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in Blue
세상에 바다가, 바다가 거기에 있어서, 떠내려가서, 가라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 무나카타는 꿈을 꾼다. 그 새파란 바다에 잠겨 아아.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파멸의 끝을 보노라고. 둔중한 굉음, 무거운 물 속에서도 속도를 잃지 않고 중력보다 더한 힘에 끌려 낙하하는 날 선 은색의 검. 머리 위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잡아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그 검이 자신을 찢는 꿈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속에서 결국은 한심하게 몸부림치는 자신이 무나카타는 싫었다. 자꾸만 엇나가는 생각을 억지로 끼워맞춰 차라리 끝이 빨리 왔으면 하는 그 조급하고 하찮고 한심한 소망 속에서 숨을 토해낸다. 멍한 귓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잡을 수 없고 눈이 아파 제대로 뜰 수 없는 시야의 끝엔 공기방울만이 모든 것에 역행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는 와중에 어디선가 아득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이, 무나카타―――
왕이란 자리가 무겁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니면 그 무게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이 생기고, 선택받고, '왕'이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 되었을 때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언젠가 와야 할 자신의 것이 온 것처럼 받아들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빛깔. 한없이 산뜻하면서도 차갑게, 깊게 깊게 가라앉는 그 색이 무나카타는 맘에 들었다. 그렇지만, 글쎄. 색을 원판에 풀어놓으면 빨간색의 보색은 초록색이라던데 왜 사람들의 상식에선 빨간색과 파란색이 대비되는 것일까?
상식과 편견을 뛰어넘어 어디까지나 논리에만 기초하여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나카타 레이시가 그 붉은 왕, 스오우 미코토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배겨진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었을까.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본능적으로 스오우 미코토를 꺼렸다. 깔끔하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죠.'라는 말 한 마디로 나눌 수 없는 그런 진득거리는 무언가가 분명히 스오우에겐 있었다. '호무라'의 난폭함, 예의 없음, 무질서, 불규칙,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애매한 감정에 기반한 그 클랜의 구성. 전부 다 무나카타의 맘에 들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는 건 치워버려야 할텐데, 스오우 미코토와 그의 클랜은 무나카타에게는 참으로 전례없는 무언가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적으로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사적으로도 좋은 기회라는 걸 무나카타는 부정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후득거리는 굉음과 뒤틀림이 사방을 뒤흔든다. 공기마저 달아올라 제멋대로 휘몰아쳐 옥죄인다. 태양이 녹아내리면 이런 기분일까. 거대한 검이 그 힘을 잃고 바스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차가운 손이 따뜻하다. 온 몸의 감각이 제멋대로 날뒨다. 뜨겁고 예민하고 동시에 둔하다. 불쾌하게 들러붙는 열기가 주는 감각이 모두 낯설고 짜증나는데 스오우 미코토만큼은 제 세계에 있는 듯, 몇 번이라도 봤던 풍경인 것 마냥 익숙한 표정이다.
한 번에 끝낸다.
아무리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어도 감이란 게 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이 무나카타."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고 바짝 긴장해 호흡을 가다듬던 무나카타의 귀에 여전히 나른한 스오우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꽂혔다.
"…뭡니까 스오우. 최후의 유언이라도 하실 계획입니까?"
겨우 적응했던 아찔한 열기가 깨져 삐끗해버린 무나카타가 있는 힘껏 평상심을 유지하며 입을 열면 스오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메마른 대지를 밟는 소리가 천축을 뒤흔드는 것 같이 크게 들렸다. 아지랑이에 일그러져 울렁거릴 정도인데 스오우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검을 다시 고쳐쥐며 자세를 바로 잡으면 가볍게 현기증이 인다. 끈적이고 진득하고 훅훅거리는 게 눈 앞의 징그러울 정도로 익숙한 남자와 똑같았다. 이 남자를 죽이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련의 동작들을 끝내면 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그러들 터였다. 그러니까.
"유언?"
그의 클랜에서 스오우 미코토의 오른팔 같은 남자는 그를 사바나의 사자라고 칭한 바 있었다. 퍽 잘 어울리는 얘기였다. 마르고 건조하고 뜨거운 대지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모든 것을 그저 내려다보기만 하는 남자. 가끔 오수를 즐기며 하품을 하고 늘어져 움직이다가 제 적이 나타나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딱 그 짝이었다. 언제나 느긋하던 남자에게서 그르렁대는 목울림 소리와 함께 경멸어리고 적대심 가득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안 죽어. 여기서. 네 손에는 더더욱."
"그런 승산없는 얘기는 마지막 남은 허세인가요."
"허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조금 남은 기력조차 힘에 지배당하는 당신을 제가 꺾지 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평소보다 더 시시하군요."
"내가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선연한 비웃음이 붉은 불꽃과 함께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백 번, 천 번, 네 그 겉만 번드르르한 검으로 찔러봐라 무나카타.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착각하고 있는 건, 네 쪽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에 숨이 막힌다. 상황은 분명히 다른데, 밑도 끝도 없는 무겁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대신 분명히 땅을 디디고 뜨거울 정도의 열기를 버티고 있는데도 무나카타는 익숙한 꿈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들고 있는 검신의 길이를 가늠한다. 당장, 당장이라도 힘있게 손목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의 몸에 분명히 상처를 낼 수 있는데, 그 전에, 숨이 막혔다.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조각조각 찢어져 엇나가는 생각들. 붕괴하는 다모클레스의 검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기 전에, 그 전에, 죽여야 하는데.
"날 네가 꺾지 못할 리가 없다고?"
부글부글, 내쉬는 숨이 모두 공기방울 되어 위로, 위로 올라가는데 음습한 공포가 무나카타를 감싸,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파멸만을 기다리고 있으려면 늘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고통스런 감각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하지 않는 그 꿈에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어느 순간 훅- 가까워진 얼굴이 맹수의 눈으로 비웃는다. 자신의 것보다 약간 큰 손이 제 손등을 움켜쥐었을 때야 무나카타는 자신이 검을 떨어뜨리기 직전이었단 걸 깨달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하려 해도 언젠가 찢겨졌는지 모를 사고와 함께 모든 감각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끓어오르는 대기 속에서 무나카타는 숨을 내뱉었다. 쥐어짜인다. 짓눌린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일까. 파멸을 맞이하는 건 이 쪽이었나?
- 어이, 무나카타.
그 목소리는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의 소리였을까. 모른다. 무나카타는 모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그러쥐어 억지로 검 끝을 바로 세운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무방비한 표정, 이글거리는 태양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검의 표면이 반짝거린다. 소리도 없이 공기를 가로지르는 화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무나카타의 눈에 잡힌다. 속도를 결코 떨어뜨리는 일 없이 떨어지는 은색의 검.
"스오우."
어둡고 푸른 바다가 가득 차올라 모두가 가라앉는 가운데 내뱉는 숨만이 위로, 위로 올라간다.
적청은 어려웠습니다. 선님에게 좋은 리퀘를 받고 제가 망쳤습니다. 분량이 안되는 것 같아서 이 쪽 카테고리.
적청은 좀 더 캐릭터가 잡히면 쓸게요. 두 왕님들은 일단 출연부터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적왕님은 탈옥부터 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