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제목은 아무거나....
01.
Aripiprazole 10mg
02.
소년 가엘리오는 정원의 티테이블에 턱을 괴고 불퉁하게 앉아 있었다. 카르타가 맥길리스를 끌고 간 지 벌써 30분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 몫의 차는 다 식었고 가엘리오의 잔은 깨끗이 빈 지 오래였다. 뜨거웠던 스콘도 이제는 버터를 올려도 녹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직전까지 정면으로 들이치던 햇빛은 어느새 옆으로 비껴나 커다란 가문비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었다. 태양의 직접적인 온기를 잃은 바람은 쌀쌀해서 가엘리오는 트레이 밑 칸에 놓여있던 담요를 꺼내고야 말았다. 그 담요는 아주 커서 두르면 어린애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쓸쓸하게 빈 양 옆의 의자를 번갈아 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돌린다. 카르타와 맥길리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저 끝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밑이다. 어제 맥길리스가 오지 않은 사이 토끼가 파놓은 굴을 발견했고 카르타는 아마 그것을 보여주려고 맥길리스가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그를 끌 고 간 것이다. 가엘리오의 눈앞에서.
가엘리오는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콘은 따뜻할 때 버터를 녹여 먹는 게 좋다. 찻잎은 오래 우러나면 떫은 맛이 강해지고 본래의 엷은 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오늘은 체리가 들어간 가향차였다. 그 엷고 부드러운 단 맛은 마시지 않아도 애저녁에 사라졌을 게 뻔했다. 바닥에서 춤추는 가문비나무 잎의 그림자가 증명하듯 테이블에 적당한 햇볕이 드는 시각도 이미 지나버렸다. 곧 있으면 명백하게 해는 지평선과 맞닿을 것이다.
오늘의 티타임은 명백하게 가엘리오가 주인이었고 그들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주인을 바람맞히고 손님들이 휑하니 사라져버리다니!
코끝이 알싸하게 매워지고 눈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나 억울하면 같이 가서 놀면 될 텐데 가엘리오는 오기로 꿋꿋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가엘리오는 내일이면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여덟 살과는 조금 달라야 했다. 매사에 침착하고, 아버지처럼 우아하게 대처하고 유능하게 상황을 이끌어나가야 하며 하찮고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호스트로서의 품위와 예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싶었던 가엘리오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의 짧은 다리는 의자 위에서 점점 난폭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전부 카르타 탓이다. 예의 없는 카르타! 남의 집에 놀러 와서 아는 체도 하지 않는 카르타 때문이다. 조심성 없는 카르타! 예쁜 치마가 좋다고 새 옷을 입고 와놓고 잔뜩 흙놀이를 한 다음 더럽혀졌다며 가엘리오 탓을 하는 카르타 때문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에게 이것저것 시켜놓고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면 생떼를 부리는 카르타 때문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매끄러운 담요의 끝자락을 움켜쥐어 조금 더 몸 위로 끌어당겼다. 예의 없고, 조심성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보다 세 살 많은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좋아한다. 가엘리오는 그것을 카르타보다 더 먼저 알았다. 카르타는 가엘리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맥길리스에겐 친절했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호의와 친절이 맥길리스에게 무시당하자 이내 본성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가엘리오에게 대하는 것보단 천 배쯤은 친절했다. 좋아한다는 건 아마 상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더 잘해주고 싶은 거고?
‘그렇지만 왜 카르타는 화를 냈다가 싫은 소리를 했다가 잘해주는 걸까.’
그것은 언제나 가엘리오의 수수께끼였다. 오늘도 그렇다. 아침부터 가엘리오의 방에 들이닥쳐서 맥길리스가 언제 올지,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도 카르타는 맥길리스는 예쁘지만 품행이 나쁘고, 거만하고, 그렇지만 책을 잘 읽고 머리가 좋다는 험담과 칭찬을 번갈아 했고, 한 시간이 지나도 맥길리스가 오지 않자 ? 당연하지! 맥길리스는 오후 두 시에 오겠다고 했는데 카르타가 온 건 오전 열 시였으니까! - 복도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보드윈 저택에 깔린 양탄자의 갯수를 세어볼 것처럼돌아다니던 카르타는 그것도 질렸는지 가엘리오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곰인형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다음 가엘리오가 조립 블록으로 만든 성이 예쁘지 않다고 멋대로 뜯어고치고 가엘리오의 머리가 길었다며 자르는 게 좋겠다고 가위를 들고 쫓아다녔다. 가엘리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도망칠 즈음에야 맥길리스가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타는 위협하듯 찰캉거리던 가위를 내던지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이제야 오다니. 나를 기다리게 한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어.”
카르타는 비장하게 일요일 아침 8시마다 방영되는 아동 드라마의 악당 같은 대사를 말하고는 거울을 보며 묶은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은 입술색이 예쁘지 않은 것 같다, 가엘리오의 방에서 부산스럽게도 난리를 피우다가 새침하니 나갔다가, 또 혼자 나가긴 쑥스러웠는지 버럭 소리쳤다. “빨리 나와! 너 때문에 늦었잖아!”
가엘리오도 아직은 맥길리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부끄러웠으니 거절하지 않고 같이는 나갔다만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보자마자 대뜸 늦었다고 화를 내다가 잘 왔다고 환대하고 - 여긴 우리 집인데? 가엘리오는 입술을 삐죽였다 -,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텐 뭐든지 잘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엘리오는 카르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이 카르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식이다. 가엘리오는 코를 훌쩍이며 담요를 더욱 바짝 여몄다. 찬바람이 더욱 쓸쓸해졌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둔 채 맥길리스의 손을 잡고 쌩하니 가버린 건 가엘리오를 따돌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카르타는 나쁘지 않다. 그냥 가엘리오와 같이 발견했으니 가엘리오에겐 더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맥길리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미처 가엘리오는 신경 쓰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애랑은 매일매일 같이 있고 싶고 대화도 많이 하고 싶고……, 이해는 하지만!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에, …….”
가엘리오는 결국 어른스러워지기를 포기하고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자세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지금은 춥고, 아홉 살은 내일이니까 오늘까진 이래도 괜찮겠지. 옆머리를 배배 꼬며 테이블에 뺨을 납작 붙인 가엘리오는, 다시 일어나 다 식은 스콘을 입에 밀어 넣고 꼭꼭 씹은 다음, 도로 엎어졌다.
지금이라도 카르타를 쫓아가 차를 다시 내올테니 돌아오라고 할까. 그렇지만 흥이 식은 카르타는 테이블 밑에서 가엘리오의 정강이를 퍽퍽 차댈 게 분명했다. 맥길리스는, 평소처럼 무관심하게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겠지.
그것을 생각하니 가엘리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쓸쓸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차갑고 텅 빈 기분이었다. 뜨거운 눈시울을 자꾸 찡긋거리고 있으면 테이블 모서리에 닿은 가슴팍에선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어제 저녁에 고르고 고른 색종이로 모양을 내고 꽃을 자르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인 생일 파티 초대장이었다. 맥길리스에게 줄 초대장에는 특별히 꽃과 나비에 더해서 푸른 깃털이 아름다운 새를 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도 높은 선명한 코발트블루에 눈 주변과 아랫부리 안쪽이 진한 개나리색인 그 새를,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자주 보는 조류 도감에서 처음 보았다.
“예쁘다.”
맥길리스의 어깨 너머로 그가 읽는 책을 흘끔대던 가엘리오는 무심코 감탄사를 뱉고야 말았다. 얼마나 예쁘고 깊은 파란색이던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자연에서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훌륭하게 예쁜 파란색을 가진 커다란 새가 두꺼운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그려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않던 맥길리스는 그 소리에 힐끔 가엘리오를 돌아보았다. 볼썽사납게도, 가엘리오는 목을 쭉 빼고 그림을 보느라 냉담한 눈동자가 가만히 저를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시선은 온통 그 커다란 새를 향해 있었다. 맥길리스의 얇고 마른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 한참 후에 형태를 갖고 움직였다.
“보실래요?”
가엘리오는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돌려 맥길리스를 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맥길리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한 번 약하게 움찔했다. 가엘리오는 처음엔 맥길리스가 제게 말을 했다는 것도 몰랐다. 한참을 두리번대고, 말없이 책을 옆으로 내밀어주는 맥길리스의 자세를 보고서야 가엘리오는 방금 전의 소리가 저를 향한 말이며, 제게 건네는 제안이었고 맥길리스가 제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응!”
가엘리오는 꾸물꾸물 무릎으로 기어 맥길리스의 옆에 앉았다.
Hyacinth Macaw. 맥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책에 쓰인 새의 이름을 읽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는 약 3.3피트. 다른 앵무보다 크고, 금강 앵무 중에서는 가장 큰 종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읽어주는 내용보다 그의 목소리에, 옆에 닿는 체온들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맥길리스의 어깨는 따듯했고, 머리카락은 가엘리오의 코끝에서 금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는 조용하고 느리고 목울대 어딘가에서 아주 깊이 울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되게 친한 것 같다.”
그 말은 아마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란 사실을 가엘리오는 금세 깨닫는다. 낮은 목소리로 푸른 새에 대한 설명을 천천히 읽던 맥길리스가 침묵해, 바람이 잔디와 우거진 나뭇잎을 쓸어내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가엘리오는 까닭 없이 적막이 무서워 숫제 울 것 같았다.
“왜, 맥길리스. 계속 얘기해 줘.”
그러나 무엇이 그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소년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 사실 맥길리스 본인도 이유를 모르기에 가엘리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평생 알 수 없었다 – 맥길리스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떠났다. 가엘리오의 곁에 남은 것은 푸르고 큰 앵무새의 이미지뿐이었다.
지금도 그 날과 비슷한 것 같았다. 사방은 온통 괴괴한 적막이었고 바람 소리 말고는 일절 들리지 않았으며 이 정원에는 푸른 새의 그림과 저만이 있었다. 소년 가엘리오는 약간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고 기본적으로 내향적이었고, 대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그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예민한 부분이 있어 내버려두면 어느새 찰나의 감정들을 잡아내 그대로 골몰하곤 했다. 보편적으로 이것은 내향적인 아이들의 특기였으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또한 그의 내향성에서 기인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지 않았고 최대한 숨겼는데 그래서 가엘리오의 공상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했다.
지금이 그 찰나였고 순간이었다. 가엘리오의 공상이 이 정원에서 하늘로, 우주로, 진공의 블랙홀에서 의식의 까마득한 저변, 무의식의 세계로 밀려나가고 나서야 카르타와 맥길리스는 그늘지고 쌀쌀한 테이블 옆에 나타났다. 마실 수 없는 주인 잃은 차들은 버려진 지 오래였고 접시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치워졌으며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지면과 하늘 중간에 있게 된 시각이었다.
“일어나, 가엘리오.”
카르타는 무의식의 세계를 유랑하는 작은 항해자가 앉은 의자를 걷어찼다.
“꼴사납게 그게 뭐니. 침이나 흘리면서 자고.”
가엘리오는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카르타의 뒤에 있는 맥길리스의 시선이 가엘리오를 슥 스쳐간다. 손등에 묻어나는 것에 벌게지는 얼굴을 무시하고 가엘리오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어디 갔다 왔어! 기다렸는데!”
침착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목소리였다.
“소리 지르지 마, 얘. 너 오늘 우리한테 줄 거 있지?”
가엘리오를 실컷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 주제에 카르타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고압적인 태도로 손을 내미는 카르타의 태도에 정신 차리고 보니 가엘리오는 이미 품에서 잔득 구겨진 초대장을 내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에서 할 건 다 한 거 같아.”
“아, 뭐야 정말!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네가 좋아하는 버터 스콘도 부탁했단 말이야!”
“어머. 그거 좋네. 가자, 가엘리오.”
그러고 카르타는 제 집인양 쏙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가엘리오는 망연하여 사라지는 카르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르타의 뒤를 쫓지도 않은 채 제 옆에 서 있는 맥길리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얘기 했어?”
“아무것도.”
맥길리스는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답한다. 평소에는 말도 안 하는 주제에, 저렇게까지 말하면 카르타와 어떤 대화든 했다는 얘기였다. 무언가 분하고 억울해 가엘리오는 발을 쿵쿵 구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멀찍이서 천천히 걸어오는 맥길리스를 기다리고는, 가엘리오는 또한 구깃구깃한 초대장을 내밀었다.
“내일이 내 생일이니까, 놀러 와!”
봉투에 커다랗게 그린 푸른 앵무새를 맥길리스가 알아보았을지 가엘리오는 잠깐 신경 쓰였으나 분한 게 더 컸다. 치졸한 소년의 마음은 그를 외면해 높고 긴 계단을 쪼르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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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을 맞은 탓에 몹시 피곤했는지 앉아서 짧고 깊은 낮잠을 잤는데도 가엘리오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홉 살의 아침은 특별하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아홉 살이 되면 어른스러워지겠다고 결심한 가엘리오는 어쩌면 그 날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도련님의 어울리지 않는 음울함을 보드윈의 사용인들은 생일을 맞아 한층 성숙해진 것이라 믿었다.
“아홉 살 생일 축하드려요, 도련님.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그런 건가요? 오늘따라 의젓하시네요.”
가엘리오는 이례적인 우울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다니거나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평소 같은 일이었으나 어제의 일은 유난히 사무쳤다. 가엘리오는 옷을 챙겨 입고 선생님이 오실 방에 앉아 카르타와 맥길리스를 기다렸다. 생일파티라고 거창하게 초대장을 만들긴 했으나 대체로 그들은 가엘리오의 집에 모여 수업을 들었고 놀다 해가 지면 갔으니 그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각에 그들이 도착했고 짧은 아침 인사 후, 오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맥길리스가 한번 이 쪽을 쳐다보는 듯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필기와 작문, 지리와 역사까지 끝나면 점심시간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이미 테이블 위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갓 구운 따뜻하고 쫄깃한 빵과 신선한 양상추에 달고 상큼한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예쁘게 장식된 과일이 각자의 앞에 먹을 만큼 놓여 있었다. 따뜻한 스프부터 천천히 먹고 있으면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작게 잘려 나왔다. 한 입 크게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가엘리오는 별 맛을 느끼지 못 했다. 시선은 맞은편의 맥길리스에게 고정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맥길리스는 아주 느리게 빵을 썰어 입에 넣었지만 먹는 속도는 가엘리오보다도 빨랐다. 스테이크 조각을 조금씩 베어 물고 샐러드를 오래오래 씹는데도 그랬다. 예전엔 이보다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빵을 뭉텅뭉텅 떼어 빵가루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입에 넣었다. 그건 가엘리오에겐 마술 같은 일이었다. 따라하고 싶어도 가엘리오는 그 정도의 커다란 빵을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입에 넣는 건 힘들었고 곧 목이 메어서 우유 없이는 씹어 삼키기도 힘들었다. “맥길리스는 대단하구나. 빵을 엄청 빨리 먹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어린 말이었다. 맥길리스의 먹는 속도는 예전보다 훨씬 느려졌지만 여전히 맥길리스는 입가에 소스 하나 묻히지 않고 야무지게 커다란 덩어리를 입에 넣어 깔끔하게 먹을 줄 알았고 여전히 그것은 가엘리오에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스테이크 조각이 들어가고 사라진다. 하나씩 빠르게 맥길리스가 제 몫을 평정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가엘리오는 쉽게 배가 부르곤 했다.
“도련님, 입맛이 없으세요?”
오렌지주스를 가져 온 하녀가 묻는다. 가엘리오는 퍼뜩 시선을 돌렸으나 그 전에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가엘리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맥길리스의 접시도, 카르타의 것도 모두 비었는데 제 것만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아니!”
가엘리오는 허겁지겁 급하게 포크로 찍어 고기를 욱여넣었다.
점심 식사가 모두 끝난 후에야 케이크가 나온다. 의례적인 생일 파티 노래는 매우 무성의했다. 카르타는 건성이었고 맥길리스는 어색하게 입만 뻥끗거렸다. 그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심드렁했다.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가 한 조각씩 앞에 놓여졌다. 너무 달아서 먹고 싶지 않아 포크를 뚱하게 바라보던 가엘리오의 눈앞에 바스락대는 포장지의 봉투가 내밀어지기 전까진 그랬다.
“자, 선물.”
“아 선물은 주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빨리.”
가엘리오의 심드렁한 반응에 칼같이 쏘아붙인 카르타가 맥길리스의 옆구리를 툭 친다. 맥길리스는 머뭇대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맥길리스?”
“생일, 축하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가엘리오의 기분은 순식간에 다시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고마워!” 아까와는 딴판으로 즉각 나온 말에 카르타는 눈을 흘겼지만 가엘리오에겐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맥길리스의 포장지부터 뜯었다. 작은 판넬 위에 그려진 새였다.
“이게 뭐야? 직접 그린 거야?”
“왕관 앵무.”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했다. 뺨이 발그레하고 노란 왕관 같은 긴 앞머리가 서 있었다. 그게 꼭 맥길리스 같다고 생각했지만 가엘리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예전의 일화를 비추어 보면 맥길리스와의 교우 관계에서 섣불리 말을 하는 건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일 선물 같은 건 한 번도 준비해 본 적이 없다고 맥길리스가 그러지 뭐니. 그렇게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었어.”
“언제?”
“어제. 네가 꼴사납게 테이블에 침 흘리면서 자던 때 말이야.”
“그건 너네가 날 버리고 가서 그런 거잖아.”
“그럼 생일 선물 준비하는데 받을 사람 데려 가니?”
가엘리오는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어제 나 빼놓고 간 게 그거 때문이었어?” 가엘리오가 물었다. “그래. 아무거나 그림이라도 그리라고 했지. 내가 그렇게 시킨 거야.” 카르타가 어깨를 으쓱대며 답했다. 가엘리오의 반응이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카르타에게도 고무적인 성취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콧대가 높아진 카르타를 옆에 두고 가엘리오는 다시 맥길리스를 보았다. 맥길리스는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쑥스러워 하고 있구나! 가엘리오는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맥길리스가 준 판넬을 조심스레 내려두고 다음 선물 봉투를 뜯어 보았다. 카르타가 준 건 커다란 인형이었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엘리오는 여전히 작은 인형을 안고 잔다. 그리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연보라색의 망아지 인형은 역시 가엘리오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가엘리오는 그 두 개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고마워 카르타. 고마워 맥길리스!”
도련님의 반나절짜리 의젓함은 선물 앞에서 사라졌다. 한껏 들뜬 가엘리오는 힘차게 포크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카르타도, 맥길리스도 포크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조그만 합창 후에 아이들은 전투적으로 케이크를 먹었다. 기세 좋게 시작한 것에 비해 가엘리오는 곧 질리기 시작했지만 케이크는 훌륭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가엘리오가 그것을 전부 맥길리스에게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맥길리스는 초콜릿 케이크를 아주 잘 먹었다. 예전에 보았던 감동적인 속도로,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가엘리오는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초콜릿 케이크와 맥길리스와 카르타와 레몬색의 새와 망아지 같은 게.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