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리퀘박스 일곱 번째
'후회공 맥길리스 인생 2회차 실패해서 3회차 돌파하는 거 써주세요..가엘리오는 쉬운 남자가 아니니까'
49화 이전에 푼 썰에 막 섞이니까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뭔가 정신산만하고 대충대충이지만 앞으로도 다른 설정 회귀물 리퀘박스에 두 개쯤 더 있어서 그냥 막 해보았습니다. 퀄리티가 들쭉날쭉 하는데 초안은 너무 오래돼서 까먹었고 이번화가 너무 많이 먹여주니 소화하기도 힘들고 마음이 급하네요.
그 아름답고 고결한 수정 같은 남자가 말하길, "부탁이야. 말하지 말아 줘", ……어찌나 아늑했는지 가끔 눈 먼 장님이 되고 싶었다. 과거는 다리를 얽매고 그를 한 번도 놓아준 적 없었다. 푸른 수정에 비치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뒷면을 모르는 귀하게 자란 이였다. 잘 마른 양지와 푸른 잔디 위만 걸었던 반들한 구두가 하수도가 역류해 시궁쥐가 뛰노는 곳을 걷는 것은 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제 과거를 털어놓고 싶은 심정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스칠 희미한 경멸, 당혹감, 어색함 같은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소문은 천 리를 가고 모든 일은 길면 꼬리가 잡힌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말은 실증된 격언이었다. 따라서 맥길리스 파리드는 그것을 모르는 척 했다.
그의 고결함, 결벽하기까지 한 완고한 성정은 결국 맥길리스 파리드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도를 꿰뚫은 총탄이 몸 속 어딘가에 박혀있을지 짐작해보려 했다.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안되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뻗은 손이 매정하게 쳐졌을 때, 그래도 목덜미를 움켜쥔 그 손아귀의 힘에 안도하고 말았다.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은 너에게 감사한다.
아. 가엘리오. 나는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겐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그대에게 팔다리처럼 당연하게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절망의 깊이를 너는 알까.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구원이 없던 시절부터 기도했다. 새벽의 문이 열리는 시각, 창으로 스미는 푸르스름한 빛을 통해 그의 존재를 느꼈다. 나에게도 권리를 달라고. 네가 가진 것 전부 내가 가질 수 있기를.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네가 갖기를.
그러면 내가,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숨이 멎었기 때문이다.
*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만난 건 열 살의 봄이었다. 차에서 막 내린 꼬마아이의 머리카락은 꾀죄죄한 옷차림과는 달리 단정했다. 순간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어색해서 맥길리스는 눈을 비볐다. 태어날 때부터 실밥 하나 없는 매끄러운 실크셔츠를 입을 것 같은 얼굴인데 부드러운 살갗이 쓸릴 것 같은 싸구려 옷을 입고 있는 게 그렇게나 낯설었다. 낯선 환경에 조금은 겁 먹고 긴장한 수정 같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다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먼 거리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맥길리스는 순간 깨달았다.
저건 가엘리오다.
가엘리오 '파리드'였다. 운명이 그에게 가엘리오를 데려다 준 것이다. 완벽하게 소망하는 대로. 비틀린 욕망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완벽한 반대의 위치라면 좀 더 거리낌 없이 한껏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차갑고 어둡고 컴컴한 파리드의 저택으로 끌려 들어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도 맥길리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을까.
(중략)
카르타는 종종 "쟤, 널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글쎄." 좋아하는 거 아냐? 가 아니라 그냥 좋아한다. 가엘리오가 말하기 훨씬 전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맥길리스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책을 읽는 맥길리스를 가엘리오가 끊임없이 흘깃대고, 맥길리스가 한 번 읽었던 책들을 그대로 품에 넘치게 안고 종종걸음으로 쫓아오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시야 한 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가엘리오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지.
처음엔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몰라서, 그 다음엔 어떻게 써야 될지 고민하느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예전보다 갑절은 노골적이고 몇 곱절은 다정한 그 시선은 모르는 척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나 과거를 기억하는 건 가엘리오 뿐만이 아니다. 맥길리스는 전부 알고 있었고 능란하게 제게 닿는 호의를 한껏 즐긴 다음 자비롭게 애정을 베풀 수 있었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까마득한 과거, 혹은 미래, 혹은 다른 세계를 기억한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기에 처음 만났을 때 가엘리오가 펑펑 울면서 맥길리스를 끌어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어울리지 않게 시치미를 뚝 떼고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맥길리스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맥길리스도 모른 척 했다. 그 편이 좋았다. 아는 척 하면 가엘리오는 다시 과거의 분노들을 생각할지도 몰랐다. 약간의 죄책감, 후회 같은 걸 곱씹으며 맥길리스 앞에 언제까지나 약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가엘리오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운 건 가엘리오가 결코 그 이상을 맥길리스에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은총을 받은 듯 기뻐하면서도 먼저 손 내밀지는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대담함은 이 애정 어린 집안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패배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성정, 맥길리스는 한 때 가엘리오가 누렸던 모든 것 - 그의 방, 그의 가족, 그를 사랑했던 사용인들 - 을 마음껏 누리면서 생각했다.
맥길리스가 '보드윈'을 누리는 대신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맥길리스라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엘리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맥길리스는 대신 호의와 애정 가득한 얼굴로 가엘리오를 보았다.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만지작대는 버릇이 꽤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유야 알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맥길리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배배 꼬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어딘가 안도감을 느끼는 얼굴로 웃곤 했다.
그래. 이제는 다 지난 얘기다.
익숙한 사관학교의 기숙사에서 맥길리스는 방학 동안 저택에 다녀 온 가엘리오를 보며 죄책감을 덜었다. 이즈나리오 파리드는 명백한 소아성애자에 일관된 취향까지 있어서 금발에 여리여리한 팔을 가진 곱상한 아이들만을 탐했다. 그 취향에 금발도 아닌 가엘리오가 어떤 연유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는지는 실로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가엘리오는 이제 열일곱이었다. 예전 과거를 상기하면 - 물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나 - 가엘리오는 진작 이즈나리오의 시선 밖에 났을 것이다. 아무리 과거를 기억해도 맥길리스는 어린아이였고, 무력했고, 그래서 가엘리오를 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가엘리오도 그랬잖아. 그랬겠지.
"집에서는 잘 쉬고 왔어?"
"응? 아, 아아. 너는, 아 그래. 여동생이 태어난다고 했지. 몇 달째야? 이름은 정했나?"
"알미리아래."
"예쁜 이름이네. 빨리 보고 싶다."
그에게 알미리아는 그저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가엘리오의 눈동자에 떠오른 애틋함에 맥길리스는 부끄럽게도, 질투해버리고 말았다. 카르타를 볼 때도 가엘리오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애틋함, 애절함, 연민과 사랑은 모두 제 것으로만 남았으면 했다.
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었지.
맥길리스는 지금은 화성 어디엔가 소년으로 남아있을 그를 떠올렸다. 가엘리오가 임관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그를 찾을 것이다. 임관한 시점에선 아직 아인 달튼은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겠지만 보드윈이든 파리드든 세븐스타즈의 지위를 가진 이상, 그는 매년 입학하는 화성지부 사관생도의 명부를 볼 수 있고 아인 달튼이란 이름을 찾는 것도 시간 문제다. 그리고 그런 아인을 돕기 위해서는 지금은 착취 받는 소년들인 수염 달린 꼬맹이들과의 싸움도 막아야 한다. 가엘리오는 한 번 겪었던 미래를 바꾸고 싶어할 게 자명했다. 바알, 아그니카 카이에르, 그런 허황된 수단과 가엘리오는 거리가 멀지만 과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맥길리스는 한 번 더 머리를 꼬았다. 맥길리스는 이제 혁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가엘리오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중략)
"너…, 알고, 있었어?"
셔츠 한 장으로 비에 젖은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핏기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입술을 애써 꽉 깨물며 가엘리오가 맥길리스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투명하게 젖어 달라붙은 직물 너머로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멍과 울혈들이 명백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남자가, 아직도 가엘리오를 탐하고 있었다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작 그만뒀어야 하는 행위다. 가엘리오는 애저녁에 그 모든 학대에서 벗어났어야 옳았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골격과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카락과 잘 붙은 근육들을 갖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즈나리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나를 봐,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질어질한 시야에서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과 마주친다.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엘리오는 한번도 그런 감정으로 맥길리스를 대한 적 없었다. 하다못해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조차도 가엘리오는 울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번민에 몸을 태우며 그래도 사람은 똑바로 미래를 걸어야 하기에 가엘리오는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알고 있다고……."
가엘리오의 푸른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얼굴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지금도 거부 당할 것 같았다. 맥길리스는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알…아."
"즐거웠어? 내가 네 대신 고통스러워 해서?"
"아, 니야."
"모든 걸 알면서도 무시한 거라고?"
가엘리오는 여전히 결벽했다. 맥길리스의 지난 삶을 가엘리오가 똑같이 살았다면 그럴 수 없었다. 오물이 묻고 구겨지고 찢어져 아무리 다시 펴도 예전처럼 깨끗해질 수는 없는데, 가엘리오의 결벽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처 입지 않았던 것처럼 견고하고 투명했으며, 그래서 지금, 삭아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나는 가엘리오."
"말해."
"너만 있으면 돼."
진심이었다. 이 세상은 사람 한 명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맥길리스의 혁명이 그저 반역으로 끝났듯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거대하고 형체 모르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당장 원하는 것만을 하기에도 벅찬 삶이다. 맥길리스는 그래서 이 인생을 오로지 가엘리오를 사랑하기 위해 쓰기로 했고, 가엘리오가 저만을 사랑하길 원했다. 그렇게 만들었다. 맥길리스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이즈나리오에게서 착취 당하던 꼬마들까지 뭘 어쩌겠는가. 이즈나리오를 죽이라고? 물론 그렇게 하면 가엘리오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을 구할 수는 있었겠지. 그렇지만 이즈나리오를 죽인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될 공산이 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가엘리오를 만나기 위해 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몇 년만 참으면 가엘리오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가엘리오가 그 정도 고통도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 안이한 변명인가.
맥길리스는 혼란스러웠다. 가엘리오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는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의 고통도 전부 대신하고 있었나. 그토록 타인과 자신의 구별이 확실한 주제에 어째서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 것일까. 예전의 가엘리오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가엘리오는 남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누군가를 쉽게 헐뜯거나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두를 구원하고 싶다는 성스럽고 고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만했다. 높은 곳에서, 때로는 맥길리스가 놀랄 정도로 냉담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가엘리오에겐 없었었다.
무엇이 어떻게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나는, 이렇게 되어서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네가 가진 고통의 반도 몰랐다고 알았으니까 그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네가 행복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사랑하고 그래서……."
"너를 위해서였어, 가엘리오."
맥길리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모르는 척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엘리오에겐 납득되지 않겠지. 실제로 가엘리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분노는 여전히 명징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한 때 원했던 격렬한 감정은 지금에 와서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맥길리스는 체념하며 눈 감았다.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가엘리오. 너를 사랑하기만으로도 벅찬데 내가 다른 것들을 신경 써야 해?
억울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맥길리스가 눈을 감고 이유 없는 분을 삭이는 동안에도 가엘리오의 손엔 여전히 이즈나리오를 쏜 총이 쥐어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자처해서 손 안의 애완견처럼 굴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이를 착취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이즈나리오를 단죄한 수단이었다. 아직은 모르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이 비밀스러운 별장을, 가엘리오의 위치를, 너무 길들여져서 이제는 갈 곳 없는 아이들, 정확하게 미간에 총알이 박힌 이즈나리오 파리드의 시체를.
"아냐. 내가 잘못했지. 맞아. 나는 언제든지 네 고통을 반으로 나눌 수 있으면 했어. 그게 내가 믿는 사랑이었으니까."
"가엘리오?"
"네게는 그게 아니었을 뿐이고. 내가 멋대로 믿은 거야. 멋대로 기댔고 그래서 멋대로 배신 당했다고 느끼는 거지. 네가 내 고통을 나눌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안녕이야, 맥길리스.
이번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두 번째 안녕이라는 말. 목소리는 총성과 빗소리에 섞여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남은 것?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앞에 남은 것은, 굳게 닫힌 눈의 얼굴 뿐이었다. 절대적인 거부였다. 눈물을 닦아줄 틈이 없었다.
(중략)
나는 지금 신에게 농락 당하고 있나?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흘깃대며 생각했다. 그에겐 그런 면도 있었다. 냉담과 경멸, 원래의 가엘리오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갈무리하는 데 능숙했고, 두 번째의 가엘리오는 그런 감정은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맥길리스를 사랑하고 미래를 다잡는 것만으로도 벅차 정신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 때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무심하게 맥길리스를 스쳐가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고 단지 투명했다. 이번에는 세븐스타즈의 누구도 아니었다. 세 번째의 맥길리스는 여전히 거짓말처럼 가엘리오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이름을 받지 않았다. 억지를 써서 여행을 핑계로 그렇게나 뒷골목을 찾아 헤맸는데, 그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가엘리오가 멀쩡하게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맥길리스는 그 때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으나 가엘리오의 성격에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보드윈의 은총이 없는 가엘리오는 분명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맥길리스는 또한 어지러웠다. 누구도 믿지 않는 가엘리오는 다른 사람이었다.
간절하게 원했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갖기를.
그러면 내가 구해줄 수 있을 텐데.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처음으로 너를 애정한 사람이 되어 영원히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어떤 소리도 그에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가엘리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고 실제로 귀찮아서 쳐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젠가부터 체념했는지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그조차 부담스러워 외면하는 게 대다수였다. 그래도 가엘리오는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를 뜨곤 했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하는 게 이렇게나 터무니 없이 무서울 줄은 미처 몰랐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혼잡한 복도에서 약간 부딪힌 어깨에 일부러 말을 걸어보았으나 가엘리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서려는 가엘리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의아함 섞인 시선이 겨우 여기에 닿았다. 맥길리스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 열었다.
"나는, 맥길리스."
"알고…있는데, 그래서?"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가엘리오는 그래도 성실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맥길리스는 듣고 싶었다. 신의 농락이든 뭐든 좋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맥길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의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차근차근, 제대로.
"…가엘리오."
이번에는 틀리지 않게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