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나후시] 어떤 회개에 대하여
http://nitrogenal.tistory.com/19 와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안 읽으셔도 무방....하긴 합니다 아마.
신성모독으로 걸리진 않겠지... 역시 모처 리퀘.
저마다 일이 바쁜 가운데 위화감을 느껴 무나카타가 시선을 돌리면 한 자리만이 공석이다. 점심시간이라 텅텅 비었던 사무실이 가득 찼는데도 점심시간에도 느긋하게 턱을 괴고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자판을 두들기던 뒷모습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다. 5분, 10분, 30분, 1시간. 외근표에 쓰여진 이름만 주인을 닮아 거칠게 뭉개지는 글씨체로 덩그러니 써져있고 텅 빈 자리의 주인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곰곰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도 잡히는 게 없다. 중앙으로 갔던 아와시마조차 무나카타의 예상보다 꽤 늦은 시간에 돌아오면 곧바로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실종된 마피아의 무기창고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수색 중이고 물류상자들 곳곳에 다량의 총기 및 폭발물이 숨겨져 있어 전부 회수하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아와시마 군의 유능함 덕분일까."
"아뇨. 이 부분은 후시미 사루히코가 발견, 먼저 수색하고 있던 호무라를 제압하고 확보한 뒤 연락이 왔습니다."
"후시미 군이?"
몇 남지 않은 퍼즐 조각을 끼워맞추던 무나카타의 손이 멈추고 한 쪽 눈이 의아하게 들려올라가지만 아와시마도 이유는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도 어차피 몇 단계를 건너 뛴 보고를 들었겠지. 아와시마라면 당연히 그 다음 어떻게 발견했는지 정보의 근원을 물을 것이고 후시미가 그것을 아주 곤혹스러워 할 거란 상상정도는 무나카타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정보 수집 능력과 일처리 부분은 분명 셉터4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테지만 그는 너무 비밀이 많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억지로 캐낸다면 대답하는 대신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 그 모든 정보들을 제 머릿 속에만 둘 것이다. 무나카타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정보들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비용과 노력 전부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니 건드리지 않을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후시미 군은?"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는 타입이라 후시미가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대부분은 명확하게 성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이 끝났으면 지금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왔으려나 싶어 블라인드가 내려진 바깥을 쳐다보면 아와시마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따로 연락을 할까요?"
"…아뇨. 결과가 있다면 정보의 출처는 의미가 없겠죠. 들어가세요."
"창고의 일이 전부 정리가 된다면 결과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짧게 목례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나카타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가 손에 들린 퍼즐조각을 다시 끼워맞췄다.
몇 천, 몇 만 피스의 퍼즐이라도 전부 그러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은 익숙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조각은 너무 많다. 애초에 전체의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몇 장의 그림을 겹쳐 이어지는 구석이라곤 없이 부자연스럽게 뒤섞어버리면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이 나올까.
무나카타는 생각해본다. 쳐지고 길게 찢어진 눈매, 항시 가볍게 찌푸려진 미간, 제멋대로 길어 거친 머리카락, 희고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 크지만 얇은 손, 갈비뼈가 드러나는 마른 상체 같은 것들. 머리카락을 쥐어 거칠게 뒤로 제끼고 잡아뜯어버릴 것처럼 피부를 깨물어도 고통섞인 신음 뒤에 익숙해지면 그저 희미하게 비웃기만 하는 얼굴을. 복종을 요구하는 무나카타의 폭력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후시미 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올려주는 손길에 후시미는 눈을 감은 채로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한 쪽은 너무 말이 없고 한 쪽은 너무 말이 많다. 불꽃의 색보다도 극렬한 대비. 불현듯 예전에 호무라 한 켠의 소파에 누워 있으면 후시미를 말없이 바라보던 스오우의 얼굴이 생각나 고개를 젓는다. 스오우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은 결코 열지 않았다. 처음부터 후시미가 떠날 사람인 걸 알았던 것처럼 그 눈동자엔 미동도 없었다. 오늘 후시미의 셔츠를 제껴 상처 난 인장을 보던 눈만이 조금 동요했을 뿐 스오우의 눈은 항시 무거웠다. 무나카타의 눈도 그것과 비슷하지만 이 남자는 정말로 말이 너무 많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얄미워 후시미조차 질릴 정도였다. 보나마나 웃고 있을 안경 너머의 뻔뻔한 낯짝을 한 대 거하게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후시미는 눈을 감고 무나카타에 손에 몸을 맡겼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성적 취향이 꽤나 독특하단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것은 후시미 사루히코 한정으로 질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애정이 깃든 폭력이라는 건 참 생소하다. 섹스는 애정이 넘쳐흐르는 연인들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호간의 암묵적인, 1g의 호감이라도 존재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의 일방향이라면 그것은 애정도 아닌 폭력의 다른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떨까. 거칠게 짓눌렸던 목이 헛기침을 할 때마다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벨트에 묶인 손목이 따갑고 답답하다. 머리 위로 들여올려져 이상하게 한계까지 뒤틀리는 바람에 어깨 근육은 뻐근하고 짓밟혔던 허벅지의 여린 살과 걷어차인 배는 어쩌면 내일 즈음엔 멍이 시퍼렇게 들지도 모른다. 무심코 몸을 뒤틀었다가 올라오는 묵직한 둔통에 인상을 찡그리면 무나카타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요. 닦고 약 발라줄테니까."
이런 걸 병주고 약주고라고 하던가. 모든 감각을 아까 전부 쏟아부었는지 몸에 닿는 물수건의 감각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아 입술을 씹으며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려 애쓰면 물에 젖은 차가운 손이 후시미의 입술을 살짝 밀어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른 곳들이 충분히 아플텐데요."
"…누구, 탓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제 탓이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비꼬면 무나카타는 태연하게 응수한다. 이 남자의 애정은 이상하다. 애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섹스는 합의고 거기에 덧붙여진 무차별적인 폭력도 마찬가지였다. 저항도 반항도 무의미하다. 애정이 깃든 폭력. 그것은 늘 정의내리기가 모호했다. 후시미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행위들의 의미도 모르고 어떻게 밀어내야 할 지 몰라 그저 감내할 뿐이었다.
"오늘 스오우 미코토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빠르기도 하시지.
무나카타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직접 얘기를 꺼낼 거라고 후시미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에게 담배를 위문품으로 주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더군요. 후시미 군은 사실 피지도 못하잖아요."
"모르시는 게 없네요."
저 멀리 널부러져 있는 재킷 안주머니의 담뱃갑은 후시미도 왜 들고 다니는지 이유를 몰랐다. 충동적으로 샀고 버리긴 아까웠고 그렇지만 펴보면 맛은 없었다. 연기가 들어갔을 때의 그 매캐함과 역겨움을 억지로 참아내면 그럭저럭 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걸 달고 다니는 스오우나 쿠사나기가 이해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나카타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억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비꼬아도 그저 웃음소리만 들린다.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뭘 해도 귀찮아 눈을 뜨기가 싫었다.
"어떻던가요. 전 왕을 대면한 심경은."
"…딱히."
후시미는 결국 퇴근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늦게 스오우를 감시하던 대원에게서 후시미가 한 번 면회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와시마를 통해 한 번 들르라고 얘기하면 후시미는 알아서 무나카타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맞춘다. 한 번 배신한 전적이 있는 남자의 속을 알 리가 만무하다. 모든게 흐릿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나카타에겐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느슨한 태도 속에 겹겹이 높은 장벽을 쳐둔 소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굽히지는 않는다. 스오우 밑에 있었을 때라고 태도가 달랐을 것 같진 않지만 후시미의 목엔 여전히 반쯤 지워졌어도 스오우의 인장이 붙어있었고 무나카타는 어떤 형태라도 그것을 덮을 수 있는 흔적을 계속해서 남기는 것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본인이 얘길 꺼내질 않으니 그저 과거의 것이라 치부했는데 오늘 후시미가 제 발로 스오우를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나카타의 머릿 속에 스쳐지나간 것은 후시미가 재킷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작은 담뱃갑이었다.
몇 번째였더라, 그 때까진 무나카타의 행위도 그렇게 거칠진 않았다. 잔뜩 피곤에 절은 얼굴로 셔츠와 바지를 주워입고 마지막으로 후시미가 재킷을 들어올렸을 때 툭 떨어진 그 물건은 무나카타에겐 제법 의외의 것이었다.
"후시미 군, 담배도 폈었나요?"
무나카타가 담뱃갑을 주워들고 물으면 후시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던 것을 기억한다. 곧 지워지긴 했지만 약간의 침묵 후에 후시미는 대답했다.
"가끔, 입니다."
"미성년자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담뱃갑을 열면 이미 닳아빠진 모서리와는 다르게 두 세개만이 들어갈 공간이 있고 꽤나 빽빽하게 차있었다. 확인하기 무섭게 불편한듯 낚아채가는 후시미의 손놀림은 잽쌌다. 그 뒤로 한 두번 후시미가 몰래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콜록거리며 힘겹게 빨아들이다 연기를 내뿜는 폼이 영 익숙해보이진 않아 도대체 왜 그 쓸모없는 것을 들고 다니는지 의문이었지만 오늘 겨우 답을 알아낸 느낌이었다. 그것은 의외로 무나카타에겐 아주 불쾌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직도 과거를 맘에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오늘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혹시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가 모르는 후시미를 알고 있는건 아닐까. 그럴 리 없겠지만 후시미는 혹시 그에게만큼은 굴복했던 걸까.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도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더 선명해질 멍자국들을 닦아내며 무나카타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고 있는데요."
"스오우 미코토가 아니고요?"
"그건 또 참 뜬금없는 얘기네요."
"내 밑으로 들어왔다면 과거는 잊어버려요. 이전의 왕 따윈 필요 없습니다. 추억에 사로잡혀서 쓸데없는 짓도 하지 말아요. 지금 후시미 군의 주인은 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마음도 몸도 전부 복종하는 게 좋아요."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꼴을 당하고도 아무 불평도 안 하잖습니까. 나의 왕인 당신의 명이니까."
눈조차 뜨지 않고 후시미는 입을 놀린다. 이건 비꼬는 걸까? 지금까지 무나카타의 방식이 전부 틀렸다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굴복시킬 순 없을 거라고? 한 번도 뜨지 않았던 감은 눈이 앞으로도 영영 무나카타를 바라보지 않을 것 같아 무나카타는 미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문득, 무나카타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만 했다.
"후시미 군."
"……"
"좋습니다. 얘기를 바꾸죠."
침대 맡의 무게가 사라지나 싶었더니 발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후시미는 결국 눈을 떠야만 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안경을 쓰지 않아 흐릿한 시야에서도 그 형태만큼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잘 보여 후시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당신은 저에게 복종하고 저는 당신에게 굴복하겠습니다."
"……하?"
"불행히도 머리카락이 그리 길지 않아 발을 닦을 순 없겠지만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는 정도라면 언제든지 하죠."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고 향유로 씻고 입을 맞추던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그랬던걸까. 무나카타의 말은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반쯤은 진담이기도 했다. 무나카타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나마 상처가 남지 않은 발 끝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대면 후시미의 얼굴이 경악과 당황이 뒤섞여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겨우 떠진 눈이 무나카타를 바라본다. 굴복시킬 수 없다면 이 쪽이 굽히고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매달리고 있는 쪽은 무나카타였고 후시미가 아니었다. 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관계다. 이를 명령이라 한다면 후시미는 지금까지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폭력에 익숙해졌듯이 후시미에 대한 무나카타의 이 굴종에 익숙해지면 이 쪽만을 보게 만들고 잉크가 종이를 타고 올라가듯이 발 끝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워 나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의 가장 총애받고 신뢰받던 여제자가 되었고 무나카타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가질 수 있게 될 터였다.
일부러 천천히 다시 한 번 발가락 끝부터 입을 맞추면 후시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어라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목소리를 뱉지 못하고 무나카타를 쳐다볼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좋았을걸.
눈을 감고 꿈적도 하지 않던 후시미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히 무나카타만을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