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오펀즈/미카쿠델] list of flowers
제목은 거창하지만 유에사님 미카쿠델 리퀘스트. 미카즈키의 쓰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하는 쿠델리아.
도움이 되고 싶어.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욕망을 갖고 살지도 모른다. 성욕, 식욕, 수면욕이라는 육체적 생존 욕망 이외에 정신적으로 원초적인 것.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 안락한 잠자리, 따뜻한 식사를 먹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끊임없이 유용성을 입증하는 것. 본능이라는 속성이 모두 그렇듯 절박한 상황에선 절실하게 발휘되고 쿠델리아 아이나 번스타인은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명명백백 고용주의 입장인 쿠델리아가 그래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불행히도 그녀의 양심은 그렇게 뻔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평균연령 열셋, 생과 사의 교차가 언제나 눈 앞에 존재했던 소년들과는 태생부터 달랐던 그녀가 우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툰 칼질에 듬성듬성하게 썰린 감자들이 익는데 한참이나 걸려 아트라가 끙끙대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 빠르게 책을 읽는 것, 차의 온도를 맞추는 것, 격식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것 등 - 은 이 곳에서는 필요없었다. 전전긍긍 함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말고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쿠델리아는 겨우, 제 자리를 찾아냈다.
탄약을 장전하거나 지뢰의 도화선을 연결하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던 손은 굼뜨기 짝이 없다.
"너무 꽉 쥐진 말고요."
"응? 아."
펜을 부러뜨릴 듯 잡고 있던 미카즈키가 한 번 펜을 놓았다가 다시 쥔다.
"둘째랑 셋째 손가락 사이에 살짝 끼듯이 잡아봐요."
뭉툭하고 짧은 손가락이 더듬더듬 펜의 굴곡을 훑다가 제게 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밀듯이, 가볍게요. 응. 경직되었던 팔이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인다. 아직은 쓴다기보단 그림 같이 꾸물거리지만 전보단 훨씬 예쁜 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쿠델리아는 최근 이 작은 습자 교실을 여는 것이 몹시 좋았다. 아이들을 질려하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쿠델리아가 쓴 제 이름을 따라 그리면서 즐거워 했다. 알파벳을 외웠고 쉬는 시간이면 노래를 불렀다. 아이처럼, 실제로도 정말 아이들이었지만, 제가 아는 단어들을 전부 올바른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고 철자의 순서를 두고 싸우다가 쿠델리아를 불렀다.
쿠델리아! 이건 왜 이런 철자인거야?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었지만. 지구에 가고, 만약 일이 잘 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많이 만들어야지. 그런 꿈도 생겼다. 안일한 꿈이긴 해도 그것이 쿠델리아가 할 일이었다. 미카즈키는 제 이름을 쓴다. Mikazuki Augus. 올가의 이름도 쓴다. Orga Itsuka. 한 글자씩, 천천히. 조용히 입술이 움직이고 철자들을 음미하듯 미카즈키는 몇 번이고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외운다. 조명을 최소한으로 켠 조용한 식당 안에서도 미카즈키의 속삭임은 아주 작아서 작은 파동, 그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쿠델리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열중하는 미카즈키를 보다보니 쿠델리아도 어느새 머릿 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올가 이츠카. 미카즈키 오거스. 유진 세븐스타크. 비스킷 그리폰. 챠드 차단, 아키히로 앨트랜드……. 수많은 아이들이 이 배 안에 있다. 생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노라면 문득 쿠델리아는 전율이 일었다. 쿠델리아는 분명 그 이름을 들었다. 청각으로 남은 기억이 크게 요동쳤다. 첫 걀라르호른 공습에서 죽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쓰는 거, 맞아?"
몇 번이고 썼다 지운 이름을 들고 미카즈키는 쿠델리아를 빤히 쳐다본다. 쿠델리아는 천천히 읽었다.
"네. 맞아요."
"그 녀석은 이름 쓸 줄 알았을까."
"글…쎄요."
"같이 배웠으면 좋았겠지."
미카즈키가 쓰고 부르는 이름의 주인들은 언젠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 영원히 과거에 머물러 있을 죽은 자들을 기리는 건 산 자들의 몫이었다. 같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올바른 추도방식.
"괜찮아. 내가 쓸 줄 알면 되니까."
"네."
"글을 잘 읽게 되면 정비반의 일도 도와줄 수 있겠지."
"분명 그럴 거에요."
"단어를 읽는 건 아직 힘들어."
"이제부터 배워가면 돼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미카즈키는."
"응. 쿠델리아의 이름은 어떻게 써?"
"제, 제 이름요?"
동료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썼다 지운 빈 칸에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쓸 준비를 한다. 쿠델리아는 어쩐지 그게 기뻐서 조금 들뜬 마음으로 제 이름을 써내려간다. 익숙한 철자인데도 하나하나가 낯설게 보인다.
"…어렵네."
"조금 긴가요?"
"이름으로 부를 때도 길었지만……."
미카즈키는 보기 드물게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Ku.delia. Aina. Bern.stein. 또박또박 끊어쓰며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작게 읊조린다.
"어때?"
올려다보는 미카즈키의 또렷한 눈빛에 쿠델리아는 무심코 손을 올렸다. 아까와는 다른 미카즈키의 미묘한 표정에 쿠델리아는 그제야 제가 미카즈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그…!"
화들짝 놀라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다. 전에 없던 실수에 쿠델리아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으아아 어떡해. 난 몰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손에는 여전히 빳빳하고 긴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테이블에 박을 기세로 숙인 쿠델리아가 발을 동동 굴리는 사이 미카즈키는 뭔가 이해한 건지 응. 습관같은 소리를 냈다.
"잘 썼다는 거지?"
"ㅇ, 네, 네! 그럼요! 잘 썼어요, 미카즈키."
"쿠델리아가 써준 거랑 뭔가 좀, 다른 거 같은데."
"잘 썼어요! 괜찮아요!"
"그래."
그리고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한 번 더 천천히 읊조리다 쓱쓱 지웠다. 칭찬 고마워. 미카즈키는 쿠델리아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말하고 이번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쓴다.
벼, 별 말씀을.
뻐끔거리며 답한 쿠델리아는 자꾸만 양 손을 매만졌다. 뒤집혀진 Bernstein의 e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영영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