤였다. 하얗게 질려 그대로 얼어버린 후시미를 보고서 스오우는 사납게 웃었다.
"계속해보지?"
"아니 그……."
"요컨대 내가 책임감 없는 어른이라 이건가?"
너무 놀라 딸꾹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 애꿎은 핫초코만 꿀꺽꿀꺽 삼키면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을 홀랑 데고 말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던 후시미가 간신히 목 뒤로 핫초코를 넘긴다.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한심한 몰골이었다.
"말해 봐, 후시미. 내가 한심하다고?"
"그… 그러니까……."
"궁금하잖아."
"……."
이유는, 설령 야타가 눈 앞에 있어도 후시미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스오우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며, 나머지 호무라 멤버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깐 채 버티는 후시미의 뒷통수에 따뜻한 손이 닿는다. 힘껏 부벼대는 손길에 머리카락에서 정전기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어린애는 핫초코나 마셔라."
"……."
"커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면 마시고."
그렇게 말하고 스오우는 걸음을 옮긴다.
"어, 어디 가요 미코토 씨."
현관의 종이 울리는 소리에 후시미가 고개를 들어 물으면 스오우는 가볍게 담배갑을 흔들더니 닫히는 문 뒤로 사라진다. 커피랑 핫초코가 어른이랑 애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툴툴거리면서도 후시미는 차마 버릴 순 없어 핫초코를 마셨다. 호무라는 이제 텅 비어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어딘가로 쏙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한 공기였다. 항상 사람으로 복작거리던 호무라에 쓸쓸함이 감돈다는 건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편안했는데. 갑자기 스미는 한기에 후시미는 머그잔을 꽉 쥐었다. 낯설지만 예언같은 감각이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당신은 언젠가 호무라를 이처럼 폐허로 만들 사람이라고. 당신 하나만 믿고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내팽개칠 텐데.
다모클레스의 검이 떨어지면 대지의 모든 것이 절멸한다고 한다. 위성으로 봐도 푹 들어가 있는 저 카구츠 크레이터처럼. 스오우의 다모클레스의 검은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으나 한계가 없는 것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 추락하는 검이 아찔할 정도로 선명하다. 스오우의 검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당신 하나만 믿고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스오우는 그 검이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당신 하나만 없어도 호무라의 공기는 이토록 쓸쓸한데.
"……한심해."
차마 스오우 앞에서 하지 못한 말을 읊조리고 후시미는 조용히 핫초코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