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if
가엘리오가 가면남이라는 망상설정으로 라스탈+가면남
그래도 가엘리오 가면남 아니었으면 좋겠따
는 개뿔이. 27화 이후에 넘 뽕 차서 쓰다 말았는데 오늘 진짜 ㅎ ㅏ....도련님 뽕 가득 참. 주의요망.
라스탈 에리온은 남들보다 2년 늦게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타입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엔 그것보다 더했다. 그는 고작 전장 10km의 인공섬을 견딜 수 없었다. 라스탈은 어느 쪽으로 가든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그 좁은 섬은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이 표현은 그가 정확하게 열세 살이 되던 해 일기장에 쓴 표현이다. 스물이 된 이후 다시 읽어본 뒤 창고에 처박아버렸지만 - .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구보를 뛰고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을 받아먹는 유년사관학교도 그의 거부감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세븐스타즈의 권력이라도 생도 전원의 식비를 현재보다 두 배로 올릴 수는 없었고 그는 매일을 얇은 냉동고기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라스탈은 간신히 예비생도 기간을 마쳤고, 그리고 간단하게 짐을 싸 2년 간의 외출을 시작했다. 나가자마자 그는 새로운 태블릿을 샀고 지도를 펴 메모했다. 어린 나이에도 모빌워커를 몰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므로, 돈이 떨어지면 공장이나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돕는 것으로 생활비는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1:40,000,000 축척으로 본 지도가 빽빽하게 들어차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주 예전에는 지구만이 세계의 전부였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 시대는 지구에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항성에도 이름이 있는 시대였다. 비록 그럴듯한 신화적 유래 대신 알파벳과 숫자의 무자비한 나열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열여섯의 라스탈 에리온은 신화에 관한 얘기를 알프스 자락 꼭대기에서 들었다. 오세아니안 연방의 고등교육 시설 산악 동아리 멤버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흔쾌히 일행이 없는 라스탈에게 같이 밤을 보내자고 얘기했고, 그 중 한 명은 상당히 입심 좋은 사람이었다.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기 전, 지구가 둥글다고 알기도 전, 세계의 전부가 하나의 대륙으로만 인지되던 시절의 헛소리를 꽤나 재밌게 해주었다. 사실 거기에 있을 땐 너무 추워서 대충 듣는 바람에 기억나는 게 없었지만――
서론이 길었다.
정 떨어지는 기계의 쇳소리 섞인 희미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의 '목소리'를 라스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들어도 봄처럼 생생했고 진공의 우주에서도 들어도 바람이 부는 듯 쾌청했다. 그는 우주와 지상, 바다에도 익숙했다. 의례적으로 참관하러 간 풋내기들의 여름맞이 수상레포츠 대회에서 그가 매끄럽고 날렵하게 요트를 운용하던 것도 라스탈은 기억했다.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바다의 파도와 바람도 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책에 삽화로 들어가도 좋을 법한 장면이었다. 인생에 단 한번의 시련도 없었던, 소설처럼 빛나는 젊음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시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에리온 공?」
"미안. 다른 생각을 했군. 계속 하게."
라스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잔에 따라둔 버번을 들이켰다. 상대가 없으니 영 술이 줄지를 않는다. 물론 테이블 위엔 상대의 잔도 놓여있지만 아직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투명한 새 것이다. 남자는 남이 있을 때는 그의 괴팍하고, 기이한 철가면을 결코 벗지 않는다.
순풍에 돛 단 듯, 구름 한 점 없던 그의 인생에도 이제는 절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발할라로 가기엔 아직 미숙한 전사였으므로 라스탈이 거두었다.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가장 먼저 밟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의 순진무구한 의식 위에 절망이 드리울 때 어떤 모양일지 궁금해 하는 건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였다. 그 말끔했던 얼굴 위에 첨단 의료기구로도 지울 수 없는 흉이 드리웠듯이 그의 정신에 남은 상처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잠자는 공주가 눈 뜨기를 기다리는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키스는 할 수 없었고 그는 공주가 아니다. 강인한 정신과 긍지를 가진 기사였다. 그는 자력으로 깨어났고, 라스탈은 기대했던 대로 잊지 못 할 광경을 보았으나 그것은 동시에 라스탈이 기대했던 대로는 아니었다.
"우리의 미래 세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네."
전략 지도를 검토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라스탈을 쳐다보았다. 에리온은 아직 직계 후손이 없다. 이슈의 외동딸은 전사했고, 파리드는 '정통성'에 흠이 있는 -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라스탈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 사생아가 당주다. 게다가 이 당주가 추문에 휩싸인 채로 '사망'한 보드윈의 후계자 대신 실질적인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컸다. 걀라르호른의 권위는 지상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갈등은 전염병처럼 번져 인류가 도달한 우주의 끝만큼 커져 가고 있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나 불가피한 혼란이 목도해 있음은 세 살 짜리 어린애의 눈에도 보였다.
"맥길리스는"
남자는 침묵을 유지한다.
"그 애송이도 안정을 위해 혼란을 바라는 거겠지."
흔히 본인이 똑똑하다고 믿는 어린애들이 그렇듯, 자신은 상대방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고. 라스탈에게 20년지기 친우는 없었으나 아마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은 열길 물 속보다 어둡다고,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지 못한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의 실책이었다. 만약 일부러 살려두었다고 해도 맥길리스는 이 남자를 너무 얕보았다.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애송이라고 비웃었겠지. 라스탈도 한 때 그랬으니까. 그러나 분노보다 슬픔이, 애도가 앞서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저보다 남을 위하는 사람도,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도.
그의 매력이 오로지 솔직함과 순수에 있었다고 생각한 저도 아직까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 상처 입은 창백한 얼굴에, 혼란에 젖었던 푸른 홍채는 기민하게 현재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리고 깊이 탄식했다. 그저 슬픔이었다. 분노도 아니고, 그저, 떠나보낸 이들과 상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자신, 정신적이고 절대적인 선의 가치는 도저히 닿지 않았던 그의 친우에 대한. 그 도량을 감히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있는가?
"하지만 너는 혼란 없이도 바른 길로 모든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 할 얘기가 아니군.」
"카르타 이슈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너는 언젠가 걀라르호른의 일석에 앉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래 그대는 그것을 바라지 않지. 그러나 그건 자네의 천성이야. 얼마나 잘 감추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에리온 공.」
단호하게 끊어내는 목소리에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에 대한 칭찬을 이만큼이나 하면 내심 우쭐해 할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그의 장점이었다. 걀라르호른 사병 사이에서 그는 그저 '보드윈의 후계자'였다. 일반 사병들에게 무심하고 특별히 다정하지도 않았다. 존경과 신뢰를 받는 상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모두 계획된 위치임을 라스탈은 이제 안다. 그에겐 그런 권력이 필요 없었다. 그런 선망이 모두 그의 친우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드윈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그는 제 위치를 고정했고 그렇게 되게끔 만들었다. 자만하지 않는 것, 저를 뽐내지 않는 것, 권력을 탐내지 않는 것, 더 높은 경지가 있음을 알면서도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무욕이나 소심함, 도량이 작은 게 아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가진 자의 자세였다.
"잊고 있었어. 너는 '원래' 칭찬도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지."
「무게 없는 말을 굳이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으니까.」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과 무너지지 않는 자아가 그대의 장점이야, 비다르. 하지만 원래 갖고 있던 솔직함, 관대함, 순수함도 잃지 않았다. 맥길리스 파리드가 만약, 그대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면 걀라르호른의 운명은 반드시 그대에게 향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라스탈 에리온은 기꺼이 그 운명의 배에 가장 먼저 올라탈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라스탈이 얼음이 반쯤 녹은 잔을 비우면 비다르는 가면 속에서 얕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략에 대해서 더 할 얘기가 없다면 먼저 일어나겠어, 에리온 공.」
"아아. 그래. 이 쪽도 상대 없는 술자리는 재미가 없어서 일찍 파해야겠어."
라스탈은 빈 잔의 일그러진 상 너머로 멀어지는 비다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는 세븐스타즈의 일그러진 별이었다. 이름, 이름은 무엇일까. 비다르? 가엘리오 보드윈? 어느 것이라도 좋다. 별에 붙여진 이름, 그에 따른 신화의 시대는 애저녁에 끝났다. 신을 바라기엔 인간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불순했다. 새로운 별, 새로운 신화, 모두 인간이 만들면 된다. 그는 분명 액제전 이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확신했다. 라스탈 에리온의 이름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