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 기노기노
집행관 기노자 + 감시관 기노자.
집행관 기노자가 감시관 기노자를 꼬셔서 다 때려치고 도망가는 게 보고 싶었기 때문에 자세한 설정이나 설명은 없음.
물론 두서도 없음.
기노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괴한 농담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지상 최대의 악몽이다. 꿈에서 깨려면 신체적인 충격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노자는 손을 들었다. 있는 힘껏 제 뺨을 후려치려는 찰나 억센 손아귀가 그의 팔목을 붙든다.
"그만 두는 게 좋아."
그 낮은 목소리가 익숙하고, 동시에 낯설어 기노자는 온 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심문 과정은 모두 녹화되며, 조사를 위해 몇 번이고 녹화된 화면을 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녹음된 제 목소리를 들으면 낯설다고 하지만, 그것도 8년이다. 기노자는 객관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제 것과 동일했다. 평생을 낸 적 없는 부드러운 말씨라는 걸 제외하면.
물론 목소리만 같은 게 아니다. 얼굴도, 말하긴 싫지만 비슷했다. 나이를 먹는다면 이런 느낌이 되겠지. 남자는 본인이 서른 여섯이라고 말했다. 그래 보이는 얼굴이다. 앞머리는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대신 우스꽝스럽게 머리를 길러 하나로 묶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세월의 흔적 사이에서 그토록 싫어하던 살짝 들린 눈매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까, 안경이 없었다.
기노자의 갈곳 없는 시선은 팔목을 붙잡을 손으로 넘어간다. 가죽장갑을 끼고 있으나 그 단단한 감촉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경도를 느낀다. 안경 렌즈 너머의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러나 결코 손의 힘을 빼지 않고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
퍽이나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의 말은 어떤 비유가 아니었다. 물론 통각을 공유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이 남자는.
"미래의, 나라고?"
하. 하하. 진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삼킬 침조차 없이 껄끄럽게 마른 목 끝까지 그런 말이 차올랐다. 있는 힘껏 부정하고 싶었다. 당장 이 정신병자, 제가 기노자의 미래라고 우기는 남자를 체포해서 교정시설에 처넣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셔츠 소매와 장갑의 틈새로 보이는 강철의 팔과 그 팔목에 얹혀진 족쇄, 개목걸이, 집행관 디바이스를 발견한 순간 어렴풋이 기노자는 깨닫고 만 것이다.
작금의 발버둥도, 고집도 아무 소용 없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운명이 제게 도래했다는 사실을.
(중략)
"잠깐, 기노. 잠깐만."
엘레베이터로 들이닥친 코가미와 마사오카를 떨쳐낼 틈도 없이 무정한 기계는 문을 닫아버렸다. 휴가를 신청한 기노자가 갑자기 사무실에 들이닥쳐 짐을 싸들고 나설 때부터 위화감을 느껴 쫓아오기는 했으나 코가미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묵한 채로 기노자를 쳐다보고 있으면 기노자는 제게 닿는 두 쌍의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피하고 있었다.
기노자는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은 그리 크지도 않은데 그조차도 여유로웠다. 찻잎, 머그컵, 작은 선인장 화분.
단지 그 뿐이었다. '잠재범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이후 제 안의 모든 것을 짓누르고, 인내하고, 노력했는데 그 흔적은 작은 쇼핑백 하나도 다 채우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얼마나 부질없는 인생을 살았는지 적나라한 회의가 밀려왔다.
공안국에 자리를 잡고, 후생성의 간부가 되어 증명하고 싶었다. 보아라. 너희가 그토록 멸시하던 잠재범의 자식도 이 사회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남부럽지 않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아버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가치관을 지켰을 뿐인데 어째서 '잠재범'이 되었는가. 모두 잘못 되었다고, 완전무결한 신탁의 무녀가 내린 운명을 비틀어 부수고 싶었다.
그건 헛된 꿈이었지.
"노부치카."
지친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 기노자의 귀에 마사오카의 목소리가 박혔다. 사실은 싫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르는 제 이름은 언제나 행복했던 나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공안국에 처음으로 등청하기 전, 기노자는 꼬박 열흘 밤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에 있을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하루에 스물여덟가지 방식을 생각하곤 했다. 무시할까. 그럴 수는 없겠지. 무심한 타인처럼 인사할까. 아버지는 어떤 표정일까. 나를 보고 놀라려나. 놀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은 대견해 했으면 좋겠다. 적성검사를 통과해 무사히 여기까지 당도한 나를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가볍게 인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몸은 피로했으나 정신만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여전히 답을 정하지 못한 채로 기노자의 시선은 누군가의 낯선 얼굴 위를 헤매고 있었다. 시야의 끝머리에서 서성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계속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러다 기어이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마사오카는 외면했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의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던 날이었다. 신입 감시관이 집행관의 아들이라는 건 분명 좋지 않은 사실이다. 그도 그래서 피했겠지. 머리로는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러웠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저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노부치카, 라고 부르는 소리에 애정의 편린을 느끼다가도 코가미나 사사야마와 훨씬 허물없이 지내는 그를 보면 부유하던 납덩이들이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운드 1 - 미래의 기노자는 저를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 - , 서른 여섯의 자신은 기노자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구하려다 죽었어. 내 팔은 그 때의 흔적이야. 그렇게 말하는 기노자 노부치카는 침착했다. 그 목소리에서 미래의 저는 증오와 애정 중 후자를 택했다고 눈치챘다.
미래가 그렇다면 현재의 자신도 그래야 하겠지.
기노자는 긴긴 한숨을 내쉬고 굳게 마음 먹었다. 이별과 결단마저 운명이라는 타의에 휘말려 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자신에겐 선택권이 있다. 이제는 자의로 이별의 말을 내뱉을 시간이 온 것이다.
"어. 기노… 상…?"
엘레베이터는 여전히 무정하다. 기껏 말을 하려는 찰나, 목적지에 도착한 기계덩이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카가리가 있었다. 카가리와 쿠니즈카 야요이와 츠네모리 아카네와, 하운드 1이.
데스크를 정리하고 내려올 동안 차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더니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던 이들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진짜 끝까지 되는 게 없네.
기노자는 짜증이 치밀어 눈을 흘겼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하운드 1은 기노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잠재범이란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래의 저조차도 정말 훌륭하게 잠재범이었다.
"하운드1."
기노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운드 1? 코가미는 반사적으로 마사오카를 바라보았고 마사오카는…… 기노자가 하운드 1이라 부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초췌하고 지치고 피곤한 기노자보단 훨씬 혈색이 좋았다. 그러니까 기노자보다. 아니, 구분이 안되잖아. 코가미가 아는 기노자보다.
코가미는 황급히 정정했다. 기노자의 차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는 기노자를 닮아 있었다. 기노자가 걸음을 옮겨 그의 옆으로 가면 키는 동일했으나 체격이 달랐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껴입은 기노자는 훨씬 가냘퍼 보였다. 기노자가 부른 하운드 1은 안경을 쓰지 않았고 앞머리가 짧아졌고 머리를 묶었으며 닳은 셔츠나 밑단 구두창 같은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코가미의 예리한 시선이 그의 전신을 훑었다. 약간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자세, 한 쪽만 끼고 있는 장갑, 둔중한 빛을 발하는 집행관 디바이스. 의수다. 기노자, 기노자를 닮은 하운드 1은 의수를 장착한 집행관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야?"
카가리가 혼란한 얼굴로 양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하는 기노자와 그런 기노자를 가리듯 옆에 서 있는 기노자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둘 다야. 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한껏 지친 동일한 목소리가 겹쳐 기괴한 울림이 되었다. 카가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 옆에 있던 츠네모리도, 코가미나 마사오카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는 했어?"
기이한 침묵 속에서 하운드1은 기노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그렇게 물었다. 그 다정한 울림에 코가미는 선뜩함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할까. 눈 앞에서 꺼림칙한 범죄가 일어나고 그것을 놓치고 있을 때, 어느 한 쪽으로 날서던 감각과 비슷했다. 코가미를 비롯한 집행관들은 형사의 감이라고 말하고, 기노자는 사냥개의 후각이라며 멸시하던 그것이었다.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나쁜 것인지 코가미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내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기노자가 고래를 똑바로 들어 츠네모리를 쳐다보았다.
"츠네모리 아카네 감시관."
"ㄴ, 네!"
"나는 오늘부로 일신상의 이유로 감시관을 사임한다."
"네?"
아, 아니 잠깐 기노 상? 너무 놀라 새된 소리를 내는 카가리와 조용히 숨을 죽이는 쿠니즈카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츠네모리가 코가미의 눈에 보였다. 옆에 있는 마사오카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코가미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이게 나쁜 일인가? 코가미는 날세워 상황을 관찰했다. 기노자의 갑작스러운 퇴직은 분명 나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좀 더 끈적한 무언가가 이 지하주차장에 감돌고 있었다.
"혼자 일하려면 힘든 것도 많겠지만 남은 집행관들이 잘 도와주겠지. '잔소리 안경'보다는 훨씬 나을테니."
악의 없는 빈정거림이 카가리의 명치 끝을 찔렀다. 아, 아니 그건 농담… 농담이죠, 기노 상. 지금까지, 잘, 받아줬으면서 왜, 왜 그래요. 불쌍한 카가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말을 잊은 사이에 간신히 마사오카가 입을 열었다.
"노부치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그것조차 단호한 기노자의 말투에 막혔지만. 소리 없는 비명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둘의 관계를 모르던 츠네모리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누구도 친절하게 부가설명을 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노력했어요."
"……."
"하지만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누가…?"
마사오카는 반사적으로 물었으나 그의 시선은 이미 기노자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저를 꼭 닮은 눈매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운드 1은 가볍게 왼팔을 들어 흔들었다. 강철의 팔과 집행관 디바이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더 이상 휘둘리는 것도 지쳤어."
아버지도, 코가미도, 마키시마도 시빌라도. 노력해도 안되는 건 안돼요. 미래를 들었어. 그 미래에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고, 애꿎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내 육신을 잃어버리지. 그건 너무…….
"나는 이게 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츠네모리."
지쳐 질질 끌리는 기노자의 목소리 위에 또 다른 기노자의 목소리가 덮였다. 평소의 기노자에게서 들을 수 없던 평온한 목소리가 도리어 불길했다.
"어째서 미래의 내가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운명이 내게 내민 마지막 자비가 아닐까 생각해. 마지막 타협인 거야. 기노자는 달래듯 말하고 있었다. 누구를 달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츠네모리? 여기 있는 모두? 자기 자신?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불현듯 한 가지 사실만이 명징하게 코가미를 강타했다.
"도망치는 거냐, 기노? 나를, 톳상을, 모두를 버리고? 후생성의 중심이 되겠다던 네 꿈도 의지도 모두?"
생각으로 정리하기도 전에 코가미의 입에서 날것의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러나 코가미가 기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이던 두 명의 기노자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잠재범 확정이다."
"아직 기회는 있어!"
"너에게도 기회가 있었지, 코가미."
그 말에는 코가미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기노자의 문장이 3년 전의 어느 날을 더듬고 있음을 코가미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전에 선택하는 거다. 이게 내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니까."
"사랑했어. 너도,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