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오펀즈/맥가엘] 오후의 티타임
마냥 가엘리오를 핥는다. 약간 캐붕일지도.
0.
짐승은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하지만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겠지. 언어를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만의 특성, 우월성의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동물에 속하는 다른 것들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빈도가 인간보다 훨씬 낮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대신 시선으로 말한다.
욕망으로 광휘로운 눈동자.
1.
가엘리오는 고개를 들어 맥길리스를 보았다. 응? 층층이 쌓인 밀푀유는 아무리 좋게 먹으려고 해도 도무지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사실 밀푀유는, 가엘리오는 썩 좋아하지 않는 간식이었다. 혀가 녹아버리게 단 것 같은 디저트들은 도무지 가엘리오의 취향이 아니었다. 너무 단 걸 먹으면 속이 메슥거려서 그가 티타임 때 먹는 것은 세 개의 쿠키 뿐. 선호하는 디저트는 신선한 과일이다. 날 것이어야 한다. 익은 것도 싫었다. 물컹한 애플파이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라면 가엘리오는 케이크를 선택했다. 물론 채 한 조각도 먹지 못하지만.
그래서 가엘리오가 매번 한 두입 먹어보고, 매번 후회하는 디저트들은 맥길리스를 위한 것이었다.
도련님이 단 걸 먹고 싶다고 하시다니 별 일이네요.
가엘리오가 바닥을 기어다닐 무렵부터 있었다는 주방장은 허리께까지 오는 작은 도련님의 부탁을 의아해했지만, 이내 그의 요청이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만이란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엔 묻지도 않고 알아서 화려한 티푸드를 준비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전공은, 도무지 입맛 담백한 보드윈 가에선 선보일 일이 없었으나, 화려한 프랑스 식 디저트였다.
그리고 가엘리오는 손님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꼭꼭 한 입을 먼저 먹었다. 주방장이 잔뜩 멋을 부린 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디저트를 성심성의껏 포크로 으스러뜨렸다.
아 정말 밀푀유는 너무 먹기 힘들어.
투덜대면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핥아내는 혀는 말간 붉은 색이었다. 어린 맥길리스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광택의 혀에 순간 눈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무슨 말을 하려고 가엘리오를 불렀는지 순간 잊어버리고 맥길리스는 이상스러운 기분에 다시 책에 고개를 처박는다. 그 때 손에 들고 있던 동물도감 책엔 섬세한 터치와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동물들의 그림이 면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표범. 광택이 나는 검고 부드러운 털은 당장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유리구슬 같이 매끄러운 샛노란 눈동자는 얼핏 보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종이 안 쪽에서 살아 숨쉬는 동물들에게 맥길리스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뺏겼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눈으로 발화하는 욕망들.
사람의 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음 페이지의 풀을 뜯어먹는 가젤에게선 그런 날카로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까맣고 커다란 동공은 그저 무뎠다. 맥길리스는 조심스럽게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는 가엘리오를 훔쳐보았다. 가엘리오의 눈은 가젤과 닮아있었다.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하지만 저는. 만약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2.
"미안."
"괜찮아. 시간의 전후로 따진다면 이 쪽이 후자겠지."
"아니. 잊어버린 건 내 탓이니. 나중에 보상하지."
보상? 그래봤자 밥이라든가, 술이라든가 산다는 얘기겠지. 어느 쪽이든 맥길리스에겐 딱히 아쉬운 얘기는 아니다. 아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다음 휴일도 책임져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굳이 '보상'이 아니더라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휴일을 함께했다. '보상'은 좀 더 적당한 구실이 될 뿐이었다.
이즈나리오는 맥길리스가 집에 오든 오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엘리오는 혹여나 무슨 뒷말이 나올까 싶어 늘 이유를 만들어두었다. 제가 실수한 게 있어서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훈련을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 가끔은 맥길리스도 기함했다. 파티나 정치나 머리 복잡한 건 질색이라면서 뼛속부터 '세븐스타즈'라는 건지. 맥길리스는 가볍게 혀를 내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엘리오를 보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엘리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나이 지긋한 남자는 맥길리스도 몇 번 본 적 있는 솜씨 좋은 재단사다. 요즘 시대에는 드물게 원단을 바리바리 들고 다니며 본을 뜨는 것부터 가봉까지 전부 직접한다는 장인이었다. 보드윈 가에선 행사가 있으면 늘 그에게 옷을 부탁했다. 가엘리오의 생일, 겸 결혼 시장이 코 앞이니 아마 그 때문이겠지.
맥길리스는 테이블에 앉아 기호에 맞지 않는 홍차와 여전히 다디 단 밀푀유를 포크로 잘라내며 맥길리스는 읽던 책을 엎어두고 가엘리오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전신 거울 너머의 그는 골똘히 제게 맞은 원단을 고르기 시작한다.
인형이 된 것 같아서 난 싫은데 말야.
가엘리오는 재단사가 이것저것 원단을 대보고 수많은 샘플들을 입혀보고 거울 앞에서 품평 당하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는 그 모든 과정을 질색했지만 그의 사교술은 그것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건 맥길리스 뿐이란 사실이 그의 은밀한 독점욕을 만족시켰다.
햇빛이 들이치는 방 안에서 희고 얇은 셔츠 밑 근육들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탄탄하고 견고한 육체다. 넓은 어깨, 도드라진 견갑골, 팽팽하게 당겨진 광배근 사이의 움푹 패인 꼿꼿한 척추, 군살 하나 없이 들어간 허리, 오밀조밀하게 꽉 들어찬 실루엣은 튀어나온 곳 없이 매끈한 선을 그린다. 그 중 곡선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승모근의 목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랜스를 주로 쓰는 보드윈의 특성상 누구보다 발달된 - 아마 맥길리스보다도 - 승모근은 퍽 아름답다. 실루엣으로 본다면 그 단단한 근육에 비해선 한 장의 얇은 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선이 가엘리오 보드윈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지탱하는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맥길리스의 시선은 그의 어깨와 목에서, 이윽고 앞으로 돌아간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잘 조형된 삼각의 흉쇄유돌근, 튀어나온 목젖, 깊게 들어간 턱을 따라가면 또렷한 옆선이 얼굴에 입체감을 선사한다. 커다란 눈동자가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얇게 층진 쌍커풀이 말려 올라가는 게 신기했다.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재단사는 익숙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손때 묻은 줄자를 가엘리오의 목에 두른다.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에 당황한 가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 저 목에는 초커 같은 것도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가엘리오는 목이 졸리는 걸 싫어해서 목 위로 높이 올라오는 셔츠나 터틀넥은 절대 입지 않는다. 규격이 정해져 있는 군복조차 부러 몰래 몇 밀리쯤 낮은 목깃의 셔츠를 만들어 입는 가엘리오다. 어색하게 그 목을 조를 검은 선과, 기분 나빠하면서도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차마 벗지는 못하고 머뭇거릴 가엘리오의 표정을 생각하면 아랫배가 뻐근해진다.
그의 무른 성정은 아무리 싫은 것이라도 제가 호의를 보내는 사람의 것이면 거절하지 못한다.
농담인 척하면서 정말로 선물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맥길리스는 포크로 밀푀유를 찍어 입에 넣는다. 밀푀유의 얇은 층들이 입 안에서 바스라지고 녹아내린다. 밀푀유의 부스러기를 핥아먹던 그 말간 혀가 제게 준 충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들의 시발점인 모양이다. 그 날의 생경함을 맥길리스는 지금은 늙은, 그러나 손맛은 여전히 견고한 보드윈 가 주방장의 밀푀유를 먹을 때마다 떠올렸다.
재단사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 하나만큼 상체가 넓은 그를 애처럼 다룬다. 겨드랑이 사이로 훅 손을 넣고 가슴 둘레를 잰다. 딱 달라붙은 셔츠 밑에서 긴장한 대흉근이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가엘리오는 저런 것들이 싫은 거겠지. 뭔가 보살핌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그 느낌이.
내내 안온한 온실 속에서 자란 주제에 돌봄 당하는 걸 싫어하다니 이상한 모순이다.
그러다 문득 거울 너머의 가엘리오와 시선이 마주친다. 사뭇 비즈니스적이었던 얼굴이 맥길리스의 녹색 눈과 마주치자마자 하늘하게 풀어진다. 비록 멋쩍고 쑥스러워하는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데에 필요한 대략 50개의 근육들이 맥길리스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얘기였다.
그러나 시선을 주고 받을 시간도 없이 가엘리오에겐 다시 새 원단이 들이대진다. 미처 무언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가엘리오는 허둥지둥 시선을 돌린다. 맥길리스는 거울 속에서 홀로 남은 제 시선과 눈이 마주쳐 버리고 만다.
가엘리오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냥 무디고, 푸르고, 투명하다.
―― 톰슨 가젤은 일견 갸냘퍼 보이지만 여전히 대초원에서 그 개체를 유지하며 살아남는 동물이다. 순간 시속은 약 100km/h에 달할 정도로 역시 날렵하고 단단한 앞다리 근육을 갖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동물 도감의 삽화와 내용들을 떠올려본다. 맥길리스는 그런 초식동물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흉폭한 육식동물이 되고 싶었다. 날카롭게 좁아지는 샛노란 눈동자. 맥길리스의 시선을 한 때 잡았던 움직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은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아마, 욕망이겠지.
도망치는 가젤의 뒤꽁무니를 쫓아, 따라잡아, 그 목덜미를 낚아채고 앞발로 누르고 짓이기고 얽힌 팽팽한 근육들 사이에 이를 박아넣는 생존본능의 욕망. 맥길리스는 그러한 욕망들을 제 눈에서 읽어낸다. 언어는 인간의 특징이라 다행이었다. 갈무리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제 눈에서 흘러넘치는 데도 가엘리오는 그것들을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본능에 가까운 흉폭한 욕망들은 그에게선 거리가 멀었다.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말로 하지 않는 이상 가엘리오는 그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길고 긴 인형놀이에 지친 듯한 가엘리오가 털썩 맥길리스의 앞에 주저 앉는다. 언제 겪어도 피곤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 식은 홍차를 들이켜는 가엘리오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맛없어. 맥길리스는 여전한 그의 투덜거림에 가볍게 웃으면서 제 욕망을 갈무리한다.
" 그래서 보상은 뭘로 해줄 거지, 가엘리오."
"뭘 원해, 맥길리스?"
한 쪽 팔을 테이블에 기대고 가엘리오는 눈을 마주친다. 뭘 원하냐고? 물론, 너를 원해 가엘리오. 너를 우악스럽게 짓누르고 깔아뭉개고 목덜미를 물어뜯고 겁에 질린 눈동자를 보고 싶어.
그런 말은 결코 할 수 없지.
"밀푀유, 하나 더 만들어달래서 싸줄까."
"고생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너희 집 주방장이잖아."
"뭐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맛있지? 다 먹었네."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보며 가엘리오가 말한다.
"아. 만족스러웠어."
맥길리스는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혀 끝에 남은 감칠맛들을 차로 씻어낸다.
뜻밖의 디저트에 풍족한 티타임이었다.
3.
게걸스럽고 우아한 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