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오펀즈/맥가엘] 순수의 종막
25화 이후. 설정 날조 있음.
가엘리오는 PV부터 ----할 애라서 언제 ----할까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버리다니, 근데 엄청 예쁘군요. 사실 2기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냥 장례식 얘기가 써보고 싶었습니다. 오펀즈 메인은 유진이었는데 막화 이후로 차애 가엘리오가 치고 올라왔습니다. 저 둘 오른쪽으로 파시는 분들 대환영.
색이 부족했다. 장교용 제복의 푸른 소매, 푸른 망토, 장식성이 다분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금색 단추도 오늘은 없었다. 소매는 검었고 어깨에 두른 망토는 짙은 회색, 단추는 은빛이었다. 그 둥근 단추에 양각으로 새겨진 뿔피리를 부는 새만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지나치게 쾌청한 하늘을 한 번 보았다가, 결코 푸른 잎을 잃지 않고 계절별로 반드시 세 종류 이상의 꽃이 피게끔 설계되어 있는 보드윈 가의 정원을 보고, 다시 눈 앞의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좋은 날씨에, 사방에서 빛을 듬뿍 머금은 색이 흘러넘치는 데도 평소라면 여름의 원색처럼 눈부실 남자는 보기 드물게 무채색이었고, 보기 드물게 우울해 있었다.
"누구?"
맥길리스와 가엘리오 둘 다 장교용 관사에서 생활하지만 지난 주말부터 사흘 동안 연휴였고,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맥길리스는 천천히 추측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하녀가 꽃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세븐스타즈의 꽃이 필요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다음. 회색이 아닌 푸른 정복을 입는 사람이라면 맥길리스에게도 연락이 왔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다음. 최근 우주 전역 어디에서 전투가 있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해적은 도처에 있었으나 걀라르호른의 이름에 상처를 낼 만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있다고 해도 없던 것처럼 되었다. 걀라르호른은 예식용 제복을 늘 두 개씩 나눠주지만, 전투 중 사상자에 대한 얘기는 결코 공식적으로 꺼낸 적이 없어 공식적으로 그 제복을 입을 일도 없었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하면서도 맥길리스는 죽은 누군가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맥길리스가 모르는 이름일 것이고, 사실 가엘리오에게도 대단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관학교 선배의 세 번 본 부관의 부하의 부하라든가, 동기의 친척의 친구라든가, 아니면 아예 얼굴도 본 적 없는 갓 들어온 MS 파일럿이라든가.
지극히 한정적인 모빌슈츠 연습환경에서 간단한 임무에도 조종미숙으로 죽는 신참들은 1년에 13명쯤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네 다리를 건너 가엘리오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그는 충분히 보드윈 가의 잘 자란 흰 꽃을 한아름 안고 가 직접 건네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되새김질 할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정이 넘쳤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헤펐다. 기쁨과 슬픔에 쉽게 휩쓸리는 폭넓은 감수성이 맥길리스는 가끔 부러우면서도 진절머리 났다. 한 번도 진창이 된 대지를 디뎌보지 않은 자의 순수였다.
"빈 말이라도 고맙긴 하네."
우중충한 얼굴이 고개를 들어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그럼에도 날카로웠고 이슈의 무남독녀처럼 버릇없지도 않았다. 300년 전부터 보드윈은 전사의 이름이었고, 그래서 무관이 된 남자는 지나치게 감성적이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동시에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귀하게 큰 사람이 그러하듯 누군가에게 감정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비난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애도 섞인 목소리였는데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목소리에 단 1mg의 슬픔도 섞이지 않았음을 눈치챘고, 그 빈말이라도 저를 위로해주는 맥길리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가엘리오의 그 말에 대꾸를 잃은 건 맥길리스 쪽이었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슬픔에 더 이상 입을 여는 것도 어색해 맥길리스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가엘리오의 맞은 편에 앉았다.
10분쯤 지나면 그는 제 감정을 추스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하녀에게 차를 부탁하고, 맥길리스에게 곁들일 과자를 물어보겠지. 정말 매너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손님을 방치하진 않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맥길리스이기에 허용된 여유였다.
맥길리스는 세 번 정도 입어 본 장례식용 정복을 가엘리오는 몇 번이나 입었을까. 가엘리오를 보며 맥길리스도 상념에 잠긴다.
제가 입을 땐 몰랐는데 가슴의 일곱 별은 은사로 수놓여 있었다. 검은 소매는 푸른색보다 팔이 길어보였고, 회색 바이어스는 목과 손목을 늘씬하게 보이게 했다. 온통 원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친우에겐 무채색도 썩 괜찮았다. 입만 다물면 우수에 찬 미남이 된다던 사교계의 소문은 술에 잔뜩 취한 극소수의 아가씨들이 떠벌리던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다.인도양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얼굴은 우중충했으나 보기 나쁘진 않았다.
인도양을 끼고 있는 오세아니아 연방은 둘 다 아직 가 본 적 없는 낯선 곳이었다. 가본 적 없는 나라의 겪어보지 못한 날씨의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그래서 이질이었다. 수리력과 공간지각력, 논리력은 뛰어나도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은 빈곤하기 짝이 없는 맥길리스에게 그는 자꾸만 무언가 색다른 문장을 만들길 종용하곤 했다. 십여 년을 붙어있었는데도 맥길리스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만들어내야 하는 문장들이 그에게 수식되었다.
그는 맥길리스에게 언제나 무언가의 처음이 되었다. 손을 내밀고, 이름을 부르고, 우정과 신뢰, 애정이 담긴 시선이 가엘리오에게서부터 맥길리스에게로 향했다. 만족스러운 온화함이 늘 주변에 있다는 것. 무념한 맥길리스조차도 가끔 깜박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안락함이 언제나 가엘리오와 함께 했다. 보드윈 가의 방은 꾀죄죄한 몰골로 끌려온 날 하사받은 제 방보다도 훨씬 편했다. 그 모든 걸 만드는 건 언제나 가엘리오였다.
"그러고보니."
"응?"
"보드윈 가는 칼라였지."
"아― 아, 응."
걀라르호른을 지탱하는 일곱 개의 별은 전부 저들만의 예식용 꽃을 갖고 있다. 대체로 흰 색이었고, 희고 기품있는 꽃 따윈 몇 되지 않기에 사실 겹칠 때가 많았지만 보드윈은 늘 오래된 유리온실에서 칼라를 키웠다.
"네가 그 꽃을 한 다발 들고 있는 건 어쩐지 상상이 안돼."
"그거, 비웃는 거?"
"글쎄."
비웃는다기 보단, 순수한 의문이었다. 단정한 검은 제복을 입고, 수려한 흰 꽃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 슬픔에 젖어있을 가엘리오를 상상하면, 뭐랄까, 아무래도 맥길리스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 밖의 광경인지라―…….
"한 번쯤 보고 싶지만 그걸 보고 싶다고 하면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으니 예의는 아닌 거 같고……. 그러면 내 장례식 뿐인가?"
"…네 말대로 그런 건 예의가 아니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말마따나 농담인 걸 알면서도 가엘리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싫은 표정이었다. 물론 맥길리스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맥길리스는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걀라르호른의 누군가가 죽어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도, 지구의 권력이 개편되고 콜로니를 포함한 전 우주의 인류가 1/10로 줄더라도 맥길리스 파리드는 살아남아야 했다. 종말을 목도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승리자 뿐이니.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오래 기다렸군. 하녀를 부르지. 차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네가 고르는 차는 다 별로니까. 하지만 과자는 선택권을 줄게. 사실 그것도 선택권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째서?"
"알미리아가 어제 초콜릿 쿠키를 구웠거든."
방금 전까지의 우울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상대에게선 다시 색이 흘러넘친다. 가엘리오의 슬픔을 증명하는 건 그 몸에 두른 우중충한 제복 뿐이었다. 그조차 분위기가 바뀌니, 방금 전까지 딱 맞았던 게 어쩐지 어색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보기 드물게 감수성이 넘쳐 흐르는 남자였으나 전사였다. 제 감정에 충실하고 난 뒤엔 언제나처럼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그를 맥길리스는 늘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초콜릿 쿠키로."
강요당한 선택지를 고르고 맥길리스는 소란을 떠는 가엘리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꽃병에 꽂힌 싱싱한 세 송이의 우아한 칼라가 가엘리오에게 잘 어울릴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의 답은 틀리지 않았다.
핏기 빠진 창백한 얼굴은 맥길리스의 생각보다 멀쩡했다. 블레이드가 꿰뚫은 콕핏의 위치를 고려하면 심각하게 훼손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피부 한 조각마저 온전했다. 차갑게 굳어 방부처리 된 품에 놓인 세 송이의 칼라가 아름다웠다. 그토록 사랑했던 혈육에게도 어린 아가씨는 차마 작별의 키스를 하지 못했다. 온기 없는 뺨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신 맥길리스가 성호를 그어주었다. 장례식은 조촐했다. 카르타의 장녀가 죽었을 때는 다 죽어가는 노인네 대신 이즈나리오가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지금은 그 이즈나리오도 없고, 보드윈 가의 안주인은 드러누웠으며 걀라르호른 자체가 어수선한지라 식을 크게 치룰 여유가 없었다.
책임감 있는 보드윈 가의 장자, 다정한 오빠, 존경 받는 유능한 상사였으며 뛰어난 무력으로도 항시 겸손하여, 결코 굽히지 않는 정의와 때묻지 않은 순수를 지닌 용감한 전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민을 지키기 위해 그 젊은 생명을 바쳐 짧은 생을 마감했나니…….
날씨는 기억 속 그 어느 날처럼 좋았다. 그 날 지금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생각했던 것이 모두 현실이 된 날이었다. 누군가의 장례식도, 맥길리스 본인이 죽은 것도 아닌, 남은 하나의 가능성, 가엘리오 본인의 장례식에서 그 품에 안긴 꽃은 맥길리스가 표현할 수 있는 어휘 밖의 묘사를 강요했다.
느긋하게 부는 바람에는 태양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정, 애정, 신뢰. 무념한 맥길리스도 깜박하면 정신을 놓아버리는 만족스러운 온화함, 안락함이 주인을 잃은 방에서도 여전히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이 방도 온기를 잃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아쉬움이 쓸쓸하게 어깨를 스쳤다. 잃어버린 것에 미련은 없다만, 그러나 여전히 처음 겪는 것들이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주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맥길리스는 그 옛날 가엘리오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정물처럼 턱을 괴고 침음에 잠긴다.
그 남자는 이 자리에 앉아 인도양의 태풍이 몰아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깊게 애도하고, 슬퍼하고 있었던가? 그가 겪었던 슬픔을 상상해보려 해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맥길리스 파리드는 빈곤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토록 쉽게 간파당한 가장된 연민을 버리고 맥길리스는 마지막 첫 경험의 감상을 내뱉었다.
"아름답군."
평균 남성보다 10cm는 크고 매일 세 시간의 트레이닝을 빼놓지 않았던 직업군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 이외엔 맥길리스가 아는 한도 내에서 딱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이 주는 처음은 전부 가엘리오 보드윈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표현할 말 없는 단어였고, 다시 쓰이지 못할 예외의 적합성을 고민하는 건 비경제적인 활동이었다.
"아름다워."
눈물 젖은 비통한 목소리가, 끝까지 버리지 못하던 그 애정이, 여전히 제게로 닿던 신뢰가, 영원히 기억할 어린 날의 온기와 굳은 뺨의 냉기가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단지 그 뿐이라는 게 가엘리오 보드윈에겐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