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우기노] 러브레터와 키스의 날
5월 14일.
2015년에 쓰다만 것을 발굴했습니다...
꽃 피는 계절이 지나면 기온은 한층 따사로워,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나날이 되곤 한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한 끗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검은 트렌치코트의 목깃을 세우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기노자도 기온이 올라가면 별 수 없이 애용하는 코트를 벗어야만 했다. 그래봤자 그 안엔 또 검은 정장이지만 흰 목이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한층 화사해지는 법이었다.
더불어 관공서란 엄격하게 실내온도를 준수해야만 한다. 이상기후에 일찌감치 한낮의 기온은 20도를 넘어섰지만 냉방기기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요즘 같은 때엔 재킷도 벗고 과감하게 흰 셔츠를 드러내니 잘난 얼굴은 더 잘나 보이고 음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셔츠를 반사판 삼아 햇빛을 듬뿍 머금으니 기노자의 성격을 도통 알 리 없는 타 과의 신입 여직원들은 조그맣게 감탄사를 내지르는 5월.
코가미 신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직한 개라면 모름지기 주인이 보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마주해야 되거늘, 영 꼬리를 흔들 기분이 들질 않는다.
"그거, 기노상, 설마……!"
카가리가 경악에 차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낯선 여자의 등과 기노자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는 사이, 코가미는 초조하게 담뱃갑을 쥐었다, 놓았다. 아니, 참아야지. 여기에서 담배를 물었다간 코가미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코가미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는 카가리가 전부 얻어줄 테니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하는 게 상책이었다.
"뭐해요, 기노상! 빨리 뜯어보지 않고."
"…지금 봐야 되는 건가?"
"그럼 지금 보지 언제 봐요! 그거 러브레터잖아요? 러브레터라구요! 보나마나 몇 시 어디에서 보자고 쓰여 있을 텐데, 기노상은 지금 안 읽으면 잊어버릴 거고, 그 가엾은 아가씨는 밖에서 기약없는 기노상을 기다릴 테고, 그럼 다음날 기노상은 공안국 공공의 적이라구요?"
"비약이 지나치다만."
"아, 그냥 빨리 뜯어봐요."
카가리가 기어이 은은한 향수냄새까지 나는 분홍색 종이 봉투를 뺏으려고 하자 기노자는 날렵하게 손을 위로 뻗었다. 아, 기노상! 폴짝폴짝 뛰면서 카가리가 안간힘을 써봤자 기본적인 신장차가 있는데 기노자의 팔까지 손이 닿을 리 없었다.
"카가리."
카가리는 어찌됐든 이 중에서는 가장 어리고 가장 주인을 잘 따르는 개였다. 기노자의 냉정한 호명에 제 분수를 알고 부루퉁하게 이죽이며 구원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코가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팔을 뻗어 낚아 채…려고 했다.
"네게 아냐, 코가미."
눈을 깜박이면서 먹이를 못 찾는 개를 교육시키듯, 다정하고 엄한 목소리다. 아, 뭐, 러브레터가 탐나는 건 아닌데……. 의외의 민첩성에 코가미가 당황하는 사이 재빠르게 봉투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갈무리 한 기노자는 자연스럽게 제 자리로 피하면서 말했다.
"밀린 보고서, 오늘 다섯 시까지. 5분 늦을 때마다 손톱을 하나씩 펜치로 뽑아버릴 거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에 알아듣는 게 늦었던 카가리가 뒤늦게 소리 질렀지만 기노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모니터로만 향한다. 기노자가 받은 러브레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영 글러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코가미는 기노자의 재킷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러브레터는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낭만적인 물건이었다. 오늘 학부생 중 누군가가 학부 공통 교양 직전에 러브레터를 받는 바람에 코가미 주변은 하루종일 러브레터 얘기로 들썩였다. 그도 그럴게 종이도 보기 드문 요즘 같은 시대엔 자필로 쓴 편지라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인문학부 누구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건네, 떠넘기듯 쥐어주고 뛰쳐나간 남학생의 등 뒤로 환호성이 올랐다. 편지를 받은 여학생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이도저도 못하고 편지를 꽉 쥐고 있었다. 당사자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받는 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기노자는 영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오늘의 이슈를 전하는 코가미를 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교류가 서툰 기노자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낯선 것을 보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코가미도 이번엔 얼굴을 긁적여야 했다.
"글쎄. 누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
"너도?"
"뭐……, 그렇겠지. 편지를 쓴다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행위니까 나쁜 소리나 이해타산적인 용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평가가 올라가지 않아?"
코가미도 몇 번 그런 류의 편지를 받았었다. 그 중 한 명과는 사귀기도 했었는데 매일매일 편지를 써 만날 때마다 한뭉치를 코가미에게 건네주곤 했다. 처음엔 나름 성실하게 답장을 써주곤 했지만 그게 귀찮아 그만두니 얼마 안돼서 헤어졌다. 편지 쓰기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코가미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너한테 편지라도 써줄까 기노?"
"왜?"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그런 걸 뭐라 그러던데…… 펜팔? 그냥 편지를 주고 받는 거야. 어때?"
"무슨 내용을 써야되는데?"
"그건 자유지. 할래? 하자, 기노. 내가 먼저 써올게."
기노자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다음날 코가미는 정말로 편지를 써 기노자에게 건넸다. 먼저 그만 둔 것도 코가미 쪽이었다. 몇 번 주고 받다가 시험기간인지 방학인지 흐지부지해져, 열 통 남짓, 3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의 답신이었다.?
기노자가 퇴근할 때까지 기노자의 재킷 안 쪽만 바라보다가 근무가 끝나기 직전, 코가미는 10년도 더 된 과거를 간신히 상기해냈다. 필요한 것을 제외하곤 이사올 때 그대로, 풀지도 않고 박스 채 구석에 쌓아두었다. 먼지 쌓인 짐을 하나씩 풀어헤쳐 코가미는 간신히 기노자가 써 준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날짜와 내용을 보고 있자니 중간의 두 통 정도는 분실된 모양이었다. 한 통은 물에 젖어 우그러들었고, 짐에 깔려 접혀 있었는지 아예 접힌 것도 있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다. 뭘 써야될 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말문을 뗀 편지는 그래도 두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볼 일 없는 기노자의 필체는 획이 생각보다 큼직큼직했다. 두 장은 세 장이 되고 어느 순간부턴 여백없이 꽉 찬 네 장으로 분량이 정해졌다. 그래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기노자가 코가미에게 보낸 편지는 하루 일과 보고 같기도 했다. 코가미가 기노자에게 보낸 것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저는 두 장 채우기도 힘들었는데, 기노는 어떻게 네 장이나 채운 거지? 신기해하면서 날짜별로 훑어보지만 끝까지 별 내용은 아니었다. 다임의 건강상태, 공부의 방향, 휴일에 산책하다 본 노을이 예뻤다던가,?지난번에 갔던 어디의 뭐가 맛있어서 한 번 더 가고 싶다던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이젠 슬슬 편지 쓰는 방법을 알았다고, 러브레터를 쓰는 사람의 심정도, 받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는 말이 마지막줄에 쓰여져 있었다.
아, 젠장.
코가미는 그 구절에서 이번엔 참지 않고 담배를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기노자가 편지를 받고 좋았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코가미 며칠을 전전긍긍하거나 말거나 기노자의 러브레터 사건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다. 카가리는 보고서를 제 시간에 맞춰 쓰지 않았다간 펜치로 손톱이 빠진다는 공포 - 사실 믿지는 않았지만 손톱 대신 카가리의 게임기가 박살날 확률은 충분했다 - 에 쫓겨 아예 잊어버린 듯 했다. 그 외에 아는 사람은 코가미 뿐이었으니 누구도 그의 궁금증을 대신 해결해주진 않았다. 대놓고 그 사람한테 고백은 받았느냐 거절했느냐 물어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3일,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했더니 시프트가 맞지 않은 게 3일이다. 도합 일주일 가량을 그냥 보낸 코가미가 어슬렁거리며 사무실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으려면 뜻밖에도 식당 근처 외부 휴게실에 기노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맞은 편엔, ――그 아가씨다.
저도 모르게 기둥 뒤에 숨어 있노라면 간간히 코가미에게도 말소리가 들렸다. 기노자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절의 말인 모양인지 여자의 "아……." 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겠지. 기노가 고백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묘한 안도감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코가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영 성격 못되먹은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가 연애 좀 할 수도 있는거지, 고백 한 번 받았다고 뒤에서 난리라니. 다음부터는 진심으로 잘되라고 기원이라도 해줄까,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코가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 여자의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훌쩍대던 것도 그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당차게도 물어봤다.
"편지는 감사히 간직할게요. 읽고 나서 답장 써도 되나요?"
"아…?"
"편지 쓰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답장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음? 아, 뭐…… 편지 정도는."
편지? 어안이 벙벙해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빼고 보면 확실히 여자의 손엔 연한 파스텔 그린의 편지봉투가 있었다. 코가미가 며칠 전에 보았던 편지묶음에 있는 봉투였다!
- 편지를 쓰면 어쩔 수 없이 답장을 기대하게 되어버려.?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던 문장을 코가미는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노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좋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기노자에게 코가미로부터 일방적으로 시작돼서 일방적으로 끝난 펜팔은 기노자에겐 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물쭈물 넘어가 버려 분명 기노자도 그대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게 기노자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조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실컷 자기 변명을 하고 있으면 동시에 다른쪽에서 멍청이란 생각도 들었다. 기노자 성격에 그런 걸 조를 리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백한 상대랑 다시 편지 주고 받을 생각이 드냐?
방금 전까지 관대하게 다음 연애를 응원해야지 하던 마음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여기엔 다시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코가미 신야만이 남았다. 기노자는 옛날부터 귀가 얇았다. 흐름에 떠밀려 가는 것도 쉬웠다. 여자는 반대로 꽤 추진력 있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영부영 흘러가 어쩌면 그대로 결혼에 골인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상상이 꽤 그럴싸해서 코가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코가미가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기노자가 말을 끊으려고 하면 여자는 능숙하게 다시 말꼬리를 부여잡아 답을 안할 수가 없는 방향으로 잡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게 생겼다. 어지간해서 도저히 기노자가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양새라 코가미는 결심하고 둘의 대화를 쳐부수기로 작정했다.
"여, 기노."
지나가다 마주친양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기노자의 곤란했던 얼굴에 슬쩍 화색이 도는 틈을 타 코우가미는 그대로 기노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깜박거리는 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코가미의 팔 밑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기노자가 코가미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뭐, 뭐, 뭐야, 코가미!"
간신히 코가미의 우악스러운 팔 밑을 벗어난 기노자가 숨을 못 쉬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대며 소리쳤다. 예고도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남의 라이브 키스씬에 당황한 건 여자가 더했겠지만 그 와중에도 소리 지르고 도망간 게 아니라 코가미를 노려보는 꼴이 제대로였다. 저지른 다음엔 모든 게 척척 진행되기 마련이다. 기노자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으며 코가미는 천역덕스럽게도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실 저희 사귀는데요."
"기노자 씨는 그런 말은 안했는데요. 그렇죠?"
올려다보는 시선에 기노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래서는 택도 없었다.
"그 편지지."
"네?"
"당신이 들고 있는 거, 예전에 기노가 나랑 주고받다가 남은 편지지인데."
코가미가 턱짓으로 여자가 쥐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면 여자는 또 말없이 기노자를 올려다본다. 이건 이견 없이 맞는 말이라 기노자가 고개를 주억이니 여자는 사납게 노려보고는 결국 멀어졌다.그 꼴을 보던 기노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든가 말든가 코가미는 제법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냐, 코가미." 넥타이를 바로 하던 기노자가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노가 곤란해 하는 걸 내가 도와준 것 뿐이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 굳이 그런 거짓말을……."
"사귀었던 건 맞잖아?"
"…과거형이지."
"키스가 처음도 아니고."
"지금 너랑은 안 해."
쌀쌀맞게 대응하며 용건도 끝났겠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기노자의 팔을 코가미는 가볍게 붙잡았다.
"편지봉투 안 버렸네."
"…열 장 정도 사놨었거든. 그 뒤로 쓸 일이 없어서."
"러브레터 받는다고 답장해 주는 사람은 없어, 기노."
"내 기준에선 답장하는 쪽이 더 정중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답장 써 달라고 얘길 하지."
"넌 재미없는 건 금방 잊어버리잖아, 코가미."
코가미가 쥐고 있는 팔을 정중하게 뿌리치면서 기노자는 가볍게 재킷의 주름을 펴기 위해 툭툭 쳤다.
"쓰기 싫은 편지 쓰는 게 고역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였고."
어……. 기노자의 날카로운 말이 코가미를 쿡 찌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코가미를 남겨둔 채 기노자는 성큼성큼 걸었다. 차마 뒤따라갈 용기는 없어 코가미는 그냥 멍청하게 서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제가 할 만한 말이었다. 실제로 의무적인 편지는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 젠장."
과거의 자신이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코가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만 헝클었다. 입술에 남은 타인의 체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