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금 극장판 직후 감상
2015.04.25.
다른 거 쓰려고 갔다가 무심코 목록을 봤는데 이런 것도 있길래. 이 조합도 좋아합니다. 코쿠죠지 오른쪽...
사실 배경만 아니었다면 이 조합이 관계성은 최고 취향...이었을텐데......
행복은 가깝고도 먼 곳에.
이상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
"하늘 위에 있으면 중력이 조금이라도 덜 작용할 줄 알았어."
"멍청한 말을."
"그러니까."
한소리 들을 줄 알면서도 바이스만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모르긴 몰라도 중위는 분명 가정교육이 엄격한, 좋은 집에서 자랐을 것이다. 자야할 곳에서 자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아무데나 드러눕지도 않았다. 잠자리를 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군인이었고 그 때는 숨을 쉬는 1초가 모두 전시였으니 그는 폭격맞은 산 어딘가에서도 침낭 없이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았다는 얘기다. 적어도 바이스만처럼 돌바닥에 앉아 수식을 건드리다 그대로 누워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제 방에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고 잤고, 부득이한 경우엔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로 조는 것도 본 적 없다. 자세는 흐트러진 적 없고 다리를 꼬거나 경박한 말투를 구사한 적도 없다. 도이치 발음은 외국인치고도 훨씬 좋은 편이었다. 바이스만이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데는 무한하기까지한 시간의 도움이 있었으나 서른이 되지 않았던 그에겐 재능이었을 것이다.
하늘 위에서 매일같이 해가 뜨고 지는 것만 보고 있다 보면 감각이 둔해진다. 살아있으되 반쯤은 죽어있었다. 무기력은 아돌프 K 바이스만을 정물처럼 만들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대로 비행선의 일부가 되어 도시전설로만 남았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거울 속의 얼굴에도 익숙해졌고 - 예전보다 훨씬 어린 얼굴이라는 게 여전히 미묘했지만 - 노출에 거리낌 없는 고양이 아가씨와 고지식한 소년은 그리울 지경이었다. 시로라는 이름도 좋았다. 학교에 처음 가보는 어린애처럼, 첫 직장에 처음 출근하는 신입사원처럼 묘하게 달라진 기분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아니 정확히는 그게 맞지. '아돌프 K 바이스만'은 사체로만 남았다.
"중위는 알고 있었어?"
"미래를 예견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알고는 있었지?"
"알았지."
"알려주지 그랬어. 그럼 내려와서 중위랑 좀 더 많이 놀 수도 있었을 텐데."
소파에서 몸을 뒤척거리다 코쿠죠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어처구니 없다는 시선이 고스란히 내리꽂힌다. 으음… 중위? 베시시 웃으면서 쳐다보면 한숨소리만 들렸다.
"네 녀석이 내려왔으면 이 나이까지 네 뒤치닥거리만 했을 거다. 시간 아까운 얘기지."
"매정하네……. 그런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너도 마찬가지다. 앞뒤 생각 안하고 달려들기만 하는 사고뭉치."
"우리 누나도 나한테 사고뭉치라고 한 적 없는데!"
"했어."
"뭐? 언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우리 애가 좀 사고뭉치라서 죄송해요'."
"그건 농담이지! 중위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아니, 그 경우엔 진담이었다."
칼같이 단언하고 차가 맘에 든다는 둥하는 꼴이 영 못마땅해 바이스만은 순간 여기서 코쿠죠지를 내쫓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비행선을 재건시킨 것도 중위, 몸을 재생할 때까지 도와준 것도 중위, 애초에 이 상공에서 머물 수 있게 도와준 것도 중위란 사실이 바이스만의 마지막 양심을 무겁게 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뻣뻣한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대충 뒤로 넘겨묶고, 먼지를 잔뜩 먹은 낡은 군복에 아시안치고는 훤칠한 키를 가졌던 이십대의 무뚝뚝한 남자는 없다. 대신 하얗게 센 머리와 쭈글쭈글한 피부, 그럼에도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바이스만."
"…뭘."
"운명이야."
"이것도 알고 있었어?"
"알았지."
"……"
"아쉬워 하지 마. 나는 지난 생에 한 점의 후회도 없어. 자네와 더 많이 대화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건 자네의 뜻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자네는 쓸데없이 낙관적이었어. 행복이고 이상이고 아무 근거도 없이 잘될 거라고 믿기만 하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지. 현실은 그렇게 맘 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자네답지 않더군.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상도, 꿈도 전부 내가 해치워버리겠다고. 이 정도면 그 수준은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황금의 왕. 운명을 내다보고 재능을 꽃피워 적합한 곳에 적합한 인재를 등용한다. 모든 힘의 균형이 맞도록,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공명정대한 이상을 위해 코쿠죠지가 바친 것은 비행선 위의 바이스만에게도 보였다.
낙관적이지 않은 자네는 이상해.
마지막 찻잔을 비우며 코쿠죠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소 짓는 게 익숙치 않은 남자는 오른쪽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어 왼쪽 입꼬리가 더 올라가 비웃음처럼 보이는 게 특징이었다. 서툰 위로에 덩달아 쑥스러워진 바이스만은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야, 잘했어."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에도 용케 알아들은건지 그럼 됐지. 하고 만족스럽게 답한다. 시간도 생도 유한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몸이 되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가련한 누이는 아돌프가 머무르고 코쿠죠지가 두고 온 시간 속에서만 살았다. 곧 있으면 중위도 과거에만 남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제 운명을 모두 보고 그 종착지에서 걸음을 멈추고 쉴 것이다.
이 힘을 이용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그 말을 했을 때, 코쿠죠지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게 바이스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Freude. 즐거운 것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명확하게 무어라고 답할 수는 없었던 바이스만 대신 코쿠죠지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이상적인 왕과 행복의 방법에 대하여.
제가 그저 정물로 하늘에 머무르기만 하는 동안 중위는 제가 내팽개친 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잘했어, 중위.
응.
아주 잘.
응.
이젠 내 차례네.
글쎄.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다. 어색하게 얹어진 손바닥. 그 또한 서툰 남자의 위로방식이다.
"행복해지기만 하면 되지."
시간은 똑같이 흘렀는데도 늙지 않는다는 건 사고에도 영향을 주는 걸까. 같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저는 여즉 어린애인데 중위는 새삼 훨씬 어른스럽게 보인다.
낯선 깨달음에 감탄하면서 바이스만은 줄곧 그 날 하려던 질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종종 생각나기도 했지만 묻지 않았던 건 물으나마나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위는 행복했어?"
문득 물어보면 대답은 없다. 영원히 목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여전히 굳은 오른쪽 입꼬리를 바이스만은 가볍게 밀어올렸다. 처음으로 중위의 얼굴에 그럴듯한 미소가 생겼다.