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후시] Leonids
Leonids ; 사자자리 유성우 입니다. 09년에 뉴스에서 떠들어대서 한 번 보려고 밤샜는데 엄청나게 추웠고 창문으론 보이지도 않아서 포기. 모처에서 리퀘 받은 겁니다. 진짜 비처럼 내리는 유성우는 3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98년이 최근이래요. 그럼 몇 년 남은거지?
"추워."
"그러니까 내가 껴입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추울 줄 몰랐지."
설령 알았다고 해도 후시미는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보이는 걸 대충 집어입고 나왔을 게 뻔했다. 11월의 새벽은 생각보다 몹시 바람이 찼다. 야타도 잔뜩 껴입었지만 옷과 피부 틈새로 스며드는 찬기에 몸이 서늘한데 후시미는 달랑 후드에 점퍼 하나다. 후드 사이로 드러난 목이 보기만 해도 서늘하고 차보여 야타는 후시미의 후드를 씌워줬다.
"왜."
"춥대며. 그거라도 뒤집어써라. 보는 내가 시리다."
"싫은데…."
중얼거리면서도 후드를 벗지 않는 걸 보니 춥긴 추운 모양이었다. 후드의 끈까지 잡아당겨 꽉 묶어주고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면 후시미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머니에 넣은 손은 끝까지 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새벽에 왜 여기까지 올라온건데?"
"좋은 거 보여주려고."
"나중에 보여주면 안되냐?"
"안돼."
새벽 야산을 올라올 때부터 후시미는 영 맘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잠에서 덜 깬 얼굴엔 짜증이 가득하고 가늘게 뜬 눈은 야타를 째려보기만 할 뿐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는 듯 했다.
"뭐 얼마나 좋은 걸 보여주려고. 10초 안에 안 보여주면 나 내려간다."
"좀 기다려야 돼."
"얼마나."
"나도 몰라."
솔직히 과연 야타의 생각대로 될 지도 미지수였다. 뉴스에서는 드디어 시기가 돌아왔다며 기대해도 좋다는 둥, 올해 마지막의 천문쇼라는 둥 실컷 떠들어댔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제대로 봤다는 사람도 드물었다. 추위 탓인지 원래도 참을성 없는 후시미는 할 일도 없이 새벽에 야산을 올라오는 너같은 멍청이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악담이야 야타도 질릴 정도로 들어봤지만 초조한 탓인지 그걸 모두 가뿐히 여유가 들지 않는다. 무시하자, 무시해. 속으로 치받는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이를 악물고 짙고 깨끗한 남색 위에 총총히 박힌 점같은 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면 후시미가 옆에서 다시 시비를 걸었다.
"너무 정곡이라 할 말도 잊었냐?"
"뭐가."
"네가 희대의 멍청이라는 데 대해서 말야."
"겉만 멀쩡하고 속은 어린애 같은 네 녀석보다 낫지."
"그리고 넌 겉도 속도 어린애고? 그러니까 매달리는 거잖아, 호무라에."
"야!"
턱- 하니 미사키의 머리 위에 얼굴을 얹으며 씨익 웃는 후시미의 얼굴은 정말로 미묘한 경멸을 담고 있어서 야타도 거기에 대해선 발끈할 수 밖에 없었다.
"왕이고 뭐고 일단 붙으려면 좀 그럴듯한 데 붙어야되지 않겠냐. 유대감 어쩌고 해도 실상은 그것 빼곤 아무것도 없잖아? 이건 뭐 먹고살기도 힘들고 난 내일도 아르바이트라고."
"미코토 씨를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미코토 씨가 너한테 해준 게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들러붙어? 차라리 둘만 있는 쪽이 벌이는 괜찮았을걸?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릴 게 분명해. 그리고 우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버리는 장기말이 될 걸."
"미코토 씨는 그럴 사람 아냐! 그리고 재밌다면서 계약하고 젤 신났던 게 누군데 그래!"
"너겠지, 이 머저리야. 신나서 사고만 뻥뻥치고 다니고."
"야!! 지난번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적당히 한 두대 패고 끝날 걸 아주 떡이 되도록 두들겼잖아. 덕분에 나도 쓸데없이 뛰었어야 되고 뭐냐 그건?"
"너도 안 말리고 옆에서 부추겼거든?"
"그거에 넘어가는 네가 병신이지. 너랑 다녀서 뭐 제대로 된 꼴을 내가 본 적이 없다. 키는 쪼끄매서 성질은 더럽고 툭하면 시끄럽고 말 많아, 사고뭉치에 머리도 안 좋고. 내가 너같은 거랑 왜 붙어다녀야 되는건데? 딱 질색이야."
"너만 그런 줄 아냐? 나도 그래! 넌 나보다 성격은 더 더럽고 기분 나쁘지, 세상에 너 좋아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거다! 지금도 친구 없어서 빌빌거리는 주제에 무슨. 네가 나한테 붙어다니는 거지 너 없어도 난 멀쩡히 잘 살 수 있거든?"
"아하, 그러세요?"
후시미의 눈이 밤하늘 밑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새벽공기만큼이나 차게 얼어붙은 얼굴이 비식거리며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무심한 잿빛이지만 가끔은 하늘의 색으로 빛났다. 오늘은 배경으로 삼은 하늘과 똑같은 깨끗하게 짙은 남색이다. 실컷 같이 떠들어놓고 예민한 척은 혼자 다하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야타는 참았다. 여기까지 말하면 후시미가 정말로 가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라질 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후시미는 자존심이 강하고 가뜩이나 집착도 없는데 살짝이라도 쥐고 있던 것도 한 번 놓아버리면 미련이 없다. 거리에서 마주쳐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잿빛으로 바라보겠지. 무심하게, 아주 무심하게 야타를 바라볼 터였다. 지금 화가 난 눈동자보다도 야타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여기선 붙잡아야 된다, 고 가속하던 비난에 브레이크가 걸리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먼저 사과하기는 죽도록 싫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되지? 후시미 말대로 자신은 진짜 멍청이인지도 모른다.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만 달싹이면 후시미는 한층 더 사납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간다. 잘 있어, 미사키."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발걸음에 그제서야 다급하게 야!! 하고 공기가 지잉- 하고 울릴 정도로 불러도 후시미는 멈추지 않았다.
"너 진짜 갈 거야?"
"추워. 그리고 지금 내려가서 짐 싸려면 빠듯하겠네."
"가, 갈 데도 없잖아!!"
"사람 일은 어떻게든 되던데."
그야말로 후시미다운 대답이었다. 흔들림 없이 걷는 뒷모습이 어둠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때 밤하늘 구석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아, 그렇지. 오늘 이 새벽에, 이 추위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저걸 보기 위해서였다.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요즘은 이미 영악해진 어린애들도 믿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같이 소원을 빌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여 주머니 속에 손을 밀어넣은채 가로등도 없는 우거진 산길을 잘도 내려가려는 후시미의 손목을 낚아채면 놀란 듯 잠깐 커진 눈동자가 야타를 향해 깜박였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거야?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싫냐?"
"……."
"뭐가 어찌됐든 이건 보고 가라."
질질 끌면 후시미의 다리가 잠깐 휘청거리다 맥없이 끌려온다. 하여튼 키 크면 싱겁다는 옛말이 틀린 건 없는 것 같다. 야, 이거 놔라. 하는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반해서 반항은 미약했다. 뿌리치려는 손목을 꽉 붙잡고 아까까지 서 있던 하늘까지 훤히 뚫린 공터로 와 다시 하늘을 바라보면 저 하늘 한 구석에서 다시 반짝, 하고 빛났다.
"봤어? 봤냐? 봤지?"
"유성?"
"오늘 사자자리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이라더라. 예쁘지 않냐?"
"이거 보려고 이 밤중까지 왔냐. 매년 떨어지는거."
"어…?"
후시미의 말에 야타가 어라? 하고 눈을 깜박거리면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눈이 야타를 향하고 픽- 하고 웃었다.
"몰랐냐? 매년 유성우는 떨어져."
"거짓말!!"
"물론 비처럼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면 시기를 맞춰야겠지. 33년 주기로는 정말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더라. 최근엔 20년쯤 됐으니 앞으로 13년은 더 기다려야 되나."
"진짜?"
"그래. 이거 보여줄 거였냐. 그럼 난 봤으니까 내려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식이라면서 생전 처음 듣는 얘기들을 줄줄 읊는 후시미의 말에 야타는 억울함이 흘러넘쳤다. 세상에, 매년 떨어지는 걸 보겠다고, 심지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다는데 이 얼어죽을 것 같은 새벽에 나와 쓸데없이 불화까지 키웠다는게 야타는 억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타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후시미는 정말 내려가자마자 짐을 쌀 기세라 야타는 다시 후시미를 붙잡았다.
"야 자, 잠깐만! 진짜 갈 거야?"
"그것만 보고 가라며. 그래서 보고 가는데."
말만으로 그치지 않는 행동력은 가끔 무서울 정도다. 지난번에도 쿠사나기가 긴밀한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어느 쪽 팀에서 까불어댄다고 본거지로 가서 다 털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하면 돼죠, 후시미는 간단하게 말하고는 아주 죽사발을 내놓고 와서 야타까지 세트로 혼나야만 했다.
"정말 나 싫어?"
"…싫어."
"꼴보기 싫을 정도로?"
"……."
"진짜로 네가 바라는 게 그런 거야?"
키 큰 녀석들은 이래서 불편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아니꼬움을 느끼며 야타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잡고 내리눌렀다. 바람에 메말라 거스러미가 일어난 열린 아랫입술을 깨물고 혀에 닿는 차가운 피부에 한기를 느끼며 슬쩍 핥으면 후시미는 정말로 당황했는지 엉거주춤하게 내려앉은 자세 그대로 야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싫은데."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에 후시미는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그 따뜻한 숨이 얼굴에 닿아 귓볼이 뜨거워지는 걸 야타는 하늘로 고개를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 속에 들어간 후시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뭐하냐?"
한참 후에 후시미가 뱉은 말은 겨우 그거였다. 하늘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야타를 따라 시선을 돌리면서 물으면 야타는 계속 하늘을 주시하며 답했다.
"유성 찾아."
"뭐하게?"
"소원 빌어야지."
"무슨 소원?"
"말 안해."
그러니까 네가 어린애라는거지. 후시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야타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매년 떨어진다고 해도 솔직히, 내년에도 이 고생을 해가며 기다릴 자신은 없고 후시미가 얌전히 따라올 리도 없으니 후시미와 보는 유성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였다. 그렇다면 어린애들도 안 믿는 속설이라고 해도 야타는 꼭 오늘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야, 미사키."
"왜. 그만 좀 불러. 매년 떨어진대도 난 오늘 다 보고 갈 거다. 소원 빌 거라고!"
"그냥 13년 기다려."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 때는 옷도 좀 제대로 입고 얌전하게 기다려 줄테니까 같이 소원 빌면 되잖아? 찾을 필요도 없이 유성은 비처럼 쏟아질거고."
응? 그렇지 미사키? 속삭이며 후시미는 씨익 웃는다. 매끄럽게 그리는 호선은 평소와는 다른 진짜 웃음이고 그대로 가까워지는 얼굴을 야타는 피할 수 없었다. 아까 야타가 했던 그대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를 내밀어 핥으면 따뜻하고 말캉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진다. 네가 비는 소원이래봤자 뻔하지.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간지럽다. 소원따위 빌지 않아도 네 옆에 있을테니까.
아. 후시미의 눈동자 뒤로 유성이 스쳐 지나간다. 빛무리보다 더 아름다운 눈동자를 야타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13년 후에도, 그것보다 더 오래오래 너와 있고 싶어. 그렇게 소원을 빌면 이뤄질까. 틀림없이 이뤄지겠지. 서로가 옆에 없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투닥거리면서도 사랑을 속삭이고 늘 옆에 있을 터였다. 늘. 아주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