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황립] 현재진행형
청황이 딱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PO짝사랑WER, PO후회WER 취향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키세는 전투력측정기라 안되고 쿠로코는 되나여... 키세가 불쌍했다.... 바르작거리는 키세랑 그걸 바라보고만 있는 아오미네가.... 내 심장에 불을 질렀어.... 그리고 키카사인 이유는 카사마츠 센빠이는 착하잖아여! 분명히 동갑이면 카사맛치 라고 불렀을 거야. 틀림없어. 뭐 그리하여 이런저런 게 쉐킷쉐킷 되었습니다. 진짜 쓰고 싶은 걸 썼더니 다 쓰니까 왜케 뿌듯하지... 한시부터 썼는데 6시쯤 다 했나. 메모장으로 24kb, 한글로 문단 그대로 붙이니 20쪽이라 아 이거면 카피본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먹. 지금까지 원고하는 거 엄청 힘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좀 생각을 바꿔야 될듯. 장하다 강메레! 일상이 걍 무너졌네!!!!!
녹황이나 청황도 원고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존못이지만. 안될거야, 아마.
1.
이제, 동경은 그만 둘 거에요.
그것은 카사마츠가 들은 아오미네에 대한 키세의 마지막 얘기였다.
아침. 눈을 뜨면 몸이 무거웠다. 뭐지? 어제 연습을 조금 빡빡하게 했더니 근육통이라도 온건가? 카사마츠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면 문득 시야에 샛노란 머리카락이 잡혔다. 아아, 이 녀석인건가. 몇 번인가 반복된 패턴에 한숨을 푹 쉬고 카사마츠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키세 료타!!!!!!!"
그 바람에 침대에서 고스란히 바닥으로 추락한 키세가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엎드려 눈을 깜박거린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닥을 한 번, 천장을 한 번, 침대 위에 앉아있는 카사마츠를 한 번 쳐다보고, 다음으로 나올 말은.
"너무해요, 선배!"
그럼 그렇지.
"뭐가 너무해! 함부로 남의 침대에 기어오지 말랬지!"
"하지만 어젯밤은 너무 추웠다구요!"
"누가 그렇게 술 마시고 남의 집에 쳐들어오래! 그냥 내쫓아버릴 걸!"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쓸쓸한 지 선배는 모름다!"
"나도 혼자 살거든!"
"아, 그렇네…"
멍청한 녀석. 부스스하게 뜬 머리를 긁적이는 키세를 다시 한 번 발로 뻥 차내고 카사마츠는 투덜대면서도 부엌으로 향했다. 해장국, 할 게 있을까? 냉장고를 열면 다행히 콩나물 한 봉지 정도는 있었다. 콩나물국 정도면 되겠지. 키세가 집에 쳐들어 올 때의 패턴은 늘 똑같았다. 어디선가 술을 잔뜩 마시고 집 앞에서 전화를 건다. 선배에~, 저 선배네 집 앞인데 들어가도 돼요? 재워주면 안돼요?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게 예의가 바른건지 아닌건지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는 풋풋한 맛이라도 있었거늘 대학생이 되자마자 술이 떡이 돼서 돌아다니는 후배는 전혀 귀엽지 않았지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는 건 도대체 무슨 심정인지 모르겠다.
"잘 먹었슴다!"
"대답은 우렁차지, 대답은."
궁시렁거리면서 괜시리 한 번 키세의 등짝을 차면 키세는 또 힝, 하는 어울리지 않는 우는 소리를 낸다. 임마, 먹었으면 설거지라도 해. 난 1교시다. 뒷처리는 몽땅 키세에게 맡기고 욕실로 들어간다. 씻고 나오면 키세는 가방을 메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냐."
"그렇슴다. 오늘도 챙겨주셔서 감사함다. 민폐 끼쳐서 죄송함다. 나중에 학교에서 밥 한 끼 먹어요."
"알면 제발 오지 좀 말아라. 지겹지도 않냐. 고등학교 때부터 이 무슨…"
무심코 내뱉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면 키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선배는 다정함다."
가보겠슴다. 혹시 학교에서 보게 되면 밥 같이 먹어요.
키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조차 익숙하고 민폐니 뭐니 해도 또 잔뜩 술을 마시면 집 앞에서 전화할 것을 알았지만 카사마츠는 어쩐지 입이 썼다.
"그 개자식."
이 상황에서 욕할 수 있는 건 딱 한 명 뿐이었다.
키세는 늘 말했다. '기적의 세대라는 이름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나머지 네 명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물론 쿠로콧치도 굉장해요!'. 입만 열면 쿠로콧치, 쿠로콧치를 외쳤지만 키세가 동경하는 것은 아오미네 뿐이었다. 압도적인 스피드, 스킬, 야생동물과도 같은 민첩성, 독보적인 센스에서 비롯된 프리스타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키세의 능력은 카피뿐이라고 누군가는 그랬지만 감독은 키세도 천재인 것은 확실하다고 얘기했다. 카이조의 에이스는 곧 죽어도 키세였다. 따라갈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물론 부러운 적은 있었지만 키세는 그 천부적인 센스를 갖고도 노력도 하는 타입이었다. 어차피 따라갈 수 없다면 자신이 지탱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1학년이었고, 자신은 3학년이었다는 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겠지.
졸업식 때는 가지 말라고 펑펑 울었다. 자신보다 몇 센치는 큰 후배를 다독거리면서도 카사마츠는 기분이 묘했다.
- 괜찮아, 2년만 있으면 너도 대학에 오면 되니까.
인터하이 토오전에서의 뼈아픈 패배 뒤에 키세는 근력, 지구력 등 기초체력부터 죽어라고 노력해서 길렀다. 온갖 스타일을 카피하고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잔뜩 뒤섞여 엉켜나올 때도 있었다. 키세의 기술은 점점 화려해졌고 그럴 때마다 카사마츠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 녀석이 졸업하고, 만약에 대학에 와서도 같이 뛴다면 정말 굉장하겠구나. 어쩐지 그럴 수 있단 강렬한 예감이 들었었다.
그 말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힘내겠슴다!'라고 외치던 키세의 모습이 생생했다.
카사마츠가 대학에 들어가고 자취를 시작한 이후 키세는 종종 카사마츠의 집에 오곤 했다. 가끔 경기를 보러가면 그 때의 키세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저 녀석이 제법 철이 들었구나, 란 부모같은 감상을 내뱉곤 했지만 카사마츠의 집에 올 때의 키세는 변함없이 철이 없었다. 그래서 변화를 눈치채는 게 늦었다.
"선배. 저, 이제 농구 못함다.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영하 15도를 밑도는 강추위였다. 동계훈련을 마치고 일단 도착하면 씻고 자야지, 하는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가고 있는데 집 앞에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고개를 무릎사이에 푹 파묻은 채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긴 코트자락 밑으로 나온 교복은 익숙한 것이었다.
"키세…?"
설마, 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부른 이름에 상대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빨개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 말이 그거였다. 이제 저, 농구 못해요.
다리가 한계였다. 기초체력부터 꾸준히 키워둔다고는 했지만 그 많은 스타일을 한꺼번에 익히고 처리하는 건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짐을 내팽개치고 얼어붙은 키세의 몸을 억지로 들어 질질 끌고 침대에 겨우 앉혀놨다. 집도 며칠을 비워둔 터라 급하게 난방을 해도 따뜻해질 때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매일 이 세상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살던 후배가 갑자기 새파랗게 죽은 얼굴로 집에 온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키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 카사마츠는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딱딱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이를 억지로 누르며 키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동경은, 포기했어요. 다 그만 뒀어요.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 적어도 누구보다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고 가능성도 있었어. 하지만 안됐었죠. 나는, 아무것도 바꿔놓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이왕 이렇게 된거 그렇다면 대신 이기겠다고, 선배의 팀으로 이겨보려고 생각했어요. 선배가 절 믿어준 만큼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안돼요. 죽어도 안되더라구요. 죄송해요. 죄송함다, 선배. 심지어 이제 같이 농구도 못해요. 전 아무것도 안되고, 못해요.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돼? 그만, 그만 두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아무것도 안돼서…
바들바들 손을 떨며 붙잡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긴 한건지 키세는 몽땅 토해내고 울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피부에 따뜻한 눈물방울이 궤적을 그리며 서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간간히 생략된 말들은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2년 전, 인터하이 결승전에서 키세는 문득 그렇게 얘기했다.
- 이제, 동경은 그만 둘 거에요.
그 말이 키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오래걸릴 줄이야. 자신은 눈치는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만이었다. 키세 료타는 애초에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철없음과 솔직함으로 누구에게나 호감가는 외형을 만들어두고 안에서는 선을 그어둔다. 어른스러운 건 키세가 그렇게 꾸며놓은 외형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다른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란 걸 카사마츠는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다.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납득하고 누구도 모를 진심이 어째서 자신에게 뱉어지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카사마츠는 일단 키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두드렸다.
"임마, 울지 마. 그만 울어. 나한테 올 때는 팬들한테 받은 간식 자랑하러 올 때 밖에 없던 놈이 왜 울어."
"죄송함다. 죄송해요, 선배. 몰라요. 내가 왜 여길 왔지?"
쿨쩍거리면서 키세는 그런 바보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민폐네요. 가볼게요. 옷자락을 꽉 붙잡고 놓지 않던 키세의 손을 아쉽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뭘까.
"그러고 나가서 어디서 얼어죽으려고. 넌 처음부터 민폐였어. 그냥 온 김에 몸이나 녹이고 가."
"처, 처음부터 민폐였다니! 선배 나빠!"
"이제 알았냐. 그러니까 일단, 일단 앉아 있어."
그 날, 아직 날짜까지도 기억난다. 윈터컵에서 카이조가 다시 토오에게 패한 날이었다. 키세의 다리가 끝장을 본 날이었고 처음으로 키세의 안을 들여다 본 날이었다.
그 날, 그 팔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카사마츠가 지금까지 이렇게 복잡한 맘을 가지고 키세를 바라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키세가 술을 마시고 담배 냄새에 쩔어서 카사마츠의 집에 오는 일도 없을 것이고, 한여름에도 춥다며 들러붙는 녀석 때문에 땀에 쩔어서 일어나는 일도 없었겠지.
학교 가는 길, 아직은 오픈되지 않은 가게의 전면 유리에 커다랗게 붙은 흑백의 포스터가 보인다. 운동을 그만뒀어도 여전히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키세가 셔츠를 풀고 반쯤 내리 깐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 포스터는 남성복 브랜드 런칭 광고였다. 풋풋함과 반짝거림 대신 무언가 아슬아슬하고 농밀한,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극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덕분에 이런 컨셉으로 화보집이 하나 더 나온다고, 키세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런 거,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은데… 저는 상쾌함의 대명사, 영원히 10대로 있고 싶다구요!
상쾌함은 개뿔. 가슴 큰 누나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얼굴이구만.
사진 속의 키세는 오히려 솔직했다. 누가 봐도 실연당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직까지도.
2.
농구를 못하게 되었단 소리를 들었을 때 딱히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아, 드디어 이렇게 끝이 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 두겠다고 해놓고, 우유부단하게 질질 끄니까 신이 옛다, 하고 결정타를 날린 게 분명했다. 어차피 그만 둘 거였고, 솔직한 심정으론 1학년 때 그만두고 싶었지만 카사마츠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 두지 않았다. 그 사람도 못지 않게 농구를 좋아하고, 팀을 아껴서 그 팀으로 그 때 내가 못한 것을,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해내서 한번쯤 우승컵을 안겨주자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결국 못 했지만.
구원이라든가 그런 거창한 단어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냥 그 시절이 즐거웠다. 아오미네를 따라잡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고 아오미네가 농구를 할 때의 얼굴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그 시절로 되돌려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주겠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줄 꿈에도 몰랐고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으며 아오미네를 다시 되돌린 게 쿠로코와 카가미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마음만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데 어째서?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요?
넌 날 절대 못 이겨. 그 말이 맞았다. 아오미네는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은 멈춰서버렸으니까. 아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따라잡질 못했다. 나중엔 그냥 그 사실이 분했고 안되는 건, 결국 안되는 거라고 체념했다.
술은 성인이 됐으니 뒷풀이 정도엔 마셔줘야지, 라고 해서 마셨고 담배는 스탭이 피는 걸 한 번 얻어핀 게 의외로 괜찮았다. 모델이 담배라니, 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뭐 어때, 요즘은 오히려 그런 분위기도 괜찮잖아 키세는? 그렇게 말한 코디도 있었다. 대신 피부 상하니까 적당히 해, 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충고도 했었다. 무언가 망가져가는 느낌이 들어도 나쁘진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컨셉의 포스터를 찍었을 때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밖에서는 대호평. 그렇구나. 이게 나인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 땐 멍청했어, 하고 추스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다만 그 때마다 의지하는 게 카사마츠라는 건 키세에게도 좀 마음에 걸리는 노릇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고교 후배일 뿐이고 대학도 멋대로 쫓아간 셈이었지만 행동은 험하고 취급이 나빠도 카사마츠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선배한텐 더 좋았을텐데. 하지만 카사마츠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키세는 알고 있었다. 키세 료타는 진저리 날 정도로 약아빠진 사람이었다. 거기에 기대서 응석을 부리고 멋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화풀이 할 사람은 거울 속의 자기 자신, 딱 한사람 뿐인데도.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면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라, 쿠로콧치?"
「잘 지냈어요, 키세 군?」
"당연하죠.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요? 쿠로콧치는 어때요? 요즘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일이 좀 바빠서."
거짓말이다. 아오미네를 떠올리기 싫어서 중학교 때 알고 있던 사람한테는 일절 연락한 적이 없었다.
「키세 군이 이번에 찍은 광고는 잘 봤어요. 굉장하더라구요. 주변에서도 난리에요.」
"헤헤, 쿠로콧치가 칭찬이라니 기분이 이상함다."
「키세 군이 더 떠버리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은데 어때요? 우리 다 같이. 미도리마 군도, 아오미네 군도 OK 했어요. 무라사키바라랑 아카시에겐 아직 안했지만.」
아오미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 몸의 피가 싸하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오미네는 대학에 가서도 유명인사였다. 스포츠 잡지엔 심심찮게 이름이 올라오는, 바로 프로팀으로 가도 좋았겠지만 이상하게 대학은 가고 싶다고 해서 대학팀에 있을 뿐이었다. 잡지 표지를 장식한 아오미네를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나 보다.
"미안함다, 쿠로콧치. 아마… 그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모처럼 다같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엔 꼭 시간 낼게요. 미안함다."
「키세 군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죠. 바쁘니까.」
그 뒤에도 쿠로코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 속이 새하얗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아오미네, 란 이름만이 둥둥 떠돌고 있어서 키세는 정말 죽고 싶었다. 도대체 이걸 모두 웃어넘길 수 있는 그 날은 언제쯤 오는 걸까?
대학에 들어오면 빠지지 않는 행사 1순위는 단연 축제고 2순위는 체육대회다. 게다가 그게 대학 대항전이라면 오죽할까. 서로의 응원가가 경기장이 떠나가라 울리고 박수소리와 함성 소리가 뒤섞여 웅웅대는 인파를 헤치고 키세는 경기장 구석으로 파고 들어갔다. 키세 료타가 이 대학이란 건 당연히 다 아는 사실이고 대학 내에서도 쉬쉬하면서도 다가오는 사람이 많은 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 오픈된 공간이면 오죽할까. 농구 경기 정도는 맘 편하게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카사마츠가 레귤러고.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전에 카사마츠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아 키세는 손을 붕붕 흔들며, 선배 여기에요!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난리가 날테니 키세는 근질근질한 입을 꽉 다물고 손도 등 뒤에 딱 붙여 넣어뒀다.
오랜만에 보는 경기는 재밌었다. 한 때는 저기에 있었단 사실이 꿈만 같았다. 코트를 뛸 때마다 나는 마찰음, 공이 튕기는 소리, 우둘투둘하면서도 탄력있는 감촉, 손 끝에 묵직하게 감겨드는 패스, 백보드에 맞아 텅- 하고 울리는 그 진동, 네트를 통과하는 공기소리. 카사마츠와 하는 농구도 분명 즐거웠다. 그 사람의 기합 소리, 과열되어 있으면 진정시키고 풀 죽어 있으면 다시 일으킨다. 페이스를 제자리로 돌려주는 침착함을 키세는 분명히 좋아했다.
- 괜찮아, 2년만 있으면 너도 대학에 오면 되니까.
그 말에 이 사람이랑은 어쩌면 대학에 가서 농구를 계속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짜릿한 3점슛과 함께 경기종료를 알리는 4쿼터의 빨간 불이 켜졌다. 팀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카사마츠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키세는 외부인이었다. 뒤에는 여자 농구 경기도 남아 경기장 밖의 복도로 빠져 나오면 복도는 한산했다. 키세는 카사마츠가 락커룸으로 들어가고 회포를 풀고 문자를 확인할 때까지 몇 분이나 걸릴까 계산해 보았다. 당연히 회식도 하겠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들떴을 게 분명한 그 사람의 열기를 자신도 좀 나눠갖고 싶었다. 패배의식에 찌들어 있는 자신이라도 분명 같이 들뜰 테니까 그럼 조금쯤은 행복한 기분이 되겠지.
「선배 오늘 저랑 저녁 같이 먹어요! 제가 사드리겠슴다!>///<」
「회식.」
「저 앞으로는 빡빡해서 시간 없단 말임다ㅠ△ㅠ 꽃등심! 꽃등심!」
「안 넘어가.」
「저 벌써 탈의실 앞으로 가고 있어요! 선배 오늘 완전 멋있었슴다! 최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문자를 보내다 휴대전화에 시선을 두고 있던 탓인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으앗, 죄송함다."
키가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 어깨를 세게 부딪혀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상대도 키가 꽤 큰 사람인가 보다. 부딪힌 왼쪽 어깨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면 선글라스의 까만 렌즈 너머로 어쩐지 익숙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아… 아오미넷치?"
"…키세 료타."
반 년만에 듣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제법 위협적이었지만 아오미네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이 좀 커져 있었다.
"어, 어쩐 일임까? 학교 대항전인데, 아오미넷치네 학교는 다른 데잖아요?"
"너 내가 간 데가 어딘지 알고는 있었냐?"
빈정대는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지금 대화의 어디가 그렇게 비꼴 만한 포인트였는지 감을 잡지 못해 어버버버 거리고 있으면 아오미네는 칫, 하더니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연락 안 해?"
"네?"
그 말도 참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테이코 농구부는 전부 먼저 연락한 적이 없는 야박한 사람들이었다. 늘 먼저 연락하는 쪽은 키세로 그 문자도 씹히지나 않으면 다행. 아오미네가 먼저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문자를 보내지 않게 된 건 벌써 2년쯤은 됐을텐데 시기를 벗어난 말이 뜬금없어 키세는 뭐라 대답해야 될 지 감을 잡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그…그게 바빠서…?"
"테츠가 오랜만에 보자고 연락줬는데 넌 못 온다고 했다며."
"그, 그것도 좀 시간이…"
"만난 김에 밥이나 사라. 배고프다."
"아니 저기 아오미넷치 그게 말임다…"
키세의 대답은 듣지않고 덥썩 팔을 잡고 아오미네는 여전히 마이페이스로 키세를 질질 끌고 갔다.
"뭐야, 싫어?"
"저 선약이…"
"취소해."
깔끔하기도 하지. 선약이 있단 말에도 아랑곳 없이 키세를 끌고 가는데 눈 앞의 문이 벌컥 열렸다.
"키세 이 자식!"
"카사마츠 선배!"
투덜대며 탈의실 문을 열고 나온 얼굴은 키세에게 구원이었다. 기쁜 마음에 소리치면 카사마츠도 고개를 돌리다가 아오미네를 발견하곤 잠시 인상을 굳혔다.
"밥 사준대며 약속 있냐? 그럼 나는 회식 가고."
"아, 아님다! 선배 꼭 사드릴게요! 지금 아니면 절대 안돼요!!"
"안 오면 그냥 간다."
"가, 가겠슴다! 미안하지만 아오미넷치, 그러니까 나중에 봐요."
키세는 아오미네의 팔을 뿌리치고 홀로 걸어가는 카사마츠의 뒤를 쫓아갔다. 등 뒤가 오싹했지만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아오미네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빨리 떨쳐내고 싶은데도 붙잡혔던 팔에 억눌린 감각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키세는 자꾸만 팔을 털어냈다.
3.
"이번에 저 모델, 진짜 멋있지?"
"나 고등학교 때부터 팬이었는데 분위기가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델이었어?"
"중학교 때! 작년까지 농구도 했었어."
"굉장하네."
여자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아오미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밖에 나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키세가 나온 광고가 어디에나 있었다. 정작 그 얼굴은 본 지가 한참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심심찮게 오던 문자는 끊기고 키세는 곧 잡지나 TV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아오미네가 기억하는 키세는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고 표정은 1분에 31가지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어색해하고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뿐이었다. 경기장에서 가끔 키세를 만나면 키세는 종종 끔찍하도록 무표정인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토오와 카이조가 붙어 마크를 하고 있을 때면 키세는 늘 그런 표정이었다. 말도 걸지 않고 농을 던져도 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 어떻게든 표정을 꺼내고 싶어 악착같이 들러붙고 떼어내고 짓눌렀다. 마지막 윈터컵도 그랬다.
"넌 안돼."
4쿼터가 1분 남았던 시점, 그렇게 얘기하면 키세는 울 것 같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러다가 웃었다. 허망한듯이 미소짓는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얼굴이어서 아오미네는 당황스러웠다.
"알고 있어요."
흘리듯이 한 말은 곧 삐걱대는 마찰음과 관중의 외침에 사라졌지만 아오미네의 기억 속에는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를 외치는 키세의 얼굴은 잠시 동요가 일긴 했지만 곧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인사도 하지 않고 수건을 뒤집어 쓴 채 약간 절뚝거리며 락커룸으로 나가는 키세를 보고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연락을 한 번 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를 차일피일 미루다 키세의 소식이 먼저 들어왔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어서 농구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모모이가 보여 준 잡지의 특집 인터뷰에 쓰여 있었다. 어차피 대학에 가게 되면 그만두고 모델에 전념하려고 생각했으니까요. 클로즈업 된 웃는 사진 위에 쓰여진 텍스트에 화가 치밀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따라잡겠다더니? 붙잡겠다더니 왜?
당장 전화해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곧 덜떨어진 짓이란 걸 알고 포기했다. 왜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갑자기 자신이 우스워졌다. 하루에도 열번씩 휴대전화를 붙잡고 몇 번이나 텍스트를 쓰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하면서도 결국 보내지 못했다. 키세가 먼저 연락하겠지.
그러나 졸업을 하고 입학식이 시작될 때까지도 키세에게 연락은 없었다. 그나마 자주 만나던 쿠로코에게 연락을 하면 쿠로코도 그러고보니… 라고 얘길 꺼냈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게 연락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지? 홧김에 던진 휴대전화가 박살 나 모모이한테 잔소리를 들으며 다시 사야만 했다. 한 번 신경쓰기 시작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키세와 연관되었다. 대학을 택한 것은 순전히 키세 때문이었다. 적어도 키세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면 연락의 끈이 닿아있을 것 같았다. 아무데나 화풀이를 해대면서도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답답한 지도 알 수 없었다.
심난한 상태 그대로 4월을 맞이하고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 거리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키세였다. 전에는 잡지모델로나 종종 나오던 키세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나온 것을 아오미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녀석은!"
아오미네가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던 키세와 가장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쿠로코가 만나자는 데도 키세가 거절했다는 사실은 아오미네의 불안감과 화를 증폭시키기엔 충분했다. 이대로 만약 키세가 영영 멀어져 버린다면? 1on1을 하자고 쓸데없이 들러붙지도 않고, 그 괴상한 별칭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오늘은 날이 좋아요 아오미넷치는 뭐함까?^▽^」 같은 쓸데없는 문자가 아침부터 날아와 그 소리에 잠에서 깨는 일도 없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다른 얘기를 하며 달라붙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붙임성 좋은 키세니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럼에도 역시 먼저 연락을 할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그 경기를 보러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차피 그 팀은 나중에 한 번 붙게 될 거라며 전력탐색이라도 하러 가자고 누가 제안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선발에 '카사마츠 유키오'란 이름이 눈에 띄었을 뿐. 카이조의 포인트 가드. 곧 죽어도 에이스는 키세라고 그랬었다. 키세는 자기 자신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믿고 있었다. 꽤나 의지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보러간 것 뿐이었는데.
예전처럼 반갑게 웃을 줄 알았는데 선글라스 너머에서 보인 얼굴은 당혹 그 자체였다. 눈을 굴리면서 변명을 하고 떼어내고 억지로 붙들면 곤혹스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굴이 그 녀석을 보자마자 웃었다. 예전에 아오미네에게 하던 그대로. 선배!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예전에 아오미네를 부르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키세는 갔다. 그대로.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녀석이 최우선순위로 삼는 건 내가 아니었었나?
당혹과 동시에 배신감과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었다. 발로 키세네 집 문을 뻥뻥 차대면 밤에 뭐하는 짓이냐며 이웃집이 항의했지만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면 상대도 험악한 기세에 눌렸는지 조용히 들어간다. 몇 번을 차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자식이랑 뭘하느라 아직까지 안 들어와?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모이에게 연락해 키세의 새 주소를 알아 여기에 온 지 네 시간쯤 지난 셈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머릿 속에서 카사마츠와 나란히 걸어가며 별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해대고 있을 키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전부. 그 목소리도, 얼굴도, 자리도. 그런데 왜?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렇게 변한 거지?
"선배 진짜 너무 멋졌슴다."
"알아."
"우에, 선배 그걸 인정해요?"
"술주정뱅이 새끼는 그냥 입 닥쳐. 차라리 이럴 거면 우리 집에 가는 게 낫지."
"그러고 싶지만 내일은 아침부터 촬영임다. 헤헤, 저도 선배네 집에 가서 자고 싶슴다!"
"시끄러워!"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와 징징대며 늘어지는 목소리는 아오미네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카사마츠에게 꼭 달라붙어 헤실헤실 웃는 키세의 얼굴을 보니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아오미네는 얼굴을 굳히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놔."
손바닥을 내밀면 카사마츠가 얼굴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구만."
"그럼 내놓으시죠, 선배."
"뭘?"
턱으로 가리키면 카사마츠도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키세를 흔들어 깨웠다. 어이, 키세. 이 새끼야 당장 안 일어나? 상황파악 못하고 발로 차대면 그제서야 인상을 찡그리더니 키세가 눈을 비비며 제 발로 섰다.
"선배, 진짜 아프다니까요? 사랑의 매가 너무 쎄요."
"됐고."
곁눈질로 아오미네를 흘깃거리면 키세가 멍청한 표정으로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서야 조금 제대로 뜨여진 눈이 아오미네를 향해 아오미네는 조금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선배, 다음은 내가 할 테니 이제 집에 들어가시죠."
"너…."
"무슨 할 말이라도?"
"키세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우린 중학교 동창이라구요? 설마 내가 얠 패기라도 할까."
"할 말은 많지만 내가 널 보면 하고 싶은 말 딱 하나만 하고 간다."
"…?"
"개자식."
난데없는 욕설에 아오미네가 당황한 사이 카사마츠는 키세에게 시선을 돌리고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때리면 당장 전화하라든가, 도망치라든가, 112에 신고라도 하라든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잠정적 범죄자 취급을 해대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고 키세는 이 쪽 저 쪽 눈치를 살피면서 네네, 잘도 대답하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겠슴다, 선배! 가면서도 걱정되는지 힐끔힐끔 뒤를 쳐다보는 카사마츠가 몹시도 거슬렸지만 아오미네는 참고 봤다. 일단은 키세가 먼저였다.
"어쩐 일임까, 아오미넷치."
우물쭈물하면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키세였다.
"너, 일부러 나 피하냐?"
"별로 그런 건 아님다. 그냥 어쩌다보니…."
"농구는 대학 가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고? 인터뷰 잘 봤다."
"그거 꽤 오래 전 인터뷰네요."
"날 동경해서 농구를 시작했다며? 근데 왜 그만 둬?"
두서없이 나간 말은 유치하지만 아오미네가 묻고 싶은 것들이었다. 왜? 어째서? 그러나 그 말에 키세의 표정이 순간 훅 가라앉았다. 낮은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그만 뒀어요, 동경하는 거."
"따라잡겠다더니?"
"그것도 그만 뒀어요."
"그렇게 근성 없는 녀석이었냐."
"안될 놈은 안된다잖아요. 그냥 안되는 것이었나 보죠. 이 쪽이 더 적성에 잘 맞는거 같고."
"이 쪽?"
"모델 일 말임다. 아오미넷치도 봤잖아요? 최근에 저는 바쁘거든요. 할 말 없으면 가주세요."
아오미네를 밀치고 앞으로 가려는 키세를 붙잡으면 키세가 또 왜요, 라고 여전히 뒤돌아 본 채 힘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진짜 그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냐? 너랑 그렇게 안 어울리는 표정만 짓는데?"
"사람들은 다 칭찬하던 걸요. 그럼 된 거 아님까?"
"때려쳐."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키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더니 아오미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오미넷치."
그렇게 부르는 시선과 목소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아오미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키세가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다시 아오미네를 바라본다.
"아오미넷치는 저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죠."
"뭐?"
"저는 매일 생각했었어요. 아오미넷치는 농구할 때 웃는 얼굴이 제일 좋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렇게 되돌릴 수 있을까. 모못치도, 쿠로콧치도 걱정했죠.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슴다. 근데 아오미넷치 말이 맞았어요."
뜬금없는 말에 아오미네는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키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넌 안돼."
심호흡을 하며 키세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었다.
"아오미넷치는 절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귀찮게 따라붙기나 하고 그래봤자 계속 졌으면서. 속으로는 시시껄렁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 그런 적은 한 번도… 그렇지만 아오미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깊게 가라앉은 키세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빛났다. 또, 그 표정이었다. 끔찍한 무표정.
"그래서 그냥 그만둔 것 뿐이에요. 근성 없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죠, 뭐. 아, 저 진짜 이제 집에 가서 자야돼요. 내일 새벽부터 이동해야 됨다. 아오미넷치도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붙잡은 팔을 빼내고 키세는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시 붙잡을 기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정말로 저게 자신이 알던 키세 료타가 맞을까? 키세 료타가 자신에게 농구를 하자며 조르던 시절이 있긴 했던걸까? 모든 건 꿈 같은거 아니었을까? 낯선 풍경을 보듯이 키세를 바라보던 아오미네는 퍼뜩 키세가 부른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오미넷치."
"…?"
"좋아했었어요. 그것도 그만뒀지만."
고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평이한 말투로 말한 키세가 문을 열고, 문이 닫히고, 사라졌다. 몇 번을 멍청하니 서서 그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고서야 겨우 키세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좋아해? 키세 료타가 나를? 아니. 아니었다. 명백한 과거형의 문장. 키세는 그만뒀다고 얘기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일순 밀려 온 공허에 아오미네는 어떻게 해야 될 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