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3!/오미사쿄] Chance
2018. 03. 24. 일본판 오미사쿄 원드로 '실연' 주제가 넘 좋아서^0^
이번엔 오미사쿄가 사귀고 대신 감독에게 애인이 생깁니다. 사쿄는 이상하게 박복할 거 같아서 실연이 잘 어울림...
"오늘은 이쯤에서 연습 그만 할까요."
"아?"
"아무래도 요 며칠 과제 때문에 밤을 샜더니."
멋쩍게 웃으며 오미는 사쿄를 본다. 리더는 어디까지나 반리지만 대체로 가을조의 주도권은 사쿄가 쥐고 있었다. 연장자에 대한 배려라기 보단 그가 가진 위압감이 큰 탓이리라. 사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반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할까, 리더?" "만전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이 이상 연습을 하는 것도 의미 없죠? 자 그럼 오늘은 해산!" 반리의 쾌활한 박수를 끝으로 레슨실에 팽팽하게 감돌았던 긴장감이 툭 끊긴다. 열기가 가득했던 레슨실을 나오면서도 오미의 시선은 사쿄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건 핑계다. 좋지 않은 것은 오히려 사쿄 씨 쪽이지. 오미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처진 어깨는 기분탓이었으면 좋겠지만 사쿄의 컨디션은 요즘 썩 좋지 않다. 아마도 일주일 전부터.
"…차라리 스마트폰이라도 되고 싶어."
"항상 하던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 말하니까 엄청 패기 없는 발언이네."
물이라도 마실까 하고 오미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소파를 끌어안고 쭈그려앉아 있는 마스미와 봄조의 면면이 보인다. 마스미는 일주일 전부터 우울의 바닥에 떨어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밥도 남기고 잠도 못 자는 것 같다고 츠즈루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무성의하게 막대사탕을 우득우득 깨물며 게임을 하고 있는 이타루지만 어쨌든 그도 마스미가 걱정돼서 옆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럴만도 하지. 오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스미가 열렬한 연정을 숨기지 않았던 상대는 최근 연애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20명이 넘는 남자들을 책임지던 감독은 사생활도 없다시피 극단의 일에 열심이었는데 최근엔 조금씩 귀가가 늦어지거나 행선지를 숨긴 채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다들 감독에겐 감독의 사생활이 있으니까, 하며 화두에 올리는 것을 피했지만 일주일 전 심야에 하필이면 마스미가 낯선 남자의 차에서 내리는 감독을 보고 만 것이다.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은 마스미가 그 원인을 말하지 않을 리도 없고 감독의 연애소식을 일파만파 순식간에 기숙사에 퍼져 그 결과가 이것이다.
"아저씨가 좀 말려봐."
사쿄가 감독과 단둘이 얘기라도 하려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던 마스미가 사쿄에게 자발적으로 말을 건 건 아마 그게 처음이 아닐까. 거실에서 일어난 소란은 얇은 벽을 타고 방 곳곳까지 퍼져 오미도 타이치와 함께 나왔었다.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오미가 걱정했던 건 마스미보단 사쿄였는데 사쿄는 코웃음 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축하파티의 건의인가? 예산은 만들 수도 있어."
"그 얘기가 아니잖아."
"어이, 꼬맹이. 너처럼 요란하게 실연하는 녀석도 없을 거다.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그 때 사쿄의 패기가 어찌나 흉흉했는지 마스미를 둘러싼 극단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스미도 입을 딱 다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하고 귀가한 감독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건 오미였다. 사쿄는 고개만 끄덕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극단원들은 자연스럽게 해산. 마스미만이 마지막까지 감독 앞에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츠즈루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마스미처럼 눈에 보이게 티를 내면 좋을 텐데.
학교에 갔다와 감독이 없으면 주인 잃은 개처럼 현관 앞을 배회하는 마스미에겐 배려의 손길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 배려를 마스미 본인이 달가워하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위로를 해준다는 건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사쿄 씨는? 오미는 그 날 이후로 사쿄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첫사랑이 감독이라는 건 극단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첫사랑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 순애보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것도 아마 알 사람은 알 것이리라.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희미하게 누그러지는 분위기, 부드러운 미소, 가끔은 지나친 과잉보호. 누군가는 딸을 보는 아빠 같다고 말했지만 마스미가 사쿄를 공공연히 연적으로 삼고 있는 이상 그의 애정이 엷고도 길게, 오랜 시간에 걸쳐 살아있다는 사실을 오미는 알고 있었다. 매일 새롭게 절망하고 있는 마스미를 보며 사쿄는 혀를 찼지만 그런 사쿄의 마음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타이치가 곤히 자는 소리가 들리지만 오미는 걱정 때문에 뒤척거리느라 통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사쿄의 견고한 등은 온통 빈틈 투성이였다. 일주일 내 잘 버티고 있었지만 오늘도 합이 안 맞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게 몇 번인지. 차라리 그럴 거면 남한테 기대면 안돼요? 같은 말이 어물어물 튀어나갈 것 같은 것도 몇 번이었다.
아니. 아니지. 전부 걱정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자신은 비겁하고 비열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 견고한 등의 빈틈이 오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평소엔 상상도 못했던, 1%의 가능성도 없었던 일에 자꾸만 희망과도 비슷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츠즈루는 사람 보는 눈이 꽤 좋은 거 아닐까. 오미는 깊게 심호흡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들은 무의식 중에 숨은 자신의 어두운 일면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도 깊게 잠들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오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쉴 무렵 옆방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미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도 오미의 신경을 건드리던 등이 어둠 속에서 복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부엌으로 향했던 것처럼 보였던 등은 무언가를 챙겨 중원으로 향한다. 오미는 서둘러 그 뒤를 쫓아나갔다.
"사쿄 씨."
중원의 테이블에 앉은 사쿄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후시미? 피곤하다던 녀석이?" 앗차. 그런 핑계로 연습을 일찍 끝냈었지. 거짓말이 들통날까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더니 오히려 중간에 깨버려서요." 둘러댄 변명을 다행히 사쿄는 믿는 듯 했다.
"마실건가?"
냉장고에서 챙겨 온 건 맥주 두 캔이었다.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오미를 보는 사쿄의 눈은 퍽 피곤해 보였다.
"사쿄 씨는 안 주무세요?"
"이상하게 잠이 안와서. 늙으면 잠이 줄어든다던데 벌써 그걸지도 모르지."
"거짓말이죠."
무심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전혀 아니었는데 오미의 입은 멋대로 움직여 마음 속에 숨겨놨던 말을 뱉고 만다. 당황해 크게 뜨인 사쿄의 눈을 보며 오미는 이왕 한 얘기 끝까지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쿄 씨 요즘 전혀 집중 못하고 있잖아요. 오늘 연습도, 몇 번 안 맞았던 거 아시죠?"
"…눈치가 빠르군."
"다른 애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네가 좀만 더 어렸으면 좋았을 텐데."
"사쿄 씨가 나이가 더 많아도 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할 걸요."
"꼴사나운가?"
마주보던 시선을 외면하고 사쿄는 캔을 기울인다.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올라간 입꼬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오미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반성을 하는 건 좋지만 자조는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지. 유조도 한 번 지적했던 태도다. 누구보다 근성 있고 노력파인 주제에 어떤 부분에선 이상하게 포기가 빠르지. 오미가 보는 사쿄는 그랬다. 그리고 자기반성은 순식간에 단계를 건너뛰어 거울 너머를 비웃곤 했다. 그럴 거면 빨리 포기해버리지. 깔끔하게 잊어버리지.
"뭐랄까. 어차피 생각은 없었지만… 딸 보내는 아버지 마음이 정말 이럴지도 모르지."
"그것도 거짓말이죠."
"사실 나도 몰라."
"힘들어요?"
"글쎄."
순식간에 한 캔을 비운 사쿄는 오미가 한 모금 마셨던 캔을 슥 빼앗아 마신다. 이상하게 붉은 열도 올라오지 않은 뺨이 오히려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틈, 서늘하게 부는 바람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그럼 말이죠." 육식동물들은 먹잇감을 포착하면 주변을 맴돌다가 상대가 방심하고 등을 돌렸을 때 빠르게 돌진한다고 한다. "저랑 사귀는 건 어때요?" 갑작스러운 말에 사쿄의 고개가 갸우뚱하게 기울어진다. 오미가 사쿄의 손목을 낚아챈 건 순식간이었다. 내용물이 아직 남은 캔이 푹신한 잔디밭 위에 소리도 없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 남자가 싫어하는 걸 안다. 남이 아플 바엔 자기가 아프고 말겠다는 그럴듯한 자기희생. 한 걸음 물러서는 반사적인 태도를 오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부분에서 사쿄와 오미는 비슷하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힘들다면서요, 실연.
마음 먹으면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씁쓸한 알콜맛이 나는 상대방의 마른 입술을 훑으며 오미는 생각했다. 아. 츠즈루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좋은가 봐. 사쿄 씨의 역할도 그랬지. 고집스럽고 아량은 넓고 배려심 있고 충직한 데다 순정파인. 좋아해요. 아마 당신이 감독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저를 힘들게 할 거에요?
저항하려던 손에 힘이 빠진다. 숨통을 물어뜯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단 한번의 기회도, 후시미 오미는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